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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무관생도들
이 원 규
4 마침내 일본군 장교가 되다
지석규, 모친상으로 고국 땅을 밟다
1911년이 왔다. 2월 초 어느 날 오전, 지석규는 모친 별세 전보를 받았다. 일주일간의 특별휴가 명령이 났다고 하며 여비와 무료승차권 승선권을 건네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구대장과 반부하사관에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급우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주십시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제1중대 제1구대의 홍사익, 제3중대 제2구대의 이응준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구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사관이 급히 걸어 나갔고 오전 일과 끝 나팔이 울리자마자 사익과 응준이 달려 왔다.
“이게 웬일이냐!”하며 두 친구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지석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사익이네 고향 안성은 다녀오기 어렵지만 사람을 보내 안부를 전하겠다. 이갑 참령님 댁은 직접 다녀오겠다. 빨리들 편지를 써라.”
두 친구는 급히 편지를 썼다.
경성에 도착한 것은 도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는 2월 5일 아침이었다. 도쿄에 비해 싸늘하게 추웠다. 그는 마음이 급해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이 있는 삼청동으로 갔다.
두 살짜리 고인의 손자를 상주(喪主)로 삼아 장례를 치르고 있던 친척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어머니의 빈소로 달려가 엎드렸다. 향을 피우고 재배한 뒤 한숨 돌리면서 그는 친척들이 자신의 도착을 예상한 이유가 유년학교에서 보낸 전보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학교 교직원 및 전체 생도들과 더불어 고개 숙여 고인의 별세를 애도하며 명복을 빕 니다. 지석규 생도는 특별휴가로 출발하였습니다. 육군중앙유년학교장 육군대좌 구노오 (久能司)
서양식 사진기술 도입의 개척자가 된 그의 당숙 지운영이 전보를 건네주었다.
“부고를 전보로 보내고 하루 만에 이 조전(弔電)을 받고 일본이 사관생도인 너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알았다.”
상복을 입은 아내를 보았다. 아이를 키우고 어머니 병수발을 해서인지 그가 떠날 때보다 얼굴과 몸이 야위어 있었다.
“에미가 삯바느질을 하고 있단다.”
고모가 말해 주었다.
‘아, 나는 일본 땅에서 일본을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하느라 가족이 먹고 사는 걱정은 안했는데 아내는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예전부터 자신을 따르던 육촌동생에게 이응준과 홍사익의 편지를 주며 이갑 참령 댁과 안성 홍사익의 집에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사직동 김광서 선배 집도 생각했으나 부모와 형님 내외가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는 친척집에 맡겨졌다는 것을 아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어머니를 마포 용강(龍江)에 있는 아버지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아들을 처음 안아보았다.
“삯바느질을 한다는 말을 들었소. 미안하오.”
그의 말에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집 걱정은 하지 말아요. 아기와 저를 위해 무사하셔야 해요.”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가슴 아픈 것은 세상의 많은 지아비들처럼,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곧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고 나라를 찾기 위해 한 몸을 던져야 한다는 의지가 아기에 대한 사랑과 아내에 대한 연민보다 크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은 일요일, 떠나야 할 날이었다. 명색이 양반가이지만 삼우제는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 이갑 참령 댁을 방문했다.
단아한 모습을 한 부인이 말했다. 일본으로 떠나던 날 남대문역 환송식에서 인사를 드렸으므로 초면은 아니었다.
“이응준 생도의 편지는 받아 읽었어요. 상중이라 경황이 없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요. 우리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 옆에 여학교 교복을 입은 정희가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제가 쓴 답장입니다. 응준 오라버니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는 편지를 받아 군복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참령은 망명 후 독립투사들과 합류했으며 중국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를 거쳐 지금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독립투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희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학교 1학년이며 봄에 2학년이 된다고 했다.
1년 반 전보다 키가 컸으며 봄꽃처럼 아름다운 소녀로 변해 있었다.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망명해서인지 미소 너머에 슬픔이 고여 있는 듯했다.
저녁에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대문역에서 작별하고 다시 먼 여로에 올랐다. 사흘 뒤 유년학교에 도착했다.
비범한 우등생 홍사익과 윤상필
1911년 봄, 홍사익은 일본인 생도들 속에서도 성적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가 속한 제1중대 제1구대는 히로시마유년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이 학교 본과로 온 와치 다카시가 성적으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한국학생반이 해체되던 날 구대 대표로 와서 홍사익을 안내해 간 생도였다. 그러나 홍사익이 구대에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둘은 학과시험에서 만점 경쟁을 벌였다.
일본인 생도들은 성적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엘리트 장교가 되는 길은 ‘중앙유년학교-도쿄 주둔 부대에서 대부근무-육사-도쿄 주둔 부대 견습사관-육군대학’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그 첫 단추를 끼우는 곳이 유년학교였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했다. 와치 다카시는 부친이 큐슈(九州)지역의 유서 깊은 군벌 나카츠번(中津藩) 출신으로 현역 중좌였고, 군대에서 입신하려는 욕망이 강했으며 가문의 전통인 무사도 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홍사익이 일본역사 과목마저도 앞서자 시험을 앞두고 노트를 빌려달라는 생도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사익은 애당초 자신이 조선인이라 엘리트 코스를 가기 어렵다고 여기고 선선히 응했다.
“내일하고 모레 자습실에서 각 과목 노트를 내놓을게. 요점정리는 따로 필요 없어. 노트에 밑줄을 쳐 놓을 테니까.”
홍사익은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다. 경쟁자인 와치와 다른 점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생도들이 좋아하고 와치도 네 살 많은 그의 엽엽한 태도에 고개를 숙였다.
5월 하순 어느 날, 홍사익이 속한 구대의 스지(辻)라는 생도가 병사했다. 생도들 중 누군가가 추모시를 쓰는 게 좋겠다는 교장의 의견이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중대장이 홍사익을 바라보았다.
“네가 추모하는 한시를 쓸 수 있겠느냐?”
홍사익이 사서삼경을 줄줄이 외어 교관들이 혀를 내두르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네”하고 사익이 대답하자 빈부하사관이 화선지와 벼루, 붓을 가져왔다.
홍사익은 여섯 구 짜리 추모시를 거침없이 휘갈기듯 썼다. 그것은 장례식장에 붙여졌다. 누구든지 읽고 이해하기 쉬운 한자를 고르고 운을 맞춰 절절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터라 교장과 학교 간부들은 물론 죽은 생도의 학부모까지 감동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해졌다.
6월이 오고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주말에 일본인 생도들은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외출하지 않고 학습실에 처박혔고 조선인 생도들은 외출을 나가 일요하숙에 모여 공부했다. 홍사익은 동기생들의 학습조를 이끌면서, 윤상필이 이끄는 하급반 후배들의 학습조를 무섭게 다그쳤다.
