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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에는 예수가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17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흔히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불리는, 이 17년 동안 예수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워왔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을 뿐이다. 예수가 태어날 때 별을 띄우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오는 등 요란한데 비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 나이 13세면 결혼하는 나이라고 하는데 예수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성경은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 김기창 화백의 '요한에게 세례받는 예수" - 한국적인 화풍으로 그린 그림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으며 불교의 고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원본은 서기 2세기 이전의 팔리어로 기록되어 랏사[신들의 장소]근처의 한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엘리자베스.C.프로펫트의『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민희식의『법화경과 신약성서』등의 책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불문학 박사인 민희식 한양대 교수가 신문지상(주간중앙 1986. 10. 26)에 ‘예수는 한때 불교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보면 그 내용을 대충 알 수 있다. 민희식 교수는 84년 펜번역 문학상, 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은 바 있는 석학으로서 특정 종교의 신자(信者)가 아닌 학자로서 발표한 내용인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秘藏)된 채 공개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 입수해 귀국한 것으로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예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민교수는 “불교측 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 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 기독교측 무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도마)복음서』 등이 지나치게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장자궁자(長子窮子)와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 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 유래 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초상 - 부루나 존자가 생존의 석가모니를 그린 그림이다.석가모니는 벼농사를 짓던 동이족 출신이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 쪽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87~1m90cm정도로 짐작되는 형상이다.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동쪽에서 이동해 온 고리(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기원 =북경근처인 중국 난하지역에 위치)족이라면 당연히 단군조선의 후예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석가의 출생 및 사망 시기는 확실치 않다. 20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기원전 410년에서 400년 무렵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의 뜻인 메시아의 어원은 불교에서 말세중생을 구제하러 올 미래불인 미륵(마하트리아 혹은 메테아)에서 유래했다는 일화를 비롯,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의 이름은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정반왕(석가모니의 부친)의 서양식 발음(이태리‘조바니’, 프랑스‘장’, 영국‘존’)에서 나왔다는 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민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 예수 생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이들 불교적 자료는 한때 리처드 보크가 실제로 인도, 티벳 등을 답사, 다큐멘터리 필름(The Lost years of Jesus)에 담겨진 적도 있다고 한다. [ 주간중앙 1986. 10. 26 ]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동양으로 구도의 여행을 다닌 사실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방법인 아카샤(akasha)라는, 우주심(宇宙心)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기록(아카식 레코드)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제3의 복음서 『보병궁 복음서』에도 나와 있다.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목사가 되었고, 20세에 종군목사(종군목사)로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사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천재적인 목사 리바이 도우링(1911. 69세 사망)이 쓴 『보병궁 복음서』(성약성서)에는 4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 등 4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병궁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인도에 가게 된 동기는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했다가 총명한 예수를 보고 인도로 데려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당시 예수는 12살이었고,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인도의 최고가는 명의(名醫)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치료법을 배우며 베다 및 불경을 공부한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승려들의 정죄에 걸려, 죽음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다. 그 뒤 성인 피자빠찌의 소개로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스테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여기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으며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라는 찬사를 받은 예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동방박사 3인의 마기교 승려를 찾아 뵈었다.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예수는 어머니의 애정어린 환대를 받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지 못한다.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희랍으로 떠났다. 희랍의 교사 중에서 아폴로라는 성자와 함께 교사들을 가르치며 희랍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 조안에 가서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이라는 신전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여기서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의 비밀을 배웠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상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인도에서의 행적 등 학자들의 연구내용과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jc80/HFuF/278?docid=ge8g|HFuF|278|200809131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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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십자가 처형을 전후한 예수의 알려지지 않는 생애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 홀거 케르스텐 / 고려원 (1987)
머 리 말
1973년 나는 예수가 인도에서 살았다고 가정하는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예기치 않는 우연한 기회였다. 그때 나로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면서도 다소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 기회에 예수의 실제 생애를 탐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곧 학술적으로 밝힐 만한 자료나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정말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왜 그는 동시대인들의 눈에 그토록 이상하고 신비롭게 비쳤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탐사를 진행해 가면서 마침내 인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나는 “인도에서의 예수”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해 온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값진 후원은 물론 놀랄만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이 책을 출판하는 형식에 있어서 나는 이 책의 간결하고도 논리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세세한 내용들이 소홀하게 넘어가지 않도록, 너무 학술적인 형식으로 기술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많은 내용이 대담하게 보이거나 어떤 것들은 있을 법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은 여러 관련 분야에 있어서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사실 이 연구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이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든 불합리한 주장들을 밝히는 일이나 거기에 상반되는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종교관을 손상시키거나 일반 독자들의 순수한 믿음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나 의도는 아니다. 그리스도 메시지의 영원하고도 중심적인 진리, 그것을 밝혀 주는 길을 다시 한번 찾아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종교적인 권위를 남용하는 다분히 세속화 된 기관의 야심에 의하여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흔들려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새로운 믿음의 선포가 아니다. 다만 이 시도는 참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인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하겠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 일어나 반론을 펴라. 전(全)교회의 역사는 오류와 권세의 뒤범벅이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983년 3월 프라이 브르크에서. 홀거 케르스텐
“영문판에 덧붙여”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의 영역판을 완성시키는 데 2년 이상이 걸렸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이 책의 7판이 나오고 있다. 이 번역은 요즘의 지식에 맞게 여러 번 개정되었다. 나는 영국 독자들에게 나의 필치가 약간 껄끄럽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나는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실들을 가볍게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흔하지 않은 솔직함을 가지고 썼다. 나는 영국에서도 탁월하게 인내심이 있고 편견이 없는 독자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주교(더 햄의 데이빗 젠킨스)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견해와 관련된 그의 개인적인 의문점들에 대해 그의 부활절 메시지에서 설교한 만큼 용기가 있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다. (데일리 델리그라프 1985년 3월 30일자) 1986년 9월 H. K.
저자 : 홀커 케리스텐은 1951년 동독의 막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에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했다. 1973년과 74년에는 동양으로 첫 번째 여행을 떠나 터키, 이란, 아프카니스탄 등지를 여행했다. 1974년-79년까지 그는 종교 교육 교사가 되기 위해 프라이브르크에 있는 개신교 개통의 한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 후 비밀에 쌓인 예수의 생애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하기 위해 인도에 몇 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1982년까지 프라이브르크 근처의 직업학교에서 종교교육 교사로 있었다. 그 이후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각종신문에 자유 기고가로 일했다. 그의 여행 행선지는 대부분 동양이었다. 저자의 사무실은 현재 프라이브르크에 있다.
“장성규 옮김 / 옮긴이의 말”
오래 전부터 역자는 인류 역사상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는 분들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참모습이라든가 그들이 펴고자 했던 가르침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색되어 온 것 같다. 사실 그들의 말을 기록한 원문은 접할 수가 없었고 어떤 것은 그들이 사용했던 말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역자는 그 글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에 싸여 있었으나 만족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말이라고 전해오는 글을 1차 자료로 하고 그 이외의 참고 서적을 2차 자료로 하여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역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의기투합할 수 있어 더 이상은 고독하지 않았다.
