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味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이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자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문학예술』 27호, 1957.7)
[작품해설]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이 시는 앞에서 설명한 시 「꽃」에 대한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두 시는 모두 ‘꽃’을 소재로 하여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관념시이다. 즉 두 시는 모두 존재의 본질에 대한 기원과 소망을 노래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두 시의 화자의 어조나 정서, 태도 등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나 「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화자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이닉하고자 하는 소망을 읊은 작품이다. 또한 「꽃」이 존재의 본질을 밝려 그것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는 반면, 이 신 그렇지 못하다.
이 시에서 ‘꽃’이 사물의 본질을 상징한다면, ‘미지’ · ‘어둠’ · ‘무명’ 등은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며, 화자는 그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 즉 꽃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이다.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위험한 짐승’인 ‘나’는 ‘너[꽃]’의 존재론적 의미를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너’는 더욱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리하여 ‘너’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무명(無名)의 어둠’이란 이렇게 존재의 의미,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무명’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나’는 의식을 일깨우는 불을 밝히고 인식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추억의 한 접시 불’, 즉 모든 지적 능력과 체험을 다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호자의 몸부림과 절망을 ‘나는 한밤내 운다’로 표햔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노력이 돌개바람처럼 문득 큰 힘으로 면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마침내 ‘나’는 ‘너’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존재의 본질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 ‘나의 울음’ 그 ㄱ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역설적 깨달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너’는 마치 수줍은 신부처럼 얼굴을 가린 채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듯 존재의 본질은 인식 영역의 밖에서 인식의 내부로 좀체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만 자신의 안타까움을 ‘얼굴을 가리운 신부’-‘꽃’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춘수(金春洙)
1922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중퇴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시화전』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대한민국문학상 및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경북대학교 교수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旗)』(1951), 『인인(隣人)』(1953), 『제1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打令調)·기타』(1969), 『처용(處容)』(1974), 『김춘수시선』(1976), 『남천(南天)』(1948),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 『라틴 점묘』(1988), 『처용단장』(1991), 『돌의 볼에 볼을 대고』(1992),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1993), 『서서 잠자는 숲』(1993), 『김춘수시선집』(1993),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가을 속의 천사』(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