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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과 레닌의 책임정치
오늘날 학계에서 레닌을 다루는 일은 예사롭지 않다. 사실 지젝 스스로 자신의 동료들을 도울 수 있을만한 연구그랜트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라캉주의자들이 학계의 제도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되고 있는 것처럼 제도권 학계에서의 구직을 위한 그의 추천서 역시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Žižek, 2007a: 200-201; Žižek, 2007b). 그가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강연의 기회를 가능한 많이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레닌 연구에는 늘 다음 두 가지 단서가 달린다. “그래, 뭐 어떠냐, 우리는 자유민주사회에 살고 있지 않느냐, 사상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 …… 단 레닌을 노스탤지어에 젖은 우상 숭배적 태도가 아니라, 객관적, 비판적,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나아가서 인권의 범위 내에서 민주적인 정치질서에 단단히 뿌리박은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지젝, 2008b: 261)는 것이다.주1)
분명 지젝 스스로 레닌주의자임을 자처하긴 해도 그가 완결된 레닌의 사유체계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레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월 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 완전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의 레닌의 실천적 지향을 가리킨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인 봄에 러시아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였다. 이 무렵 러시아는 전례 없는 수준의 대중동원, 조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 때문에 오히려 상황은 불투명했다. 그 불투명성이 레닌이 개입할 만한 독특한 공간을 제공했다.주2) 지젝이 주목하는 부분도 혁명과 혁명 사이의 공간이다. 이 간격은 단지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간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1차 혁명에서 내용이 아닌 형식 그 자체를 간과했다는 점이다(지젝, 2008b: 14-15).주3)
이 무렵 정작 레닌을 반복하는 이유는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날의 상황에서 당시의 충동을 되살리자는 것이라고 말한다(지젝, 2010b: 21).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특별한 해법이 틀렸으며, 그것도 괴물스럽게 실패했지만, 그 안에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인 스파크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Žižek, 2007b). 지젝이 레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보다 심각한 이유는 많은 좌파이론가들이 전 지구적 위협에 대한 철저한 변화의 지평을 외면한 채 로칼 수준에서 다양한 저항운동에 보다 치중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에 있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와 이의 민주적 정치형태를 철저히 타도하자는 천박한 혁명요구도 경계한다. 이러한 그의 충정은 민주주의자에 대한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혁명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판에 박힌 의례적 표현으로, 관습적인 통칭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인민 다수의 이익을 현실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혁명가는 낡고 해로운 모든 것을 가장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레닌, 2008b: 126-127).
오늘날 지젝이 복원하고자 하는 레닌의 유산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자가 추구하는 ‘진리의 정치’이다. 지젝은 레닌에게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모두 배척하고 있는 “유물론적 진리”(지젝, 2008b: 287)의 정치를 되돌리고자 한다.주4) 레닌이 물질의 철학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자연 안의 변증법 또는 자연의 변증법’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소했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레닌은 거침없이 진리로 나아갈 권리를 주장하지만 진리가 경험주의적 또는 실용주의적 도구주의로 환원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지젝은 그가 1914년 붕괴의 와중에 유럽의 거의 모든 사회민주당이 전쟁의 열기에 굴복하여 전쟁 채권에 찬성표를 던졌을 때 ‘애국주의노선’을 완전히 거부했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지배적인 분위기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행동이었지만 상황전체의 진리가 독특하게 출현하는 과정을 대변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지젝, 2008b: 284).
의심할 여지없이 지젝 또한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발화하는 위치에 관한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진리개념을 준용하는 실천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뿐이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 두 이론은 모두 투쟁하는 이론이다. 단지 투쟁에 관한 이론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투쟁 속에 두는 이론이다. 두 이론의 역사는 중립적인 지식 축적의 역사가 아니다. 그 역사는 불화와 이단과 파문으로 얼룩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두 이론에서 이론과 실천은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다. 이론은 단지 실천의 개념적 토대가 아니라 왜 실천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지젝, 2009a: 10).
그렇다면 레닌은 21세기 우리에게 무슨 말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인가? 지젝의 이 질문은 지구적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시애틀, 워싱턴, 멜버른, 다보스 마지막으로 다음 달 서울에서 벌어지게 될 일련의 시위를 생각하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젝은 오늘날 새로운 반자본주의 좌파에게 가장 적절한 충고를 제시할 수 있는 사상가는 단연 레닌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발견된 가장 좋은 기능형식으로 여겨지고 있는 오늘날 진정한 혁명은 어디서 가능할까? 우리는 이런 자본주의의 자본화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그것의 무한한 재생산을 가로막을 만큼 강력한 적대들을 내포하고 있는가? 여기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혁명을 이끄는 네 가지 적대를 상정하고 있다.
