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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잘못된 진실4. 조선에 자유인.. 허균(許均)..
이장희 추천 0 조회 108 16.04.20 17: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과거 신라가 그랬고 고려도 그랬다. 하물며 같은 땅에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조선도 그랬다. 전 들에게 오직 하나 됨을 믿게 하여 권력자의 손에 순순히 백성들이 따라 와 주길 바랬다.


그 와중에 이를 이용하여 자기 이권만 챙기며 챙기는 쪽과 챙겨주는 쪽은 결코 나와 다르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것도 대를 이어가면서 말이다. 왕족이니, 호족이니 관리니,양반이니..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다 같이 한마음 한 뜻으로 가자고 하면서 결국엔 너와 나는 다르다"는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수 천년에 걸쳐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나라의 이름들이었고 기득권자들의 변론이다. 어느 때든지 그들은 한결 같은 공통된 이유는 "백성들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이도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만 곪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왜 이리도 힘든지 모르겠다. 그냥 배고품만 면하게 되는데 말이다.


문제는 다 먹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일이 커져 간다는 이야기이다. 더 가질려고 하는 마음에 서로 뜻이 맡는 사람들과 무리를 이뤄고, 뜻이 다른 사람들을 구분을 짓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이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도 하고 때로는 그 욕심이 지나쳐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더 가질려는 욕심에 사건은 일어나고 끝내는 글로써 남겨져 기록이 되고 훗날에는 역사가 되었다.


요순시대 때 백성들은 자기의 임금이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그 만큼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았다고 한다. 항상 외세의 적을 막아주고, 배고품을 잊게하고, 진정한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들이 임금이 누군지 몰라도 백성들 마음에 흡족했다는 이야기이다.


역사를 막론하고 백성은 항상 말없이 가만히 있다. 우뚝 선 저 웅장한 산과 같이 넓디 넓은 바다와 같이..

하지만 항상 위정자들이 먼저 산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베어내고 바다를 가두면서 하는 말이 "다 너희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끊임 없은 다양한 이벤트의 연속의 기록이 바로 역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을 거부하고, 하나만 바라 든 국가들은 이내 성장 한계성을 나타냈다. 왕조가 하나되길 원했든 그 시작은 바로 종교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왕실이 믿으면 너희는 무조건 이유 물문하고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만의 종교만으로 미개한 백성을 개화하고, 나라를 지켜내며,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를 따르지 않을 시에는 역당(逆黨)이라는 굴레를 씨워 무차별 탄압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와 사상에서 과감히 탈피하려든 조선 중기에 한 집안이 있었지만, 그들도 곧 "나라"라는 사회의 벽과 그 땅에 밥먹고 사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꽤나 시끄럽게 한 세상을 살다가 간 한 집안에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 때 초당 허엽(草堂 許)과 그의 자식들 이야기와 그 중 막내 아들 허균(許筠)의 이야기이다.

 

초당 허엽(草堂 許: 1517년~ 1580년)에게는 삼남 일녀의 자식이 있었다.  큰아들 허봉(許?: 1551년~1588년), 둘째 허성(許筬: 1548년~1612년), 삼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  막내 허균(許筠: 1569년~1618년) 있었다.


허엽은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과 이황(李滉: 1501년~1570)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3년)에게 사숙(私塾: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다) 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때 관직에 올랐으며 동, 서분당<<東西分黨: 조선 선조 8년인 1575년에 사림(士林)이 동서(東西)로 분열한 사건이다.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자리 문제를 놓고 신진 사류 김효원을 지지하는 일파와, 명종 왕후의 아우 심의겸을 지지하는 일파 사이의 반목ㆍ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점차 확대되어 결국 사류(士類)가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때는 동인(東人)에 가담하였다.

★ 동인(東人)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좌도에 기반이 있던 유성룡(柳成龍)·김명원(金命元)·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한준겸(韓浚謙)·정경세(鄭經世).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경상우도에 기반이 있던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

이황과 조식의 양쪽 문하에 드나들던 김우옹(金宇?)·정구(鄭逑)·김효원, 그리고 이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거나 인척 관계에 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허엽(許曄)·홍진(洪進)·정여립(鄭汝立)·홍여순(洪汝諄)·송응개(宋應漑)·정지연(鄭芝衍)·유영경(柳永慶) 등이었다.



