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근 목사 그리스도인의 언어 사도행전 26:1-8
2. 이성희 목사 성도의 언어 생활 민수기 14:26-30, 에베소서 4:29:30
3. 류철량 목사 말다툼을 하지 말라 디모데전서2:14
4. 최성규 목사 생각, 말, 행동 잠언 4:23
5. 박삼우 목사 온전한 사람 야고보서 3:1-12
그리스도인의 언어
사도행전 26:1-8
박정근 목사(영안교회)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TV 인기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습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토크쇼입니다. 여러분 토크쇼가 말하는 거예요. 밤중에 나와서 말하는 건데 이게 그렇게 인기가 있어요.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약 하루에 30번씩 대화를 하고 일생에 5분의 1을 말을 하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굉장한 것이죠? 활동시간의 5분의 1을요. 남자인 경우에는 하루 2만 단어정도를 말하고 여자는 역시 여자라 1배반 정도 더 많은 3만 단어를 얘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금 있다가 예배 후에 휴게실에 가 보시면 제가 말씀드린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휴게실에 가보면 남자들은 주로 휴게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십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주로 커피를 주문해 놓고 입을 열고 있어요. 제가 예배 마치고 가끔 휴게실에 가 보는데 거기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 참새가 지저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부산 사람들은 아직 목소리를 조금 톤을 낮춰야 되겠죠?
그러나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우리의 이 말에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몇 가지 영향력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먼저 말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 10년 후의 여러분의 미래를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점쟁이에게 찾아가 볼 필요가 없습니다. 10년 후 여러분의 인생과 미래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여러분의 언어를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늘 사용하는 말 가운데 불평의 언어를 내뱉습니까? 그렇다면 10년 후 여러분의 인생은 불평스러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굉장히 행복한 언어를 사용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10년 후에 반드시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예화를 우리에게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중요했으면- 두 가지 생생한 예화를 들었겠어요?
첫 번째 예화는 재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죠? 여러분 경마장에 가보셨나요? 저는 경마장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경마에 나가는 종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TV에서 보고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키가-길이가 아니고 높이가- 크더라구요. 제 키가 180Cm인데도 저보다 한참은 더 위예요. 저 말 위에 어떻게 올라탈 수 있을까? 저는 상상도 못하게 놀랐어요. 그런데 그 말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보통 1000Kg에서 1500Kg이나 된다고 해요. 종마, 잘 달리는 말들은 그렇게 크고 무거워요. 그리고 제가 백과사전에 찾아보았는데, 그럼 기수들의 보통 몸무게는 얼마인가? 세계적인 평균 몸무게는 42Kg입니다. 45Kg이 넘으면 훌륭한 기수가 될 자격이 없어요. 왜요? 몸이 가벼워야 되니까요. 자기 몸무게의 약 50배나 나가는 이 말들이, 이 자그마하고 가냘픈 42Kg의 몸무게를 가진 기수에게 꼼짝못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말의 입에 재갈이 물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의 입에 물린 그 작은 쇠붙이 하나가 그 큰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두 번째로 든 예화는 다름 아닌 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배는 얼마나 큽니까? 어떤 것은 수만 톤에 이르는 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작은 키 하나에 방향이 마음대로 좌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깁니까? 우리의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인생의 운전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말에 따라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뿐 아니라 때로 잘못 사용되면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불태울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말 때문에 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를 불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일어난 고성 산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때, TV를 보고 굉장히 놀라기도 하면서 배운 것이 있어요. 대개 불이 한 5m정도만 길을 끊어 놓고 나무를 놓지 않으면 건너편으로 붙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 당시 TV를 보니까 고성 산불에는 이 불이 강을 건넜어요. 약 100m가 넘는 강을 가로질러 이쪽 산에서 저쪽 산으로 붙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불이 어떻게 그렇게 붙을 수 있을까 했는데, 바람이 세게 부니까 이쪽 산에 활활 타는 불이 그냥 날아가요. 날아가서 건너편 산에 딱 붙는 거예요. 강을 건넜어요. 연료의 크기의 백 수십 배를 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송이버섯 값이 두 배는 오를 거라고 하죠? 송이버섯이 문제입니까?
여러분. 앞으로 그 산림을 다 복구하자면 30여 년에서 40년 아니 50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자연이 다 파괴되었어요. 수많은 짐승이 죽고, 사람들이 죽고, 가옥이 불탔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불의 출발점은 어디였어요? 성냥개비 하나였습니다. 담배꽁초 하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러한 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말에 이런 큰 영향력이 있으니까, 과거 우리의 선배들 가운데 중세의 어떤 사람들은 아예 말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해서 침묵의 훈련을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한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한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말실수를 많이 할까봐 내 혀를 훈련하기를 원합니다"라는 입문 원서를 썼어요. 그 수도원의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1년에 딱 두 마디의 말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혀요. 1년 동안 침묵하다가 땡하고 1년이 되면 두 마디를 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3년을 훈련을 해야 됩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도를 닦았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침묵했습니다. 사람을 봐도 말하지 않았어요. 입을 꽉 다물었어요. 그리고 1년이 다 되는 날, 사람들 앞에 나와서 딱 두 마디를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이 "딱딱한 침대"라고 했어요. 수도원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던가 봐요. 더 이상의 말은 허락이 되질 않으니 그렇게 하고 끝냈습니다. 또 한해가 지났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이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차가운 밥!" 이라고 했어요. 식은 밥을 주었던 모양이죠? 굉장히 힘들었는가 봐요.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마디를 하고 내려가면 됩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두 마디를 하는데, "다 끝났다!" 라고 말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말했겠어요? 그 말을 들은 수도원장이 떡 올라오더니 "방금 내려가신 분은 실격입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너무 놀랐어요. 아니 그렇게 1년 동안 두 마디 밖에 안 했는데 말의 훈련에 실격이라는 거예요. 원장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사람은 3년 동안 불평밖에 말한 게 없습니다." 말의 훈련이, 언어의 훈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해 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용하는 이 언어에는 위대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말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때로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말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언어의 특징 몇 가지를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아침에 본문이 가르쳐 주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언어의 모습을 다 발견하고 돌아가는 우리 사랑하는 영안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 내용들을 기록한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을 쭉 읽어보시면 사도행전 21장부터 오늘 이 26장까지 사도 바울은 적어도 여섯 번에 걸쳐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체포된 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기까지 사도 바울에게는 여섯 번 자기를 변호할 기회가 주어져서 사도 바울은 변호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마지막 변호가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언어를 알기 위해서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변호한 언어의 내용을 살피는 것은 너무나도 합당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여섯 번의 변호를 통해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던가요? 우리가 이 핵심 주제를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언어의 모습이 사도 바울의 언어의 모습과 같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1. 능동적인 언어
