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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번 강의
2007년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강의 : 이근호 목사
주제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예수 안에는 본인이 원해서 들어갈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들어가는 상태란 기껏해야 이스마엘밖에 안되고, 사울밖에 안되며, 레위지파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란 다윗언약 곧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생겨나야만 했어요. 우리가 천국가겠다고 애쓰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쪽에서 따로 마련해서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출생부터가 예수 안에 있도록 출생되었기 때문에 예수 밖에 나갈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9장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문제가 나옵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본인의 달음박질이나 본인의 원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그 사람에게 사랑이 주어질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부터 죽 보면 그것이 구약 때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때부터 이어져 온 근거가 무엇이냐 할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이 육으로 만들어 낼수 있는 이스마엘과, 인간의 태가 끊어져서, 죽음에 처해진 상태 - 그토록 모든 것을 이루고자 애를 썼는데, 구원받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우리의 한계, 인간의 한계는 이것 밖에 안된다고 모든 것을 접었을 때 -에서 불현듯이 등장한것이 이삭이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에 의해 태어난 사람과, 사람의 육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과 완전히 구분하는 겁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출생된 사람과 육의 확산에 의해서 출생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때는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좁은 범위에서 나누었지만 신약에서는 무엇으로 나누는가를 이제부터 뽑아야 되겠지요? 구약에서 보면 이삭류와 이스마엘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구약에서 이것이 중간에 다윗류와 사울류로 분류가 되죠.
다윗은 무조건 왕이 되어야 합니다. 실수를 하든 뭘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애초부터 왕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인간들의 요구에 의해서 왕이 되지만 몇 번 실수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차없이 왕에서 폐위를 당하고 제거를 당합니다. 이렇게 이삭류와 이스마엘류, 다윗류와 사울류가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면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쪽에 사울류, 이스마엘류는 율법의 경계선안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무제한의 자유를 행사해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수련을 거듭하고 종교적인 영성의 수련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차츰 차츰 개선되면서 신의 대한 헌신의 단계도 높아지고 찬양하는 마음도 높아진다는 식으로 뭔가 점점 나아진다는 사고방식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바깥쪽에 율법이 있어서 율법의 테두리안에 갇힌채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사울류와 이스마엘류 쪽은 율법의 경계선을 돌파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삭류는 이미 율법자체로부터,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주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의 능력을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뭐냐 하면 말씀이 완성된 성취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이 성취된 상태이기에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여기서 이삭류를 생산해 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하다 보니까, 저쪽에서는 의를 이루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되지만, 이쪽에서는 이미 다 이룬 의로운 상태에서 제품이 그냥 생산된 상태죠. 그래서 푹 찌르면 믿음으로 의롭다 이미 의안에 들어가 있습니다하는 고백이 나오는 이러한 새로운 약속의 자녀가 생산됩니다. 이렇게 둘로 나뉘어 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안에 있어서 율법의 정죄함이 없는 이삭류와 다윗류와 같은 사람은 예수안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태어나서 어떻게 하다 보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될수 밖에 없는 증거물로 출생부터 이미, 출생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세전부터죠. 창세전부터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되어 태어나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작업을 벌이셨기에 우리가 예수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쪽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어떤식으로 성취했는가?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로마서는 기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취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기록된 로마서는 왜 인간들의 행함으로는 안되는가와 더불어서 이루어지지요. 왜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는가?를 로마서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느냐?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90%쯤 심하게 정죄받을 짓을 했더라도 10%정도는 착한것을 건질것이 있는데 왜 일체 의롭다고 하는 것이 없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자기는 지켰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해요. 받는 하나님이 이것은 영 아니야라고 거부를 해버리면 자기딴에 남보다 더 열성을 내서 바르게 살았다고 할테지만 하나님쪽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거절한다면 자기가 열심히 한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보통 자본주의 사회가 경쟁사회 아닙니까? 진리라는 것은 서로 서로를 비교해서 추가적인 진리가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계속해서 남들과 경쟁하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것이 나오는데 그렇게 나오는 것을 추가적으로 진리에 더 접근했다는 식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대 인간으로 해서 싸워서 거기에서 추가적인 것이 나와 봤자,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이겼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지도 않은 것을 생산해 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까?
