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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전략가들은 흔히들 당시의 사회 위기를 구현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간혹 세계의 흐름을 뒤바꿔 버리기도 한다."
역사상 위대한 전략가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건 간혹 등장해왔고, 비록 희귀하긴 하지만 웬만한 나라에서 한두 번 쯤은 출현하는 존재들이었죠. 한국인들도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광개토 태왕이나 이순신,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 등 각자 자랑하는 전략가들이 저마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존재들이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같은 세대를 겪고, 심지어 맞붙기까지 하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문 희귀한 경우죠. 오늘 소개할 인물들이 바로 그 경우에 속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2100년 전, 로마공화국이 오랜 숙적 카르타고를 멸하고 서부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된 후 마침내는 지중해 동부로까지 세력을 뻗쳐가고 있던 시기, 로마는 폭발적인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여러가지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로마연합 가맹국끼리의 내전, 여러 지배지역에서의 반란, 심지어는 스파르타쿠스를 위시로 한 검투사들의 반란마저 일어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상황이었죠. 희대의 전략가 한니발이 로마를 멸하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와 이리저리 박살을 내고 다녔던 2차 포에니 전쟁 때처럼 멸망할 뻔한 국가적 위기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여러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또 다시 로마 원로원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죠.
기원전 77년, 여느 때처럼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던 원로원에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29살의 청년이 등장하여 느닷없이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나섭니다. 꽤 이름이 있는 신흥 유력가문 출신의 이 젊은 청년은 이미 자신의 휘하에 수천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반란군을 소탕하여 어느정도 유망한 지휘관으로 슬슬 이름이 퍼지기 시작하던 차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직 어린데다 공직경험도 전혀 없는 이 젊은이에게 군단 지휘권을 부여하여 원정을 보내는 것은 원로원으로서는 생각도 하기 힘든 일이었죠.
하지만 원로원은 이미 3년이나 끌어온 에스파냐의 반란을 너무도 지겨워하고 있었고 마침 그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나선 이가 어느정도 믿을만한 전도유망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결국 '집정관 대리' 라는 임시직함을 만들어 주어 에스파냐로 파견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인해 이미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던 로마 공화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Gnaeus Pompeius Strabo),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이 등장합니다.
2. 무너지는 원로원
기원전 71년, 로마에 일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반란군의 끈질긴 게릴라 전법으로 인해 거의 5년을 넘게 끌어온 에스파냐의 난을 진압하고 개선하는 폼페이우스가 군대 제한선인 루비콘 강을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린 것입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까지 육박한 후 태연히 원로원에 출두하여 개선식 허가와 다음해의 집정관 선거 출마를 요구합니다.
원래 로마공화국에서의 국법상 로마시민의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수도 개선식을 거행할 경우 다음해 열리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공화국 최고의 공직인 집정관의 자격연령은 40세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이것마저 무시하죠.
원로원 의원들은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군대를 뒤에 업은 폼페이우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폼페이우스는 결국 로마 역사상 최연소 집정관에 당선됩니다. 그해 명목상으로 열린 청문회에서도 원로원은 대망신을 당하게 되죠.
원로원 회의장에 소환된 폼페이우스에게 한 원로가 묻습니다.
"참전경험은 있는가?"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거만하게 대답합니다.
"전 지휘경험밖에 없는데요."
이런 일련의 광경을 모두 지켜본 한 젊은 청년은 원로원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죠. 이 청년은 폼페이우스가 한창 군사적 명성을 날릴 시기에 플레이 보이, 바람둥이, 빚쟁이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이 젊은 양아치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천년 로마사 최고의 유명인사는 아직 이때는 조용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 해적소탕 (BC 67)
기원전 67년에 이르러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측근인 호민관 가비니우스를 선동하여 500척의 군선,12만 병력 군대의 절대지휘권을 부여받는 해적소탕의 사령관으로 자신을 추대합니다.
원로원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이미 최고의 인기를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 추종자들의 시위 앞에 원로원은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3년간의 절대지휘권을 부여받고 해적소탕에 나섭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때 지중해 전체를 13구역의 작전 해역으로 나누고 일거에 들이쳐 바다를 제압한 후 해적들의 본거지까지 밀고 들어가 소탕하는데 이때 지중해는 해적의 씨가 마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중해 전체의 해적을 일소하는데 들인 기간은 3년은 커녕 3개월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남은 폼페이우스는 본래의 목적을 모두 달성한 후에도 당연히 지휘권을 반납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대지휘권을 더 연장하는 법안을 가결시킨 후 동방원정의 총사령관에 추대되어 그리스를 넘어 지금의 터키, 지중해 동부의 소아시아 지역으로 원정을 갑니다.