오늘 본문이 사도 바울의 변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첫 번째 언어의 모습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언어의 모습은 다름 아닌 능동적인 언어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말이 상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에 따라 그 말이 얼마나 달라지던가요? 상관에게 하는 말과 자기 부하직원에게 하는 말이 틀립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말과 집안에서 하는 말이 틀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 따라, 대상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타임지에 난 재미있는 만화 하나를 봤습니다. 사람들의 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려진 만화였어요. 하루는 한 뚱뚱한 중년 부인이 돼지 고기 반 근을 사기 위해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그 정육점은 대단히 큰 정육점이었어요. 그래서 앞에서 손님을 맞는 점원이 있고, 고기를 썰어주는 점원이 따로 있었어요. 이 손님을 맞는 점원이 뚱뚱한 부인이 나타나자 이렇게 인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참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굉장히 뚱뚱한데도 칭찬을 해 준 거예요.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이 점원이 "뭘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돼지고기 반 근만 주세요." 그리고 미소를 싹 짓던 점원이 뒤돌아 서서 인상을 바꾸며 그 고기 써는 점원에게 다가가서, 그 여자가 뒤따라 온 줄도 모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야! 저 돼지가 지 살 반 근 달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귀퉁배기 한 쪽이 날아갔을 겁니다. 여러분, 극대화된 만화요, 평론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얘기는 우리의 세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 얼굴을 가지고 얘기하는지 모릅니다. 말이 능동적이지가 않습니다. 대상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그런가 하면 환경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내 사업이 잘 될 때 말이 다르고, 내 사업이 실패할 때 말이 틀립니다. 내 기분이 좀 좋을 때 말이 틀리고 내 기분이 나쁠 때 말이 틀립니다. 모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의 지배를 받아 수동적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기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제가 이 본문을 읽으며, 참으로 은혜를 받았던 것은 사도행전 21장부터 26장까지 사도 바울이 여섯 번이나 다른 대상자들에게 자기를 변호합니다. 그 대상자들은 판이하게 달랐어요. 어떤 때는 성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어떨 때는 민중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어떤 경우엔 산헤드린 공회 앞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 앞에서, 우리가 잘 아는 그나마 인격적인 베스도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다고 지탄받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다른 대상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어떠한지 아십니까? 그가 사용한 언어는, 그의 변호는 한결같았다고 성경은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이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대상과 환경에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말씀을 쏟아놓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사실을 3장에서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0,11절)
그 당시 이 야고보서를 받아 보던 많은 수신자들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너희들이 그 입으로 찬송을 하고, 그 입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형제를 저주하는도다. 어찌하여 샘물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모순이다" 즉, 불가능하다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한결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윗사람에게 하는 말과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 동일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과 집안에서 하는 말이 동일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와서 주님을 찬양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다 끝내고 "오늘 저녁엔 뭘 먹지?" 라는 내용으로 부인하고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이를 가는 소리를 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누구라서 이러한 실수를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저 역시 해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 것은 이제는 훈련이 된 것 같은데, 환경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 것이 아직도 절제되지 않습니다. 제가 화가 났을 때에도 한결같은 말을 해야 되는데 지난 2주전에, 우리 호진이를 야단을 치면서- 참 오랜만에 야단을 쳤는데- 제가 톤을 너무 높였어요. 그래서 광진이도 상처받고 집사람도 상처받고 저는 더 상처받았습니다. '목사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하며 내색은 안했지만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는지 몰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다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 하십시다.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우리의 말이 수동적인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능동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환경 가운데 폭풍이 불거나 잔잔하거나 내 앞 길이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에 상관없이, 우리는 성령의 샘물을 가졌으니 당연히 단물만 내어야 하며, 능동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두 번째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이 말씀의 뜻이 뭘까요? 제가 좀 설명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설명 가운데 성선설(性善說)이 맞을까요? 성악설(性惡說)이 맞을까요? 확실하지 않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악설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여러분 아이들을 키워보세요.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좋은 말보다는 주로 나쁜 말을 더 잘 배워요. 좋은 말은 아무리 가르쳐도 잘 못 외우는데 나쁜 욕설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배워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보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는 말, 집안에서의 언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들을 유심히 봅니다. 주일학교 오면 저 집안의 삶이 어떨까 생각하며 애를 지켜봐요. 그러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속일수가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나쁜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쁜 생각들을 그대로 쏟아낼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쏟아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나쁜 생각이 있어요. 문제는 그대로 낼 것이냐 해석해서 낼 것이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구라서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라서 그 마음에 미움이 없겠습니까? 누구라서 그 마음에 섭섭함이 없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섭섭함이 있고 원망이 있고 미움이 있고 마음 안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사람은 그 상처들을 올바로 해석한 다음에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있는 그 섭섭함과 미움을 그대로 쏟아내 버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 다음에 얘기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대로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 다음에 말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정의예요.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2년을 넘게 아무 죄도 없이 감옥생활을 해 왔어요. 그런데 이제 아그립바 왕이 변명해 보라고 합니다. 저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 아하, 이제야 때가 왔구나! 이놈의 자식들!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무슨 죄가 있니껴."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막 정죄하지 않았겠어요? 원망하지 않았겠어요? "당신이 왕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재판을 질질 끈다 말이요?" 수많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 뭔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의 이 여섯 번의 변명 가운데 그 어디에도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쁜 말로 사람들을 정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한 다음에, 얘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과거가 해석되지 않은 자들의 언어의 특징이 뭔지 압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과거가 도저히 해석되어 본적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내뱉는 언어의 특징은 다름 아닌 원망입니다. 잘 살펴보세요. 성경이 이것을 증명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나왔어요. 그런데 그 과거의 은혜, 과거의 출애굽하고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를 내리시던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해석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내비칠 수 있는 것은 원망밖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왜 원망합니까? 예수님을 통해 내 과거를 한 번도 해석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예수님을 통해 내 현재를 해석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내뱉는 언어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평입니다. 조금만 병이 들어도 불평합니다. 조금만 사업이 어려워도 불평합니다. 늘 입에 불평이 달려 있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게 뭔지 아세요? 예수님을 통해 내 과거를 해석하고 나면 원망이 사라져요. 오히려 제가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이런 말들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입에서 "아하!", 예수 믿는 것은 "아하!"라구요.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이 깨달아져요? 과거의 고통이 깨달아져요. "아하! 하나님이 그래서 내게 질병을 허락하셨구나! 하나님이 그래서 그 못된 상관을 나에게 주셨구나! 하나님이 그래서 그 시어머니를 통해 나를 연단 시켰구나! 아하! 하나님이 그래서 술주정뱅이 남편을 내게 주셨구나!" 아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가 해석된 자들에게는 감사만 있는 거예요. 찬양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찬송가 작사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은 뭐라고 찬송했습니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하늘 문을 향해 크게 내가 외치겠다는 거예요. 뭘 외쳐요. 예수님이 인도 하셨다구요.