종교라는 것은 소용없는 것이거든요.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하느냐? 달리 그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걸 이스마엘 쪽에서 설명하는 겁니다. 이스마엘 쪽에서 그것을 설명해 줘야 예수안의 의미가 밝혀지니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쉽게 하려고 많은 애를 쓰기는 합니다만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대목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방치하는 쪽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3절부터 나오는 그 이야기를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어렵지만 어려운것부터 합시다.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이 따로 있고, 그 자연밖의 자연이 따로 있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과 자연밖에 있는 자연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이 자연이다라고 여기는 그 자연밖에 자연이 따로 존재합니다. 자연밖에 따로 존재하는 그 자연을 카오스(혼돈, 변화)이라 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자연을 코스모스(질서)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에 있는 혼돈을 - 다른 말로 하면 변화거든요 - 자기것으로 합리적으로 굳히려는 식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을 이성(깨우침)이라고 합니다. 구조적으로 점검하는거죠. 보통 젊은 총각들이 여자친구의 집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가 깜짝 놀라는 일이 있습니다.
여성은 외모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주로 보이니까, 당연 그의 집안도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여길수 있는데, 불현듯 방문해서 가보면 혼돈 그 자체거든요. 그때 으악! 이럴수가하면서 놀라게 됩니다. 자기하고 만날때는 천하의 깔끔을 다 떨더니만 집구석에 가보니까 설거지도 안해놓은채 엉망진창입니다. 그것을 우리 어머니가 현장에서 증언을 합니다. 우리어머니집에 자취생들이 살고 있는데, 그 영남대생들이 학교에 갈 때 보면 남자들은 집안정돈을 깔끔하게 하고 가는데 여자들은 드라이기 던져놓고, 숟가락도 굴러 다니고, 머리카락은 여기 저기 다 빠져서 돌아다니는 거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여대생들에게는 방을 안주려고 하는 거죠. 혼돈 자체죠. 그러면 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채 왜 밖에 안나가는 겁니까? 대자연의 혼돈속에서 자아라는 것을 따로 모으려면 깔끔하게 정돈되어야 하는 겁니다. 정돈되는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형식화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할때는 뭔가 정돈을 한 뒤에 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숫자에서 나왔는데 0이라는 숫자입니다.
사과가 하나 있으면 이것은 1이죠. 사과가 두개 있으면 2가 됩니다. 그러면 0이라는 숫자는 왜 튀어 나옵니까? 없는데 없으면 그만이지 왜 지시할 것도 없는데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 합니까? 0이라는 숫자를 인도에서 처음 만들었어요. 없다는 뜻이죠. 피타고라스가 맞나요?그쪽에서는 자연수만 숫자로 보는 거예요. 정확하게 있는 것에 대해서 셈하고 헤아릴 때, 그것이 이 우주의 혼돈에 대항하는 아주 적합한 방법이라고 보는 겁니다.
0이라는 숫자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0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라면 입을 다물어야지, 없는 것을 0이라고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0이라는 숫자는 있잖아라는 말이 나와버려요. 이것은 반칙이죠. 없는것은 침묵하고 없애버려야 할텐데 없는것도 0이라는 숫자를 만들어서 0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야 된다는 이 말은 실제 자연과 인간이 합리적으로 만든 자연과 뭔가 삐걱거리고 안맞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0이라는 숫자가 왜 있는가? 여러분! 25하고 205하고의 차이점이 뭡니까? 또는 25와 250처럼 영이 들어가는 숫자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미 이것은 십의 자리하고 백의 자리로 층이 달라진다는 뜻이 되죠. 층이 다를 때 0을 빼버리면 25와 205의 차이점이 없잖아요. 0을 집어 넣음으로 말미암아 십단위와 백단위의 차이를 말하게 된다는 거죠.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자연은 계속 변화(혼돈)를 일으키니까, 그 변화를 인간이 수용을 못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관, 내가 굳혀 놓은 이해에 다 수용을 못하지요. 다 수용을 못할 때 그것을 스트레스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정상인데, 스트레스를 받아야 변화에 대처하면서 수련을 쌓아서 변화를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집에서 놀던 장정들 집에서 놀던 가락 가지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게 되면, 군에서 그냥 굴려 버립니다. 막말로 조져버리죠. 왜요? 집에 놀던 가락 - 별이 빛나는 밤에 다 듣고 그 다음날 아침 10시에 일어나고 - 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나라를 어떻게 지키고 간첩은 누가 잡습니까?