첫째, 생태학적 적대이다. 자본주의의 무한한 적응력, 예컨대 생태학적 파국과 위기의 경우 생태계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투자와 경쟁의 장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이러한 강력한 적응력에도 불구하고 생태학적 위험의 본성 자체가 시장의 해결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사실 자본주의는 오직 엄밀한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적 실체, 어떤 법에 복종하는 객관적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모든 주관적 개입들의 매개물이자 토대로서 기능해 왔다. 즉 사회정치적 주체들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역사적 실체에 의해 매개되고 지배되고 중층 결정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지평은 주관적 개입이 직접 역사적 실체로 개입할 가능성, 가령 생태학적 파국, 치명적인 유전자 돌연변이, 핵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군사-사회적 재앙의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역사적 과정을 돌이킬 수 없이 교란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다.
둘째, 지적 재산에 대한 사유화의 부적합성의 문제이다. 새로운(디지털) 산업의 핵심 적대는 어떻게 이윤추구가 가능한 (사유)재산 형식을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예컨대 무료음악 유통이 가능한 넵스터의 경우 지적 소유권의 문제가 모호해지고 있다. 생명유전자에 대한 법적 분규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으로 새로운 국제무역 협약의 핵심 쟁점은 지적재산권 보호가 될 것이다.
셋째, 새로운 과학기술적 발전이(특히 유전공학에서) 지닌 사회-윤리적 함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적대이다. 유전공학의 윤리적 결과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에서 잘못된 점은 논쟁이 너무나 빨리 독일인들이 ‘하이픈 윤리학’이라고 부른 테크놀로지-윤리, 환경-윤리, 의학-윤리 등으로 전환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하이픈 윤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윤리 그 자체이다. 문제는 “보편적 윤리가 특수한 논제들로 해체되었다는 게 아니라 반대로 특수한 과학적 돌파가 직접적으로 낡은 휴머니즘적 ‘가치들’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의 여지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신중한 입장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부정성과 함께 머물며’ 과학적 현대성의 결과들을 완전히 받아들여 ‘우리의 정신은 게놈이다’ 역시 무한판단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든지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형태들, 새로운 장벽과 새로운 슬럼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이제 모든 탐색은 끝났다는 자유세계의 공동체가 지구촌 골목마다 편재해 있어서 이 초특급 할리우드판 해피엔딩의 장애물이 단지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은 21세기의 처음 10년 사이에 무참히 깨지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의 위치는 새로운 거대도시의 슬럼 거주자들의 위치가 되었다. 지난 10여 년 간 슬럼의 폭발적 증가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이 될 것이다(지젝, 2009a: 626-639을 참조하라).
우리가 이러한 네 가지 적대와 관련하여 대의를 옹호해야 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보다 너무나 손쉽게 제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지젝, 2009a: 15). 무엇보다 지젝은 작금의 금융붕괴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혁명공간을 발견한다. 여기서 혁명의 과제는 “사건적 폭발에 정상성으로의 귀환이 뒤따르는 패턴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그 대신 세계자본주의적 무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돈(ordering)’”이다. 만약 이 혁명이 공산주의 이념을 재현실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다시금 문제는 자본주의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된다. 즉, 생활세계를 박탈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적 투쟁의 좌표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적은 이제 징후적 뒤틀림의 지점으로부터 기반을 허물어나가야 하는 국가가 아니라 영구한 자기혁명화의 흐름(flux)인 것”이다(지젝, 2010a: 259).주5) 이러한 지젝 분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논점은 레닌을 따라서 경제체계보다 정치적 개입을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지젝에 따르면, 적정한 수준의 정치적 개입과 관련하여 국가와 정치의 관계는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첫째, 공산주의적 국가-당 정치의 실패는 반국가적 정치의 실패, 국가의 제약들을 돌파하고 국가적 조직형태를 자기조직화의 직접적, 비대의적 형태(평의회)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이다. 둘째, 국가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국가에서 물러날 권리가 없다. 여기서 진정한 과제는 국가에 거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주는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혁명적 폭력의 목표가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하는 것, 그것의 기능, 토대에 대한 그것의 관계 등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지젝, 2010b: 260)이다. 이것이 곧 앞에서 구분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적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바뀌는 국가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민중참여의 새로운 형식들에 의존하게 되는 것”(지젝, 2010b: 261)이다. 레닌의 기본적 명제는 참된 혁명의 목적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장치들 자체를 해체하고 와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국가기구의 장치들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들에 대해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는 후기자본주의내의 ‘지적 노동’의 우위(혹은 심지어 주도적 역할)가 노동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의 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재전유로서의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의 기본적 구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월드와이드웹과 같은 영역에서 생산, 교환, 소비는 뗄 수 없이 서로 결합되며 잠재적으로는 심지어 동일하다. 나의 생산물은 곧장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그에 의해 소비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 형태를 띠는 상품물신주의라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관념은 따라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비물질노동’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객관성의 막 뒤에 숨는다기보다 그 자체로 우리의 일상적 착취의 바로 그 소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고전적인 루카치적 의미에서의 ‘물화’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성은 비가시적이기는커녕 바로 그 유동성 속에서 직접 마케팅과 교환의 대상이 된다. ‘문화적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또는 감정적 경험을 ‘초래하는’ 대상을 팔지(그리고 사지) 않고 직접 그러한 경험을 파는(그리고 사는) 것이다(지젝, 2010b: 274f.).