★ 서인(西人):기호학파(畿湖學派).

이이(李珥),성혼(成渾),심의겸(沈義謙),정철(鄭澈),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조헌(趙憲)·남언경(南彦經)·이귀(李貴)(김류(金?)·심기원(沈器遠)·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신경진(申景?)  김상헌(金尙憲), 김경징(金慶徵) 신흠(申欽), 나만갑(羅萬甲)·이기조(李基祚)·정홍명(鄭弘溟)·장유(張維)·박정(朴炡)·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강 이북에 거주하고 중앙 정계와 유대를 맺으면서,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는 권력지향적인 한당(漢黨)이 성립되었다. 이 당의 수령은 김육(金堉)·김석주(金錫胄)였다.

또 원두표(元斗杓)의 원당(原黨)과 김자점의 낙당(洛黨)이 분파되어 서인은 산당·한당과 함께 4분파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효종 때에 들어와 송시열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면서 스승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를 중심으로 서인을 재규합, 새로운 조직체를 이루었다.>>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였다. 뇌물로 인한 탄핵과 복귀가 반복되었지만, 그는 명나라 사은사로 갔다와 새로운 신문화를 아들과 딸에게 공평하게 가르쳤다.

<< 그리고 그는 실헙정신이 강했다. 지금 강릉에서 팔고 있는 유명한 두부.. 초당두부.. 바로 그가 처음으로 동해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춘 만든 두부가 바로 초당두부이다. >>   

당시 왕실에만 해도 공주에게는 언문(한글)만 가르쳤지, 한자는 가르치지 않았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왕실에도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허엽은 큰아들 허봉, 차남  허성, 삼녀 허난설헌, 사남 허균을 나이 차이는 났지만 그들을 똑같이 환경에서 명에서 가져온 책이나 자신이 위대한 스스에게서 배운 지식들을 자녀에게 가쳤든 것이다.

허균은 누나인 허초희(許
楚姬: 허난설헌)에게 공부를 배웠다고 한다. 이들의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 서광철(徐光轍)의 딸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누나인 허난설헌도 8살 때 벌써 시를 지었다. 시간이 지나 임진왜란 시 명나라에서 파견 온 오명제(
吳明濟)가 중국말을 할 줄 아는 허균에게 와서 조선의 시(詩)를 구한다고 하자 허균은 오명제 앞에서 약 2,000구의 시를 ?는 것이 아닌가? 오명제(吳明濟)는 그의 박식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오명제
(吳明濟)에게 준 자기 누이가 쓴 시집을 주었다. 오명제(吳明濟)는 명나라 돌아와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선(朝鮮詩選)"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허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시대에서 조선 선조 때 까지의 시 2,00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허난설헌의 시가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은 명나라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허균은 3개의 외국어를 했다고 한다. 명나라, 여진족, 왜나라.. 그러고 보면  허씨 집안 전체가 천재들이 모인 것 같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 허엽은 평소에 풍을 앓고 있었는데 경상도 상주에 한 객접에서 객사를 하고 만다.



허균의 누이인 허초희(허난설헌)의일대기



그는 서애 유성룡(柳成龍)에게 학문을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 최경창, 백광훈)의 하나인 이달(李達:  이첨의 서자로서 그 시재는 널리 인정받았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운명을 절망)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 허성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이달(李達)은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양반과 서출의 차별관계와 사람과 사람간에 차별을 질타했었다. 이 사상은 허균에 너무 큰 영향을 줘 이일로 그는 능지처참을 당한다.) 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1594년(선조 27)에 26세의 허균은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같이 데려가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여섯달 만에 파직됐다.

1601년당시에 둘째 형인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충청도·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순시하면서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계생(매창)을 만나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 허균이 33살, 매창이 29살 때의 일이다.