“여기선 성적이 좋으면 무시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 애들보다 나이가 많고 체력도 좋아 술과는 이길 수 있다. 학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앞설 수 있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발표되었다. 상급반은 본과 1학년 수료 성적, 하급반은 예과 3학년 수료 성적이었는데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홍사익이 전체 학년 312명 중 3위로 우등상을 받고, 하급반의 윤상필이 예과 3학년 70여 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홍사익과 같은 구대에서 성적 경쟁을 벌였던 와치 다카시는 깨끗하게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축하해 주었다.
연병장에 생도 전원이 모인 학년 수료식에서 윤상필은 일본 황태자가 하사하는 은시계를 받고 홍사익은 우등상장을 받았다. 그날 홍사익은 자신보다 성적이 앞선 동기생 엔도 사부로(遠藤三郎)와 야나기다 겐조(柳田元三)를 만나 악수했다. 둘 다 비상한 수재로 알려진 생도들이었다.
센다이(仙台)유년학교에서 예과를 마치고 와서 이곳 본과에서 전체 2등을 차지한 엔도는 과묵하지만 야심이 큰 인상이었다.
“사서삼경을 줄줄이 외는 조선인 천재가 있다 해서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육사까지 동기생이 될 테니 잘 부탁합니다.”
수석인 야나기다는 예과도 여기서 공부했다. 눈빛이 예리하고 수재형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만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홍사익보다 네 살에서 다섯 살 어려 보이는 우등생 생도들은 허리를 60도쯤 굽혀 인사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조선 출신인 내가 부탁해야지요. 우리가 장차 좋은 인연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익은 그렇게 말하며 나이 어린 두 우등생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이들과 함께 육사에 가서도 성적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뒷날 셋이 깊은 우정으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육군대학까지 가고, 함께 육군 중장까지 올라가 일본군 수뇌부에 들어가고, 태평양전쟁을 지휘하고 패전 후 함께 전범재판에 끌려 나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6월 말에 하루 간격으로 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졸업식이 열렸다. 유년학교 생도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육사 졸업식에 참석했다. 홍사익과 조선인 생도들은 작년에는 위탁생 신분이라 그냥 구경삼아 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일본인 생도들과 섞여 행진해 가야 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긍지가 서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 뒤 당당히 겨뤄 1등과 3등을 차지했고 김광서 선배가 졸업하기 때문이었다.
천황이 탄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예포가 울렸다.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식이 시작되었다. 700여 명의 졸업생들이 고별행진을 하며 연병장을 한 바퀴 돌고 천황과 황태자의 사열을 받았다.
식이 끝나고 졸업생들은 가족과 축하객들에 둘러싸였다. 김광서는 가족이 없었으나 후배들의 따뜻한 축하를 받았다.
그는 두 눈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다시 아카사카 기병연대로 가서 견습사관 근무를 한다. 거기서 일요하숙이 전차로 열 정거장이니 멀지 않지만 견습사관 일이 바빠 자주 못 올 거야.”
여름이 가고 가을 새 학기가 왔다. 조선인 생도들은 본과 2학년과 1학년에 진급했다. 일본인 생도들은 자기네 국민성이 그런 것처럼 깨끗하게 조선인 생도들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학교생활이 수월해졌다.
어느 날, 홍사익은 자기 구대의 급우로부터 영친왕이 예과 2학년으로 편입해 왔다는 말을 들었다. 급우는 큐슈 출신인데 일요하숙에 갔을 때 거기서 예과 2학년 고향 후배가 자기 구대에 영친왕이 들어왔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영친왕을 어린 나이에 볼모로 끌어와 황족들의 학습원에 넣었다더니 일본군 장교로 만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정을 더 알아보았다.
다음주 일요하숙에 조선인 생도들이 모였다. 홍사익은 자신이 알아 낸 내용을 말했다.
“영친왕 전하는 친일 대신(大臣) 조중응(趙重應)의 아들 조대호, 그리고 전하의 생모이신 엄귀비(嚴貴妃)의 오빠 엄준원의 아들, 그러니까 고종사촌이 되는 엄주명(嚴柱明)하고 같이 편입해오셨습니다. 조대호는 예과 2학년으로 전하와 같은 구대, 엄주명은 1학년입니다. 전하는 일본의 황족과 똑같은 예우를 받으시고 조대호가 곁에 있어서 우리가 염려할 일은 없다고 봅니다. 내게 부탁 받은 생도가 ‘지금 유년학교에 조선인 생도들이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알고 있다. 보고 싶지만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지.’하고 대답하셨답니다.”
하급반 김석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 말은 전하 자신이 볼모로 끌려온 몸이니까 일본 사람들 신경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뜻 같습니다.”
지석규도 의견을 말했다.
“김석원 생도 말에 동의합니다. 학교 측으로서는 우리들이 영친왕 전하 중심으로 뭉치는 게 달가울 리가 없지요. 전하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시다.”
그 말이 결국 결론이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홍사익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교관단 휘장을 단 중위에게 불려 복도로 나갔다. 중위가 말했다.
“나는 이왕가(李王家) 왕세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이다. 나를 따라오라.”
그는 생도대의 한 별실에서 영친왕을 만났다.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나이 어린 생도가 고급 가죽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은(李垠)’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홍사익은 차렷 자세로 서서 경례했다. 영친왕은 앉으라는 뜻으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솜털 같은 콧수염이 나 있었지만 앳된 얼굴이었다. 나이가 열너덧 살은 됐을 텐데 더 어려 보였다.
“모두들 잘 있는가?”
홍사익은 의자에 앉으며 어깨를 꼿꼿이 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영친왕은 금장 만년필을 들고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네가 성적이 매우 우수하다고 들었다. 비결이 있는가?”
“황공하오나 비결은 없사옵니다. 수업 중에 집중해서 듣고 그 자리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하는 것이옵니다.”
영친왕은 눈을 약간 찡그렸다.
“상식적인 걸 물은 게 아니야.”
홍사익은 방에 들어온 지 5분도 안 되었는데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목이 탔다.
“암기 요령이 있사옵니다. 예를 들어 보병소대 전투의 공격집결지 행동 8단계를 쓰라는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각 항목의 첫 글자를 따서 외웁니다. 경계병 배치, 화기 임시 거치, 사계(射界) 청소, 통신망 점검, 지뢰 매설, 장애물 설치, 탄약 수령, 명령 대기, 이렇게 여덟 항목에서 첫 글자를 따서 문장을 만들어 외웁니다. ‘경화사라는 절에 가려면 미리 통지해야 애를 태우지 않고 약수를 마시며 기다릴 수가 있다’ 식으로 하는 것이옵니다.”
영친왕은 손뼉을 치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참 좋은 방법이야.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
홍사익은 그 정도라도 만족시켜 드리고 마치고 나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을 나왔다.