역자가 보기에 종교나 철학 분야에서의 우리나라 학문 발전은 더욱 많은 노력이 요구되어진다고 보며 각 종교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배가(倍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류 최고의 기록 중에서 네 개의 베다, 우빠니샤드, 잰드 아베스타, 라마야나, 마하바라따 등은 아직 국내에 재대로 번역되어 있지도 않는 실정이다. 사해문서라든가 폰 데니켄 가설 등은 외국에서 이미 10년 이상 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검토와 비판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금기시 되어 온 듯한 인상이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학문 발전 추세에 너무 소외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성인들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기존 종교의 가르침과 대치될 때 탄압 내지는 견제가 심하더라도 종교발생 이전의 성인들의 참모습을 우리는 그들의 말과 삶을 통해 직접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이하 생략)
1987. 4. 신사동에서 옮긴이
차 례
머리말 / 개요
제 1 장 알려지지 않는 예수의 생애 니콜라이 노토비치의 발견 / 보병궁 복음서 / 세속적인 자료들 / 복음서 / 증인 바울 / 결론 / 나의 히말라야 여행
제 2 장 모세와 하느님의 자녀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 마누-마네스-미노스-모세 / 모세는 누구인가? / 케시미르에 있는 모세의 무덤 / 정복에서 유수(幽囚)까지 / 이스라엘 자손들 / 케시미르에서 홍수가 났다 / 케시미르는 약속의 땅인가? /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부족 / 불교의 전파 / 예수는 정통 유태인인가? / 붓다와 예수의 비교 /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불교사상
제 3 장 서양에서의 동양의 지혜 동방박사의 별 / 동방박사는 누구인가 / 어떻게 신의 화신을 찾는가? / 이집트로 피난 / 나자렛파 예수 / 에세네파 / 예수 이전의 기독교 / 쿰란에서의 에세네파의 가르침
제 4 장 예수의 비밀 예수의 비밀 / 신약성서에서의 사후재생 / 예수의 기적과 인도에서의 기적 / 끄리슈나와 그리스도
제 5 장 예수의 죽음 재판과 처형 / 수의의 연대 / 수의의 과학적 분석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 역사적 관점에서 본 부활 / 바울,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를 만나다
제 6 장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 다시 동방으로 가다 / 이슬람의 진정한 예수 / 캐시미르에서의 예수 /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
끝맺는 말 / 옮긴이의 말
(*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의 돌에 새겨진 “발자국”의 사진은 겔러리 / 기타란에 올립니다)
출처 : http://lightearth.net/zboard/zboard.php?id=good&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인도에서&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
1)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독일사람 홀거 케르스텐이 쓴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은 지성인 다운 의욕이 엿보이는 책이다. 우선 종교적 고정관념을 깨고 종교의 배후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선견자 다운 자세가 엿보이고 또 그 열정으로 많은 연구를 했다는 점이 들어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연구결과 중에는 무리한 결론도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유럽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전통적 종교인 기독교에 희의를 품고 동양의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낀 사람인 것 같다. 진정한 동양이 아니라 인도철학이나 그 사상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며 그러한 기호(嗜好)적인 선입견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인도의 북부지방인 캐시미르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생애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그는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청소년기가 그곳 인도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캐시미르에서 가까운 라다크(캐시미르와 티벳의 국경지대)의 헤미스라는 사원에 기록으로 남아 있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캐시미르 지방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는 사실은 그 지방의 역사서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다.
우리 지구인들의 탁월한 스승이었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중대한 과거의 역사들은 우매한 대중이나 아직 어린 성장기의 지구인들도 모두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미국인 베어드 스폴딩이라는 사람의 체험담인 '초인생할'이라는 책을 읽고서야 홀거케르스텐이 왜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접촉자들' 33-34장에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캐시미르의 배경인 히말라야 산악지대에서 베어드 스폴딩과 그 일행인 고고학 탐사대를 접촉한 예수님은 유대교의 배경인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뉴에이져들이 여호와는 악한 외계인이었다 하고 또 그렇게 오해받을 만한 여러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인생활'이라는 책을 자세히 읽으면 거기에는 분명 많은 행간의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고 성경에 대한 불신은 옳지 않음을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초인생활'을 읽기 전에 홀거 케르스텐의 저서를 만났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며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는 개인적인 기호(嗜好)성이 너무 짙다고 생각된 것이다. 기독교의 단순한 윤리적 교훈보다 인도 종교의 배경인 철학성에 심취한 나머지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역사연구에 임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때의 본인의 의구심들을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우선 에덴동산이 캐시미르에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여러 모순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의 모든 연구는 에덴동산을 캐시미르에 고정시키고 그 가정하에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편향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든 것 같다.
에덴에서 발원했다는 네 개의 강 중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도를 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수천년의 역사 동안에 지형이 바뀌었다 해도,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다시 이란의 고원지대를 지나, 아라랏 산맥을 경유해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페르샤 만으로 흘렀을까?
또 성경에서는 분명 노아 이전의 아담의 계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히브리족이 노아 이전의 계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서 히브리 족이 인도의 노예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히브리 족의 신화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관점인데, 그러면서 어떻게 인도나 이집트의 신화들은 인정해서 히브리족의 언어와 혈통도 그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도의 캐시미르 지방에는 지명과 인명, 그리고 생활풍습이 유대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그 지방 학자들의 연구결과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그곳에는 유즈 아사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부활 후의 예수님의 족적도 분명히 남아 있다 한다. 유즈 아사프란 다름아닌 '예수 요셉'이란 뜻의 이름이다. 또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사원도 있다고 한다.
히브리 족은 캐시미르 뿐만 아니라 이웃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중국에까지 그 발길이 닿았다는 사실도 근래에 들어 밝혀지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홀거 케르스텐 자신도 말했듯이 히브리 족이 BC 7백년 경에 아씨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12부족 중 10부족이 고국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졋잖은가?
인도는 예로부터 라마라는 이름으로 페니키아와 무역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의 신화시대에도 잘 알려진 땅이었다. 제우스 신이 바람을 피워 생긴 아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고, 제우스의 어머니 에아에 의해 보호받다가 라마(인도)에 가서 성장기를 보냈다고 한다. 히브리의 신화서 '아담과 이브의 생애'에서도 에덴동산의 지도자 여호와가 사탄을 인도의 땅에 가서 살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아씨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들은 남쪽을 향해 이집트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동쪽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것 같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유랑했으나 그들이 안주할 곳은 이미 다른 종족의 땅이었고 그 마지막에 도달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중의 조용한 분지 캐시미르였을 것이다. 그곳은 그들에겐 새로운 낙원이었을 것이다. 분지라는 지형상 기후조건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리안 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서 인도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오랜 역사학적 정설인데, 홀거 케르스텐은 그 사실을 뒤집어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가 인도의 싼스크리트어의 가지라든가 히브리 족이 인도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은 수긍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 지구를 방문하고 있는 우주인들도 히브리어가 우주인들의 언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싼스크리트 어도 같은 계통의 언어일 것이다. 히브리 신화서의 내용처럼 에덴에서 쫓겨난 천사들이 그곳 인도에 가서 살았다면 말이다.