4. 동방원정 (BC 66)
이때 소아시아는 루쿨루스라는 뛰어난 장군이 이미 파견을 나가 있었죠. 이 루쿨루스라는 장군은 전략전술에선 뛰어나 동방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로마 장군으로서는 최초로 카스피 해까지 진출했었지만 너무 고지식하여 휘하 병사들에게 신망을 잃어 병사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로마가 해적소탕으로 대병력을 출병했다는 말을 듣자 야심만만한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눌렸던 것도 잠시,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미트라다테스는 뜻밖에도 순식간에 해적들을 끝장내고 나타난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게 됩니다. 슬슬 간을 봤을 뿐인데 갑자기 끝판왕이 등장한 격이죠.
소아시아에 10개 군단 5만2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한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미트라다테스는 패기가 쩌는건지 멍청한 건지 게릴라를 해도 모자랄 판에 4만의 군대를 끌어모아 대결을 벌여 간단히 격파당하게 됩니다. 이때 폼페이우스 군대는 사상자가 아예 없다시피 할 정도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고 폼페이우스는 곧 소아시아 전체를 제패하게 됩니다.
소아시아 전역을 로마의 패권아래 복속시킨 후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남하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멸하고 시리아를 제패하였으며 그대로 밀고 내려가 유대전역을 평정하고 이집트까지 로마의 패권을 확대시킵니다. (ㅎㄷㄷㄷㄷ;;;)
이때 폼페이우스는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성소에 들어가는데 유대의 신에게 참배하러 들어간 그는 성소안에 신상이나 무언가 참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자 그냥 두리번거리기만 하다가 나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유대인들의 성역인 성소에 들어갔다 나온 소감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덧붙이자면 로마는 항상 피지배인들에게 시민권을 나눠주고 국민으로 받아들여 동화시켜왔는데 이 로마에 대항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조건적인 거부를 보인 유일한 민족이 이 유대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훗날 이집트와 시리아 여러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끝까지 로마인이 되길 거부하다가 결국 나중에 진압을 당해 뿔뿔히 흩어지게 되죠.
5.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불과 3년만에 지중해 동부지역 전체를 제패한 폼페이우스는 명실상부 로마공화국 최고의 장군이자 유명인이자 인기인으로서 수도 로마에 위풍 당당히 개선하게 됩니다.
이 폼페이우스의 업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흑해에서 카스피해 및 홍해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로마의 패권을 확립.
2. 1천2백만 이상의 인구를 로마의 패권하에 거둠.
3. 1천5백개 이상의 도시를 로마의 패권하에 편입.
4. 지중해 해적의 씨를 말림.
폼페이우스의 정복을 거친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 전체를 제패한 최초이자 최후의 제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폼페이우스는 당시 자신의 가문이 모셨던 로마의 통치자 술라로부터 농담삼아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 라고 종종 불렸었는데 시간이 흘러 지중해 전체를 평정한 폼페이우스는 정말로 로마 시민으로부터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 로 불리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중해 세계의 1인자이자 주인공은 누가 봐도 바로 이 위대한 폼페이우스였습니다.
6. 날개를 펼치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가 만약 카이사르만큼 야심과 정치적 천재성이 있었다면, 혹은 그러려는 의지만 있었더라면, 이 시점에서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자신이 이 거대한 제국을 직접 통치하는 황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전략전술과 용병술에 있어서는 천재적일지 몰라도 정치적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으며 명예욕과 허영심은 있을지언정 야심은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 가 되어 귀국한 폼페이우스는 이후 원로원의 반격을 받아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을 직접 엎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여 유명해진 로마의 대부호이자 상류층의 대표인 크라수스까지 끼어들어 결국 인류 정치사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희한한 정치체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기원전 59년 출범하게 되는 이 유명한 체제는 "트리움 비라토(Trium Virato)", 즉 삼두정치로 불립니다.
평민층의 대표인 카이사르와 로마최고의 득표를 보장하는 폼페이우스의 인기, 그리고 상류층의 대표인 크라수스의 재력이 결합되자 이 3인 체제는 원로원의 힘을 가볍게 압도하여 이후 모든 공직 출마자들이 이 세 명의 파벌에서 나오게 되며 로마제국의 국정을 온전히 이 셋이 모두 쥐고 흔들게 됩니다.