12월 둘째 주에 좋은 일이 생겼다.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던 김광서 선배가 임관하여 소위 계급장을 달고 일요하숙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육군 장교의 정복을 입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8개의 단추가 세로로 줄지어 달린 두툼한 모직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목의 깃 부분에 기병병과가 표시를, 어깨 위에는 소위를 나타내는 별을 하나 붙인 차림이었다.
후배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얼싸안고 축하해주었다.
“내 임지는 그대로 아카사카 기병1연대이다. 휴가 받아 집에 간다. 세 시간 뒤에 기차를 탄다.”
후배들은 와 함성을 올렸다.
“휴가는 며칠간인가요?”
이응준이 물었다.
“보름간이야. 결혼식을 하고 와야지. 7년을 기다려 준 약혼녀에게 미안해서 미룰 수가 없어.”
보름 뒤 김광서 선배는 휴가를 끝내고 돌아왔다. 신혼의 아내는 두고 혼자 왔다.
육군사관학교
1912년 새해가 왔다. 이응준은 23세가 되고 중앙유년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시작했다. 처음 편입해 왔을 때처럼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5월 말 유년학교를 졸업했다. 대부근무 명령서에 따라 동기생들과 헤어져야 했다. 도쿄 주둔 1사단으로 갈 사람은 홍사익과 이응준 둘뿐이었다. 홍사익은 아카사카에 있는 보병1연대, 응준은 아자부구(麻布區)에 있는 보병3연대였다.
그밖에 조철호와 박승훈은 제2사단 예하 센다이연대, 신태영과 유승렬은 3사단 예하 나고야(名古屋)연대, 안영범과 권영한은 6사단 예하 쿠마모토(熊本)연대, 지석규와 민덕호는 10사단 예하 효고현(兵庫縣) 히메지(姬路) 주둔 10연대, 김준원과 이대영은 11사단의 젠쓰지(善通寺)연대와 마루카메(丸龜)연대, 염창섭은 16사단 교토(京都)연대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대부근무 종료 후 돌아와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이 되어 그 부대로 다시 배속될 것이었다.
이응준은 멀리 가는 11명의 동기생들과 포옹을 하고 건투를 빌었다. 지석규와는 뜨거운 감정으로 포옹했다.
“부디 무사하게 복무를 마치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행운을 빈다.”
“그래, 나도 너의 행운을 빈다.”
지석규는 석별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응준은 반 년 간 실무부대 근무를 하는 동안 같은 도쿄 1사단에 있는 홍사익도 만나지 못했다.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연대에 배속된 육사 입학예비생은 그를 포함해 8명이었다. 육사 입학 예비생이긴 하지만 사병 대우를 받으며 사병들과 숙식을 같이했다. 모든 장교들이 주목하며 사소한 것까지 지적해 기합을 주며 훈계를 했다. 근무평정이 나쁘면 육사에 가지 못하고 도태될 수 있었으며,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 근무를 하러 이 부대로 다시 올 수 없었다.
정신없이 반년이 지나 12월이 되고 대부근무를 수료한 뒤에야 그는 지석규 · 홍사익과 만났다. 약속한 음식점에서 만나자마자 세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얼싸안았다.
그들은 육군사관학교 입학식을 이틀 앞둔 일요일 낮, 아카사카에 있는 김광서 소위의 숙소를 찾아갔다. 김광서 당번병이 만든 돼지고기 안주를 내놓고 일본식 청주인 사케를 후배들에게 안겼다.
“우리 민족이 왜놈들을 밀어내자고 뭉칠 날이 반드시 온다. 언제고 그 날이 오면 내가 전보를 친다. 암호는 요코하마이다. ‘요코하마가 그립다’ 혹은 ‘요코하마에 가려고 한다’ 그런 전보를 치면 다음날 탈출이다. 술잔을 들어 맹세하자!”
“맹세합니다.”
네 사람은 맹세를 확인하는 술잔을 들었다.
이틀 뒤 이응준은 일본 각지에서 대부근무를 끝내고 온 사관후보생 766명과 함께 육사에 입학했다. 조선 출신은 그를 포함하여 13명, 모두 삼청동 무관학교에서부터 같은 길을 걸어온 동기들이었다.
사관학교의 교육은 본격적인 군사교육이었다. 그가 밟았던 유년학교 과정은 육사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전술학 병기학 축성학 교통학 등의 군사학과, 교련, 진중근무, 검술, 사격, 마술(馬術) 등의 술과(術科)와, 조전(操典), 교범(敎範), 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내무(內務), 예식, 그리고 외국어 등을 배웠다. 내무생활은 빠듯하고 고되었다.
이응준은 두려움 없이 느긋하게 대처하며 생도생활을 즐겼다. 일요일이면 일요하숙에 꼭 들렀으나 거기 죽치고 있지는 않았다. 12명의 동기생들도 각자 충분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고 후배들도 비록 하급생이긴 하나 유년학교 졸업반이고 일본생활에 이골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염창섭이 까까머리를 한 아우 상섭을 데리고 일요하숙에 왔다. 경성에서 보성중학을 다니다가 유학 와서 아자부중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응준의 중학교 후배가 되는데다가 아자부중학교는 응준이 대부근무를 한 3연대에서 가까웠다.
상섭은 꾸벅 인사했다.
“선배님 말씀을 보성중학에서도 들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응준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응준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일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그는 봄이 오자 일본인 생도들과 어울려 다녔다. 조선인 생도들이 일본인 생도들을 친구로 사귀기는 조금 힘들었는데 이쪽이 그들의 형과 엇비슷하게 나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응준은 그것도 잘했다. 성격이 엽엽하고 잘생긴 덕이었다.
홍사익도 그걸 잘했다. 유년학교 우등 졸업자들인 엔도 사부로와 야나기다 겐조를 가까이 하며 우정을 쌓고 있었다. 둘 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며 사려가 깊은 홍사익에게 끌려들고 있어서 가끔은 형이라고 부르는데, 그러고도 시험 때는 경쟁을 하는 독특한 사이였다.
이응준이 어느 토요일 오후, 자기 구대에서 축구경기가 있어서 늦게 외출 나가 보니 일요하숙이 텅 비어 있었다. 한꺼번에 사라진 걸 보니 활동사진 구경이라도 간 것 같았다. 혼자서 뭘 할까 망설이는데 김광서 소위가 왔다.
“잘 됐다. 나하고 갈 데가 있다.”
김광서 소위가 이응준을 잡아끌었다.
전차를 타고 가서 도착한 곳은 간다구(神田區) 니시오가와초(西小川町)에 있는 대한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정문에 ‘재동경한국인유학생학우회 월례모임’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던 해 가입했던 대한흥학회가 강제합방 후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나와 함께 일본으로 온 황실특파유학생 동기들은 을사년 보호조약 때 동맹휴학을 하고 난리들을 쳤지. 태반이 복학을 했고, 빈 자리는 정부가 뽑아보낸 보결생으로 채워졌지. 거의 모두 공부 마치고 귀국했고, 지금은 후배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도 열고 하지. 나는 바빠서 오랜만에 가는 거야.”