케르스텐은 일부 역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가 인용한 역사적 논리들을 모든 역사학자들이 함께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역사를 거짓없이 말해주는 것은 그 민족의 신화인 것이다. 신화가 비록 과장되고 알쏭달쏭한 은유적인 표현법에 의해 전수되긴 했지만, 신화는 아직 유아기에 있었던 인류가 보고 들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유아적인 표현법으로 후손들에게 전한 인류 최초의 역사인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정직하듯이 신화에 거짓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의 신화와 모세5경의 기록을 깡그리 무시하는 홀거 케르스텐의 역사관점은 그래서 매우 기호(嗜好)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5경이 다른 민족의 신화를 가져다가 짜맞춘 누더기 신화라면 그것은 모세의 문학작품이지 민족의 역사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 모두가 모세의 거짓 이야기에 동조해서 함께 춤췄단 말인가?
석가님이 태어나자 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듯이 예수님도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가르칠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지성주의자 케르스텐은 이해할 수 없었든 것 같다. '어린 성자 이사'의 정신적 스승을 찾아 그는 많은 역사학적 여행을 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우주인들의 영혼이 지구인의 몸을 입고 태어날 수도 있다는 21세기적 사고에 눈을 뜬다면, 어린 성자 예수의 정신적 스승을 찾아 동양과 서양을 헤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스승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지구인들에게 주어졌었고 그들은 동양에도 태어나고 서양에도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동양을 더 선호한다든가 혹은 서양을 더 선호하는 편협한 자세로 지구인들을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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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병궁의 성약'
< 128 > 리바이 도울링
리바이 도울링는 1844년 미국의 오하이오주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란 개신교 종파의 한 전도사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하던 리바이는 13세에 이미 교회의 어른들과 신앙을 토론할 정도로 천재적인 아이였다 한다. 16세에는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했고, 19세에 목사가 되었다. 군에 입대해서는 군목으로 일했고, 제대 후에는 종합대학을 거쳐 다시 2개의 의과대학을 나왔다 한다. 그는 이처럼 지적 욕구가 왕성한 사람으로서 많은 공부를 했으나 그의 일생은 '보병궁 시대의 성서'라는 책 한 권을 쓰는 데 바쳐졌다 한다.
'보병궁 시대의 성서'는 문자 그대로 보병궁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예수님의 일생에 관한 책이다. 기본적으로는 신약성서와 같으나 신약성서에 없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많이 윤색되었다. 변조된 것이 아니라 보병궁 시대의 사람들에게 맞는 내용으로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새로운 조명은 리바이 도울링 자신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비셀이라는 한 정령의 인도를 받아 '비셀의 기록전시관'에 씌어 있는 내용들을 가져다가 글로 옮긴 것이라 한다.
리바이 도울링이 생존했고 '보병궁 시대의 성서'를 쓴 시기는 19세기 후반부였다. 그 시대에는 아직 UFO나 우주인의 나타남이 극히 제한적이었으므로 '정령'이란 단어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리바이는 비셀이라는 한 우주인과 텔레파시적인 접촉을 가진 것이다. 그가 13세에 교회의 어른들과 토론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았다는 것도 그의 출생에 우주인들의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는 '보병궁 시대의 성서'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백색의 도시를 세우라는 계시와 환영을 세 번에 걸쳐서 받았다."
'보병궁 시대의 성서' 안에 그 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예수님이 공생활 직전에 세계의 7성현들과 함께 쌍어궁 시대 2천년을 계획하면서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7성현들은 쌍어궁 시대 2천년을 위한 7가지 보편적 원리를 정했습니다. 이 보편적 원리 위에 빛나는 도시가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쌍어궁 시대를 통해 가르칠 7가지 보편적 원리는 보병궁 시대에 세워질 세계교회의 7가지 초석이 될 것입니다...."
리바이 도울링이 쓴 '보병궁 시대의 성서'는 바로 21세기에 세워질 세계교회를 위한 안내서인 것이다. 백색의 도시는 21세기의 세계교회를 상징하는 좋은 모티프인 것이다. 그래서 보병궁의 성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보병궁 성서가 지닌 시대적 의미와 그것을 우리에게 준 우주인들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인들의 지구 방문에 관한 온갖 소식을 접하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목마르게 기다렸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재림의 모습을 부여주실까? 그분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지구에 나타나서 활동하고 계셨다. 보병궁성서가 출판되어 나온 직후인 1894년부터 미국의 고고학 탐사대를 만나고 계셨던 것이다.(33-48장 참조) 히말라야 산맥 속의 고대 사원에서 미국의 탐사대를 접촉한 예수님은 이 시대의 지성인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보병궁 성서'를 통해서는 기존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리바이 도울링을 접촉한 비셀이라는 정령(성령)은 아카식 레코드(Akasic record)라는 우주의 기록보관소로 도울링을 안내했다 한다. 과거 시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기록보관소인데, 종이 같은 물질을 이용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우주적 차원의 기억장치라 한다. 비물질적 컴퓨터 같은 것이리라. 그 기록보관소에 들어가 기록들을 추적하는 방법을 비셀이라는 정령이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1세기에 맞는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보게 되었고, 그런 작업은 주로 새벽 2시에서 6시 사이에 명상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한다. 그때마다 비셀이 그를 우주적 기록보관소에 안내했을 것이다. 아래는 비셀이라는 정령이 리바이 도울링에게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다.
"리바이 도울링이여, 그대는 앞으로 다가오는 영적 축복의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리라. 사람의 아들이여, 사람들은 그리스도, 신의 사랑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은 인간이 겪는 온갖 고통의 치료약이며 모든 질병에 대한 특효약이다. 그리고 인간은 지혜와 힘과 오성(悟性:깨달음)을 부여받아야 한다. 아카샤를 보라!! 온갖 생물의 모든 사상과 말과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 비셀의 기록전시관이다....이 신비한 기록전시관에 들어가서 기록물들을 읽어라....이제 나는 그대에게 성령을 불어넣는다. 그대는 식별하게 될 것이며, 이들 기록서들이야말로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어 있는 교훈들임을 깨닫게 되리라. 이제는 성령의 시대이므로 앞으로는 빛과 광휘의 시대가 될 것이다. 또한 성령이 영원한 사랑의 로고스인 그리스도를 새로이 증명하는 시대가 되리라.
모든 시대가 시작될 때마다 이 로고스는 육신을 입고 나타난다. 태양이 황도대를 돌며 12성좌 중 한 별자리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게 된다. 에녹도 멜기세댁도 그 시대의 그리스도였다.
이제 그대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평화의 님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왔노라. 내가 이룬 일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의 경지는 모든 사람도 될 수 있는 경지다....모든 그리스도는 생명, 죽음, 죽음의 부활에 대한 참된 철학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인간과 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본보기였다...."