시차적 전환을 통해 우리가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자체를 생산적 다중의 흐름을 넘어서는 진정한 과잉으로 본다면 오늘날 다중의 생산이 직접적으로 삶을 생산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과잉, 즉 자본이라는 과잉을 생산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직접적으로 생산된 관계는 왜 여전히 자본주의적 관계의 매개적 역할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현상한다는 물신주의 논제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인가?
지젝에 따르면,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앞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국가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민중참여의 새로운 형식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레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 역시 프롤레타리아가 새로이 지배계급이 된 국가형태는 아니었다. 그의 전망은 계급적 억압 장치로서의 국가의 점진적 사멸이었고 이는 민중참여의 새로운 형식을 전제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법으로서라기보다 실천으로서 자기 모순적인데 이는 그것이 국가의 사멸을 위한 국가, 권력의 민중전체로의 이양을 위한 권력, 그리고 계급의 소멸을 위한 계급의 존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과서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지젝에게 있어서 새로운 점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결과’로 전망하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로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결코, ‘그냥 말’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레닌은 국가운영의 중책을 맡아, 여기에 필요한 모든 것과 타협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볼셰비키의 권력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구되었던 가혹한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지젝, 2005: 387과 615). 레닌에 대한 지젝의 수정에는 레닌의 의도를 살린 면과 죽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그러니까 현실사회주의에 대해 “공산주의적 국가-당을 ……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라고 파악하는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성격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직접적인 민중참여형식들이 뿌리를 내리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일하다는 지젝의 주장은 구공산권 지도자들의 독단을 거슬러 레닌의 의도를 살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의 이론적 구조에서 중심은 자본주의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차원의 조건을 창조한다는 전제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혁명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전시켜 자신의 모든 가능성들을 소진했을 때 자본주의 중심 적대(모순)가 가장 순수하게 벌거벗은 형태로 발생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서 레닌의 ‘약한 고리’ 이론은 일종의 타협적 해결책인데 최초의 혁명은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가 아니라 비록 덜 발달되었더라도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순이 가장 심각하게 집중된 나라(농업을 배경으로 마치 섬처럼 집중된 현대 자본주의 산업과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정부가 결합되어 있는 러시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여전히 10월 혁명을 서유럽에서의 광범위한 혁명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위험한 돌파로 인식했다(지젝, 2009b: 271)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레닌은 문자 이전의 베케트주의자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기본적으로 볼셰비키는 내전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에서 직접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볼셰비키는, ‘정상적인’ 부르주아 국가보다 더 잘 실패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불가능성의 조건이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유명한 데리다의 명제가 혁명과정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불가능성의 조건, 예컨대, 사회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 러시아의 후진성과 고립된 상황은 최초의 사회주의적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예외적 상황의 일부분이다. 지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달리 말해 (혁명은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예외적이고 ‘미성숙한’ 상황을 혁명의 역사적 변종이라고 한탄하는 대신 혁명은 사회의 객관적 진보가 혁명을 위한 ‘성숙한’ 조건을 낳는 바로 그 ‘제 시간’에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레닌의 유명한 ‘연쇄 속의 약한 고리’ 개념의 요점은 다시 ‘변종성(anomaly)’을 적대를 과속화하는 지렛대로 차용해서 혁명적 폭발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지젝, 2009b: 540).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레닌주의자의 태도는 자유주의적 좌파와 확실히 다르다. 그들은 대중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면서도 자신들의 아카데믹한 특권이 위협받아서도 안 되고, 몸소 더러운 일을 기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젝에 따르면,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레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확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레닌이 선보인 위대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 자유주의적 좌파는 야당세력으로 남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권력 장악이라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회피한다. 체제 전복 활동에서 책임을 지고 사회를 원활하고 순조롭게 운영하는 활동으로 옮겨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열정은 악순환의 고리에 포박당한 히스테리성 혁명열정일 뿐이다.
