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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송민 이주형 개인전 안내
일시 : 2009년 7월 16일(목)-7월 22일(수) 장소 : 인사동 백악예원 1-2층 전관 (전화 734-4205) 오픈 : 2009년 7월 16일(목) 오후 5시 작가 연락처 : 016-366-4041
송민 이주형의 득의망언得意忘言 서예미학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서예세상 지기) 송민 이주형은 당당한 풍채와 준수한 외모를 지닌 작가이다. 그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면 이지적인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에 맞게 깊은 사유를 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의 기억에는 ‘서예세상’카페를 함께 운영을 해 오면서 여러 번 만나 서예담론을 나눈바 있는데 박식한 식견과 탁월한 실기능력을 갖춘 전재형의 작가이면서도 늘 겸손함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론과 실기를 갖춘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이 그 동안 사유하던 것들을 그의 숙련된 붓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전시를 앞둔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그가 걸어온 길과 작품속에 담고자 하는 것들을 담담하게 들어보았다. 교학상장의 30여년 붓길 인생
송민의 붓길인생은 81년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연히 붓을 잡게된 그는 얼마지나지 않아 교학상장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 당시 처음 입문해서 공부하던 서실에서 지도자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지도와 공부를 병행하게 된다. 인천에서 서예를 지도하던 중 군대에 입대했고, 그런 연유로 국군논산병원에서 병사신분으로 간호장교들을 상대로 서예를 지도하였다. 제대 후 86년 개봉동에서 서실을 개원한 이래로 만 24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으니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도자로서 교학상장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남을 가르치려면 피교육자보다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한다는 각오로 제대한 뒤 전각을 배우고, 윤의현선생께 한학을 익히는 등 촌각을 아껴 공부에 매진하였다.
한글서예는 처음 일중선생이나 이미경선생의 자료를 구해 독학하다 한계를 느껴 낙셩비룡과 옥원듕회연 및 봉셔 등 고전자료를 구해 차근차근 임서해 나가기 시작했다. 각종 공모전에 열심히 응모하여 공모전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 나갔다. 거기에 한문서예의 용필과 장법을 응용해 변화를 추구하였다. 한문서예는 초정 권창륜 선생을 찾아 입문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상 규칙적인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가까운 곳에 서실이 있었던 소정 전윤성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골력을 세우기 위해 북위서체를 열심히 임서했고, 고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진한대 이전의 글씨자료들을 많이 임서하였다. 한글을 독학한 것처럼 한문공부도 운필법을 눈여겨 보고나서 체본없이 실험하고 확인하는 공부를 반복해 나갔다. 본인이 맞게 공부하는지 여부는 공모전을 통해 확인하고, 다시 고전을 통해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서 숙련시켜 나갔다.
오래전부터 송민은 서예의 대중화를 위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일찍부터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여 휘호하는 장면을 녹화해왔는데 대장금을 찍을 때는 작품 곳곳에서 휘호하는 장면을 녹화하여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송대와 명대 서가들의 묵적에 관심이 많다. 송민은 초서연구에 치중하는 한편, 바쁜 중에도 성균관대 박사과정을 마치는 학구파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경기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등 교학상장의 분주한 일상을 소화해내고 있다. 고전을 통해 공부하고 고전을 잊어버려라 장자 외물편에 보면,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알기 위해 말을 듣지만 뜻을 얻고 나면 말을 잊는다. 언제쯤 말을 잊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뜻을 얻는[得意] 순간에 말은 우리의 감각범위 밖에 놓이게 되고 나와 뜻만 남게 된다. 문자를 매개로 해서 이뤄지는 서예는 문자가 지닌 의미와 형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고전적인 틀에 얽매어 한걸음도 고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말속에 갇혀 뜻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장자의 ‘정신을 집중함[凝神]’, ‘귀신의 솜씨인지 의심이 감[疑神]‘, ’사물의 오묘함을 얻음[得物之妙]’, ‘마음과 손이 상응함[心手相應]’ 등과 같은 동양예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예술경계를 대변하는 이론들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민은 “서예술은 모든 것을 통섭해야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지혜와 기교가 겸비되어야 하고, 이론과 실기가 두루 갖추어져야하고, 안목과 노력이 겹쳐져야 어느 정도 성취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고전에 푹 빠져 고전을 완전히 소화한 뒤 다시 고전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확신을 가지고 실제 그렇게 실천해 나가고 있다. 예컨대 이쁜 궁체에 매료되어 이미경선생의 글씨본과 일중선생의 글씨본을 부지런히 임서했고, 지금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여운이 남는 한문글씨에서 취사선택한 것들을 한글에 대입시켜서 자신의 글꼴로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바로 득의망언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고, 실제 이번 작품전에서 <득의망전得魚忘筌(고기를 잡으면 통발이 필요없어짐)>이라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그의 이런 작품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의 작품에는 고전을 충실히 소화한 뒤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송민의 의도와 마음이 담겨있다. 이런 점이 앵무새처럼 동어반복적으로 남의 글씨만 흉내내는 다른 작가와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문서예의 표현에 있어서도 운필과 결구와 장법에서 이전의 고전과는 다른 점들이 보여진다. 태세, 강약, 대소, 지속 등등의 서예미학적인 용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변화가 무궁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런 변화는 우연히 되거나 의도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갑골문의 직졸미와, 서주금문의 자연스러움, 북위의 방경함과 당대 해서의 엄정함, 송대 행서의 자유분방함과 청대의 복고풍 글씨들을 익힌 나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규범화된 글씨의 정치함을 알고 규범에서 풀어져서 자유스러움을 구가한 글씨들의 한가함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송민의 좌우명은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범하게 살자”라고 한다. 그의 좌우명처럼 그의 작품도 늘 신중한 구상 뒤 과감한 자기만의 휘호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앞으로 그는 글씨를 서사하는 것만큼 이해하는 시간도 늘려 나갈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감할 수 있는 글씨를 써보고 싶다고 말한다. 즉 정체성이 살아있는 한국적인 작품을 제작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문작품 못지않게 한글작품도 같은 비율로 제작하여 감상자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을 제작한 것이다. 아울러 젊은 시절엔 서예를 삶의 방편으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왜곡된 서예의 가치를 널리 알려나가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소리없는 음악[無聲之音]’이라고 이름부친 이번 전시에서 그의 주옥같은 한글 29점, 한문 30점, 국한문 7점의 작품에서 배어나온 울림이 대중들에게 널리 울려퍼지길 기원한다.
작가소개
이 주 형( 李 周 炯 ) 아호 : 산벗. 송민 Lee ju hyeong 住 所 : 서울 구로구 개봉2동 264-31호 (우 : 152-092 ) 전화번호 : (自宅) 02-2613-2459 (연구실) 02-2686-4041.2 (F A X) 02-2686-4042 H,P 016-366-4041 e-mail : maobi@hanmail.net
▶ 1962 충남 청양산 ▶ 성균관대학교 유학 대학원 박사과정수료 ▶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서예전공/대학원 강사 ▶ 경기대학교 미술 디자인대학원 대우교수 ▶ 대전대학교 예술대학 서예학과 강사 ▶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송민 이주형선생의 최근 모습
< 空心> 40-70
< 無愧我心>42-50
<得魚忘筌 >55-50
박재삼님의 <천년의 바람> 40-95
정호승님의 <풍경소리> 45-55
< 氣山心海 > 30-90
http://cafe.daum.net/callipia 서예세상 작가세계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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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민보다는 산벗이란 아호가 탐이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