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
어머니는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평소 건강하던 분이였지만 말년에 기억을 잃어, 나름의 질서 속에 살아가던 자식들 삶예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행동 중 하나는 서울 사는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남편의 대한민국 정부 방위산업 프로젝트 참여 차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 살다. 자의 반 타의 반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고국에 돌아오니 방위산업은 사양길이어서, 남편은 대학교수로의 이직을 꿈꾸며 방 두 칸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정교수로 자리 잡으면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풀지 않은 짐 박스들이 켜켜이 쌓인 비좁은 집에 어머니가 자주 오시니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대학교수의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다리에 쥐 나도록 논문 보따리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찾아다녔으나 연이 닿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을 등한시할 수 없어 이 일 저 일을 거치다 결국 사업으로 방향을 들었다. 생업의 연장으로 은행 지분 반이 넘는 허름한 상가주택을 매입했다.
한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동짓달 무렵이었다. 다녀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어머니가 또 오셨다. 새집으로 이사 온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 예전 집으로 가신 어머니를 데려오는 동안 속에서 감정이 끓어올랐다. 사업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데다., 대출 원금.이자가 숨통을 조이는 통에 남편도 나도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남편에게 면목 없고 부끄러워, 어머니를 몰래 불러 서운한 말을 뱉었다. "김 서방 하는 일이 순조롭지 않아. 이렇게 자주 오시면..'' 어머니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모질게 밸은 말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듯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항상 젊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너무 연로하여 가슴이 먹먹했다.
80대 초반, 나와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조급증이 일기도 했다. 남은 세월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리라 다짐한 지 불과 얼마나 됐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평소 살가운 말을 주고받는 모녀지간이 아니어서 어색하고 불편했다. 좋아하시는 찬들로 저녁상 차려 만회하기로, 시장으로 향했다. 좋아하시는 멍게, 해삼, 각종 나물 등을 바리바리 사 들고 오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가방과 옷가지조차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당시 남편은 1층 상가 한쪽에서 사업 발판 마련하느라 끼니때가 돼야 집으로 올라오곤 했는데,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물으니 모른단다. 집주변 공원과 한강 고수분지 등을 미친 듯 뛰어다녔지만 어머니를 발견 할 수 없었다. 대구 사는 언니, 오빠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시골까지 갈 교통편은 없었기에, 서울에서 하룻밤 묵어야 하는 동선이 그려졌다. "또 너거 집에 갔더나? 너네 살기 팍팍하다고 가지 마라 몇 번 일렸건만, 아무래도 요즘 이상하다는 생각이, 옛날 어머니가 아닌 듯.." 친정 단톡방은 불이 났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기다려보자.' 등의 메아리가 사이버공간을 빽백이 채우던 중, 머리에 번개 같은 섬광이 일었다. 평소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면 나와 함께 봉은사, 길상사 등 서울에 있는 사찰 다니기를 좋아했다. 처음 몇 번은 효도랍시고 충실히 모시고 다녔지만 삶에 여유가 없어지며, 어머니도 그 일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다녀오시곤 했다.
남편과 함께 집 가까운 산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차를 몰았다. 언젠가 어머니와 한강 다리를 걸어간 적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 느닷없는 젊은 부부의 등장에 절 관계자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투덜됐다 ''밤에는 법당문 잠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녀가신 흔적이라도 있는지 근무자들에게 좀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관계자는 여간 귀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느 방문을 노크했다. 잠시후 부스스한 얼굴의 남자가 눈을 비비며 나와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법당문 잠글 때 누가 옷을 벗어놓고 간 것 같기도 하고." 부리나케 직원들과 대웅전 법당으로 뛰어갔다 '나무관세음보살!' 자식에게 속 알맹이 다 내어준, 차디찬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빈껍데기 가죽, 어머니가 거기 계셨다. 며칠 후, 병원에 모시고 간 어머니에게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는 게 아닌가!
어머니 돌아가신 지 십여 년, 해마다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등이 들어있는 5월이 돌아오면 그 죄업을 용서받을 길 없어. 거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읊조린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가없음에 있다 (ᆢ)
천둥과 번개를 침묵으로 만들어 목구명 깊숙이 밀어 넣고 살았다
(ᆢ)
그 무량겁無量劫의 곡선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생애의 울음을 멈추어 버렸다
비로소 신의 손을 잡을 일밖에 님아 있지 않는
마지막 낮은 사람의 등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시 대신 보여준 끝 장면은 이것이었다
ㅡ문정희, <어머니의 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