자기 멋대로 살고,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먹는 식으로 해서는 군대생활이 안되잖아요. 어떤 규율에 집어 넣어야 된다고요. 억지가 되고 무리가 되니 거기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수련이 되어서 나중에는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문제가 안됩니다. 전장에 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험악한 환경속에도 생존이 가능한 숙달과 수련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연세계입니다.
제가 지금 우상이 뭐냐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상이 뭐냐? 우상은 합리화입니다. 어떤식으로 합리화하느냐 하면, 자연세계를 형식화 하는데 새로운 변화가 다가올때면 새로운 형식에 의해서 수정을 해야 합니다. 이걸 가지고 메타형식이라고 합니다. 메타라는 말은 뭔가 극복한다 혹은 뛰어넘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메타형식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메타형식을 가지고 또 형식화를 만들어 버립니다.
형식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정보를 집어 넣어서, 새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전에 있던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메타형식으로 자기를 자꾸 이동시킵니다. 나는 이런 존재라고 하죠. 옛날에는 나는 이랬는데 지금의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남자들이 군에 있을 때는 어떤 여자든지 치마만 입었으면 결혼한다고 해놓고는 말년되고 또 제대하고 나면 그때는 골라잡는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전에는 어떤 여자하고도 결혼 하겠다면서? 상황이 너무나 어려울때는 그런식으로 형식화 했는데, 이제 와서 제대도 하고 취직도 한 마당에 배부르다는 겁니다. 이제는 내쪽에서 점수를 매기면서 골라잡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새로운 메타형식이 생겨나면서 이동되죠. 그러나 인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메타형식에 항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다 채우지 못한 +a(플러스알파, 잉여분)이 계속 남겠지요.
그 잉여분을 뭘로 남겨두는가? 이것을 신의 이름으로 남겨두는 겁니다. 이것이 보이즈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입니다.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청년들이여! 앰피스리를 들어라(???) 비젼(소망)을 가져라 이것이 한국교회의 모토가 아닙니까? 2007년도에는 네뜻(소망, 비젼)대로 되리라는 식으로 +a(플러스알파, 잉여분)를 만드는 거예요. 이
+a를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합리화, 메타형식)까지는 우상이고, 우상마저 채우지 못하는 잉여분을 신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예요. 이것이 기독교이고 불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성으로서 형식화 시킬 때 반드시 질서(코스모스)를 부과해서 형식화를 시킵니다. 나는 오늘부터 성경을 3장 읽고 주일날은 5장읽어서 올해 성경 한권을 다 읽는다고 했습니다. 재수가 좋아지라고 한것인데 재수가 안좋아집니다. 그러면 형식을 바꿉니다. 하루에 성경 다섯장을 읽고 기도시간을 30분에서 한시간정도 더 늘인다
인간이란 과거입니다. 자기(자아이성)속에는 자신의 경험 곧 과거가 들어 있습니다. 과거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살아온 자기경험, 자기체험이 있어요.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느낀다(감성)고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성에 의해서 자신의 과거의 체험을 정리정돈 함으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자기라는 것이 있어서 이 자기가 자기의 경험, 자기가 수집했던 정보들인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형식화를 만드는데 여기에 - 여기가 이시간 강의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여기 잘 들으세요. 여기에 별표 쫙 해야 합니다 - 금지의 법을 집어 넣습니다. 금지의 법
율법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듭니다. 규칙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듭니다. 내가 나에게 법칙을 만들어야 혼돈에 법칙이 들어가면 질서가 생겨납니다. 혼돈에 내가 만든 규칙을 집어 넣으면 질서가 생겨나고 그 질서가 우상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듯이 이삭계열에는 뭐가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규칙을 적용해서 이삭을 낳았습니까? 나는 오늘부터 철야기도를 한다는 규칙을 적용해서 철야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까?