조선의 삼대시기(三大詩妓)


1. 황해도 송도기생(松都技生)  황진이(黃眞伊, 1506년 ~ 1567년)
2. 전라도 부안기생(扶安技生)  이매창(李梅窓, 1573년 ~ 1610년)  
3. 평안도 성천기생(成川技生)  김부용(金芙蓉; 1813년 ~ 1848년)   


그때를 허균은 그의 '조관기행(漕官紀行)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선조34)년 벼슬을 내놓고 동작(銅雀) 나루를 건넜다. 7월 壬子(23일)에는 부안(扶安)에 도착했는데 비가 쏟아져서 그곳에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찾아왔으며 기녀 계생과도 만났다. 그 얼굴이 비록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재주가 있고 정이 많은 여인이어서 가히 종일토록 더불어시(詩), 가(歌)를 주고받으며 즐길 수가 있었다."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전라도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한양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부안 기생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昌女)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1610년 매창이 죽었다는 소문이 허균에게 들리자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시를 남겼다.


계생(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 하고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
누가 설도의 무덤곁을 찾아 오려나
..


허균의 이 시를 보더라도 매창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창은 비록 천한 기생이기는 하지만 남다른 시 재주를 지녔던 여자로 허균과 오랫동안 사귈 수 있었던 것이다. 허균이 두 차례나 계생에게 보낸 서신과 '학산초담', '성수시화'에서 계생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된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선조 37)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를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강화도 천민 출신이지만 당시와 학문에 조예가 깊은 유희경(柳希慶: 계생의 첫남자)과도 교분이 두터웠다.(부안삼절: 유희경, 이매창, 직소폭포)

1608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조선 15대 왕으로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은 또 계속해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몇년뒤에 계축년에 일어난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한다.

1608년  선조 41년에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이 연명(連名)으로 서자(庶子)들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 상소하였다. 이는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보여주었든 양반들만 과거를 치루는 것을 일반 서자와 상민들에게도 같이 치뤄 실력위주로 사람을 가려 벼슬길을 열어주어 또 다른 계층에 인물들을 두루 정치에 참여시키겠다는 광해군의 본 마음을 알기에 상소를 하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광해군은 자기를 왕위에 올려주었든 대북파조차 결렬 반대로 인해 이들이 올린 상소는 허락 할 수 없었다. 


허균과 강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1613년  광해군 5년 7명의 서자들이 자신이 올린 상소가 허락되지 않자, 이들은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박응서(朴應犀:박순(朴淳)의 서자(庶子) ·서양갑(徐羊甲: 목사 서익(牧使 徐益)의 庶子) ·심우영(沈友英:심현(沈鉉)의 庶子) ·이경준(李耕俊: 병사 이제신(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朴致仁: 상산군 박충간(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의 제(弟: 동생) / 박충간(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자(庶子)들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칠서(七庶)의 난(亂))>>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은 왕으로 즉위하자 슬그머니 교지를 하나 내린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정도전으 모든 것을 철처히 짓?는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 초기까지 별탈 없든 정실과 측실 자식들의 관직에 변화가 태종에 의해 생기면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 법이 지겨며 많은 이들이 한과 눈물로 한 세상을 보낸 것이다. 단지 정도전이 서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태종이 즉위 한 날 부터 양반의 서자들의 벼슬 길을 법적으로 막아 버렸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 죽이고 은자 500냥을 강탈하는 사건으로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농간에 꾐에 빠져들어 하지도 않은 역모사건에 연루된다. 이들은 이렇게 모음 자금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를 사주한 자는 대비 김씨와 외할아버지 격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어린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였지만, 영창대군(광해군의 동생, 선조의 적통)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
: 서인)만 증거가 없어 방면하였으나 대북파로써는 눈에 가시였다. 마침 조령에서 일으난 칠서들의 강도살인 사건을 역모로 몰았다. 그들은 이이첨이 시킨데로 자백을 하였다. 자기들은 친분(아버지들과 같은 서인)이 있는 김제남이 시켜서 자금을 모아 군을 양성하여 지금의 혼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게 계획이었다고 허위 자백을 받아내었다. 칠서의 목숨을 담보로 말이다..(박응서의 옥).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
(金悌男)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첫번째 왕후)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金悌男)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다.