여기서 지젝이 정의하고 있는 레닌주의는 이른바 ‘책임의 정치’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주의와 확실히 구별되는 좌파자유주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그 신념을 실천하는 데 따른 혹독한 결과는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권력 장악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업은 회피하고 야당세력으로만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진정한 레닌주의자는 행위에 나서고,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실행한 결과가 유쾌하지 않을 때도 기꺼이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지젝, 2010b: 59). 한편, 지젝이 다루고 있는 진리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에 대한 자기 관계적 진리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적 정확성보다는 주관적인 발화의 입장에 영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관여적 진리라 할 수 있다(Zizek, 2010: xiii). 지젝은 이를 혁명을 위한 일련의 보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데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에 전력하였던 레닌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지젝은 레닌을 사회주의의 완성자라 보지도 않고 전체주의자로 보지도 않는다. 지젝에게 있어서 레닌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이를 끌어낸 실천가로서 중요하다. 지젝이 복권하고자 하는 레닌은 결정적인 행위의 레닌, 여타 당 리더십이 속수무책일 때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던 레닌, 노동자의 혁명의 가능성을 주창하기 위해 혁명이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적 성격의 이론으로부터 과감히 뛰쳐나올 수 있는 레닌이자, 자기 정당의 대세를 거슬러서 홀로 투쟁할 수 있는 그러한 레닌이었다. 이러한 레닌의 모습은 그가 1914년 당시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 정당들이 애국주의 노선을 따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새로이 혁명의 가능성을 읽어낸 데서 벌써 확인되었다. 지젝이 레닌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론가'를 발견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지젝 스스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실천하는 이론가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젝은 레닌과 달리 노동자의 눈으로 인텔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과 같이 정신분석가의 눈으로 인텔리를 비판한다. 지젝과 레닌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폭동의 기술’로서 정치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반면에, 지젝은 ‘정치행위자들에게 불가능성’의 기술로서 정치를 추구하라고 외치는 점이다(Johnston, 2010: xvii; Daly, 2006: 319).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용어는 ‘잠정성,’ ‘당파성,’ ‘불확실성’ 등의 언어를 지지하는 범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범주는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구성물, 즉 혁명적 폭발의 순간에 파괴되는 구성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보다는 사회가 ‘어떻게’ 불가능한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젝의 궁극적인 과제는 바로 이 불가능한 것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다루는가 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존하는 가능성의 결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불가능성(the impossible)’에 모험을 걸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실재계의 윤리학(the ethics of the Real)’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젝의 실재 개념은 내재적인 한계와 내재적인 개방/출발이라는 두 측면 모두를 구성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실재계는 현실(reality)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 양자 사이의 관계는 공간적이 아니라 차원적이며(dimensional) 상호혼합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현실이 ‘실재계의 삐침(a grimace of the real),’ 왜곡시키고 있는 어떤 시각의 결과물인 반면에, 실재 그 자체는 단지 현실의 삐침일 뿐이라고 말한다(지젝, 2004b).