김 소위의 말을 들으며 응준은 따라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60여 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막 회의를 시작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몇몇 회원이 김 소위를 반갑게 포옹을 하고 김 소위가 응준을 소개했다. 유학생학우회 회장인 메이지(明治)대학 법과생 송진우(宋鎭禹 1889~1945)가 응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사관학교에 계신 분들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유대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응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갑자기 일본에 실려 와서 군사교육에 적응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응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누구야? 김영섭이 아닌가?”
“그래, 응준아. 잘 지냈어?”
두 사람은 얼싸안았다. 삼청동 무관학교를 같이 다니고, 일본행을 거부했던 동기생이었다.
김영섭은 동기생들이 일본으로 떠난 뒤 황해도에서 교원 노릇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도쿄 와세다대학에 유학 왔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지라 와세다를 졸업하면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될 거라고 했다.
“군인은 적을 죽이는 게 목표이고 목사는 인간을 구원하는 게 목표인데 자넨 진로를 정반대 쪽으로 바꾸었군.”
이응준의 말에 김영섭은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회의가 열리고 응준은 60여 명의 유학생학우회 회원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 환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들 사관생도들도 대부분 대한흥학회 시절부터 가입했는데 이제야 제가 오게 됐습니다. 저희는 44명이 일본에 왔고 지금은 36명이 육사와 중앙유년학교 졸업반에 들어 있습니다. 생도대에 갇혀 살아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조국을 잊지 말자고 수백 번 다짐하며 지내왔습니다. 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대해 보고하고 앞으로 가끔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학문과 교양도 높으시고 식견도 높으신 분들이니 저희를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학생들은 환영의 뜻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유학생학우회는 이런저런 의견교환을 한 뒤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일본을 규탄하는 발언들이 쏟아졌다. 유학생들은 육사 생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일본을 성토했다.
토론이 끝나고 근처의 값싼 조선식 음식점으로 몰려갔다. 골목길을 함께 걸어가는데 유학생 하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곁으로 붙어 손을 내밀었다.
“이응준 형, 나는 이갑 참령님의 조카 이태희입니다.”
응준은 상대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 우리가 이제야 만나는군요.”
고국을 떠나던 해 애국지사들 모임에 갔다가 마차 타고 돌아오는 길에 이 참령이 기억해 두라고 말한 바로 그 조카였다.
“참령님은 어떠십니까?”
“최근 소식을 모르시는군요. 러시아 땅에서 전신불수로 쓰러지셨습니다. 숙모님과 정희가 병구완을 위해 가려고 준비 중일 겁니다.”
“아, 참령님! 저는 그러신 줄도 모르고….”
응준은 울먹거렸다.
음식점에서 응준은 장덕수(張德秀 1894~1947) · 김성수(金性洙 1897~1955) · 현상윤(玄相允 1893~?) ·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 유학생학우회의 간부들과 섞여 빈대떡으로 속을 채웠다. 그러고 이태희와 조용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
“작년 여름방학에 경성 갔는데 숙모님께서 이 형 이야기를 하셔서 한 번 찾아가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제가 학교가 지바 현(千葉縣)에 있는지라 그러지 못했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일본으로 오던 해 참령님께 이 형 말씀을 들었지요. …참령님은 부모님보다도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하며 조선식 탁주잔을 기울였다.
모임에 참석한 유학생들 중 여학생도 십여 명이 있었다. 그 중 넷이 따로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김영섭이 그를 그녀들에게 데려갔다. 모두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졸업하면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갈 여성들이었다.
“사관생도 제복이 참 잘 어울리세요. 활동사진 배우처럼 잘생기셨어요.”
검정색 블라우스에 은색 브로치를 가슴에 단 여학생이 말했다. 다른 여학생들도 그렇다는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도 제복을 입은 어깨를 꼿꼿이 폈다. 제복이 잘 어울린다고 말한 브로치를 한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눈이 선해 보이고 가장 아름다웠다.
“첫인상이 좋으십니다. 이름과 고향을 여쭈어도 될까요?”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정말 사관생도다우셔요. 저는 경성 출신이고 이름은 김선희(金善姬)입니다.”
그때 다른 테이블 남학생들이 응준을 자기들 쪽으로 데려 오라고 김영섭에게 성화를 하여 응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관생도답게 민첩하고 멋있는 동작으로 여학생들에게 경례했다.
“여러분, 감사했습니다.”
오랜만에 모임에 간 김광서도 인기가 있었지만 이응준은 이쪽저쪽 옮겨 다니며 어울려야 했다. 일본의 명문대학에 다니는 유학생들은 사관생도들과는 대화의 폭이 달랐다. 일본의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울분을 토했다. 사관생도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열심히 대화에 끼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모르는 것은 묻기도 했다.
그날 학교로 복귀하는 길에 김영섭을 일요하숙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 남아 있던 생도들은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일요하숙은 난리법석이 되었다. 일본행을 거부했던 고국 무관학교 동기생이기 때문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동기생과 후배들에게 유학생학우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등사범학교 여학생들 이야기를 하자 동기생과 후배들은 뒤로 자빠지며 다시 야단법석이 되었다.
다음 달 유학생학우회 모임에 조선인 생도들이 한꺼번에 몰려갔다. 김광서 소위가 오지 못한 터라 이응준이 저절로 양쪽을 연결하는 리더가 되었다. 열띤 토론을 한 뒤에 유학생과 생도들이 어울리어 그곳에서 가까운 스미다강(隅田川) 강변으로 벚꽃 구경을 갔다. 벚꽃이 만개한 강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유학생과 생도들은 풀밭에 앉자 커다란 등불처럼 타오르는 꽃 더미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었다.
응준은 도쿄고등사범의 김선희와 벚꽃나무 밑을 거닐었다.
“제가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육사에 들어가려면 일백 대 일 이상 경쟁을 뚫어야 한대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그녀가 벚꽃더미 아래 서서 말했다. 햇빛이 꽃들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과 하얀 블라우스에 분홍색 꽃그늘이 드리워졌다.
“일본은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이므로 당연히 장교 교육에 정성을 다합니다. 그런데 더 큰 정성을 기울이는 분야가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바로 선희 씨 같은 미래의 교사를 키우는 사범교육이지요.”
김선희는 벚꽃 그늘 속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사범학교를 좋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우리 민족이 갱생하는 길은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교육을 통해 민족이 갱생을 해야 해요. 독립은 희망일 뿐이지요. 일본이라는 벽이 매우 높고 단단하니까요.”