이 삼두정치로 인해 이때까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던 카이사르가 드디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원로원은 이제 유명무실한 허울뿐인 집단이 되어버렸으며 로마 공화국은 이제 '허울뿐인 공화국' 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전면에 등장한 카이사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숨에 폼페이우스와 필적할 만한 군사적 명성을 쌓기 위해 웅대한 목표를 설정하게 됩니다.
7. 갈리아 정복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42세가 되던 해,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6개 군단 3만5천 병력의 사령관이 된 카이사르는 갈리아, 즉 지금의 프랑스 전역과 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를 합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러 출정합니다. 이 갈리아 원정은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서술하여 <갈리아 전쟁기>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폼페이우스는 물론이고 당시 거의 모든 로마인들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상세히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갈리아 정복을 자세히 썼다가는 밤을 새도 모자라고 내용도 삼천포로 빠지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4권을 보시기 바랍니다 ㅎㅎ
본편으로 빨리 넘어가야 하니 대충 요약하겠습니다.
당시 갈리아는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인구는 1천만 좌우였고 100개에 가까운 부족이 난립해 있었으며 완전히 미개하고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돈이 안되는 지역이었죠. 하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에 가까우면서 군사적으로도 자주 위협이 되는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려 마음을 굳혔고 결국 4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1천만 인구의 갈리아 전체를 평정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최초로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문명의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훗날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화하여 이후 황제들도 여럿 배출하게 됩니다.
이 갈리아 정복에는 총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걸핏하면 수만,수십만의 부족전사들과 전투를 치뤄야 했던 카이사르의 부대는 지중해 최강의 정예부대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싸웠다 하면 이기는 최강의 부대가 탄생한 것이죠.
8. 삼두정치 폐막, 원로원의 대반격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에 전념하던 시기, 삼두정치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의 아기를 출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됩니다. 태어난 아이도 얼마 안 가 죽었고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로써 '남남' 이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유효했죠.
문제의 발단은 기원전 53년에 일어납니다.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 최고의 재력가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죠.
크라수스가 전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반격을 시작합니다. 카이사르의 부재를 틈타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이간질 하는데 성공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거의 마무리 된 시점에는 이미 폼페이우스를 구워삶아 원로원파로 전향시킨 뒤였습니다. 이미 크라수스가 죽어 삼두정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혈연관계마저 끊어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떼어놓는 것은 원로원으로서는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기원전 49년 1월, 이미 '삼두' 파의 인물들은 거의 공직에 없었고 당시의 집정관 또한 당연히 원로원파의 일원이었습니다.
원로원 회의장에서 낭독된 집정관의 카이사르를 향한 최후통첩은 결국 로마공화국 사상 최대의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군대를 해산하고 당장 수도 로마로 복귀하라는 원로원의 권고는 명백히 카이사르를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고 카이사르는 일단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군사제한선인 루비콘 강 앞까지 진군합니다. 로마국법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여기서 군대를 해산해야 합니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굽어보며 휘하 병사들에게 연설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몰아내어 국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폼페이우스파는 나를, 너희들의 총사령관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이에 병사들이 즉각 답합니다.
"우리는 총사령관의 명예를 지킬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고 따라준다면 나는 로마로 가서 저들의 음모를 쳐부수고 우리들의 존엄을 되찾을 것이다.나를 따르겠는가?"
이번에도 병사들은 즉각 답합니다.
"장군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후 마지막으로 선언합니다.
"가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가 50세 되던 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루비콘 강 도하와 함께 로마공화국 역사상 최대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로마천년사, 동로마까지 합치면 2천년 로마사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전략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이 둘의 세기의 대결이 이제 시작됩니다.
Civilization IV - Baba Yetu (piano).s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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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본격적으로 대결하게 되는 내전기 내용은 다음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편으로 들어가기도 전인데 분량이 꽤 되네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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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미드 로마가 급 땡기네요!!! 저번 한니발 편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매번 이리 좋은 자료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혹시요... 영어로 된 로마사 나 전쟁사 책 추천해주실수 있나요?? 우리나라는 로마인 이야기 밖에 생각이 안나서 ^^;;;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영어로 된 로마사라면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Edward Gibbon 이 쓴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추천드립니다. 로마인 이야기 9권까지 보신 다음부터 보시면 딱 맞을 거에요
잘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마시대에 관한 이야기나 영화, 드라마 같은걸 좋아하는지라 정말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2편은 언제쯤 올리실건가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음......2편은.....글쎄요. 이번 주말은 바쁘고 월요일도 바빠서....다음주 평일쯤에는 올릴 것 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