우리 3절 가사를 다 같이 한번 불러볼까요?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여러분 누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 마지막날에 "나의 모든 무거운 죄짐을 다 벗어 놓고 주님 내 발걸음마다 돌아보니 당신이 인도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은, 예수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해석되고 내 과거가 해석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고백인줄 믿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언어가 이러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년이나 가둬 놓다니요. 아무 죄도 정하지 않고, 2년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앞에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변호를 보십시오. 그의 놀라운 변호가 여기에 나오는데, 몇 가지 자세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중요한 순간 자신의 결백을 알리기에도 모자랐던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결백을 위해 항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로 인해 자기의 인생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좀 읽기를 원합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 과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 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해석하고 나니까 원망이 없어졌어요. 자랑이 없어졌어요. 과거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너무나 잘난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제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나서 자신의 과거를 보니 다 내 탓인 거예요. 부모님 탓이 아니었어요. 내 잘못이었어요. 남편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얘기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올바른 해석을 하고 보니까 내가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13절부터 18절까지 예수님 만난 현재를 얘기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을 아그립바 왕에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이렇게 해석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인생이 해석되어져야 돼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과거, 내 마음에 과거에 받던 서러움, 손해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쏟아놓는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된 언어라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언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언어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고생을 했고,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서러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에게 그대로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된 다음에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언어생활을 할 때, 우리의 가정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치료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저는 얼마전 한 성도의 간증을 들었어요. 누구라고 제가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굉장한 갈등을 겪었던 사람이에요. 이유가 뭔지는 잘 몰라요. 그저 너무너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똑같이 교회를 다니고,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머니와 등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쪽 교회 나가고, 본인은 우리 교회를 나오고 있었어요. 갈라져서 교회를 나갔어요. 이제 그 어머니가 병들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교회 나와서 2, 3년 지나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신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어머니로 인해서 자기가 고생한 줄 알았고, 어머니로 인해서 좀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못간 줄 알았던 그 원망스러웠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상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마음에 풀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도 울고 자신도 울고...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석된 언어를 내뱉는 자의 모습입니다. 용서가 있어야 돼요. 용서를 구해야 돼요. 괜찮다고 용납할 줄 알아야 돼요. 긍정적인 말이 그 입에서 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능동적인 언어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여야 합니다.
3. 선교적인 언어
세 번째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선교적인 언어입니다. 29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얘기해 주고, 부활까지 다 얘기해 버리고 나자, 그 당시 유대 나라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 베스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을 보세요.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미친 걸로 치부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때 사도 바울이 눈을 돌려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베스도는 몰라서 그렇다 치고,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제 말을 곧이 들어 주십시오." 라고 얘기하자 아그립바 왕이 대답한 말이 뭡니까? 28절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때 사도 바울이 한 말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내가 오늘 이 결박한 것 외에는 오늘 나를 둘러 싼 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입니다. 여러분, 이 여섯 번의 사도 바울의 변호를 살펴보십시오. 그는 이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증언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오해를 받아도 그것을 풀려고 애를 씁니다. 전화통을 붙잡고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자신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수많은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해 보셨나요?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루에 2만 단어씩 총 14만 단어 가운데,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과연 몇 단어나 되시나요?
저는 어느 날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사용한 이 영향력 있는 언어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공상만 하고 돈을 받는 과학자들이 있어요. 미국에선 놀리면서 공상과학자라고 하죠. 그런데 봉급이 굉장히 많아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은 과학자는 과학잔데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상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그냥 책으로 써서 주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공상과학자들의 공상이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졌어요.
여러분, 수 백년 전에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처음에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새를 흉내내 가지고 여기다가(어깨) 날개를 달아서 언덕 위에 가서 이렇게 날려고 하다가 그대로 떨어져서 면상을 다 갈았어요. 그런데 결국 우리는 날았어요.
요사이 과학자들이 뭘 공상하는지 아세요? 사람들이 평생동안 했던 말을 다 녹음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요. 왜 가능한지 아세요? 여러분, 우리가 라디오 방송을 어떻게 들어요. 극동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전파로 바꾸어요. 그러면 그 말이 전파가 되어서 공중을 휘이~ 날아다니다가 수신기를 98.1Mhz에 딱 맞추면 그 98.1에 맞는 주파수는 라디오를 통해서 싹 끌려와요. 그래서 제 설교가 나가는 것이에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수십 억의 인구가 있지만, 사람의 목소리만큼 다양한 게 없다고 해요. 그래서 범죄수사에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목소리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는 것이에요. 어떻게 잡아내는가? 한 사람도 똑같은 주파수를 가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주파수가 다 달라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 이 말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은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공중에 전파로 되어서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수신기를 개발하는 거예요. 제 목소리의 주파수에 맞는 수신기를 개발을 하기만 하면, 이 공중에 남아 있던 모든 말들이 그 녹음기로 쏴악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태어나서 응아하고 울 때부터 마지막 죽으면서 뱉은 말까지 모두다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훗날 그 어느 날 우리가 일생동안 내뱉은 언어가 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고 하면, 과연 그 중에서 "주님! 내가 당신의 복음을 위해 이런 말들을 행했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과감하게 내어놓을 떳떳하게 내어놓을 언어가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말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한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증인이 되라!"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다름 아닌 '증인이 되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삶으로 전도하는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만, 삶으로 전도한다고 하는 것이 입으로 전도하는 것을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도 전도해야 합니다.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약사도 바울의 말을 여기에 다 진열해 놓는다고 하면 아무래도 80% 이상이 선교와 전도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심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의 말은 능동적인 언어이었던가?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석되어진 언어였는가? 나의 말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언어인가? 이 질문이 우리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그 옛날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런 기도를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주여!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사도 바울과 같이 사도행전 26장에 나타난 이 바울의 언어와 같이 우리의 말을 바꾸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0년 8월 6일
성도의 언어 생활
민수기 14:26-30, 에베소서 4:29:30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성서주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을 중심하고, 성경을 높이하고, 성경을 전하고, 성경을 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입은 마음의 하수구이고 말은 배설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말은 배설물처럼 더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혀는 작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동시에 말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얻게 하고, 살게 합니다.