외출 나온 유년학교 일본인 생도 하나가 그와 마주치자 꼿꼿이 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답례를 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번 홍수가 몰아치면 아무리 단단한 벽도 무너지게 마련이지요. 이천만 명 조선민족이 하나로 뭉치면 홍수가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사관학교는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무수히 강조하고 생도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단단한 벽의 일부가 되게 만들어가는 곳일 텐데 말이에요. 처음 모임에 오신 날, 지난 3년 동안 조국을 잊지 말자고 수백 번 다짐했다고 하셨지요?”
이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살았어요.”
“유학생학우회 토론은 어떻게 보셨어요?”
“내가 아는 이태희 형이나 김영섭 형처럼 학비를 대는 부형이 애국자인 경우는 당당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갈등하고 있더군요. 이 시대에 일본 유학을 온다는 건 말이지요. 일부 고학생들 빼놓고는 부형이 조선총독부에 적당히 협조하며 타협해 모은 돈으로 학비를 보내줘 가능한 거니까요.”
김선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저도 그런 면에서는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해요. 아버지가 일진회원이며 총독부 중추원 찬의이시니까요.”
“아, 그러신가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걸으며 그녀에게 해줄 말을 생각했다.
“출신이 어떠냐 하는 것보다 실천의지가 중요하지요. 문제는 누가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훈훈한 바람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듯 불고 벚꽃 잎들이 눈송이처럼 우수수 강물 위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강둑에 발을 멈추고 내려다보았다. 도쿄의 명물 스미다 강의 물은 꽃잎으로 덮여 흘러가고 있었다.
이날 헤어지면서 그녀는 자신의 기숙사 주소를 적어주었다.
“편지 주셔도 되요.”
“그럴게요. 사관생도의 편지는 검열을 받기 때문에 일본어로 쓸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답장을 보낸다면 그것도 검열하나요?”
“아닙니다. 선희 씨는 통제 받는 생도가 아니니까요.”
다른 생도들도 그랬지만 이응준은 모임에 나가 대학생들의 토론을 듣고 지식과 사유의 폭을 넓혀 나가는 것이 좋았다. 조선인 육사 생도들은 야전훈련과 당직근무가 아니면 유학생학우회 모임에 나가 유학생들과 유대를 이어갔다.
이응준은 김선희와의 교제를 이어 갔다. 편지로 연락하고 몇 차례는 단둘이 만났다.
어느 날, 그녀를 만나고 학교로 들어가기 전 일요하숙에 들러서 지석규와 홍사익을 만나 같이 학교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가 오늘도 김선희와 만났다고 고백하자 두 친구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했다.
다음 주에 응준은 긴자 거리로 김선희를 만나러 갔다. 30년 전 화재가 난 뒤 서양풍으로 재건했다는 벽돌거리에 ‘카페 파울리스타’라는 브라질 명칭의 카페가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까맣게 탄 숭늉 같은 물을 잔에 담아 왔다. 그게 처음 먹어 보는 커피였다.
“커피는 처음 마십니다. 각성효과가 있다고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모양인데 맛이 쓰군요.”
이응준이 그렇게 말하자 김선희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 전통적인 다도가 있는데 그걸 버리고 의자에 앉아서 서양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군요.”
친구들 이야기를 하다가 지석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가장 점잖고 신중합니다. 글쎄 결혼 초야에 아내에게 말했어요. 자기는 나라를 지키려고 결심했으므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자기를 용납할 수 없으면 결혼을 물러도 좋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신부가 좋다고, 각오한 바라고 했어요. 선희 씨라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의도한 바는 아닌데 결혼 의향을 물은 셈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독립투쟁에 몸을 던지는 일은 옳지만 무모하다고 생각해요. 일본에 지배당하는 현실은 너무 견고해요.”
이응준은 실망스럽고 조금 화가 났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우리는 결혼은 할 수 없겠군요.”
“저는 응준 씨가 좋은데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노력하지요.”
슬픈 마음도,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정성을 다하며 그녀와 남은 시간을 보냈고 조금 이른 시간에 학교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총총히 발을 돌렸다.
6월이 오고 육사 재학 중 가장 고통스럽다는 야영훈련이 다가왔다. 지바 현의 나라시노(習志野) 훈련장에서 열흘 동안 전술훈련을 하는데 시작부터 큰 고비였다. 총을 들고 20킬로그램 배낭을 멘 완전군장에 네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훈련 출발을 앞둔 날 밤 중대장이 말했다.
“생애 최고 고난의 언덕을 넘을 것이니 잠을 충분히 자둬라. 너무 힘들어서 보통 생도중대 150명 중 20명 남짓 제 시간에 도착한다. 그야말로 자기 체력의 밑바닥, 인내력의 밑바닥을 만져보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 중 시간 내 완주자가 30명까지 나오기를 기대한다. 알겠지만 이번 훈련 결과는 학교성적에도 많이 반영된다,”
다음날 응준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고국의 무관학교 시절 남산을 왕복하는 구보에서 1등을 해서 황제가 주는 은시계를 탄 그였다. 그때는 25명이었고 이번에는 각 중대가 시간차를 두고 떠나지만 보병병과 전원 450명이었다.
절반거리를 통과하자 심폐기능이 약한 생도들이 먼저 뒤로 처졌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는 자기최면을 걸면서 계속 달렸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배낭끈이 젖은 어깨를 파고들었다. 소총은 쇠뭉치처럼 무겁고 심장이 터질 듯 급히 뛰었다. 내장이 뜨거워져 헉헉 숨을 쉴 때마다 단내가 올라왔다.
“심장아, 너는 할 수 있지. 뭐든지 할 수 있지.”
수통을 들어 머리 위에 부으며 그는 자신의 심장에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심장의 고통이 사라지고 무아지경처럼 편안해진 것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말하는 심폐의 적응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심장아, 고맙다 고맙다, 중얼거리며 똑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5킬로미터가 남았을 때, 그는 3명과 함께 선두그룹을 형성해 달리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으니 속도를 올리자는 뜻으로 손으로 앞을 가리키자 생도들이 손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 중대 최고 기록 부탁해.”
“그래, 먼저 간다.” 그는 속도를 냈다.
그때 중대장이 말을 타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응준, 이대로 가면 넌 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달려 도착점에 발을 찍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네가 금년 최고기록이다!”
중대장이 그를 끌어안고 배낭을 벗겼다.
나머지 훈련하는 기간 일본인 생도들이 보는 눈이 달라졌다. 깨끗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국민성이었다.
훈련에서 복귀한 첫 주말에 일요하숙에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다시 모였다. 하급반이 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대부근무에 들어가게 되어 김광서 소위도 격려차 왔다. 응준은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확인해보니 무관학교 동기생들은 대부분이 장거리 구보에서 제 시간 도착을 달성했다.
“조선민족이 우수하다는 걸 선명하게 알렸지. 참 잘했다.”
김광서 소위와 후배 생도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후배 이응섭이 육사에 가는 걸 포기하며 대부근무를 안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응섭은 응준과 이름이 비슷해 사촌동생이라고 불려온 후배였다. 김광서 선배가, 4년이나 고생했고 이제 남은 게 2년이니 마치는 게 좋지 않느냐고 말하자 이응섭은 고개를 저었다.