이삭의 존재의미가 뭡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갖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갖게 된 느낌은 뭡니까? 내가 나에게 어떤 규제를 가하고, 어떤 법칙을 정하고, 내가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취했기에 의롭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어떤 육적인 행위와 상관없이 거저 주어졌다는 것이 이삭의 존재의미잖아요.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하나님이 이삭을 시험할 때, 아브라함은 덜렁 이삭을 누구한테 바칩니까? 하나님께 바치죠?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주신것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이소라는 뜻으로 바칩니다. 창세기 22장에 있는 그 사건을 가지고 두글자로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 로마서에서 우리가 그렇게 보고자 하는 믿음이 벌써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의 그런 행동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그리고 그 뒤에 붙는 말은 뭐냐?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로 한것이 아니고 이삭은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받은 것뿐이다 라고 합니다.
(로마서 4:11-16)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좆는 자들에게도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여러분! 한국교회 교인만들기 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달라도 너무 다르죠. 정말 다릅니다. 억수로 달라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뒤에는 자칭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선악적인 요구가 계속 이어져요. 여기 형식화가 되었지요? 인간의 이성으로 형식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 혼돈을 질서로 잡았다는 말이죠. 질서를 잡은 뒤에 이 형식화에 대해서 인간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선, 세상이 돌아가는 그 외부의 변화도 수용을 못합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한 청년이 교회와서 결심을 하는 겁니다. 이제는 다시는 만화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만화를 보거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려도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결심해놓고는 친구 집에 가서 만화를 봤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세워놓은 형식화(질서)에 수정을 합니다. 두 번까지는 안보겠다고 수정합니다. 그래놓고는 친구집에 가서 또 봅니다.
이제부터는 만화보는게 그게 뭐 대수인가? 만화를 봐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받나?라고 해가면서 자기 쪽으로 수정해 나가는 겁니다. 정직하게 살겠다면서 교회 다녀보지만 사회는 정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직을 요구하죠. 몇 번 정직하게 살려고 시도는 해 보지만, 어느 때부터는 사탄이고 뭐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가죠. 그 다음부터는 정직을 포기하게 됩니다.
자! 첫번째로 사회, 곧 외부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이 이길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두 번째로 그것보다 더 골치가 아픈것이 내부의 욕망입니다. 주여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줄로 알겠습니다. 단 먹는 음식은 짜지는 않게 이런식이죠. 입는 것으로 족한줄은 알겠는데 단 그 입는 것은 백화점 물건으로 입는다는 조건 이런식입니다. 자꾸 추가적으로 붙이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교인 몇 명이 와도 만족하겠습니다. 적어도 백명정도만 되면 그정도만 되어도 만족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계속 이런식으로 추가합니다. 만일 교인이 백명이 나왔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2% 인상해서 120명을 만족의 수준으로 높입니다. 계속 인상합니다. 내부적인 욕망과 외부적인 변화를 본인이 감당을 못합니다. 계속 수정해 나가야 됩니다. 수정하지 아니하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까 그냥 수정하는 쪽으로 자신을 방치할수 밖에 없어요.
나라는 것이 내 맘대로 살아지는 내가 아니고, 외부에서 변화를 주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자기를 못살게 굴게 되어서 여기에 그냥 휘둘리는 인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보면서 자기변명으로 계속 일관하죠. 자기합리화로 끊임없이 일관하죠. 형식화에서 메타형식으로 이동할 때 여기서 차이를 둡니다. 차이를 둠으로써 나는 왜 의로울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전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는 차이로 답함으로 자기의 존재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하나님! 나 발전했습니다라는 겁니다. 전에는 술도 못끊어서 하루에 소주 세병씩 먹었는데 이제는 한병 줄여서 참이슬 두병밖에 안먹는다는 거죠. 한병 줄인 그 차이에서 자기 존재의미를 찾는 겁니다. 소쉬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기호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언어의 특징은 분절에 있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을 한다고 미리 말씀 드렸습니다. 모든 언어가 자연을 제대로 묘사해내지 못합니다. 딱딱 끊어서 묘사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잖아요. 아 하고 어 사이에 음성은 어떻게 할래요? 없어요. 그나마도 아와 어를 분절해서 잘라내고 연결하고 하는 거예요.