야고보서 3장 5절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성도의 언어생활은 성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1.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라고 합니다. 더러운 말이 어떤 말입니니까? 비판하고 욕하여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헛소문입니다. 영성적이 아닌 말입니다. 이런 말은 덕이 되지 못하므로 입밖에 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큰 사람은 사상 얘기를 하고, 보통사람은 시사 얘기를 하고, 작은 사람은 남의 얘기를 합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입이 거칠어져 욕설을 많이 합니다.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에 대하여 엄격합니다.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헛소문을 잘 퍼트립니다. 성경은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 것을 권합니다.
2.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라고 합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화평케 하는 말입니다. 위로하는 말입니다. 분위기를 좋게 하는 말입니다.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가장 유럭한 약입니다. 얼마든지 사람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고 합니다. 긍정적인 말은 용기를 더하는 영양소입니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우리의 공동체에 덕을 세웁니다.
3. 듣는 자들에게 은혜가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율법주의의 치료법이 될 수 있는 "은혜"라고 불리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말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의 말은 은혜가 됩니다. 혀는 우리의 영적 온도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혀는 우리의 영적 온도를 조절합니다. 은혜가 되는 말을 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말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말을 원하십니다. 서로가 은혜의 말을 전달할 때에 서로의 말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의 말은 은혜의 공동체의 얼굴입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12월 9일
말다툼을 하지 말라
디모데전서2:14
류철량 목사(부천동광교회)
한 몸에 입이 둘인 벌레가 있었습니다. 서로 언쟁을 하다가 나중에는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오른쪽 입이 왼쪽에게 졌습니다. 물어뜯어 많은 피를 흘려 결국 죽였습니다.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입은 둘이었지만 몸은 하나였으니까요. 망하려면 다투면 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지 자기들끼리 편갈라 싸우면 망할 것이다. 어느 도시나 가정도 나뉘면 제대로 서지 못한다”(마12:25)고 하셨습니다. 국가나 가정이나 그 사회를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방법은 단합입니다. 그 사회를 파멸시키는 방법은 불화요 다툼입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성도들을 사도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교훈한 말입니다. 가르칠 때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왜냐하면 말다툼은 자신에게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말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일까?
첫째, 함부로 하는 말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 함부로 말하면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분별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입니다. 버릇없이 입을 놀려대는 것입니다. 조심성이 없습니다. 그 말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무렇게나 해버린 말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라는 말씀은 모든 말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주의 시키라”는 뜻입니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는 소리, 다투는 소리도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길을 가다가 티격태격했습니다. 누가 더 크냐는 것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언쟁하는 것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너희가 노중에 말한 것이 무엇이냐? 고 꾸짖으셨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급한 마음으로 조급하게 하는 말입니다. 과속하는 자동차는 사고의 위험이 커집니다. 빠른 말이 문제가 됩니다.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 체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씁니다. 급하게 하는 일은 실수합니다. 급하게 한 말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언어는 도시이다. 그 도시를 건설하는데 만민이 말로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언어가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물결치는 해변의 조약돌처럼 인간의 언어도 다듬어져야 합니다. 생각하고 다듬어서 내 보내지 않은 말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 중에 또 하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보면 실수가 많아지고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습니다(전10:14). 예수님은 기도할 때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생각 없이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의미 없는 공허한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탈무드에 침묵이 만병의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뛰어난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해 지려면 입을 다무는 것이요, 말다툼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면 목숨을 지키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잠 13:3)
둘째, 괴롭히는 말입니다.
듣는 입장에서 짜증스럽고 괴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들으시고 괴로워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말2:17) 사람들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좋게 보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괴로우신 것입니다.
괴롭히는 말은 잔소리입니다. 여자의 잔소리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에 비유됩니다. 잔소리가 심한 인간을 보고 개가 벼룩 씹듯 한다고 말합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잠19:13)이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지붕들은 경사가 편평하게 되어있어 장마철에는 비가 새는 경우가 생깁니다. 잔소리 심한 아내는 새는 지붕에서 계속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가지 긁는 아내와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다락 한 구석에서 사는 편이 낫습니다(잠21:9).
또 빈정거리는 말이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사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 농담도 못하냐?고 반문합니다. 아내가 곱게 화장을 한 것을 보고 특유의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한다는 소리가 “입술에 떡칠 했구먼, 누구를 꼬시려고 그렇게 야하게 했나”라고 빈정댑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9) 괴롭힌다는 것은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편하지 못하게 하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말버릇 고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잘못된 말버릇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빈정거려서 사람을 괴롭히는 언어 습관을 고치려면 어떻게 할까요? 먼저, 자신의 잘못된 언어 습관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언어 습관은 유전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칠 수 있다는 확신과 결심이 필요합니다. 셋째, 계획을 세워야합니다. 오랜 습관을 고치기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계획해야합니다. 넷째,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의 잘못된 언어 습관에 대해서 비난보다는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진실한 친구의 도움말을 받아야합니다. 다섯째,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면에서든지 잘못된 언어 습관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무한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실천해 오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 실패했어도 포기하지 말고 또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쌓아야 합니다.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은 빛은 항상 어두운데서 나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셋째, 폭언이 문제입니다.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폭언이란 난폭하게 칼로 찌르는 듯이 하는 말입니다. 폭행을 당하면 멍이 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낫습니다. 언어의 폭력은 오래가고 깊이 박힙니다. 언어 폭력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당신 어머니를 닮았소. 장모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툭하면 눈물을 보이듯이 당신도 똑같아.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A~ C." 공격받은 아내가 참을 수 있나요? 아내의 반격이 나옵니다. “그래요 나는 우리 엄마를 닮았어요. 당신은 당신 아버지를 닮았다구요. 당신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를 발가락 때만도 못하게 여겼대요. 당신도 똑같이 나를 그렇게 무시하잖아요?” 약점을 공격받고서는 반드시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비비기까지 합니다.
