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재해와 재앙을 마주하는 자세
연합뉴스 2023. 2. 19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자연재해와 전쟁은 인류의 재앙이다. 세계사에서 이 둘은 족쇄 혹은 굴레였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홍수, 산불 등의 자연재해는 예고도 없이 닥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이를 마주한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역사상 기록의 측면에서 가장 비극으로 남은 자연재해는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서기 79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2만~5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리고 잊혔다.
오늘날까지 귀중한 저작으로 인정받는 '박물지'를 남긴 플리니우스(23~79)도 화산 폭발 때 사망했다. 폼페이의 종말이 유명해진 건 18세기 중반에 이뤄진 고고학적 발굴 덕분이다. 벽화를 비롯한 유적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여러모로 알 수 있게 됐다.
화가들도 폼페이의 비극을 그렸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러시아의 화가 카를 브률로프(1799~1852)가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브률로프가 폼페이를 방문한 건 1827년이었다. 6년여 동안 문헌 및 유적을 통한 공부와 구상 끝에 1833년 완성했다. 작품은 서유럽 미술계를 강타했다. 그림을 본 당시 다수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찬사를 보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예르미타시 박물관 소장
죽은 어머니 옆에서 울고 있는 아기, 무너지는 조각상, 노인을 어깨에 메고 가는 젊은이들, 두 딸을 위험으로부터 방어하는 어머니, 필사적으로 아이를 지키려는 부부 등의 모습이 그림의 색조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준다. 브률로프가 현장을 지켜보며 그린 듯하다. 화가는 증인이라도 되려는 듯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도 그렸다. 왼쪽 뒤편 화구를 머리에 이고 피신하는 청년이 그다.
재해의 현장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비극 사이에서 움트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브률로프가 그리고 싶었던 건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재해 속에서 발휘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자연재해가 어찌할 수 없는 천재(天災)라면, 회피할 수 있으나 피하지 못한 인재(人災)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최악의 발명품이다.
전쟁을 그린 그림은 셀 수 없이 많다. 직설적인 그림 한 점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고발이 신랄하다. 미국 출신인 존 싱어 사전트(1856~1925)가 그린 '가스전'이라는 제목의 그림(1919)이다.
가스전 런던 전쟁박물관 소장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는 '참호전'과 '가스전'이었다. 그림에서처럼 대규모 독가스 공격에 노출된 병사들이 시각 장애를 일으켜 전우의 어깨에 손과 손을 얹어 이동하고 있다. 움직이기 어렵거나 죽은 병사들은 바닥에 방치돼 있다.
사전트는 인물화에서 두각을 보이며 상류층 인사들을 많이 그린 뛰어난 초상화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을 방문한 그는 끔찍한 현실을 목격한 뒤 충격을 받아 붓을 들었다. 초상화는 한동안 잊었다.
예술가들에게 펜과 악기와 붓은 때때로 고발과 참회의 도구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가로 6m가 넘는 대작으로 그리면서 의도적으로 단조로운 색조를 구사해 비참한 현실을 강조했다. 16세기 네덜란드 풍속 화가인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 그린 '장님을 이끄는 장님'(1568)이 상기된다.
장님을 이끄는 장님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 소장
브뤼헐의 그림은 '풍자'지만, 사전트의 작품은 눈앞의 '현실'이다. '무슨 의미가 숨어 있나?' 하며 그림을 보는 일이 '유예'라면, '어떻게 이런 현실이!'하며 그림을 보는 마음은 '상처'다.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강한 지진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에서는 반복된 어리석음으로 '비린내 나는 마비'를 이어가고 있다. 오는 24일은 전쟁 발발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사망과 부상, 폐허, 이별 등의 단어에 심드렁해지고 있다.
인류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 벗어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재해와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읽고, 보면서 아파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이 실체가 되면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 그건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화가인 페데르 세버린 크뢰이어(1851~1909)의 그림 '만세, 만세, 만세'(1888)처럼 이웃이 한 곳에 모여 축배를 드는 시간을 기억하자.
만세, 만세, 만세 예테보리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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