'보병궁의 성서'가 세상에 전해진 지 1백년이 넘었다. 그리고 지난 1백년 동안 우리 지구인들의 사회에는 많은 급격한 변화들이 있었다. 특히 과학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으며 달나라까지 갔다오는 우주여행도 했다. 그러나 보병궁의 성서에서 말하는 발전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세계의 발전, 인간 자신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가능성,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발견, 신의 일부분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하는 우주적 각성, 그런 것이 진정한 발전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그것이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가르치신 것이고, 또 이 시대에 거듭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135> 쌍어궁 시대를 위한 7원칙
알렉산드리아 필로의 집에 모인 세계의 7성현들은 형상화되어 나타난 '로고스'의 모습을 본 후, 7일 동안 명상에 정진하며 아카샤 세계에 들어가 '생명의 책'을 읽는다. 거기서 앞으로 다가올 쌍어궁 시대의 인간들의 삶과 역사를 예견하며 다가올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가르침과 신앙의 철학적 체계를 짤 차례다. 가장 연로한 중국의 멘구스테가 회의의 의장이 되어 먼저 입을 연다.
"인간은 아직 신앙에 의하여 삶을 영위할 만큼 진화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시대(쌍어궁)에는 상징과 의식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또한 아직 자신을 다스릴 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다스릴 왕이 필요할 것입니다....그러나 그 다음 시대에는 신앙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의 시대에는 육안의 도움이 없이도 보게 되며(천리안), 소리없는 소리를 듣게 되며, 성령의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돌입하려는 시대는 과도기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권과, 학교와, 신앙의 형태는 인간의 수준에 맞춰서 준비되어야 합니다....우리는 이제 다가올 시대를 위한 가르침의 모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계발을 위한 일곱가지 기본철학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 7성현이란 종교만을 위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지구인 삶의 전분야를 책임지는 정신적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사회형태를 띄고 있지만 고대에는 제정일치 시대였다는 것을 생가해보면 된다.
의장 멘구스테가(중국) 먼저 쌍어궁 시대를 위한 가르침의 모형을 제시한다.
"만물은 사상(생각)이다. 생명은 사상의 활동이다. 수많은 실존의 형태들은 단지 하나의 사상이 명확히 표현된 한 국면일 뿐이다. 사상은 곧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곧 사상이다."
그러자 인도의 불교 성자 비자빠찌가 바톤을 받는다.
"영원한 사상은 하나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지성과 힘(권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사랑이다. 그렇게 해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정립된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한분 뿐이다. 그런데 한 분의 하느님이 숨을 내쉬니 7성령이 하느님의 면전에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창조적 속성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다 덜 중요한 하느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형태로 인간을 만들었다."
덜 중요한 하느님이란 창조의 재료인 무인격의 신을 대신해서 창조행위를 하는 인격적 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보병궁 성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대기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히브리의 신비서 카발라에서 삼위일체의 신에 대한 개념을 따오고 있다.
다음은 페르샤의 카스파 성자 차례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상으로서, 7위(位:7성령)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영혼의 실체 위에 육신의 옷을 입었다. 인간의 소망은 강하였으므로 생명의 모든 단계에 명확히 나타나기를 원했다. 가장 낮은 단계에까지 떨어진 인간은 천부적인 권리를 잃었으며, 하느님과의 조화를 잃었다. 부조화에서 악이 발생했다."
인간이라는 놀라운 생명체는 최저의 동물성에서부터 최고의 신성(神性)에 이르기까지 7가지 수준으로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 동물적 근성에 자신을 맡기면 인간세상에 부조화와 악이 나타난다는 뜻일 것이다.
네 번째 조항은 아씨리아의 아시비나가 말한다.
"씨는 빛 속에서는 발아할 수 없다. 종자는 땅을 찾아서 자신의 몸을 빛으로부터 숨겨야 싻이 돋고 성장을 시작한다. 인간은 생명의 종자로서 진화 발전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의 빛은 너무 강열하여 그 속에서는 씨앗이 발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어두운 땅의 토양 속에서 싻트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토양에서 발아한 나무는 자연법에 순응하며 잘 성장하는 중이다. 인간을 육의 삶으로부터 영의 삶으로 갑자기 승화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인 특별법은 없다. 인간은 식물이 자라듯이 자라서 때가 이르면 완성에 도달한다. 인간을 영적인 삶으로 승화시켜 주는 영혼의 본질은 '순결'이다."
이제 겨우 네발짐승에서 두발로 걷게 된 인간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대부분 행성의 인간류 생명체들은 우주의 태초 시대에 7성령의 창조주들에 의해 유전공학적으로 창조되어 여러 행성에 씨뿌려진 선조들을 가지고 있다 한다. 그들의 DNA 속에는 고등한 생명체로서의 씨앗인 신성(神性)을 간직하고 있으나 그것이 단 한번의 생을 통해서 활짝 피어날 수는 없다는 말인 것 같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생을 반복적으로 살면서 창조주의 분신으로서의 본래모습에 다가가는 것이다.
다음은 아폴로의 차례다.
"영혼은 네 마리의 백마에 의해 완전한 빛으로 끌려간다. 네 마리의 백마란 의지, 신앙, 협조, 사랑이다. 인간의 의지는 힘을 얻어 권능에 도달하고 권능은 신앙의 빛이 된다. 신앙이 움직일 때 영혼은 날개를 달고 날 수 있다. 그러나 이기적인 신앙은 빛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외로운 순례자란 없다. 상호협조의 봉사정신만이 신앙의 경지를 정상까지 안내한다. 이 모든 것을 이끄는 준마가 사랑이다."
21세기의 지구인류는 이성적 분야에서는 화려한 꽃을 피운 것 같다. 과학, 철학, 예술, 법, 정치의 분야에서는 대학생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영성적(靈性的) 분야에서는 아직 유년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이성은 영성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지만 영성 그 자체는 아니다. 영성이 성장하고 꽃을 피우려면 빛을 향하는 의지, 빛의 선함을 믿는 신앙, 이기적이 아닌 협동정신, 이 모든 것의 귀결점은 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 같다.
다음은 맛세노가 여섯 번째 조항을 말한다.
"아폴로가 방금 말한 사랑의 준마는 우주 보편의 진리이며 지혜와 신의(神宜)의 자식이다. 하느님께서 이 신의의 존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육신으로서 이 땅에 보내셨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 보편애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에 속하는 음습한 동굴 속에서는 살 수 없다. 공포, 자아, 감정, 욕망 등 온갖 세속적인 것들이 청소되기까지 일곱 번을 싸워서 일곱 번 이겨야 한다. 싸워 이기는 날, 그리스도 안에는 하느님이 거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하나가 된다."