“매일 아침 일본 왕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와 군인칙유 낭독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바위나 언덕처럼 불변하지 않고 사람은 변합니다.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민족 앞에 군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이응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중 자퇴자도 있었고 합방되던 날 뛰쳐나간 친구들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온 것은 신중한 결정이기 때문이었다. 이응섭은 결국 육사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쌌다.
방학이 다가왔다. 일본 육사 당국은 조선인 생도들이 문제없이 융화되었다고 판단한 듯 ‘방학 중 귀성 허용’이라는 특별조치를 내렸다. 조선인 생도들은 모친상을 당해 특별휴가를 받았던 지석규 외에는 아무도 고국에 다녀오지 못했으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귀국길에 올랐다. 이응준은 지석규 · 홍사익과 동행했다. 홍사익은 경부선을 타고 올라오는 길에 평택에서 내렸고 지석규는 경성역에 내리자마자 삼청동 집으로 달려갔다.
이응준은 고향집으로 떠나기 전에 원동 이 참령 댁으로 갔다. 그러나 지난날 청지기였던 사람을 만났을 뿐이었다. 이태희의 말대로 부인과 정희가 병구완을 하러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골목을 걸어 나왔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초가지붕들, 때에 절어 버린 흰옷을 입은 사람들, 태어나서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은, 목에 때가 낀 맨발의 아이들. 그가 머물던 도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참령의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참령 댁에 있을 때 수학과 과학을 가르쳐 준 김형섭 정위를 찾아갔다. 이 참령의 죽마고우였으며 방황하던 그를 일본 유학의 길로 이끌었던 김 정위는 응준이 아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다.
“나하고는 연락이 끊어졌어. 그 사람은 정신력이 강한 지사(志士)야. 이국땅에서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할 뿐이야.”
젊은 날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변란을 계획했던 김형섭은 총독부와 타협하여 패망하여 명목만 남은 왕실을 보좌하는 무관 노릇을 하며 초라한 지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응준의 귀환 소식은 그를 통해 옛 대한제국 군부 인사들에게 알려졌다. 꼭 응준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삼청동 무관학교 시절 노백린 정령에 이어 교장을 맡았던 이희두 장군이었다. 그를 만나 제자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 것이었다.
이응준이 찾아가자 일본에 타협하며 지위를 이어가고 있던 장군은 반색하며 맞았다. 그는 자신과 동기생, 후배들이 걸어온 과정을 보고하듯이 이야기했다.
장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떠나간 생도들이 잘 적응해 육사를 다니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비록 열 명 가까이 탈락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경성에 머무는 동안 묵으라고 자기 집의 빈 방을 내주었다.
다음날 저녁 장군이 말했다.
“네가 우리 집에 묵는 걸 알고 청혼을 해온 집이 있다. 최고의 가문이며 최고의 규수다.”
응준이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장군님, 저는 아직 결혼할 수 없습니다.”
장군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응준의 가슴 속은 이갑 참령의 병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어린 나이에 여학교를 휴학하고 아버지를 구완하러 간 정희에 대한 연민도 밀려 왔다.
그는 경성에 이틀 머무르며 보성중학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사관학교보다 대학이 방학이 빨라 한 발 앞서 귀국한 김선희의 주소가 수첩에 적혀 있었으나 연락하지 않았다.
경성 도착 사흘째 되는 날 부모님을 뵈러 북행길에 올랐다. 그의 가족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이사해 있었다. 전보다는 살림이 나아져 있었으나 아우들이 커가고 있었다.
“막내 영준이가 공부를 잘한다. 네가 칭찬 좀 해 줘라.”
어머니가 말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아우는 형의 사관생도 모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상은 넓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해라. 경성의 배재중학은 학비도 싸고 장학금도 많다. 부모님이 뒤를 못 대면 형이 하마.”
그의 말에 아우는 기뻐서 두 눈에 웃음이 가득 찼다.
가족과 사흘을 보낸 그는 다시 경성으로 갔다. 경부선 열차를 타기 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그는 안현동의 옛 이 참령 댁에 들렀다. 자신이 머리를 땋은 가출소년으로 참령의 말에 실려와 묵었던 집.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대문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담장 밖에서 발돋움을 하고 자신이 공부하던 방, 정희의 방, 그리고 참령의 체취가 서린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정희에게 목말을 태워 살구를 따게 한 정원의 살구나무가 보였다. 어린 정희가 떼를 써서 올려 주었던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치고 있었으며 살구가 그때처럼 알맞게 익어 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올려 그것을 하나 따서 들고 그곳을 떠났다.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다
다음해인 1914년 5월 말, 이응준은 육사를 26기로 졸업했다. 그의 졸업 석차는 전체 760명 중 32위, 홍사익은 22위였다. 그들을 포함한 조선인 동기생들은 견습사관 근무를 위해 대부근무를 했던 부대를 찾아가며 다시 흩어져야 했다.
이응준은 다시 아자부구에 있는 보병 3연대로 가서 견습사관 근무를 시작했다. 견습사관은 하사관의 최고계급인 조장(曹長)과 위상이 같았다. 부대에서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병사들의 교육훈련이고 또 하나는 숙직과 일직 등 당직 근무였다. 이응준은 매일 펼쳐지는 교육훈련 때 미리 나가서 병사들의 집합상태와 건강, 장비를 점검해 놓고 장교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소위나 중위 들이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면 대신 맡아서 해 주었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고 이해 12월에 그는 마침내 어깨에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1906년 아버지의 돈 3원 50전을 훔쳐 가출하고 9년, 일본에 온 지 6년 만에 생애의 한 매듭을 지은 것이었다.
이 무렵 세계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럽을 거쳐 중동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영국 ·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도 참전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군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근무했다.
홍사익 소위와 조철호 소위
1915년 1월 초, 홍사익은 도쿄 제1연대에서 신참 소대장 임무를 시작했다. 견습사관 시절에도 근무했던 중대였다. 부임 인사 때 소대원들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조선 출신이다.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소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미 그가 조선 출신임을 알고 있던 하사관과 병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견습사관시절의 충실한 근무태도를 알기 때문에 이미 그의 부임을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임무에 엄격하지만 지혜로운 장교여서 부하들의 마음을 꿰뚫듯이 읽었다. 견습사관 시절에도 군대의 일에 통달하고 있었으며 말이 적은 편인데도 범접할 수 없는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의 고향과 부모형제 이름까지 외고 있었다.
