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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재약산 표충사 순례 ① 慶南 密陽 載藥山 表忠寺 巡禮 一
5월 22일 오후 3시 7분 운문사를 나와 표충사로 향하였는데 이 시간이면 사실 귀경길에 올 라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미 표충사를 간다고 했으니 안 갈 수도 없는 것이라 가게 되었습니다. 운문사에서 표충사까지 꽤 먼 길인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 사람은 없 었습니다. 운문사를 빠져 나온 버스가 높고 높은 가지산을 꼬불꼬불 넘어 밀양으로 향하였 는데 지나치는 경치가 빼어나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약 1시간 정도 달려 표충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3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0분 정도여서 넓은 도량에 50분 동안 전각을 참배하고 도량의 경 관을 찍고 주련을 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표충사는 10여년 전에 모 법사회에서 수련대회를 와서 의식을 집전했던 바가 있었는데 그 때도 책임을 완수하느라 제대로 전각을 돌아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표충사를 간다고 하기에 제대로 봐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이 되고 말았 습니다. 그러나 주요 전각과 주련은 재빠르게 담았습니다. ^^
일주문을 향하여
홍제교(弘濟橋)를 건넙니다.
재약산 표충사 (載藥山 表忠寺)
아뿔사! 편액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영사각(永思閣)
일주문에서 조금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낡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편액을 보니 영사각(永思 閣)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안에는 검은 칠을 한 나무로 된 비목(碑木)이 모셔져 있는데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였습니다.
밀양부사 심의복(沈宜復)과 그의 아들 심경택(沈敬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이들은 표충사가 현재의 위치에 건립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공 을 잊지 않기 위해서 비를 세운 듯합니다.
무엇인가 하고...
여기 한 번 서 보세요. 표충사(表忠寺) 수충루(酬忠樓)
그러면 표충사의 위치와 창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표충사(表忠寺)는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載藥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 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표충사의 역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에서 출발한다. 이후 829년(흥 덕왕 4)에 황면(黃面)선사가 중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이름을 바꿨다. 흥덕왕의 셋째 아들 이 병으로 고생할 때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해서 ‘영험있는 우물 절’이라는 뜻 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에 탔다가 1600년(선조 33)에 혜징(慧澄)스님이 중건 하였다. 1715년(숙종 41)에는 탄영(坦英)ㆍ도한(道閑) 스님 등이 중창하였다. 1738년(영조 14)에는 남붕대사(南鵬大師)가 신유한 등과 함께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모은 《분충서난록 (奮忠紓難錄》을 간행하였다. 1785년(정조 29)에는 29명이 참여하여 영산회상도를 조성하 였다.』 -전통사찰총서 표충사편에서-
유서 깊은 표충사의 이전에 대해서 알아 봅니다.
『영정사는 언제인가 법등이 끊어져 19세기에는 절터만 남아 있었다. 1893(헌종 5) 월파천 유(月波天有)대사가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에 이전, 중창하면서 비로 소 오늘날의 표충사(表忠寺)가 등장하게 되었다. 표충사는 원래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 을 건립하여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하였으므로 사(祠)를 사(寺)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영정사터로 이전하기 전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 리에 있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41년 (숙종 40)에 밀양부사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건물을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이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려 줄 것을 청하였 다. 조정에서 흔쾌히 허락하여 마침내 사당을 다시 세우고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 사,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가 금산(錦山)전투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별도의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지니고 다니던 원불(願佛)을 봉안하였 다. 동서쪽에는 요사를 지어 수호하는 스님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백하암은 서 산과 사명, 기허의 삼대 의승장을 추모하는 서원이면서 그 관리와 제사를 사찰에서 맡는 이 른바 유불(儒佛)의 이원적 구조가 성립되었다.』
가람각(伽藍閣)
이와 같은 전각은 처음 만납니다. 이 전각은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전각으로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때를 벗 는 목욕을 하게 됩니다. 이 전각은 표충사의 독특한 건물입니다.
표충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후 사명당의 법손인 태허당(太虛堂) 남붕(南鵬)대사가 표충사를 확장, 중건하려는 원을 세웠다. 1738년(영조 14) 대사의 행적을 자세히 갖추어 국가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영조가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을 면제하고, 전답 5결을 하사하여 경상도 관찰사 에게 중수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중건의 총책임은 남붕대사가 맡았고, 연초(演初), 취안(翠 眼), 최심(最心), 상현(尙玄) 등이 힘을 모았다. 삼화상을 모시기 위해 전각을 3칸으로 신축 하고, 중앙에 사명대사, 동쪽에 서산대사, 그리고 서쪽에는 기허당을 영정으로 봉안하였다.
다시 새로 신축, 또는 중건한 건물이 원불전(願佛殿), 노전(爐殿), 예제문(禮制門), 의중당(義 重堂), 자하문(紫霞門), 명인루 등이다. 사당의 좌우에는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다. 향교와 서원건축의 기본형태인 동,서 재실(齋室)과 동일한 형식이었다. 이와 같이 대규모로 신축, 중창하면서 절이름을 백하암에서 중흥사(重興寺)로 바꿨다.』
『중흥사는 현재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 웅동 영축산에 있는 대법사(大法寺)다. 터만 남아있 던 곳에 1970년 무렵 새롭게 중창하여 대법사라 이름하였다. 지금이야 절까지 이어진 도로 가 잘 닦여저 있지만, 19세기 당시에는 산새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제향에 참례하는 여정 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마침내 1839년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대사가 좀더 넓은 터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조 정에 보고하여 예조의 허락을 받았다. 당시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의 가람 모습을 보면, 먼저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전각을 신축하였다. 사명대사가 모시 던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였고,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 門) 등을 짓고, 의중당 좌우를 동ㆍ서 재실이라 하였다. 명부전 자리에는 진영을 봉안한 영 당(影堂)을 건립하였다. 중흥사에 있었던 남계료(南溪寮)는 심검당(尋劒堂)으로, 원통료(圓 通寮)는 설법당(說法堂)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한전 등은 그대로 두었다. 이제 표충사는 명실공히 국가불교의 대표적 사찰이 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서원도 철폐되었다. 1926년에는 안타깝 게도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대화재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스님들 과 지역 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29년 대부분의 전각을 재건하였다. 오늘날 표충사 의 가람은 바로 이 때 중건한 모습이다. 이후 1960년대부터 가람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꾸준 히 법등을 밝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사찰총서 표충사편에서-
표충사(表忠祠)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表忠 書院)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 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表忠祠)라고 편액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고 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들르지 못한 것이 아쉽 습니다.