창조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의 씨앗은 육체 속에 감추어진 씨앗일 뿐 그것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워야 비로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성이 곧 사랑이요 신의(神宜)라고 한다. 의(義)는 사정(邪正)을 분별하지만 또 다른 의(宜)는 마땅함과 모순됨을 가린다. 그리스도성의 발아(發芽)는 이성의 자식인 宜와 감성의 자식인 義의 도움을 받아 싹트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필로가 일곱 번째 조항을 말한다.
"완전한 인간이여!!, 그대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데려가기 위하여 자연이 만든 존재이다. 이러한 완성은 신비한 생명의 최고의 경지다. 모든 세속의 육적인 진수가 영혼으로 화하고, 영혼의 모든 진수가 하느님의 성스러운 숨결로 변하여, 마침내 인간이 완전한 신으로 변모되어질 때, 창조의 드라마는 종결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지창조의 완성형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세계 7성현이 모여서 제시한 인간의 완성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상의 목표였을 뿐 쌍어궁 시대를 마감할 때 그 목표에 얼마만큼 다가갔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목표는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4차원 시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그 목표를 바라보고 전진해야 할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지금은 2천년 전 세계의 7성현이 만나 제정했던 인류 진화의 목표가 완결지어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3차원 인간에서 4차원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성을 잠깨우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완성을 향한 첫 발걸음인 것이다.
필로가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조항을 말하자 성현들은 일제히 '아멘'을 외친다. 그러자 의장 멘구스테가 회의를 다시 진행한다.
"새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세월의 각고의 노력 끝에 계발된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성현들에 의해 입증된 바 있는 이 사람, 갈릴리 사람 예수를 모든 성자들의 대 스승으로 우리 다 같이 기쁘게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가져온 지혜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이 연꽃의 화관을 이분께 바칩시다."
그리고 나서 세계 7성현들은 다시 7일 동안 명상에 들어간다.
성현들이 계속적으로 명상에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육체적인 삶에서 정신적인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 인간의 바람직한 발전형태임을 강조하는 것 아닐까? 육체는 작은 바늘 하나에 찔려도 고통스럽고, 미세한 박테리아를 만나도 병들고, 종국에는 죽어서 없어진다. 그 육체를 춥지 않게, 배곯지 않게, 병들지 않게, 혹은 보다 호의호식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자나깨나 고심하고 투쟁해야 한다.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야 말 것을. 이 고달픈 삶을 통해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똑 같은 수준의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신앙이란 곧 정신적 삶에 대한 이해다. 3차원 인간의 육체는 비록 에테르의 가장 낮은 단계에 떨어져 있지만 인간은 창조주인 7성령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성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살고 또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산 성현들의 가르침일 것이다.
<133>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24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 예수는 또 다른 여행을 위해 떠난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정신을 섭렵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에서는 아폴로라는 철학자가 청년 예수의 안내자가 된다.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과 토론한 후 한 원형극장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 예수님의 차례가 돌아오자 청년 예수가 일장연설을 한다.
"오랜 옛날, 자연법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과학자들) 지금 당신들의 수도가 서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지구의 어느 부분에는 지구의 약동하는 심장이 하늘을 향하여 에테르의 파동을 던지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에테르와 만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장소에서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롱한 영혼의 빛과 깨달음의 오성(悟性)이 힘을 얻습니다. 아테네와 같이 감수성이 예민하고 보다 많은 영적인 축복이 있는 곳은 없습니다....철학, 시, 과학, 예술의 방면에서 위대한 거장들이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며 맑고 순수한 사상의 요람을 흔들어서 건장한 어른으로 키웠습니다....그러나 당신들이 성취한 모든 고상한 학문들은 단지 감각의 영역을 뛰어넘은 세계로 나가는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시간의 벽을 날아 스쳐 지나가는 허무한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너머에 있으며 내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이 생명은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는 참된 생명입니다. 과학과 철학에는 영혼이 자각하고 하느님과 교통하는 강한 힘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왕성한 사상의 흐름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혼의 통로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숨결에 의하지 않고는 지적 작용의 큰 활동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의 문제를 풀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사물의 실체를 보기 위해 신비의 베일을 찢어내려는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각(靈覺)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모든 영혼 안에 잠자고 있어서 성령의 숨결이 손님으로 임하기까지는 깨어나지 않습니다....철학과 과학은 신비의 베일 안을 힐끗힐끗 들여다 보았으나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영혼의 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순결한 생활, 기도, 거룩한 상념 이외에는 없습니다...."
지구인들을 접촉하고 있는 우주인들은 영적인 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힘을 능가하는 것이라 한다. 영적전사(戰使), 영적공학(工學) 같은 단어들은 그들이 다방면에서 영적인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물질과학은 전자의 최소입자들을 발견하고 핵에너지를 이용하게 되었지만 그런 물질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정신세계의 힘에 비하면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 있는 것이다. 과학적 힘을 맹신하는 현대의 사상은 매우 위험스런 사상으로 보일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세계를 향해서 왜 그토록 영혼의 순수성을 가르치려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만일에 순수하지 못한 영혼들이 과학적 힘을 넘어선 정신적 힘까지도 지니게 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그들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우주를 휘저어서 우주 자체의 존속을 불안케 만들 것이다. 창세기 해설서 '하가다'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하느님이 파괴의 천사들을 하늘 끝에 배치해서 그곳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이집트 북부의 도시 헬리오폴리스다. 그곳에는 이집트에서 살던 히브리인 맛세노, 즉 다윗의 동굴에서 세례요한을 교육시킨 히브리인 맛세노가 의장으로 있는 신비적 명상도가(徒家)라는 신비의 학교가 있었는데, 청년 예수는 그 명상도가의 일원이 된다. 청년 예수가 세계의 모든 가르침을 섭렵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그리스와 이집트를 방문한 것도 계획적인 순서였을 것이다. 보병궁 성서가 전해질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자 과거의 신비를 푸는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그 거대한 피라밋과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밀의(密意)적인 비법들은 신비 중의 신비인 것이다.
명상도가의 한 과정인 7단계 시험에 들어간 청년 예수는 그곳 피라밋의 지하실에서 갖가지 유혹을 물리친다. 제일 힘든 유혹은 미와 재능을 겸비한 아름다운 여인의 애욕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애욕을 성애(聖愛)로 변화시킴으로서 마지막 시험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명상도가의 의장 맛세노로부터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얻는다.
(다음 장에서 계속)
((보병궁 성서 시리즈는 대원출판 간 '보병궁의 성약'에서 발췌한 내용들입니다.)
출처 : http://www.jesu-ufo.com/
< 132 > 돌아오는 여정
예수님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을 지나 티벳에 도착한다. 티벳의 수도 라싸에 있는 사원에는 수많은 고대문서들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중국 승려 멘구스데의 도움으로 그 많은 문서를 독파하고, 그곳을 떠나 서쪽으로 여행해서 티벳과 캐시미르의 경계지역인 라다크에 이른다. (훗날 19세기에, 러시아의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바로 그곳 라다크의 헤미스 사원에서 '어린 성자 이사'의 발자취가 담겨진 고대 문서를 발견한 것이다.) ('성경과 과학' 15-17장 참조)
그곳 라다크에서도 시장과 마을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온 한 여인의 아들을 고쳐준다. 캐시미르의 라호르에서는 한 유랑악단을 만나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뛰어난 음악성에 감탄하며 저런 음악성은 한 생애를 통해서는 익힐 수 없으며 아마 수 천년의 삶을 통해서 얻은 재능일 것이라며 천국의 음악에 비유한다.