끊어 냄으로써 대충 묘사할뿐입니다. 우리나라 말도 분절이 발달해서 여러 가지 용어들이 많습니다. 삼삼하다. 잘빠졌다. 알록달록. 새록새록등등. 언어자체가 분절이기 때문에 아무리 용어를 잘 사용해서 자연과 가까이 접근하려고 해도, 속시원하게 그 전부를 담아낼수가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E=Δmc² 공식이 있습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전의 에너지와 현재 에너지의 차이의 광속의 제곱에 의해서 물질에너지로서 서로 교환된다는 등가성을 공식으로 세웠는데 이것이 매우 합리적이면서 정확할것같이 여겨지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에너지의 개념이 뭔가에 대해서 열대여섯가지가 나오고요. 또 무게와 질량의 차이점이 뭐냐에 대해서 개념이 중력이 있을때와 없을때가 달라지면서 또 열댓가지 나오고, 광속의 의미가 뭐냐가 개념이 또 여러 가지가 나오거든요. 이것은 하나의 축약된 것일뿐 속시원하게 모든 것을 해소한것은 아닙니다. 잉여죠. 뭔가 잉여분이 항상 남아 있어요. 그저 혼돈되고 변화하는 그 사이에서 우리의 육체가, 그렇게 이스마엘이 원했고 사람들이 원했던 그 아까운 우리의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하기 위해서 접근하고 또 접근하기를 시도할뿐입니다. 그것도 과거에 누적된 경험과 정보를 기초해서 겨우 몇발자국 가는 것밖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었어도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 그걸 몰라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이 전도서에 나오죠.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탐구해도 항상 현재라는 그 댐안에 갇혀 있어요. 과학이 아무리 탐구하고 또 탐구해도 내일은 이렇게 될것이라고 보장하는 인간의 지혜는 아직까지 나온적이 없습니다. 어제 주가가 폭락했다는 것을 미리 예측했다면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서 팔았을겁니다. 혹시 오늘 어떤 종목이 뛴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확 사겠지요?
아무도 모르죠. 다만 예측을 할 뿐이죠. 그런데 예측을 너도 나도 하다보니까 예측된 그 종목이 폭락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수학자들이 추측해서 투자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종목이 오를지 자기만 알면 돈을 버는데, 어떤 예측을 자기만이 아니라 다 같이 아는 경우가 되기 때문에 그 예측이 어떤 변동을 일으킬지 또 알수가 없게 됩니다.
예측을 못하면 바보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떤 바보라도 자기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병자치고 자기를 정신병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어디서 찾게 됩니까? 그래도 한살 더 먹었으니 지난것과 오늘의 것과의 그 차이에서 나는 안죽고 계속 살아야 된다는 자기존재의미를 계속 고수하려는 겁니다.
인간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하는데 다만 기독교 교인이라는 인간들은, 이것을 더 큰 범주, 신이라는 범주로 이것을 변명한다는거죠. 다 신의 뜻입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신이라는 테두리를 가지고 천막처럼 확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 위에 설명한 방식으로 다 살아와 놓고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신이라는 대형천막으로 덮어놓고 다 신의 뜻입니다. 죽어서 좋은 곳으로 보내주세요 이러고 있습니다.