내부에는 사명대사(泗溟大師)ㆍ서산대사(西山大師)ㆍ기허대사(騎虛大師) 삼화상(三和尙)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합니다.
의중당(義重堂) 무설전(無說殿) 대흥불법도량(大興佛法道場)
표충사(表忠祠)가 왼쪽에 있다면 이 전각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봉축등으로 장엄하게 꾸며 놓았네요.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 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합니 다.
사천왕문으로 갑니다.
형형색색으로 장엄된 봉축등 속으로 황홀하게 들어갑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대홍원전(大弘願殿)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대홍원전은 일반인들을 위한 시민선방이라고 합니 다. 내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후불탱은 1882년(고종 19)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라고 합니다만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또한 옆에는 죽원정사 라는 편액도 있습니다.
대홍원전(大弘願殿)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선생 글씨.
위당
『조선 말기(朝鮮末期)의 무신(武臣)이자 외교가(外交家).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자(字)는 국빈(國賓), 호(號)는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 우석(于石) 등이며, 시호는 장숙(壯肅). 후(後)에 ‘헌(櫶)’으로 개명(改名)하였음.
1844년(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를 거쳐 금위영대장(禁衛營大將)이던 1849년(年) 헌종(憲宗)이 위독(危篤)했을 때 사사(私事)로이 의원(醫員)을 데리고 들어가 진 찰(診察)했다는 죄명(罪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철종(哲宗) 5년(1854) 무주(茂朱) 로 이배(移配)된 다음 1857년(年)에 풀려났고, 그 후에는 승승장구해 1862년 통제사(統制 使), 고종(高宗) 1년(1864) 형조(刑曹), 병조(兵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66년 병인 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江華)의 염창(鹽倉)을 수비(守備)했는데, 난(亂)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左參贊 兼 訓練大將)을 지냈으며 수뢰포(水雷砲)를 제 작(製作)한 공(功)으로 가자(加資)되었음.
1868년 하고, 1874년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강화 연안(江華沿岸)에 포대(砲臺)를 구축(構築)했으며, 1875년(年) 운요호[운양호(雲揚號)] 사건(事件)이 일어나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서 전 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年) 일본(日本)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 타카[흑전청륭(黑田淸隆)]와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일명(一名)‘강화도조약(江華島條 約)’이라고도 함)을 체결(締結)하였고, 1882년(年)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 門事)로 역시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미국(美國)의 슈펠트(Robert W. Shufeldt)와 조미수 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締結)하고는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음.
전형적(典型的)인 무관 가문(武官 家門)에서 태어났음에도 다산 수학(修學)함으로써 유장(儒將)으로 불리기도 한 위당(威堂)은 금석학(金石學) 관계 저술(關 係 著述)인『금석원류휘집(金石原流彙集)』을 지었고, 역사지리서(歷史地理書)『유산필기 (酉山筆記)』를 편찬(編纂)했으며, 예서(隸書)를 잘 쓰고 묵란(墨蘭)을 잘하며 문장(文章)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시(詩),서(書),금석( 物)로 알려져 있다.
추사 추사 선생이 "한대(漢代)의 명필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나보다 났다." 고 극찬했던 명필로 수제자가 신관호공, 다음 제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인데 1864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주요 사찰의 편액 등은 다음과 같다. 해남 대흥사 御書閣. 表忠碑閣. 고성 옥천사 大雄殿. 蓮華玉泉. 화계사 보화루 寶華樓』
-출처 : 화계사 포교사회 카페에서 인용- 죽원정사(竹園精舍)
표충사가 본래 죽원정사(竹園精舍)라 하였기에 붙여 놓은 편액인 듯 합니다.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마당에 삼층석탑이 자리합니다. 온통 연등이 달려 있어 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홍원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의 화강암 3층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표충사에서 가장 오래된 성보로서 높이 7.7m입니다.
단층의 기단 위에 올린 사각형의 3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지녔으며 이 시대 탑 으로서는 상륜부가 잘 남아 있어 주목을 받는다고 합니다.
표충사 석등(表忠寺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이 석등은 기둥돌(竿柱石)과 등(燈)을 넣는 화사석(火舍石), 화사석을 받쳐주는 위 받침돌 (上臺石) 지붕돌(屋蓋石) 등을 모두 갖추었다. 다만 석등의 전체를 지탱해 주는 받침대(基 壇)와 기둥을 받쳐주는 아래 받침돌(下臺石)은 유실된 것 같다.
조각의 수법이나 규모 등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석등으로 추정된 다. 』 -안내판에서-
그런데 탑과 석등은 본래의 자리가 아닌 듯하다고 합니다.
☞ 다음은 표충사 순례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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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표충사의 자세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잘 봤습니다. _()_
잘 보셨습니까 감사합니다. 표충사는 이제 두 번째인데 너무 짧아서 많은 전각을 다 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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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역사가 깊은 사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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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만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도망간 사진 다시 체포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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