이렇듯 지젝의 시각은 철저히 유물론적이다. 그러나 그가 토대하고 있는 유물론의 정식은 우리의 그릇된 현실 지각 너머에 어떤 본체적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포괄적 전체로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포괄적 전체인 세계를 지각할 수 있다는 입장은 외부 관찰자의 입장이다. 우리 마음 밖에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세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지젝은 자신의 시차적 간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존재하는지,’ ‘내 마음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현실에 내재하는지’(Žižek & Daly, 2004: 97)를 궁구함으로써 이에 대한 ‘래디칼한 시각(a radical perspective)’을 유물론적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지젝에 따르면, 유물론적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로 실재계로의 개입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려는 존재론적 잠재력을 통해서 지속되고 활성화된다. 이러한 바탕 아래에서 지젝이 논의하고자 하는 실재계의 윤리학과 실재계의 정치는 궁극적으로 상징계의 영역 안에서 절차와 숙고에 토대한 유형의 정치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이 주목하고 있는 레닌의 ‘실재 정치’ 역시 실질적인 투신과 (어떤 아름다운 영혼의 징후를 피하려는) “절대적인 절박함”(Žižek & Daly, 2004: 50)의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지젝은 다른 누군가가 자유주의적이거나 의사좌파적인 지식인들을 위해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잔인하고 실용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정치에나 전혀 관심이 없다. 주식시장을 기웃거리며 반자본주의자인 체하는 가까운 동료 지식인들보다는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에게 있어 후자의 전형이 바로 레닌이었다. 그가 존경하는 레닌은 문제의 사안에 실질적으로 투신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자의 모습이다. 지젝에 의하면 레닌은 분명 “우리에게 책임 없어. 상황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잖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가 아니라, “무슨 소리? 어쨌거나 우리에게 절대 책임이 있어!”의 입장에 서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군가 권좌에 있음은 뭔가 철저한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고 “미안하이. 내 잘못이네!”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Žižek & Daly, 2004: 51). 레닌과 지젝 모두 공유하는 정치적 과제는 무엇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철저히 궁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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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러한 단서는 마르크스 패러다임이 다음과 같은 사조로 대체되었다는 자신감에 의해서 대체되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 있다. 첫째, 인권, 윤리, 및 정치적 자유주의로의 칸트적이고 자유민주적인 전회(롤즈, 하버마스, 킴리카 등); 둘째, 정체성의 문화정치와 차이의 창출을 향한 포스트모던 전회(버틀러, 크리츨리, 문화적 유물론 등); 셋째, 정치적인 것을 탈구성적이고 메시아적인 용어로 재고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정치로의 탈정치적 전회(데리다, 아감벤 등); 넷째, 포스트마르크시스트 전통(라클라우와 무페, 하트와 네그리, 랑시에르 등)(Sinnerbrink, 2010).
주2) 1917년 여름 혁명적 인수를 위한 레닌의 요청에 반대했던 멘셰비키는 이 불투명한 상황을 혁명을 위한 성숙한 조건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반대했다. 단순히 그들은 혁명을 원치 않았다. 사실 혁명적 잠재력은 객관적 사회적 사실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볼 수 있으려면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할(desires)” 필요가 있다. 즉 “그 운동에 관여해야(engages oneself in the movement)” 한다는 말이다(Žižek, 2007c).
주3) 지젝은 서구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레닌주의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사상가로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들고 있다. 하지만 그는 1930년대 이후 이상적인 스탈린주의 철학자로 변모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지젝의 논문, “Georg Lukacs as the philosopher of Leninism.” Žižek(2004): 94-123을 참조하라.
주4) 흥미롭게도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경계를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을 통해서 발견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말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유물론이 출현하는 독특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버림받은 그 순간에 주체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또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지젝, 2008b: 292f).
주5) 지젝에 따르면, “어떤 이론적(그리고 윤리적, 정치적, 바디우가 드러내고자 했던 심지어 미학적인) 투쟁의 핵심적인 계기는 특수한 생활세계로부터의 보편성의 발생이다. 우리가 특수한 (우연적인) 생활세계에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토대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그래서 모든 보편성은 어떤 특수한 세계에 의해서 환원불가능하게 윤색되는(그 세계 안에서 구현되는) 공통장소는 반전되어야 한다. 즉 진정한 발견의 순간, 돌파는 적절히 보편적인 차원이 특수한 생활세계 내부로부터 폭발하여 대자적이 되고 직접적으로 그 자체(보편적인 것)로 경험될 때 발생한다. 이러한 대자적 보편성은 단순히 특수한 맥락 밖에(또는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 안에 각인되며, 동요를 일으키며, 내부로부터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특수한 것의 정체성은 그것의 특수한 양상과 보편적 양상으로 분리된다 ”(Žižek, 2008b: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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