불교신자 같으면 이것이 다 부처님의 은덕입니다라고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신을 안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알되라고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은 인간이 보는 그 자연의 범주 안에서 아무리 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식으로 살아갈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흡족하시는 경우는 있을수 없는 겁니다. 이게 불트만의 로마서 주해에도 나옵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인간은 처음부터 저주 받을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불트만은 이와같은 인간존재의 현실을 깔고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르트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알되라고 할 때, 교회도 안다니고 돈만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잖아?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것은 자기가 아는 범위, 그밖에 있는 무한대의 미지로 남겨둔 +a(플러스 알파, 잉여분)것을 추가해서 통째로 안겨주는 개념을 신개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개념에 그대로 다 들어오도록 되어 있어요.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보면 이런것이 있어요. 20미터의 삼베가 한 벌의 저고리의 가치와 같다 20미터의 삼베가 어느만큼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시장에서 어떤 물건과 교환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보니까 한 벌의 저고리와 똑같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저고리가 사용되는 것에 따라서(사용가치) 20미터짜리 삼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겁니다. 이것이 가역적으로 변동됩니다. 저고리 한 벌의 가치가 뭐냐고 물을때는 20미터의 삼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장에 물건이 두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20미터의 삼베는 두개의 호빵과 같다든지, 자동차 바퀴하나와 같은 값이라는 식으로 계속 등가식을 하게 될 때, 만약에 졸지에 자동차 바퀴 값이 올라버리면, 20미터의 삼베를 가지고 하나의 저고리를 살줄 알고 있었는데 저고리 반값도 안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형편이기에 혼돈을 합리적인 형식으로 잡을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원인을 마르크스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생각하기를 가치란 어떤 사람이 - 창세기 3장에 있는 것처럼 - 무엇인가를 위해서 땀흘리고 애쓰고 수고한 그 값은 그 안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순진함입니다. 어떤 치킨집 주인이 생닭 재료 사다가 튀겨내서 만원씩 받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옆집에서 새로 닭집낸 아줌마가 온갖 아부 다 떨고 춤까지 춰 가면서 손님을 다 가져 가니까 먼저 낸 닭집은 아예 팔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투자한 노동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냐 이말입니다. 누가 내 가치를 빼앗아 갔느냐는 겁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그게 다 밝혀졌습니다.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오렌지가 있고 참외가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테니스공하고 럭비공이 있습니다. 어제 약간 했습니다. 라헬과 레아, 정실부인과 첩실부인식으로 살펴봤는데 그것과 약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오렌지와 참외는 과일이라는 것으로 묶을수가 있습니다. 테니스공과 럭비공은 공이라는 점에서 묶을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렌지는 테니스공하고 닮았으니 묶을수가 있습니다. 또 참외는 럭비공하고 닮았으니 그렇게 한묶음으로 묶을수가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보면 참외(a) - 과일(b), 테니스공(c) - 럭비공(d) 이런식으로 나란히 나란히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오렌지(a) - 테니스공(c), 참외(b) - 럭비공(d) 이런식으로 연결되어 버립니다.
공무원들의 경우에 하급공무원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고급공무원이 되면 어떤 일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법대로 집행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법조공무원인 경북고등학교 동창생이 다른 부서의 고급관료로 있다면 그쪽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유리하게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반대쪽 불리한 쪽에 자신의 외척이 또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라는 것이 나와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다른 요소들이 자꾸 엮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사를 결정할 때 A보다는 B가 낫겠다 싶었는데, C쪽에서 압력이 들어오는데 보니까 같은 교회 장로님입니다. 사람이 합리적으로 살아야 비로서 나라는 것을 압니다. 거기서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나라는 주체성이 확립되는데 점점 더 사회가 다양해지고 복잡해 집니다. 할인점에서 콜라는 돈 500원받고 사고 팔면 되는데, 그 할인점이 평수가 2천평쯤되고 대형마트로 달라졌을때는, 물건가격을 정하는데 있어서 지역사회에 세금을 얼마를 낼것이며, 불우이웃돕기성금은 얼마를 낼것이며, 그 대지를 내준 지방자치단체에 어떤 출자를 해야하는지를 다 고려한 상태에서 원가계산이 따로 나온다는 거죠.
복잡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산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대형마트에 납품을 하는 단골입니다. 그 대형마트 사장이 자기 아파트 앞에 신축공사를 벌이는데 단골납품업자의 아내는 부녀회에서 신축공사반대데모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때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내 단골확보를 위해서 대형마트 사장편을 들어야 할지의 갈림길이 생기게 됩니다. 신문은 조선일보를 보고 싶은데, 아는 친척이 한국일보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 더 받아주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정치적인 권력, 타협, 조정입니다. 그것을 막스베버는 합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합리란 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치적 합리, 또하는 도덕적 합리 - 사람이 행동을 너무 비도덕적으로 하면 안되잖아요 - 그리고 물리적 합리 - 내 몸이 약해지면서까지 성경공부에 참석할 필요는 없잖아요 -입니다. 이런 합리를 통해서 자기 행동을 조정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행동을 잘했다는 식으로 의미를 찾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물리적인 한계에 도달한것 같은데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의 정체가 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상품의 가치를 논하게 되고, 자본가들은 생산된 가치를 이자 이상으로 가져가 버리면서 거저 먹는 식으로 하고, 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도둑맞는 것처럼 빼앗기고 소외당한채 빈껍데기처럼 남아있게 되니 그것가지고 어디가서 물건을 살것이냐는 식으로 상품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나중에 더 발달하게 되면 상품이 화폐를 얻고 그걸 다시 상품으로 교환하는데 그런 원리가 아니라, 돈으로 상품을 사는데 상품을 사는 이유가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상품을 산다는 거예요. C-M-C에서 C-M-C′에서 M-C-M′로 전환된다는 겁니다. 상품 - 화폐 - 상품′에서 화폐 - 상품 - 화폐′가 된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물건이 좋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이것이 돈이 될것이냐를 보는 겁니다.