이후 영창대군은 당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烝殺...증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을 당시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정온'이 그 의문을 제기하기에 '광해군'은 '정항(鄭沆)'을 불러 철저히 조사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이 ?겨나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여 서인(西人)세력들이 집권하자 본격적으로 영창대군의 살해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항'을 불러 처벌하라고 하지만 인조(仁祖)는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 영창대군의 살해혐의로 의심 받았던 광해군은 도려 이를 철저히 조사하였지만, 오히려 인조는 피하였던 것이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대왕대비로 복권되어 권력의 중심에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영창대군)을 죽인 그들을 조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살려 둘 뿐만 아니라 벼슬도 계속 유지되었다.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광해군을 패륜아로 몰아가면서, 정작 살해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조사도 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들에 의해 제기된 영창대군의 죽음은 이러하다.


1.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어 연기로 증살(蒸殺)시켰다는 설(說)...

2. 영창대군이 빨리 죽게 하기 위하여 방에 불울 넣지 않고 그래도 죽지 않자 잿물을 먹여 죽었다는 설(說)....

3.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설(說)....

★.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광해군 일기와 인조실록의 차이

광해군 일기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고 한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 '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인조실록

광해군이 '이정표'를 별장(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영창대군을 아무도 모르게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옷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서인 영수였으나 비교적 당파색이 옅었던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광해군 10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북인과 같은 뿌리였던 남인의 영수 이원익도 홍천으로 유배되었고, 심지어 광해군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북인 영의정 기자헌까지 홍원에 유배되었다.

조정은 소수 강경파 이이첨 등 극소수 대북이 장악했다. 전 영의정 이항복이 유배가며 지었다는...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라는 시를 지어 억울한 심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옥사라고 한다.
 
칠서의 난을 일으킨
강변칠우(江邊七友)와 허균은 그들과 형, 아우라고 칭하며 잘 어울려 다녔다. 칠서들이 조령에서 살인강도질을 할 때 때 마침 허균과는 연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절친한 이들이 옥에서 고신을 받을 때 자신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허균은 이들이 폐비의 사건과 영창대군으로 조작된 사건의 빌미로 역도로 몰리자  울분을 참지 못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칠서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광해의 오른팔인 격인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목숨을 구했고, 대북파(大北派)에 일원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4,000여권의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사신들에게는 나라에서 별도에 자금이 지원되지 않았으나, 인삼교역권을 주어 청나라에서 인삼을 교역해 그 돈으로 청나라 원행자금을 충단하였다. 대게 사신들은 인삼을 가지고 가 청나라에서 판매를 하고 자기가 필요한 도자기나, 비단 등 가지고 와서 국내에 판매를 하여 더 많은 이득을 남겼다고 하나, 허균은 인삼을 교역한 후 막대한 양에 서책을 구입하는데 썼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좌참찬이 됐다. 

허균은 이이첨의 마음을 얻어 그를 등에 업고 주군인 광해군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당시 이이첨의 여식이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비였지만, 아들이 없었다. 마침 허균의 딸을 세자의 후궁(소빈)으로 들이게 되어 이이첨은 허균의 딸이 아들을 순산하기도 하면 허균의 세상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허균을 사람을 시켜 세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이이첨과 허균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점점 멀어져가는 두사람... 

허균은 크져가는 자기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인목대비(仁穆大妃: 영창대군의 어머니)의 폐모론을 주장하다.이예 이이첨은 수하들을 총동원해 폐모론을 주장한 허균을 탄핵하였고, 그를 아예 반역 죄인으로 몰아 붙였다. 이 과정에서 허균은 자신을 해칠 만한 빌미들을 제공하고 만다.