공격과 방어가 거듭되다보면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고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당신 그렇게 뚱뚱하고도 창피하지도 않아?” 여기에 맛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 보세요. “그래 누구나 자신의 잘못은 모른다니까? 다른 집 남자처럼 돈 좀 벌어다 줘봐! 나도 헬스도 다니고 다이어트 할 수 있다고, 다른 집 여자들 몸 관리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줄이나 알아! 불쌍한 ‘분이’ 아이구 내 팔자야 내 어쩌다 저런 인간 만나서 이 꼴이 되었는지... 원통해서 못살겠네...”
“이제 정말 막가자는 거야” 하며 손을 들었습니다. “그 주먹이 무서웠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않았다! 어디 한번 때려 보시지! 때려 보라니까?” 그 말 듣고도 참을 남자 있어요? 코앞에 바싹다가 가서 고개 쳐들고 때려 보라고 하면 참지 못합니다. 언쟁이 전쟁이 되는 거지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 가정 폭력이 남자 탓도 있지만 어떤 때는 여자가 맞을 짓을 한다더라구요. 여러분 모두 유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촌 누님이 유순이 입니다. 미련한자의 입술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언어가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은 왜 그럴까? 어릴 적부터 부모의 언어 폭력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언어 폭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예민한 사람은 조금만 화가 나도 폭언을 합니다. 지긋지긋하게 언어 폭력에 시달려 온 사람은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면서 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허름한 술집에서 앵무새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욕을 많이 들어서인지 앵무새가 욕쟁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욕하고 헐뜯다가 경찰관이 지나가니까 “경찰관은 모두 도둑놈들”이라고 했습니다. 경찰관이 이런 놈은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면서, 후려쳤습니다. 앵무새는 매를 맞고 죽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앵무새가 억울하다. 벌을 받아야 할 자는 술집 주인인데, 앵무새가 주인의 말을 따라서 했을 뿐인데”라고 했습니다.
유리병 세 개에 각각 밥을 담고 한 병을 향해서 “고맙다”라고 했고, 또 하나에게 “망할놈”이라고 했습니다. 나머지 한 병은 무시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은 밥은 발효하여 좋은 향기를 내고, 망할 놈이란 말을 들은 밥은 썩어서 냄새가 나고, 무시당한 밥은 악취가 너무 시해 코를 댈 수 없었답니다. 폭언을 들으면 망가집니다.
가장 건강한 대화는 어떤 것일까요? “I'm OK. You're OK”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둘 다 옳다가 되어야 합니다. 대화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둘째, 너는 옳고 나는 틀렸다. 셋째, 우리 둘 다 틀렸다. 넷째, 우리 둘 다 옳다 입니다. 공통 분모를 만들려면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게 하십시오(고전 1:10). 말다툼을 일으키는 원흉은 함부로 하는 말입니다. 듣는 이를 괴롭게 하는 말입니다. 폭언, 언어 폭력입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보다 고상해지기 바랍니다. 말다툼 없는 품위 있는 삶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8월 17일
생각, 말, 행동
잠언 4:23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생각, 말, 행동",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
"말."
"행동."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좋은 말과 나쁜 말,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의 차이에 따라서 인생이 성공이냐, 실패냐가 좌우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가 결정됩니다. 복을 받을 사람이냐,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냐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4장 23절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생각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에서 좋은 말이 나오며, 좋은 말에서 좋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가 되어 잘 이루어질 때,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잘 이루어질 때,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수 있으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넘치게 축복을 주시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받는 우리가 될까,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좋은 생각을 많이 하자.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좋은 생각을 많이 하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 좋은 생각을 하면 마음에 평안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늘 평안함이 있는 사람은, 날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은 생각은 우리 몸에 활력소가 됩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몸에 활력소가 있어서 병이 들어왔다 가도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막 용솟음 치는 거예요. 좌절하지 않아요. 낙심하지 않아요. 뒤로 물러가지 않아요.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서 막 몸에 힘이 생겨요. 그래서 마음에 결단을 하고, 또 말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고 무엇이든지 힘있게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면, 안 되는 것들도 되게 되고, 없는 것들도 있게 되고, 놀라운, 하나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개 좋은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을 즐기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의 이런 습성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9절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 그것에서 쾌락과 기쁨을 맛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로마서 8장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영이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것을 봐야 합니다. 나쁜 것에 눈을 빼앗기지 말고 좋은 자연, 좋으신 하나님 말씀의 말씀을 자주 읽으며, 자주 보아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더 많이 눈으로 보면서 읽어야 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 생각을 더 많이 해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을 더 많이 해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님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 이 무엇입니까? 요즘 TV가 텔레비전이 우리의 생각을 나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이 19세가 되기 전에 자그마치 20만 건의 폭력물을 본다는 것입니다. 또 5만 건의 살인을 TV를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폭력물을 보고, 많은 살인 사건을 보았을 때, 그들 마음속에 좋은 생각이 들어가기가 전혀 만무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렇게 살면 안돼요. 할 수만 있는 대로 좋은 책을 많이 보고, 이왕 이면 좋은 비디오를 보고, 좋은 미담의 역사서를 많이 읽고, 좋은 미담의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살아가면, 분명히 좋은 사람이 되어서 이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맑고 밝고 환한 좋은 사회로 만들게 될 줄 믿습니다.
또 좋은 생각을 의식적으로 심는 삶도 가져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원수 마귀는 우리에게 나쁜 생각을 자꾸 심어주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다 뽑아 버리고, 어찌하든지 내 의지적으로라도 '나는 정말로 내 마음에 좋은 것 심어야지, 내가 좋은 생각을 해야지!' 하고 살아가면 누가 도와주시느냐,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악한 방향으로 쉽게 흘러가기 때문에 이것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는 노력이 성도에게는 꼭 필요하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생각을 심어야 할까요? 빌립보서 4장 8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유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것은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책임'지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했으면 말하고 말한 것에 대한 책임, 또 자기 행동한 것에 대한 책임, 이런 책임이 있을 때, 이것이 중요한 민주주의가 되고, 이것이 정말로 살기 좋은 사회이고, 맑고 밝고 환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너무나 많은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은 기성세대들이 안타깝게도 자유는 말을 많이 해요.
