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자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s Ethic and Spirit of Capitalism)》이라는 책은 1905년에 나왔다. 수필체로 쓴 이 책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종교개혁 후 루터와 칼빈의 사상이 퍼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칼빈의 神學(신학)을 계승한 장로교와 청교도 등 개신교가 淸富(청부) 사상을 확산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맡은 바 일을 天職(천직)으로 여기고 신앙적 열정으로 몰입하여 돈을 벌고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인간은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천당에 간다는 보장은 없다. 구원받을 사람인가, 아닌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결정하고 이미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세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누가 구원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구원받지 못할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사치하고 낭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활태도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이런 긍정적 人生觀(인생관)과 직업관 및 구원관이 자본주의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개신교가 퍼진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그리고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점을 드는 이들이 많다.
국가적 차원에서 改新敎(개신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다. 이어서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이 칼빈주의를 主流(주류) 신학으로 수용하였다. 이들 나라는 지금도 一流(일류)국가이다. 아시아에서 보수적 改革(개혁)신앙으로 불리는 칼빈주의가 主流的 위치를 차지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최근 연구는 文盲率(문맹률)에 초점을 맞춘다. 改新敎가 번성한 나라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유는 성경의 보급으로 文盲率이 낮아진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 지배 아래에선 평신도는 聖經(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1229년 툴루즈 종교회의는 가톨릭의 평신도는 聖經을 소지해선 안 된다는 결정을 하였다. 타라곤 종교회의는 성직자들에게조차 聖經의 소지를 금지시켰다. 1408년 영국 옥스퍼드 종교회의는 성경의 번역도 금지시켰다. 종교개혁가들은 이 금지령을 거부하였다. 改新敎는 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신앙인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마틴 루터는 1522-34년 사이 新舊約(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改新敎가 퍼지는 나라에선 문맹률이 낮아졌다.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선 새로운 기술과 과학을 배우는 이들도 많아졌다. 자연히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문맹률이 낮아진 것과 改新敎의 확산은 관련이 있다. 특히 여성文盲率이 낮아진 데는 성경읽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改新敎의 확산이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에 기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승만, 김일성, 기독교
마태복음 6장33절은 이렇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는 영어 성경에서는 His Kingdom, 즉 하나님의 나라로 적혀 있다. ‘구하라’는 말은 구출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추구한다는 뜻, 찾는다는 뜻인 Seek로 되어 있다. 義는 正義(정의)라는 의미인 righteousness로 적혀 있다. 이 正義는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His righteousness, 즉 하나님의 正義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찾으면 너희들이 갈구하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正義가 바로 서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로마서 14장17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義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正義 있는 평화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평화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그 평화는 독재자의 평화가 될 뿐이다. 반대로 正義만 있고 평화가 없다면 살벌해서 살 수가 없다. 정의, 평화, 행복이 성령 가운데서 조화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일 것이다.
그런 나라를 이 땅에 세우겠다는 일념을 가진 분이 바로 140년 전 한국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건국-호국의 지도자 李承晩(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뒤에는 기독교인 학살자가 되었지만 북한의 수령 金日成(김일성)도 기독교 집안에서 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미국의 기독교 단체가 만든 미션 스쿨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이었다. 반석이란 이름도 성경(베드로가 盤石이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강반석은 고향인 칠골교회의 집사로 봉직했다. 金日成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나갔다. 주일학교에서 金日成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성경을 가르치고, 그의 육촌동생 강양욱은 소년 金日成의 주일학교 담당 교사였다.
북한정권을, 주체사상이란 종교를 믿는 사교 광신집단으로 해석하여 신도 수 기준 세계 제10위의 종교단체로 올리는 통계도 있다. 초대 대통령 李承晩 박사는 원래 전주 李씨 양녕대군[태종의 長子(장자)로서 세종대왕에게 王位(왕위)를 양보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끈질기게 과거 시험에 도전했으나 낙방을 거듭한 사람이었다. 李承晩이, 갑오경장으로 과거 시험이 없어지자 좌절해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배재학당에 나가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李承晩이 守舊(수구)세력에서 급진 개화세력으로 바뀌는 매개 역할을 기독교가 수행한 것이다.
남북한 두 지도자의 기독교적 공통점은 여기서 끝난다. 김일성은 만주로 가서 공산주의와 만나고 李承晩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가서 자유민주주의와 만나기 때문이다.
사랑과 생명의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에서 명문 대학을 나오고 지도층 인사들과 대등하게 교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나라를 잃은 이 젊은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 독립의 문제를 놓고 담판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생 시절에는 미래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총장의 총애를 받았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통합한 바탕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투시하고 대한민국 建國(건국)의 날을 내다보면서 그 미래를 설계하였다. 그는 미국 문명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지 않은 무서운 자주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됨으로써 한민족의 모세 역할을 하게 된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미국 젊은이들의 피로써 해방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20만 명이 넘는 戰死者(전사자)를 내는 희생을 치른 끝에 日帝(일제)를 무찌르고 한민족을 해방시켰다.
1945년 해방 직후 이승만, 김일성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귀국하였다. 김일성은 증오의 과학(공산주의)으로 무장한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돌아왔다. 李承晩은 사랑과 생명의 종교(기독교)에 바탕을 둔 人權(인권)과 자유의 이념(자유민주주의)을 신념화한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李承晩 박사는 한국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속삭임에 넘어가던 1920년대부터 벌써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 李承晩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독교인의 눈으로써 공산주의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李 박사는 건국할 때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사상에 기반을 둔 민주국가로 만들려는 꿈을 지녔다. 반면 스탈린식 최악의 공산주의에 혼을 판 김일성은 인간생명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唯物(유물)사상에 젖어서, 外勢(외세)를 끌어들여 同族(동족)을 치는 민족반역의 남침전쟁을 준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