그중 가장 큰 실수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문창부원군 유희분, 병조판서 박승종, 영의정 기자헌
(奇自獻)"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예 기자헌(奇自獻)은 자신들을 모함한 사람이 허균이라고 반대 주장하였으나  허균과 파워게임에서 진 기자헌(奇自獻)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하지만 기자헌(奇自獻)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던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에 허균도 억울하다며 맞상소를 올려 변명하려 했다.


기준격의 내용은 허균의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 이광(1589∼1645)은 선조와 김한우(金漢祐)의 딸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장중(藏中), 호는 기천(杞泉)이다.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로서 의창군에 봉해졌다.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에 모반죄로 주살된 처족 허균(許筠)사건에 연루되어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때 허균을 크게 신임하던 광해군은 기준격의 상소를 믿기 않았다. 그는 허균과 틀어진 이이첨을 비롯한 신하들과 맞서면서 허균을 보호하려 했으나, 허균은 조정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 버렸다.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던 이들뿐만이 아니라 이에 찬성하던 이이첨 세력까지 허균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그는 완벽하게 고립되어버린다. 광해군 혼자의 힘으로 허균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국이 뒤숭숭하든 차에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누군가가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내용은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격문은 후에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인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게 된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세력 확장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었다.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부르짖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에서 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역적 허균(許筠)·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우경방(禹慶邦)·김윤황(金胤黃)을 서쪽 저자거리에서 정형하였는데, 그때 백관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이에 허균은 〈협박하여 공초를 받지 못하게 하고〉 단지 기준격의 전후 소 중에 나타난 흉모의 곡절과,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격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과, 남대문의 흉방에 대해서 하인준이 허균이 했다고 이른 것,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것,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을 협박하여 나가게 한 것, 유구(琉球)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와서 섬에 숨어있다고 한 설 등이 모두 허균이 한 것이라고 전후의 흉모에 대해 윤황과 하인준이 일일이 승복한 죄인데,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

역적 하인준은 흉방에 동참한 죄이다. 역적 현응민은 역적 허균의 이목과 복심이 되어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면서 무릇 그가 행하는 일은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과 남대문의 흉방을 응민이 썼고 산에 올라 밤에 소리친 것을 응민이 하였다는 설이 허균의 첩인 추섬(秋蟾)의 공초에서 나온 죄이다.

역적 우경방은 군목에 같은 당인의 성명을 나열해 쓰고 또 결사 맹문(結死盟文)을 지어 한보길 등과 죽음을 각오한 교유를 맺었다는 것과 은밀히 흉계를 꾸밈에 있어 적 허균의 지휘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 또 더욱 흉참한 갑자(甲子)를 나무에 새기는 등 역모에 동참한 죄이다.

역적 김윤황은 허균의 지시와 사주를 듣고 흉계를 이루려고 흉격을 화살에 싸서 경운궁 안에 던져 넣은 죄이다. 


또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허균은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된다.
연좌와 적몰,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일, 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일, 그 읍호를 강등하는 일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했다고 한다.

 광해군 일기 131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8월 24일(경진) 9번째기사

 균을 둘러싼 위와 같은 의혹에 대해서 광해군 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다. 오늘날 이 옥사의 사실 여부에 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실제로 허균이 혁명을 도모하였다는 주장과 당시 실권자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역모로 몰렸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허균은 결국 1618년 8월 26일 역모 죄로 능지처참 되었다는 것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정확한 사실이다.

허균이 죽고 난 뒤 광해 임금은 도성 곳곳에 방을 붙여 허균에 대한 반교문(頒敎文: 나라에 어떤일이 벌여져 어떻게 처리했다고 사실을 알리는 글)을 발표했다.


"....역적의 괴수 허균은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으며, 인륜의 도덕을 더럽히고 음탕함을 좇아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다했다. 기강을 업신여기고 상례를 버리고 스스로 공자의 도를 끊었다.."


왜 허균이 광해에게 칼날을 들어대었는지는 아직도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딸이 비록 후비이지만 사위가 다름 대를 잇는 세자이고 광해 임금하고는 사돈인데 이렇게 무리를 해가며 억지로 일을 벌릴 필요가 있었을까? 자칭 타칭 조선에 천재라고 소릴 듣는 사람이 말이다. 