여행은 계속되어 페르샤(현재의 이란)에 도착했고 그 때는 예수님의 나이가 24세였다. 카스파를 비롯한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 성자들을 만나 그들 종교의 창시자 조러아스터의 훌륭함을 찬양한다. 그러나 악도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조로아스터적 철학에는 이의를 제기하며, 악은 여러 다른 선이 혼합되는 과정에서 부조화를 이룰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 예수님의 탄생 때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세 명의 철인들을 다시 만났는데, 그 때 하늘에서 비추는 밝고 찬란한 빛에 감동된 페르샤의 철인들은 젊은 선생 예수에게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뭇는다.
"영혼이 그의 하느님과 만나는 고요한 순간이 있습니다....일단 명상 속에 들어가면 환영의 헛개비가 잠시 어른거리지만 주인인 영혼이 명령하면 곧 사라집니다....당신은 모든 마음의 긴장, 세속적 관심사, 일체의 공포, 의혹과 번뇌를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대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신성 속으로 흡수되지 않으면 안됩니다....그대는 신성한 의식 속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보게 될 것입니다....그 촛불은 당신의 온 몸을 모두 비추고 그곳에서 지혜의 샘물이 콸콸 솟아오름을 느낄 것입니다. 그 샘물을 마시고 그곳에 머무르세요. 그리고 나면 한 장막이 걷히면서 그곳에 언약의 궤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언약의 궤 속에는 예언의 마술 지팡이가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그리고 그 궤 속의 만나는 영생을 약속하는 만나이며, 이 하느님의 언약의 궤는 천사 케루빔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궤 속에서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페르샤를 떠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메소포타미아의 칼데아 우르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 아직도 살고 있는 노아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약 2천년 전에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곳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겼으며 이러한 신성한 숲 속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숲속을 거닌 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머지 혈족들의 가슴 속에는 아브라함이 가르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지금도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씨리아의 성자 아시비나를 만나 옛 바빌론의 폐허를 돌아본다. 영국사람 레이어드가 19세기에 그 지역의 유적지들을 발굴할 때는 옛 도시의 폐허가 풀이 무성한 몇 개의 언덕으로 변해 있었으나 청년 예수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바빌론의 거리 모습들이 그런대로 남아 있었든 것 같다. 황폐해진 궁전과,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나무에 비파를 걸어놓고 슬픈 노래를 불렀다는 장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바빌론의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했던 장소, 그리고 벨루스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신전 등을 돌아본다. 벨루스의 신전이 바로 바벨탑이었다고 한다. "이 무너진 기념비를 보시요. 인간은 하느님의 옥좌를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들의 언어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큰 소리를 치며 지나치게 인간의 힘을 자랑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제단에 새, 짐승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어린아이까지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십년이 넘는 기나긴 여정을 거쳐 이스라엘로 돌아온 청년 예수를 반긴 것은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미리암 뿐이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에 대한 예기를 들려준 것도 그들 뿐이었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고 한다.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먼 훗날 보병궁 시대를 위한 복음서가 다시 씌어질 것이고, 그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 131 > 인도에 간 소년 예수
보병궁 성서 제 6부는 소년 예수의 인도에서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신약성서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인도의 여러 성도(聖都)를 둘러본 후 티벳과 네팔지방으로 넘어가셨는데, 이는 러시아 니콜라이 노토비치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는 경로와 일치한다. 그러면 소년 예수가 인도에서 걸었던 보다 자세한 행적을 따라가보자.
남부 인도의 오릿사 지방 왕자였던 라반나는 서양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중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토론하고 있는 비범한 소년 예수를 발견하고, 부모의 허락을 받은 후 함께 인도로의 여정에 오른다. 육로를 거쳐 인도의 서북부 인더스 강을 건너 남부 오릿사 왕국에 다다른다. 소년예수는 그곳의 자이나교(힌두교의 한 종파) 사원의 생도가 되어 베다경전과 마니 경전을 배우나 이미 이스라엘에서 일곱 살 이전에 다 읽은 것이므로 경전해석에 능란함을 보이자 모두 놀란다. 자이나 승려 가운데 라마스라는 한 승려가 소년 예수에게 매혹되어 함께 토론한다.
"젊은 유대 선생, 진리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진리란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지요. 세상 만물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입니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거짓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진리는 유(有)이며 거짓은 무(無)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은 눈에 보이지만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에테르가 진동하는 동안만 현상적인 것으로 머물고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리, 즉 성기(聖氣)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화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잘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진리와 거짓이 이상하게 혼합된 것입니다. 인간이란 성령의 기운이 육체가 된 것으로서 진리와 거짓이 그 안에 함께 결합하여 서로 어우러져 투쟁하고, 그럼으로써 무(無)는 가라앉고 인간은 진리로서 남게 됩니다."
"에너지와 권능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합니까?"
"우주 보편의 에너지는 에테르의 진동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변하고 소멸되기도 하지만 권능은 하느님의 의지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바람과 파도와 번갯불을 일으키지만 그 소임을 다하면 그뿐이지요. 그러나 권능은 엘로힘, 천사, 인간, 그밖의 사상(생각)을 가진 모든 것들을 지도합니다."
"예지(叡智)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예지란 그것을 토대로 삼아 인간이 그 위에 자신을 세우는 바위입니다. 그것은 유와 무, 진리와 거짓을 가려서 알아내는 직관입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참다운 존재라는 것, 인간과 하느님이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하느님과 인간이 전능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며, 사람이 신적인 생활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마음에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구원에는 세 계단이 있는데, 첫번째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신앙, 마지막은 완성입니다. 믿음은 신앙에 젖어 없어지며, 신앙은 완성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생활에 도달하여 그 자신과 하느님이 하나되었음을 깨달을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말한 지혜와 신앙에 대한 정의가 놀랍지 않은가? 기존의 성경에서는 인간의 죄인됨을 강조하여 날 때부터 죄인이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병궁 성서에서는 그리스도성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병궁 시대란 인간이 자신 속의 그리스도성을 발견하고 개발해서 신성(神性)의 수준에서 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는 노인은 꿈을 꾸고 젊은이는 예언을 할 것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하며 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소년 예수와 브라만 승려 라마스는 여행을 계속하여 간지스 강가의 종교적 도시 베나레스에 이른다. 그곳에서 유명한 의사 우도라카를 만나 인간과 자연과 하느님이 조화를 이루면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는 힌두교적 의술을 배우고 그 참됨을 인정한다. 4년 동안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카스트 제도의 부당함을 알리고 수두라 계층의 고달픈 삶에 위로의 말들을 전한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제사법의 무의미를 가르치며 불행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제물이 된다고 가르치고, 소년 예수를 신성시하는 군중들에게 인간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도둑과 강도와 창녀를 비난하는 브라만 승려들에게 승려들의 마음 속에 거하는 더 큰 죄를 돌아보라고 한다.