"나는 생각의 자유다",
"나는 말의 자유다",
"나는 행동의 자 유다"
그래요. 좋아요. 생각의 자유, 말의 자유, 행동의 자유, 좋아요. 그러나 자기가 한 말은, 자기가 한 행동은 자지가 책임을 져야 이것이 민주주의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자기가 말한 것 책임지지 아니하고, 자기가 행동한 것 책임지지 아니하면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지도자가 전혀 될 수가 없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수록 좋은 생각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하기 전에는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5장 28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인 성(聖)자 한문을 보면, 귀 이 (耳) 변에 입 구(口), 그 다음에 임(壬)자를 썼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듣기는 많이 듣고, 생각도 많이 한 후에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성인 군자가 된다, 그 말입니다. 듣는 것 교만해서 안 들으려고 하고,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말만 자꾸 뱉어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있고, 지위가 있고, 권세가 있어도, 그런 사람들은 존경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인 군자가 될 수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한 일들을 깊이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같이 위대하신 분도 우리를 깊이 생각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실 때도 그냥 기분 나시는 대로 뚝뚝 잘라서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도 깊이 생각하신다는 거예요. 보세요. 시편 40편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어떻게 하신다고요?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그 뿐이 아닙니다. 시편 144편 3절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생각하고 계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시고
"그래, 이만하면 내가 사랑을 베풀 때가 되었어", 생각해보시고
"이만하면 내가 응답해 줄 때가 되었어", 생각해보시고
"이만하면 내가 치료 해주고 복 주실 때가 되었어"
하고 결단하신 후에 우리에게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영혼이 잘 되게 해주시고, 범사가 형통하게 해주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생각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좋은 말을 많이 하자.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자."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부요하기를 원하십니까? 한 사람도 여러분 스스로가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한 사람도 여러분 스스로 가 "나는 가난한 게 좋아", 가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려면, 우리가 부요하려면, 우리말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행복을 많이 말하면 행복이 오고, 불행 을 많이 말하면 불행이 오는 거예요. 부요를 많이 말하면 부요가 오고, 가난을 많이 말하면 가난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삶 속에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려면 우리는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 가운데 가장 잘못된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실수가 많은데 그 중에 제일 무서운 실수가 뭐냐, 제일 큰 실수가 뭐냐, 말의 실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요, 온전한 사람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나쁜 말을 쉽게 내뱉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하는 말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잠언서 12장 18절 말씀입니다.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어떤 사람이 쓴 글에 보니까, 전 세계에서 전쟁으로 말미암아 총칼로 죽은 사람보다 세치도 안 되는 혀의 말로 상처받아서 마음이 상해서 병에 걸려서 죽은 사람이, 전쟁이 나서 총칼로 죽은 사람보다 수 십 배, 수 백 배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이 불과 세 치도 안 되는 혀가 핵무기보다 무서운 거예요. 신무기보다 무서운 겁니다. 혀 때문 에 마음 상하고, 혀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혀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혀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냐, 그 말입니다.
반대로 좋은 말은 어떤 말입니까? 위로하는 말, 평화를 주는 말, 기쁨을 주는 말, 은혜를 가져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말은 미움과 시기와 절망과 죽음을 가져오게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말을 하려면 좋은 말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부모를 통해서 좋은 말을 듣고, 스승을 통해서 좋은 말을 듣고, 형제를 통해서 좋은 말을 듣고, 그 뿐이 아닙니다.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통해서 좋은 말을 듣고, 성경을 더 많이 읽음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말을 듣는 우리가 되어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또 부모의 말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무시해도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경청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감사함으로 그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양약이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해마다 어린이 주간이 되면, 참 저는 듣기 싫은 소리를 가끔 들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내가 별로 못 들은 것 같애. 1999년은 안 그랬던 것 같아요. 해마다 어린이 주일이 되면 너도나도 방송국에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앞 다투어서 학교를 찾아가요. 길을 가는 학생들에게 물어요.
"너, 무엇이 제일 싫으니?"
그래요. 어린이 주간에. 그러면 그래요.
"우리 엄마 가요 공부하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학원 가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나는 그런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너는 무엇이 제일 좋으니?"
"무슨 말이 제일 좋으니?"
그렇게 물으면 어떠냐, 그 말입니다.
"무엇이 제일 싫으니?"
그렇게 묻는 언론의 기자들이나, 또 그렇게 대답하는 어린아이들이나 다 답답해요. 여러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한다고요. 그것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부모의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소리인 줄 믿습니다. 세상에 자기가 벌어서 공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벌어서 학원 가라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땀 흘리고 애쓰고 수고해서 전체 수입의 40%라는 많은 돈을 자녀의 교육비로 쓴다고 그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까운 돈을 주면서
"학원 가라",
"공부하라",
"학교 가라"
그러면 '나를 위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하시는구나!' 그러면서 고맙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이게 잔소리로 들려지는 거예요.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만약에 그 부모가, 그렇게 잔소리하는 부모 가 없다면,
그렇게 잔소리하는 선생님이 없다면 어떻게 교육을 받으며, 어떻게 살고, 우리가 지식을 얻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겠냐,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대로
"무엇이 좋으냐? 어린이날이 되어서 무엇이 좋으냐? 말 좀 해봐라."
"네, 좋은 것이 있지요. 우리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피로 날 낳으셨잖아요, 우리 아버지와 어 머니가 힘들게 벌어서 우리를 학교에 보내 주시잖아요. 그것만도 아닙니다. 학원까지 가라고 말씀합니다. 학원비가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 과외비가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 우리들 잘 살고, 교육을 잘 받아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는 지 몰라요. 너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좋아요."
아멘. 왜 그런 사회를 못 만드냐, 그 말입니다. 왜 그렇게 대답을 못 하냐, 그 말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왜 유도하지 못하냐,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돼요.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도록 말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묵상하기 때문에, 입을 열면
"하나님 아버지."
입을 열면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
입을 열면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
입을 열면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진실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구하는 이가 받고, 찾는 이가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IMF 경제 체 제에서 어렵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66권속에서 축복의 말씀을 가득가득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우리가 받아들인 사람마다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입에서 하나님 말씀이 막 나와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치료의 힘이 있습니다. 축복의 힘이 있습니다. 저주가 물러가고, 원수 마귀가 한 길로 들어왔지만, 일곱 길로 떠나게 될 줄 믿습니다.