한 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과연 허균의 죽음, 그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은 웃끼는 나라인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3대 임금 이방원(태종)이 정적(政敵)인 정도전을 싫어한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그가 서자 출신이라 것에 대한 보복으로 너무 가혹한 조치가 처해진다. 태종 14년 어느 하루에 태종이 승지 불러 슬그머니 교지(敎旨)를 하나 내린다. "서자(서얼)들을 절대로 과거를 치룰 수 없도록 하였고, 여간해서 벼슬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때 부터 조선은 철처히 서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손자 때인 세조 시절에 서자 출신의 유자광(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유자광은 자원하여 종군하여 난을 진압한 후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서자이지만 벼슬길을 허락 받았다. 그는 이시애의 난 이후에 선략부호군(宣略副護君)이 되었다.)처럼 벼슬길에 오른이도 있었다.


그리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 때에는 아예 글로써 명문화 해 버렸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말이다. 그 법이 바로 "서얼금고법 (庶孼禁錮法)" 서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대대손손 벼슬을 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조 때에 서얼들이 초금 관리로 임명 되지만 '서얼금고법'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 때까지 이어진다. 


"서얼금고법 (庶孼禁錮法)"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서 적·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寡女)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공·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조선은 27대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 중  조선의 적통 왕은 13대인 명종에서 끝나고, 14대 선조 부터는 방계(자기와 같은 시조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계통) 자식들이 특히 그는 서자 출신의 조선의 첫번째 왕이었다. 그럼 선조 이후 다른 왕들도 다 서자 출신의 왕이 되는 것이다. 다음 왕인 광해도 서자(공빈 김씨) 출신의 둘째 아들이다. 다음 왕인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후비인 인빈 김씨의 서자 출신인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다. 그러니 이때 부터 줄 곧 조선은 서자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자신도 서자 출신이면서 양반의 서자들을 더 혹독하게 통제해 왔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딱 맞는 경우이다. 그러니 웃끼는 나라다고 할 수 밖에.. 그러면서 공맹의 도를 말하고,.. 


칠서의 난 이후로 허균은 현 국가체제를 반감을 품은 책을 한권 집필한다. 이 책은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문책으로 되어있다. 바로 그 책이 "홍길동전"이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홍길동전을 지을 때 일부러 작자 미상이라고 전했지만 후에 같은 북인의 당원이던 유몽인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임을 기록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이 왜? 자유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둘레는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이라고 하고 법도라고 하며, 도의라고도 한다. 사람이 모여 만든 사회에서 그 굴레를 벗어나면 어떻게든 압박이 가해 온다. 그리고 기득궈을 가진 여럿이 모여 그 사람을 단죄하며 죄인 치급을 해버린다.


허균이 살든 조선은 개국한지 몇 백년이 흘러 그 물이 고여 썩어 마침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어 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왜란의 공은 수 없이 죽은 백성들도 아니고 들불처럼 타 오랐든 의병들도 아니고 기회만 노려 일신에 영광을 얻고자하는 임금이고 그를 따르는 기득권자들이었다.


그들은 전란 시 어려울 때는 서자도 좋고, 노비도 좋고, 상놈도 좋고.. 면천과 서얼의 차별을 두지 않겠다며 얼마 남지 않은 재화를 끌어냈다. 모자란 군비에 보태 쓰기 때문에.. 그러나 왜란이 끝나자  기득권자들은 면천과 서얼 차별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 버렸다.


이러한 불만들이 사회 곧곧에 팽배하게 부풀어 올랐있었다. 그 때 허균에겐 친한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 칠서의 난(당파 싸움)으로 이용되었고, 어릴 때는 스승인 손곡 이달의 서자의 울분을 보았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아품과 울분을 잘알고 있었다..