선배 장교들도 그를 반겼지만 가장 좋아한 사람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 대위였다. 6개월 간의 견습사관 시절에도 중대장으로서 사익을 지도했던 오카무라는 육군대학 출신으로 일본 육군의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그러나 사익이 소대장이 된 한 달 뒤 육군참모본부로 전속명령을 받았다. 출세와 빠른 진급이 보장되는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그는 송별회식 자리에서 홍사익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는 최고의 소위이다. 조선 출신인 게 좀 아쉽지만 최고인 건 최고인 거다. 대대장님께서도 너를 인정하신다. 어제 네 신상을 물어서 아는 대로 말씀드렸다. 태만하지 말고 이대로 달려가라. 언제고 다시 함께 근무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겠다.”
“고맙습니다. 중대장님께서 그동안 잘 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충고를 잊지 않고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홍사익은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동기생인 조철호가 찾아왔다. 센다이에 있는 부대에서 초임장교로 일할 때인데 어쩐 일인가 하며 일과 후 외출신청을 해서 만났다.
“우리는 고국 유년학교 입학 때부터 같이 왔으니까 11년 간 동기생이었지.”
조철호는 쓸쓸한 얼굴을 하더니 사익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래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 퇴역신청을 했고 일단 휴직상태가 됐다.”
“뭐라고?” 홍사익은 조철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미 결정돼 경성으로 가는 길이다. 내 나라를 빼앗은 일본군 장교 노릇은 할 수 없어서다. 동기생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못하니 네가 잘 말해 줘라. 그동안 고마웠다고.”
조철호는 홍사익과 함께 고국에서 유년학교 3년, 무관학교 2년, 일본에 와서 유년학교 3년과 육사 1년 반, 모두 합해 10년 이상 고락을 같이했다. 어려운 고비를 모두 넘겨 소위 계급장을 달았는데 곧바로 군복을 벗겠다는 것이었다.
“너는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솔직하구나. 기다리면 언젠가 우리가 독립투쟁에 나설 때가 온다고 나는 믿지만 네 결심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네 신념을 존중한다. 뒷날 같은 길에서 만날 수 있기를 빈다.”
홍사익은 허탈한 표정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전의회 조직, 그리고 슬픈 조국 황제
1915년 새해가 왔다. 지석규 소위는 도쿄로부터 남서쪽 200킬로미터 쯤 떨어진 효고현의 항구도시 히메지 시에 있는 보병 10연대 독신장교 숙소에서 새해를 맞았다. 영외거주를 할 수 있었으나 독신장교 숙소를 썼다. 사병 1명이 당번병으로 배정되어 있어서 불편한 것이 거의 없었다. 견습사관 시절에 비해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졌는데 월급이 4원 50전에서 43원 50전으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부대 안 매점인 주보(酒保)에서 외상을 달아놓고 술이나 감미품을 쓸 수 있었으나 돈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그는 조선식 나이로 벌써 28세였으며 지난해 4월 아내가 둘째 아이로 딸을 출산했기 때문에 네 식구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지난해 재작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 집에 가서 아내와 같이 지냈는데 아기가 생긴 것이었다. 같이 근무하는 장교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와 영외거주를 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언제 부대를 탈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4월에 갑자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과 일․영동맹을 맺은 터라 영국 편을 든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 샨둥(山東)반도 자오저우만(膠州灣)에 주둔중인 독일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대규모 파병을 하게 되었고 그가 속한 연대가 출정부대에 포함되었다.
“아, 이 전쟁은 중국 땅을 놓고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땅뺏기 싸움을 하는 건데 내가 휘말리는구나.”
그는 그렇게 탄식하며 출정 길에 올랐다. 그는 32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보병 소대장이었다. 성격이 꼿꼿하고 의지가 강한 그는 부하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중국 땅에 상륙해 소대를 이끌고 전투에 투입된 그는 두 차례 공격전투에 참가했다. 목표를 점령한 뒤 중대장으로부터 용감하고 탁월한 지휘를 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일본의 국익을 위해 싸우는 초급지휘관, 바로 그게 아닌가.’
그는 수많은 총탄을 발사한 소총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행해 중얼거렸다. 다음명령을 기다리며 이삼 일 쉬는 동안에 끊임없이 회의에 잠겼다. 일단 참전한 몸이 되면 일선 소대장이란 돌아가는 기계의 보통 크기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만약 내 조국의 의병들과 싸우게 된다면 그때도 그럴 게 아닌가.’
그가 존경해 온 김광서 선배와, 형제처럼 믿고 의지해 온 홍사익과 이응준, 그들보다 먼저 전쟁의 폭풍 속에 뛰어든 그런 생각을 하며 갈등에 빠졌다. 임관하자마자 모든 것을 포기한 조철호가 옳은지도 생각도 들었다.
그 갈등 때문인지 세 번째 전투에서 적탄에 다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일본으로 후송될 정도의 중상은 아니어서 야전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을 받고 누워 지냈다. 그러면서 김광서 선배와 홍사익 · 이응준에게 편지를 썼다. 일단 전장에 서면 움쩍도 할 수 없다고, 개인의 의지나 결심 따위는 전쟁이 삼켜버린다고.
중국에서의 전투는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은 일본의 승리고 끝나고 그는 부대와 함께 효고현 히메지로 귀환했다. 부대에 홍사익과 이응준의 답장, 그리고 조철호의 편지가 와 있었다. 군에서 제대를 허락하지 않아 아직 휴직 상태이며 장교 신분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五山)학교 체육교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산학교를 알고 있었다. 선각자인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자기 고향에 세운 사립학교로서 민족정신을 강조해 온, 그리고 사관학교 같은 성격을 가진 학교였다.
아내가 간호하기 위해 딸아이와 함께 히메지로 왔고 그는 셋집을 얻어 영외거주를 했다. 결혼하고 6년 만에 제대로 된 살림을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적국의 장교복을 입고 적국의 한복판에서 집을 얻었지만 그는 행복했다.
그런 가운데 겨울이 지나가고 1916년 새해가 왔다. 도쿄에 있는 김광서 선배, 지석규 소위, 이응준 소위와는 새해 안부를 묻는 편지만 주고받았다.
아내의 정성 때문인지 두 달이 지나자 부상당한 상처는 아물었다. 그는 다시 정상근무에 들어가 다시 소대장 보직을 받았다.
이응준은 보병중대에서 위수(衛戍) 임무와 사병 교육을 맡고 있었다. 중대의 병기, 탄약고, 피복창고 등의 상황을 수시로 순시 감독하여 중대장을 보좌하면서 병사들에게 사격과 총검술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봄에는 도쿄 동쪽 지바현의 나라시노 훈련장에서, 여름에는 후지산(富士山) 산록에서 벌어지는 기동훈련에 참가했다.
후지산 기동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니 이태희가 면회를 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가면서 남긴 편지가 있었다. 방학이라 조선 땅으로 가는데 가능하다면 러시아로 가서 숙부를 찾아뵙겠다는 것이었다.
‘기동훈련을 안했으면 참령님께 편지를 써서 이태희 형에게 전해 달라 부탁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그는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달포가 지났을 때였다. 토요일 오후 이태희가 면회를 왔다. 이갑 참령을 찾아가 만나고 왔을 것이라는 예감에 그는 즉시 접견실로 달려갔다.