나쁜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 살면서 나쁜 말이 안 들려질 수가 없습니다. 유혹이 말이 안 들려질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말이 안 들려 질 수가 없습니다. 다 들려져요. 그럴 때는 한 귀는 듣고 쏙 뽑혀 나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들려 준 사람 앞에서 못할지라도 돌아서면 탁탁 털어
"나는 이 말과 관계가 없다. 유혹의 말아, 핍박의 말아, 이 부정적인 말들아, 다 물러가라!"
쫓아버리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어떤 것이 좋은 말일 까요?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며, 경 우에 맞는 말, 이것이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8장 7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어떤 말이 좋은 말입니까?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말, 중립적인 말,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5장 1절에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또 어떤 말이 좋은 말입니까? 남을 위로해주고,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6장 24절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믿음이 담긴 말, 여기에는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귀신도, 질병도, 저주도 말로서 물리칠 수 있는 것,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긍정적으로 말할 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을 창조적으로 말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힘에 때라서 행복과 불행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불행을 말하면 불행이 오고, 행복을 말하면 행복이 옵니다. 이 우리의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몰라요.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괴롭히는 원수 마귀가 다 한 길로 왔을지라도 일곱 길로 쫓겨나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또 어떤 말이 좋은 말입니까?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말. 잠언서 17장 9절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어떤 말이 좋은 말입니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말. 에베소서 5장 4절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언제나 생각한 뒤에 말하는 습관도 가져야 합니다. 부부싸움을 해결하는 비결 중 하나가 뭐냐고요? 그런 말이 있어요. '3분만 참아라! 부부 싸움은 없다!' 3분만 참아라. 그렇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한 것의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로 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런 말을 합니다. 전도사 10장 20절입니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처럼 오직 바르고 정직한 말을 하고, 이해하고 깨달은 말을 하며, 좋은 말을 해야 될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37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셋째, 좋은 행동을 많이 하자.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좋은 행동을 많이 하자."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과 좋은 말은 반드시 좋은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사람의 삶이요, 인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느냐,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행동은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나쁜 행동은 파괴와 분열과 멸망을 가져옵니다. 좋은 행동은 나도 좋고 남도 좋지만, 나쁜 행동은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한다, 그 말입니다.
생각과 말이 행동으로 입증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좋은 생각을 했다면, 좋은 말을 했다면 분명히 그 행동으로 그 좋은 것이 증거 되고, 입증되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고 말만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경 말씀을 듣고 실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마 7:26-27), 그랬습니다. 우리는 좋은 행동과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경건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 우리 사회의 커다란 단점은 무엇입니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있는데, 옳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사랑을 말해야 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구제하고 나누어주어야 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몸으로 참여하고 봉사해야 그것이 교회를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그대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십니다. 시편 150편 2절을 보니까,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말입니다. 아담의 나쁜 행동이 전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온 것처럼, 또 예수님의 좋은 행동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 온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이제 아담 따라 가지 말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을 따라 갈 때, 나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사회도 잘 되고, 우리 모두가 다 좋게 될 줄 믿습니다.
최근에, 지난 10월 30일날 인천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꽃다운 55명이 죽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잘못 행동한 사람들로 인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독 관청, 경찰, 건물주인, 그 업주, 다 책임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학교도 잘못 가르친 책임, 교회도 잘못 가르친 책임, 더더군다나 부모도 잘못 가르친 책임, 본인들도 분별 없이 행동한 책임,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사무엘상 2장 3절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 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좋은 행동 을 해야 됩니다.
넷째, 좋은 사람이 되자.
따라 하시겠습니다.
"좋은 사람 이 되자!"
그렇습니다.
생각이 좋고, 말이 좋고, 행동이 좋은 사람, 인격자입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복 받을 사람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 누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 누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힘으로 되지 아니 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그랬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성령세례, 성령충만 받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서 성령세례 받고 성령 충만함 받으면,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고, 열매를 맺고 살아갈 수 가 있습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1999년 11월 7일
온전한 사람
야고보서 3:1-12
박삼우 목사(잠실중앙교회)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이 궁중의 광대 둘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세상에 나가 찾아 헤매던 이 두 익살꾼이 마침내 답이 들은 상자 하나씩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광대가 먼저 왕에게 나아가 절을 한 후 상자를 내놓았는데 열어보니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혀라는 뜻입니다. 다른 광대도 상자를 내어놓았는데, 풀어 보니 거기도 똑같이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복 중의 하나입니다. 말, 즉 언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습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이 언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언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 하나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글을 씁니다만 글이 무엇입니까? 문자란 언어를 기호로 형상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문자가 있어서 사람은 모든 지식과 사상을 기록했고 그것을 연구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언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말이 없었다면 글도 있을 수가 없었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언어가 없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 신앙생활만 해도 성경도 없습니다. 설교도 없고 기도도 없고 찬송도 없습니다. 아예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언어가 없다면 사람은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언어야말로 하나님 인생에게 주신 최대의 복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언어도 함께 타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답고 귀한 것일수록 부패하면 더 더러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가 그렇습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복이 죄로 타락한 다음,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서 상처를 받습니까? 왜 문제가 생겨납니다. 말 때문입니다. 말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 거듭남의 역사는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듭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우리의 언어 생활입니다. 이제 우리는 언어 생활에서 거듭남의 역사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책임도 더 무거움을 지적합니다.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누구입니까?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책임이 더 크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록 책임도 더 큽니다. 그러니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 말에 내가 도장을 찍으십시오. 보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온전하냐가 얼마나 말에 온전하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6 장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는 환상이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웠을 때 이사야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고 두려워 떱니다. 그 때 천사가 화저로 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이사야에게 날아와 이사야의 입에 되며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사야도 자신의 죄인 됨을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고, 천사도 깨끗케 됨의 표시로 숯을 입에 되었습니다. 죄의 대표도 입술이요 깨끗케 됨의 대표도 입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장 많이 짓는 죄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말입니다. 남자는 하루 평균 20,000 마디 여자는 평균 30,000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말에 실수하게 되고 말로 죄를 짓게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적질하는 것 아니고 강도질하는 것 아닙니다. 말로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말에 진실하고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진정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은 적은 것이지만 그 위력은 무엇보다 크고 무섭습니다. 본문도 말은 말의 재갈과 같고 배의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의 재갈을 아십니까? 적은 것이지만 그것 잡으면 말이 꼼짝 못합니다. 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배의 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는 적은 것이지만 그 키를 통해 큰배를 움직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혹은 한 사람의 생애가 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언어를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너무 자주 입에 올립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심성 자체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거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 시조에서부터 오늘날의 시와 노래에까지 태양을 노래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달을 노래했습니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취니" 이 정도로라도 해를 노래한 적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달만 노래했습니다. 아이들 동요 중에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만히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분명히 대낮의 하늘입니다. 거기 붉게 타는 태양이 있는데 저자는 애써 태양을 외면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달을 찾고 있습니다. 그만큼 달을 사랑했습니다. 달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달은 물론 낭만적이요,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달은 태양만큼 밝지 못합니다.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질 못합니다. 어둡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런 민족성을 가지다 보니 하는 말도 보면 부정적인 말이 너무 많습니다. 쉽게 자녀들에게 하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안 일어나느냐, 아침 안 먹느냐, 학교 안 가느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지만 전부 부정입니다. 긍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을 부정으로 합니다. 또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자주 합니까? 슬퍼 죽겠다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기뻐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언론은 또 얼마나 더 부정적입니까? 저는 제 기억에 제가 신문을 읽고 난 후 신문이 지금이 난세가 아니라고, 위기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큰 일 났다고 말해왔습니다.
