입다의 서원이 주는 교훈(사사기 11장 40절)
136.144.360장. 3927 Bible 말씀 : 박봉웅 목사.
입다 사사는 기생의 아들입니다. 당시 기생의 아들을 천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천한 기생의 아들에게 구원(救援)을 구걸(求乞)해야 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수치와 형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거부하므로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에게 이러한 축복은 이스라엘의 장로(長老)들에게는 수치가 됩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죄 없는 처녀가 죽어야 하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된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죄악에 대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삿11:30,31).
예수를 믿은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나 않았는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의 죄가 커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되어서 더 열심히 매달려 보지만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생활이 어렵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때문에 후손인 우리들에게 이런 저주가 임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반대로 이런 어려움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한 측면은 일반은총 범주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예수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은총 역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사기서에 나타난 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섭리하신 일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의 앞 뒤 전후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사사기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반역이요, 패역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고 사사 시대에 들어서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했습니다. 심판의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방 나라를 강대하게 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여 노예로 삼아 버리게 했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때 구원자인 사사를 보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 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옴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암몬 족속은 창세기 3:15절에서 말씀한 뱀의 후손으로 등장한 언약 밖의 계열입니다. 창세기19:37-38절에 보면 “이 암몬 족속(族屬)의 조상(祖上)은 아브라함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내린 유황불의 심판에서 벗어난 이후 작은딸과 관계를 맺어서 생겨난 족속입니다.
이 족속은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한 족속입니다. 하나님의 적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이런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왔습니다.
첫째, 암몬 족속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암몬 왕은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려고 왔다고 합니다.(12-13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갓 지파가 있습니다.
이 갓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갓 지파가 분배받은 땅 가운데 암몬 자손의 땅이 절반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수13:25). 지금 사사시대에 암몬 왕은 이 땅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17-19절에서 암몬 자손의 땅을 공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암몬 자손의 땅을 갓 지파에게 분배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거역한 행위가 아닙니다. 암몬 자손은 자신들의 땅을 아모리 사람 시혼에게 정복당하여 땅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땅은 암몬에게 빼앗은 땅이 아니라 시혼을 공격(攻擊)하여 정복(征服)하여 정당하게 분배받은 땅이었습니다.
이 땅을 달라고 요구한 암몬 왕의 요구에 거절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 암몬 왕의 요구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망해서 집이 남에게 팔려 갔습니다. 그 집을 친척이 돈을 지불하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잃었던 자가 친척에게 그 땅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니 내 놓으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둘째, 암몬이 전쟁을 해 옵니다. 암몬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대책을 숙의합니다. 우리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제아무리 대책을 수립해 봐야 그 대책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장로들의 대책 회의 결론은 힘센 입다를 다시 불러 오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배다른 형제가 기생의 아들에게 재산이 분배될까 봐 그를 쫓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쫓겨난 신세가 되어서 돕 땅에 살았습니다.
장로들이 그 입다를 다시 부른 것입니다. 11:8절에 길르앗 장로들이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하면서 입다를 달래고 있습니다.
쫓을 때는 언제이고 이제 다시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입다는 암몬 왕과 대치 상황 속에서 암몬 왕의 땅 요구를 거절합니다. 결국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전후 문맥의 상황입니다.
2. 입다가 서원하여 암몬 성읍을 쳐 승리합니다.(29-33절)
자신들의 땅 소유권(所有權)을 주장한 암몬 왕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입다는 이 전쟁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기생의 아들이라는 따돌림을 피하고 이스라엘의 장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만큼은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첫째,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神)이 임했습니다.(29절). 본문 29절에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전쟁에 출전할 때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앞으로 암몬과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임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한 입다를 통한 여호와의 전쟁은 두 가지 의미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암몬을 진멸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암몬 왕의 땅 소유권 주장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언약 밖의 백성인 암몬 족속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도전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부하고 도전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아니 모두가 이미 그 거룩하심에 미치지 못하기에 심판을 받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습니다.
②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한 입다 사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목적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의 수치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인간 힘을 의지했습니다.
힘센 용사를 의지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들이 갖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도 돈, 권력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못됩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힘의 논리로 살아가려고 할 때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생의 아들에 의해서 구원을 구걸하는 수치를 받게 해 버립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여호와의 신은 임했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둘째, 입다는 서원과 승리입니다. 31절에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입다는 이 전쟁만큼은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두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서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입다는 자기 힘으로 전쟁이 가능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는 것이고 패배하게 하면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입다는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이런 입다 에게 실패를 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과 용사를 의지했던 이스라엘 장로들에게도 패배를 맛보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3. 입다의 서원한 그 제물이 자신의 딸이 되도록 해 버립니다(34-40절).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 전쟁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어야 합니다. 입다와 이스라엘의 장로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패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승리입니다.
그 패배의 쓴맛은 입다가 서원한 제물이 자신의 딸이 되도록 해 버립니다. 제물은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를 뒤집어씁니다. 딸의 희생은 곧 입다의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신 것만 바라보면서 그 승리에 도취되어 있어야 합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축적된 재물 때문에 기뻐하시렵니까?
그 재물이 올무가 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교회 직분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기 위하여 교회 직분에 피택 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그 직분을 통해서 심판해 버립니다. 직분을 통한 교만을 역으로 이용해서 쳐버립니다.
차라리 그 직분을 맡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려움으로 직분을 성실히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직분을 명예와 계급으로 생각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과 거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어떤 조건과 단서를 달지 맙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흥정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회사의 재정을 맡고 있는 사람이 회사 돈을 가지고 그 회사 사장과 거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구약 성경의 서원은 하나님 자신의 의도를 보여주기 위한 한 방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이 어떻게 확실히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면 됩니다.
4. 말씀을 정리합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죄 없는 입다의 딸이 희생을 당하듯이 오늘날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 희생의 은혜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저주의 진노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들에게 저주가 없습니다.
조상들의 죄나 우리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용서되었습니다. 병이 들고 사업이 좀 안 된다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 죄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자유 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난 건너편에 소망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영 안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또한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 화답하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서 우리가 간구 하는 모든 기도의 제목을 응답 받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하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