이태희의 표정이 비장해 보였으므로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참령님의 용태가 안 좋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숙부님은 페테르부르그에서 중국 북만주 무링(穆陵)으로 이주하셨다가 지금은 연해주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북쪽에 있는 도시 니콜스크 우스리스크에 머물고 계십니다. 의학적으로는 뇌졸중인데 회복이 어려워보였습니다. 이 형에게 직접 편지를 쓸 수 없는 정도이십니다. 저는 숙부님께서 주신 중요한 분부를 갖고 왔습니다. 아마 마지막 분부일 겁니다.”
이태희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과 금반지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숙부님께서는 이 형이 정희의 배필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반지는 약혼의 증표입니다.”
“네?”하고 반문하며 그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스무 살 청순한 처녀로 성장한 정희였다. 슬픔과 행복감, 그리고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참령님 분부라면 저는 뭣이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지요, 이건. …정희가 내 아내가 된다는 건 그런 일입니다. 저한테는 과분하기도 하고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 순간 휙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일곱 해 전 남대문역 환송식에서 부인과 정희를 부탁한다고 참령이 한 말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정희의 생각은 어떤지….”
“숙부께서 정희의 의향을 묻고 결정하신 일입니다. 정희도 ‘응준 오빠가 저를 받아주신다면 결혼하고 싶어요. 늘 그리웠고 지금도 그리운 분이에요.’ 하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응준은 반지를 집어 무명지에 끼웠다.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정희가 준비한 건데 이 형 손가락에 맞는군요. 나는 숙부님께 이 형이 승낙한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고향 숙천으로 소식을 보내면 거기서 알아서 할 겁니다.”
이태희는 그 말을 하고 일어섰다.
이응준은 “나도 반지를 보내야지요.”하며 따라 일어섰다. 그는 접견실에 있는 전화기로 당직사령에게 전화를 걸어 외출 나갔다가 오겠다고 보고했다.
이태희와 함께 부대를 벗어난 그는 전차를 타고 긴자의 벽돌거리로 나갔다. 거기 있는 금방으로 갔다. 점원이 내놓은 몇 개 중 가장 아름답고 깔끔해 보이는 반지를 골라서 이태희에게 넘겨주었다. 편지는 쓸 수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가 적대관계에 있어서 편지를 보낼 수 없고 숙천을 거쳐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도 위험했다. 이쪽이 현역장교이고 저쪽은 항일투쟁을 해온 유명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었다.
12월이 되고 그는 지석규 · 홍사익 등 동기생들 12명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다. 후배들 20명도 견습사관 근무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34명이 살아남아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조철호가 임관 즉시 퇴역했으니 33명이 남은 것이었다.
육사 26기 동기생들이 뿔뿔이 흩어져간 것처럼 27기 후배들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이응준은 이들을 지속적으로 결속시킬 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우선 도쿄에서 근무하는 동기생 홍사익과, 도쿄 주둔부대에 배속명령을 받은 27기후배 윤상필 · 김종식 소위와 만나 전의회(全誼會)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소식을 들은 타 지역 근무 장교들이 우리는 왜 빼 놓느냐고 성화를 해서 회원 수는 늘어났으며 두 주일 뒤에 그 중 24명이 모였다. 그들은 당연히 최고 선배인 김광서 중위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장차 회지도 발간하고 하여 마음을 결집시켜 두자고 합의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지만 그걸 강조하거나 표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다. 장차 헌병대가 사찰의 손길을 뻗쳐올 것인데다 동포 장교라고 하여 모두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17년이 되었다. 6월에 육사 23기 김광서 중위, 26기 홍사익 · 이응준 중위, 27기 윤상필 · 김종식 소위 등 도쿄 주둔 조선인 장교들은 패망한 조국의 황제를 뵙게 되었다. 경술년의 강제합방으로 이왕(李王)이라는 칭호로 격하된 대한제국 융희(순종) 황제가 일본 천황을 뵈러 도쿄에 온 것이었다. 그들이 소속된 연대는 환영하기 위해 길가에 도열했고 황제는 승용차를 타고 천천히 달려갔다.
며칠이 지난 뒤, 그들은 융희 황제가 묵는 시바리큐궁(芝離宮)으로 불려 갔다. 황제는 오전에 근위(近衛) 2사단에서 근무하는 아우 영친왕 이은을 만나고, 그들을 만났다. 재위 중 무관학교를 폐교하고 생도 44명을 한꺼번에 일본 땅으로 보내서인지 황제는 감회가 큰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눈이 젖어 있었다. 한 사람씩 손을 잡으며 “잘 있었느냐?”하고 물었다.
“넷, 잘 있습니다.”
장교들은 어깨를 꼿꼿이 펴고 대답한 뒤 황제의 손을 잡았다.
30분 남짓 조국의 마지막 황제를 배알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숙연해졌다.
“감상이 어떠냐?”하고 김광서 선배가 홍사익 중위에게 물었다.
"사람 손이 아니라 풀솜을 잡는 느낌이었어요. 황제가 그렇게 연약하시니 나라가 망했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어요.".
27기 윤상필 소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신문에서 읽었어요. 우리 황제는 며칠 전 천황을 배알하러 황궁에 들어갔어요. 이척(李拓)이라고 평민식 이름을 대며 절했어요. ‘성상 폐하, 이척이 좀 더 일찍 방문하여 알현해야 하지만 숙병(宿病)에 시달리는 병약한 몸이어서 전례(典禮)를 수행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날을 미루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오늘에야 용안을 지척에서 뵈옵고 오랫동안의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은 진심으로 기쁜 일이며, 세자 은(垠)이 오래도록 궐하(闕下)에 있어서 항상 폐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고 학덕에 정진하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번에 이척의 도쿄 방문에 즈음하여 폐하의 극진하고 융숭한 대접에 송구스럽고 감격하여 이에 삼가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기사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그런 내용이었어요.”
윤상필의 말을 듣고 젊은 장교들은 탄식하며 한숨을 쉬었다.
김광서가 다시 말했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리자. 독립을 되찾는 건 황실만이 아니라 조선 민족 모두의 책무, 특히 우리들 장교들의 책무이다.”
조국의 황제를 배알하고 며칠 뒤, 이응준은 다시 이태희의 방문을 받았다. 면회신청이 접수됐으며 신청자가 지바의학전문학교 재학생 이태희라고 전화로 듣는 순간 그는 이 참령의 부음을 전하러 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지난해 약혼반지를 건네면서 참령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했는데 1년이 지난 것이었다.
예상 그대로였다.
“참령님께서 돌아가셨군요?” 하고 묻자 이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전보를 받았어요.”
응준은 그곳이 사병들도 있는 접견실이란 사실도 잊고 “아아, 참령님!”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