지난 날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심성도 언어도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창조적인 말,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정말 망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말의 악한 영향력을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곳이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해서 가을과 봄에 각각 한 달 가량 우기가 있습니다. 이 때는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온 들녘에 풀과 엉겅퀴 그리고 가시나무 같은 것이 자랍니다. 그러나 비가 거치면 곧 메마르기 시작하는데 원래가 건조한 곳이라 바삭 말라 버립니다. 이 때 성냥 한 개피만 갖다 부치면 온 들녘이 불바다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도 산불을 경험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건조기에는 담배불 하나가 온 산을 태워 버립니다.
말 한마디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너는 쓸모 없는 놈이다" 하는 한 마디가 그 아이의 한 평생을 불사를 수 있습니다. 치유 목회로 유명한 정태기 목사님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 우연히 여학생들이 자기를 두고 못 생겼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정말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만 그의 가슴에 딱 못으로 박혀버립니다. 그 후 약 20년을 자신은 못 생겼다는 무서운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그는 그 20년의 세월이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 우리 가운데도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형제의 가슴에 한평생 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언어생활인데 이 언어 생활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말씀합니다. 모든 짐승이 다 길들여지는데 혀는 길들여지지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 길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커스 같은 것을 보면 호랑이 사자 코끼리 곰 뭐 동물들이 다 길들려 집니다. 온갖 동물이 다 길들여집니다.
그런데 혀는 길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잘 나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잘못된 말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던 입술로 운전대를 잡으면 다른 사람을 향해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온천에서는 찬물이 안 나옵니다. 찬물 나오는 샘에서는 뜨거운 물 나오지 않습니다. 생수 나오는 곳에서 물통 갖다 놓고 십 년을 기다려보세요. 더운 물 올라오지 않습니다. 나무도 무화과나무는 평생 무화과 열매만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만 맺습니다. 절대로 다른 열매 맺지 않습니다. 그런데 혀만은 제멋대로 입니다. 이 말 했다, 저 말 합니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이 못되어 그는 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한 혀로 두 말을 합니다. 베드로만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언어생활에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주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경건한 언어 생활의 첫 번째 비결은 항상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어울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계속 귀에 들어오는 말이 내 입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듣고 접하는 말을 나도 하게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거창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기사가 흘러간 유행가를 크게 틀었습니다. 소위 뽕짝을 튼 것입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노래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더욱이 지금은 집회를 인도하러 가고 있습니다. 좀 경건하게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하는데 큰 소리로 유행가를 틀어놓으니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분은 나빴지만 꾹 참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혼자 숙소에 들어와 잠깐 짐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 노래를 흥얼거리기를 잘 합니다. 주로 찬송가나 복음송을 흥얼거립니다. 그 때도 옷을 정리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에 제 자신이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몇 십 분 후면 집회를 인도할 사람이 흥얼거리는 노래는 놀랍게도 버스에서 들었던 뽕짝이었습니다.
듣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듣는 대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언어를 늘 접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경건한 말을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있으니 입만 열면 그런 언어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정확하고 유익한 말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성경적으로 거짓말은 큰 죄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거짓말 하다가 죽었습니다. 정확한 말, 진실한 말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아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남의 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오전 예배를 마치고 집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여 전도사님이 여 집사님 한 분이 교회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놀라서 교회에 달려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교인들에게 물었더니 아무도 모릅니다. 다들 놀라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사무원이 말하기를 교회계단에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버스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했는데 나중에 알고 버스에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집에서 교회 가려고 나오다가 넘어져 입원을 했습니다. 말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내용이 영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제가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넘어져 다친 이야기라 다행이지 만약 다른 사람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변질되었겠는가 말입니다.
말이란 돌아다니다 보면 변질되고 부풀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남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좋지 못한 말은 듣고 끝내버려야 합니다. 말이 돌아다니다가 내게 와서 끝나 버리는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말이라도 유익이 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한 말이라고 다 하는 것 아닙니다. 이 말이 과연 함으로 유익이 있겠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 있습니다. 목사님 누구 누가가 목사님 더러 이렇다고 말했어요. 누가 나를 비난했다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비난한 사람 보다 고자질하는 사람이 더 싫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모르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제가 성자가 아닙니다. 알고 나면 극복하는데 힘이 듭니다. 그런 말을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숙한 언어생활은 정확하지 않는 말과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좋은 말, 복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찬양의 말, 남을 향해서는 축복과 칭찬의 말,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말, 이 얼마나 복된 말들입니까? 이런 말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감사의 말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항상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남을 향해 칭찬과 축복의 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인색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 축복하는 것, 이보다 복된 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보면 예수님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할 때 어디든지 가거든 그 집에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집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빈 복이 거기 임할 것이요,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복 받기 위해서도 남에게 복을 많이 빌어야 합니다. 그것도 복 받지 못할만한 사람들에 복을 만이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이 다 내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래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남에게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보다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복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우리의 입술로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입술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 하나님께는 감사하고, 이웃에게는 칭찬하며 복을 빌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이런 말들은, 아무리 많이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이런 좋은 말들이 가정을 복되고 만들고 교회를 은혜롭게 만들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듭니다.
다시 한번 명심하십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모습은 경건한 언어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언어생활이 거듭나 우리의 언어가 성숙해야겠습니다. 늘 경건생활에 힘씀으로 경건한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정확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혀를 길들여 무의식 중에서라도 복된 말, 유익한 말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주신 이 고귀한 입술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