다시 베나레스로 돌아와 힌두교 승려와 율법학자들과 토론한다.
"하느님의 향기로운 숨결에 의하여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살아있는 생명체의 한 줄기 섬유를 건드려도 그 파장은 생명의 중심에서 먼 바깥까지 도달합니다."
"그대의 신은 누구이며 사원과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사원 안에 갇혀 계시지도 않으며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신이십니다. 우주신은 지혜, 의지, 사랑의 존재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분을 삼위일체의 존재로 보지 않고 개별적인 신으로 봅니다....모든 민족은 우주신의 한 부분만을 보고 있으며 따라서 독자적인 이름을 갖습니다....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을 대신할 승려를 세웁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승려를 통해 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개인 각자가 아버지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려고 한다면 승려 같은 중재자는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들 스스로 승려가 되십시요. 그리고 이웃에 대한 희생과 봉사의 제물을 그분에게 직접 바치십시요...."
이 대목도 당시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겠으나 이 시대의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난다(우주인 예수)는 더 이상 십자가의 대속에 의지하지 말고 직접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도록 명상을 하라고 한다. 명상이 불교적 용어라고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틈만 나면 산에 올라가 홀로 기도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소년 예수의 파격적인 언행은 인도의 상류계층과 승려들의 불안감을 고조시키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 체포에 어려움을 느낀 브라만 승려들은 마침내 살인 청부업자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늘 동행하던 승려 라마스가 위기때 마다 그를 구하고 베나레스를 떠나게 한다.
소년 예수는 히말라야 산맥 가까이 있는 가빠비추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그곳의 불교 승려들의 영접을 받는다. 불교승 비자빠찌와 토론 중에 불교적 진화설, 즉 원생물질에서 벌레가 생겼고 벌레들이 짐승들이 되고 짐승이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생명의 종들은 그 종에 따라서 독자적인 진화를 했지만 인간은 결코 그들에게서 탄생된 것이 아니며 그들과 동일하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부신이 최초에 성기를 발휘해서 물질 세상을 만들 때 7영들, 즉 엘로힘을 먼저 만들었는데 그 엘로힘들이 바로 인간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본떠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엘로힘의 모습을 본떠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말한다.
21세기의 지성인들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뉴에이지 메시지에서는 이런 진화론이 틀렸다고 말한다. 생물학자가 아닌 보통수준의 지성으로도 진화론에 부분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은데 왜 우주인들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일까?
우주인들의 진화론 부정은 진화론 전반에 대한 부정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진화를 다룬 부분에서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유랜시아서'라는 뉴에이지 문서에서는 지구에 두 종류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여우원숭이에서 진화한 자연진화적 산물로서의 인간과 우주인들에 의해 씨뿌려진 우주인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진화에 의해 인간이 된 생명체들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는 수백만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인들의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들은 빠른 문명의 진보를 보인다는 것을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행성에 살지만 파푸아뉴기니의 원시인과 미국 나사(NASA)의 과학자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가다'라는 히브리 신화서는 창세기의 신화를 보다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창세기 해설서다. 그 문서에서 에덴동산의 반란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하느님이 땅의 먼지에서 인간을 창조한 후 사탄을 비롯한 천사들에게 아담을 숭배하라고 했다 한다.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해 사탄을 선두로 한 천사들은 아담을 숭배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자기들은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천사들이고 아담은 천사들에 의해 2차적으로 창조된 피조물인데 어떻게 그들을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태초에 인간형 우주인들과 비인간형 우주인들이 서로 세력을 겨룰 때 발생한 최초의 충돌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천사들이란 스스로 진화해서 인간의 경지에까지 이른 태초의 지배자들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자인간, 독수리인간, 황소인간 같은 생명체들이 실지로 우주에는 허다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한 생명체들이 우주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숫적으로는 한참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다량의 인간 후손들을 유전공학적으로 창조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인간은 분명 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며 이는 신이 인간에게 우주를 지배해도 좋다는 권한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형 우주인들이 자신의 후손들을 유전공학적으로 창조할 때 진리의 천사가 그 일에 반대를 했다고 한다.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 뛰어난 재능과 영혼을 지니게 된 생명체이지만 또한 그만큼 강력한 욕구와 복잡한 내면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의 문제아가 될 소질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다. 그 반대행위 때문에 진리의 천사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지만 그의 지론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의 천사가 땅에서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라는 선포를 했다고 한다.
소년 예수가 불교의 고장에서 불교적 진화론을 부정한 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야기를 다시 본론으로 돌려 소년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불교의 축제날 광장에 모인 군중과 승려들의 장엄한 행진을 보며, 화려한 겉치레 속에는 결코 하느님의 성신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농부의 포도나무가 가지와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자 가지치는 이가 나타나 가지와 잎을 모두 자르고 줄기와 뿌리만 남겼습니다. 농부는 앙상한 포도나무의 모양만 보고 가지치는 이를 나무랬지만 때가 되니 포도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화려한 의식과 무성한 말들은 열매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만듭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빛을 가려서 열매가 자랄 수 없습니다. 가지치기를 하면 남는 것은 신도들의 적라나한 생활 뿐입니다. 그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다음은 불교승 비자빠찌와의 대화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승려나 사원이나 산 제물이 필요치 않게 될 것입니다."
"모든 형식과 의식들은 영혼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들의 본보기일 뿐이지요."
"다가오는 완전한 시대에는 형식이나 의식이 필요치 않겠지만, 이제 곧 닥칠 시대는 완전한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의식을 여전히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승복을 입고 으시댈 것이며 아름다운 음성으로 송가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승려이므로 경건한 신앙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특정한 옷을 입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곧 닥칠 시대란 쌍어궁 시대, 즉 지난 2천년 동안을 말하며 그 시대에는 종교라는 형식과 사제들이 필요했지만 보병궁 시대에는 모든 인간이 사제들의 수준에서 살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보병궁 시대의 신전은 인간 각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소년 예수는 불교승들에게도 위험인물로 인식되어 그곳을 떠나 티벳과 네팔 지방으로 향한다. 이처럼 소년 예수가 가는 곳 마다 배척을 받는 것은 마치 이 시대의 뉴에이지가 모든 종교로부터 배척과 몰리해의 대상이 되는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 소년 예수의 인도행은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있을 종교인들의 무지를 예시하기 위함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 129 > 보병궁 시대의 성서
'보병궁 성서'는 보병궁 시대를 위해 새롭게 조명된 성서다. 21세기부터는 우리 지구 태양계가 보병궁의 시대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은 또 다른 거대한 중심태양을 공전하기 때문에 지난 2천년 동안 지구와 지구 태양계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 공전의 궤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쌍어궁 시대에서 보병궁 시대로 접어든다는 것은 지구 태양계가 새로운 우주환경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천체환경이 바뀜으로 해서 찾아오는 이번의 변화는 추락이 아니라 상승이라 한다. 지구 태양계의 행성들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생해서 사는 모든 생물도 급속히 진화한다는 것이다. 어떤 우주인은 그 변화가 자연적 현상에 의한 변화이기 때문에 악인과 선인이 함께 진화한다고 하고, 어떤 우주인은 정신적으로 진화될 준비가 갖춰진 사람만이 진화의 기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악인까지도 4차원의 우주인으로 진화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약육강식은 고도의 기술에 의해 더욱 횡행하고 전쟁도 더욱 고도화된 기술전쟁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세상이 아니잖은가?