허균은 이러한 세상을 없애버리고 오로지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양반과 서자, 노비가 없는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고자 했든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그의 행동은 조선의 건국 이념 성리학의 사상에 어긋난 일이었어 조선이라는 나라에 근간을 뒤 흔드는 것 이라고 위기감을 느겼기에 그의 모든 것이 국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서얼 철폐 등 조선의 친분 개혁을 이루고자 나선이는 허균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글로만 생각으로만 했을 뿐이고, 허균은 몸으로 실천을 했다는 것이다.  


허균은 판결문도 없이 공모자의 자백 만으로 3일 만에 능지처참 형으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허균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소신있게 적은 글이 <성소부부고 (惺所覆?藁) 중에 호민론(豪民論)>에서 잘나타 나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그의 논설 「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내용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바로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호민론
(豪民論)에서 허균은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항민
(恒民)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로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얽매인 채 사는 사람들이다.

원민(怨民)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항민(恒民)과 마찬가지이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怨望)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망(怨望)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항민(恒民)과 원민(怨民)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호민(豪民: 예를 들어 궁예와 견훤)은 남모르게 딴 마음을 품고 틈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호민(豪民)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怨民)들은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恒民)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오광(吳廣) 때문이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나라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서 난을 꾸몄다. 끝내 이 때문에 이들의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호민(豪民)들로서 학정의 틈을 노린 것이다.

우리 조선의 경우를 보면 백성이 내는 세금의 대부분이 간사한 자에게 흩어지므로 일이 있으면 한 해에 두 번도 거둔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망(怨望)은 고려 때보다도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위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다.”고 한다. 견훤(甄萱)·궁예(弓裔) 같은 자가 나와서 난을 일으키면 백성들이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운 형세를 바로 알고 정치를 바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 <호민론(豪民論)>의 요지이다.

<호민론(豪民論)>은 기성의 권위에 맞서 이단으로 일컬어질 만한 새로운 사상과 개혁의 이론을 내세운 그의 정치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글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그러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허균은 도,유,불(道,儒,佛) 두루 능통했다는 증명되었다. 또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異端)시할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유교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궁극에는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하지만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서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25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성소부부고』에 함께 실려 있는 「성수시화(惺?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저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현재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이 있다.




★.
년도별로 본 허균(許筠)의 삶

허균
(許筠: 1569-1618, 선조 2 - 광해군 10)

1세(1569, 선조2년) : 허균은 1569년 11월 3일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2세(1580, 선조13년) : 허균의 부친 허엽이 이 해 상주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17세(1585, 선조18년) : 초시에 급제.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

21세(1589, 선조22년) : 생원시에 급제.

24세(1592, 선조25년) : 임진왜란 피난 중 부인이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외가 애일당 뒤산 이름을
                                  따서 교산이 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25세(1593, 선조26년) : 최초 시평론집 『학산초담』을 지었다.

26세(1594, 선조27년) : 정시을과 급제 하였다.

28세(1596, 선조29년) : 강릉부사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29세(1597, 선조30년) :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35세(1603, 선조36년) : 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대령산신 찬병서』를 지었다.

36세(1604, 선조37년) :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난설헌집』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39세(1607, 선조40년) : 삼척부사, 공주목사 역임, 『국조시산』을 편찬.

43세(1611, 광해군3년) : 문집『성소부부고』64권 엮었다.

44세(1612, 광해군4년) :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지음(추정)

46세(1614, 광해군6년) : 호조참의,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47세(1615, 광해군7년) :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으며 동지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옴.


48세(1616, 광해군8년) : 정2품 형조판서가 되었다.

49세(1617, 광해군9년) : 정2품 좌참찬에 오름.

50세(1618, 광해군8년) :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을 모함하였다. 4월 7일에 허균이 상소를 올렸으나 좌목을 알리는 결안도 없이 음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한양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아 생을 마감하였다.

傳소설 5편;

「손곡산인전」, 「엄처사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장산인전」

저서

《홍길동전(洪吉童傳)》,《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성수시화(惺?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 영남파 VS 기호파로 나눠진 훈구 VS 사림 그리고 파벌(분당)과 사대사화" 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7259214)



선조 때 부터 시작된 당파(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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