'보병궁 성서'를 쓰라는 명령을 받은 리바이 도울링은 보병궁 시대에 관한 계시도 받았다 한다.
나는 별들의 세계를 지키는 24명의 케루빔과 세라핌을 보았다. 그들은 오랜 옛날 선철들이 고대의 24장(壯)이라 언급했던 권능의 영계 인물들이다....황도대의 모든 별자리는 한 명의 케루빔과 한 명의 세라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두 개의 시대가 만나는 경계선에 섰다. 쌍어궁 시대가 끝나고 보병궁 시대가 막 시작되는 경계선이다. 나는 쌍어궁 시대의 수호령인 케루빔 라마사와 세라핌 카비엘을 보았다. 보병궁 시대의 수호령 아르케 케루빔과 사그마킬 세라핌도 보았다. 이들 하느님의 위대한 네 성령들은 시대의 경계선에 서서 성 삼위의 신의 면전에서 영토와, 힘과 지혜와 사랑의 홀을 물려받았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내가 적으려 하였으나 케루빔 라마사가 말렸다.
"지금은 안된다, 내 아들아. 지금은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형제애와 평화를 위한 신성한 율법과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사랑할 수 있는 선의를 배울 때까지는 안된다."
그리고서 나는 쌍어궁 시대의 왕홀이 보병궁 시대의 천사들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그 현장에서, 그러니까 케루빔과 세라핌의 천사들이 시대적 사명을 인계하고 인계받는 현장에서 무엇이라 말씀하신 것일까? 왜 그 명령을 아직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리바이 도울링이 그 계시를 만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조 말기의 시기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증산선생이 사람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같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과거의 루시퍼였던 아쉬타 사령관에게('강증산' 47장 참조) 보병궁 시대의 왕홀을 넘기면서 그가 과거에 주장했던 '자유선언'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러면 그것이 아직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하느님은 자유선언의 정당성을 인정하시지만 지구와 지구인들이 그것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증산선생은 신축년(1901년)부터는 연사(年事)를 자신이 맡았다고 했다. 1901년은 20세기의 첫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궐 안의 일은 짐이 맡아 하리니 궐 밖의 일은 장군이 제어하라.
케루빔과 세라핌 천사란 황도대의 12별자리를 담당하는 무관과 문관의 대천사를 가리킬 것이다. 그 중 문관(세라핌)의 대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짐(朕-임금)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아쉬타 사령관은 그리스도 사난다의 지휘하에 일한다고 했으니 무관(케루빔)의 대천사는 그리스도 사난다의 지휘를 받는 천사일 것이다.
'보병궁 성서'는 19세기를 위한 책이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를 위한 책이다. 보병궁 시대는 앞으로 2천년 간 지속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보병궁 시대의 관문인 20세기 말과 현재의 시대인 것이다. 바로 이 시대를 위해서 '보병궁 성서'는 주어진 것이다. 전환기와 관문의 시점에서 반듯이 알아야 할 길잡이로서 말이다. 보병궁 성서, 히말라야에서의 3년 반 동안의 접촉, 증산선생이 1세기 전부터 아쉬타 사령관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만들어낸 UFO 현상과 접촉자들의 메시지(상생주의, 무극대도, 우주일가)....그 외에도 미리미리 주어진 수많은 예언서들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배웠다. 이러한 배움을 통해 우리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를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한 아들이 성장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자유를 누리듯이 지구라는 행성도 우주의 한 아들이 되면서 독립과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보병궁 성서'의 주된 테마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고, 궁극적 목표는 '세계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세계교회는 곧 세계사원이라고 했다. 기독교적으로 종교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하나의 뿌리를 가졌음을 아는 것이 곧 세계사원을 세우는 일인 것이다. '보병궁 성서'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쓰여진 21세기의 성서다.
리바이 도울링을 안내한 정령 비셀은 쌍어궁 시대의 성서가 아니라 보병궁 시대의 성서를 쓸 도울링에게 필요한 예비지식으로서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의미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를 주입시킨다. 아래가 그 내용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는 성부신과 성모신과 함께 아카샤(하늘의 영역)를 거닐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권능의 신, 전지전능의 신, 사상의 신으로부터 태어난 독생자이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런 빛도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생명이 표현되었으며....그리스도 없이는 무가치한 세상이 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무한의 로고스이며 오직 그 말씀으로써 만이 사상과 힘이 나타난다....그리스도를 통하여 원형물질, 땅, 식물, 짐승, 인간, 천사, 그리고 케루빔이 그들의 단계에서 적당한 위치를 정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은 보존된다....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원형물질, 땅, 식물, 인간은 그들의 천부적인 권리를 죄에게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완전은 생명의 궁극목표이다....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종자 씨앗들은 완전을 향하여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에게 온갖 만물을 지배할 권리를 주었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지배하라는 교훈을 주었으나 인간은 점점 잔인해져서 진정한 지배권을 잃었으며 만물이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로 전락했다....그리스도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인간에게 접근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의 위대한 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그들은 곧 잊어버렸다....그래서 시대마다 새로운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병궁 성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원래의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주보편의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며 나 예수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지만 갖가지 형태의 시련을 통해 많은 유혹을 극복하고,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기름부어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 보편의 사랑이 내려와 임한 예수님이란 뜻이다. 예수라는 이름 앞에 그리스도라는 존칭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는 각 시대마다 나타난다는 것이다. 에녹도 멜기세덱도 그 시대의 그리스도였다면 그리스도 에녹, 그리스도 멜기세덱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유한한 것이다....유한성으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는 육신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인간은 정령이며 하느님의 일부다. 창조적인 명령은 인간에게 그가 영혼의 단계에서 맡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영혼을 주었고, 물질계에서 그 소임을 다하도록 육체를 주었다....인간은 신의 사상(생각)이다. 모든 신의 사상은 무한하다....신의 사상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 미친다. 그것은 정령인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모든 사상과 같이 단지 하나의 씨앗에 불과하다....그리하여 신의 씨앗으로서의 인간은 그 속에 신이 지닌 모든 부분의 온갖 속성을 깊이 간직했다....인간은 영혼의 영역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울 때까지 물질계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낮은 자아, 세속적인 자아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의 천부적인 권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잃은 신분과 유산을 다시금 회복하게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투쟁 속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인간은 수많은 시련과 유혹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권능의 온갖 정령들이 인간의 보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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