모나리자가 얼마입니까? 그것을 집에다 걸어놓는다고 해서 수십억이 생깁니까? 그걸 왜 사려고들 합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우표 이런것 왜 수집합니까? 좋아서요? 아닙니다. 돈으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상품이란 나의 육체의 만족을 위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으로 환원될 목적의 상품이 되어서 그럴때만 가치가 매겨진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시대에는 돈이 신이 되어 버립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남보다 돈이 없으면 가치없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돈 = 가치 = 신입니다. 그래서 왜 나의 신이 저사람의 신에게 꿀리느냐?가 되는 겁니다. 공통적인 신의 축복(혜택)을 누가 더 많이 받아 내느냐? 많이 받았으면 복받은 것이고 적게 받았으면 그는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축복가 저주가 돈의 소유에 의해서 결정나는 겁니다. 옛날에는 상품자체에 가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상품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도 돈이 될 수만 된다면 일시적으로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라는 학자는 이 세상은 도박이다라고 합니다. 도박이라는것이 뭐냐 하면 삼팔 한끗 쥐고 판쓸이 하는 것 아닙니까? 저쪽에서 장땡 쥐고 있는데 이쪽에서 삼팔 한끗만 쥐고 있어도 이기는 겁니다. 이게 도박입니다. 도박하는 사람이 돈버는 이유가 집에 화투를 많이 쌓아놓고 살아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화투의 활용으로 돈을 버는 거죠. 오랜만에 바른소리 합니다.
허름한 화투라도 그 화투를 가지고 돈으로 교환을 잘해서 돈을 버는 겁니다. 요새 펀드 펀드라고들 하는데 펀드가 뭡니까? 베트남 유전 펀드 이런거 있잖아요. 그런데 베트남 유전에 대해서 정말 얼마나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베트남 유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거예요. 다만 관심사는 차후에 그것이 나에게 더 많은 수익을 얻어주게 되면 그냥 사는 겁니다. 베트남이든 말레시아든 가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죠. 이익만 얻게 된다면 그것만 보고 사는 거예요.
아파트가 뭡니까? 비올 때 비피하고, 들어가서 잠자는 곳이잖아요. 지금은 아파트가 뭡니까? 과천에 있는 반지하집이 시가 5억입니다. 대구 영주에 가면 천평을 살겁니다. 이것은 아직도 좋은 상품이 좋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낭만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가막힌 노릇입니다. 이거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노무현이가 이렇게 말아 먹었습니까? 노무현이 탓할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노무현이를 왜 원했습니까? 돈으로 환산될수 있을것을 생각한 겁니다. 앞으로 이명막을 원한다면 왜 원하겠습니까? 이명박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모릅니다. 집사인지, 장로인지 그런것은 관심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돈으로 환산될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 보는겁니다. 내 주머니에 돈 들어오게 하면 좋은 대통령입니다. 신을 안믿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신이란 내가 소망하고 원하는 것에 대한 추상체, 추상개념을 신이라 합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3장에 있는대로 탐심이 우상숭배니라 하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은 그렇게 되니 안되니의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하나의 육체로서 그 세계속에 놓여 있는 겁니다. 신을 안믿는다고요? 왜 안믿어요. 교회 신이나 세상신이나 다른게 뭐가 있는데요. 교회 신이 여호와라서 믿는 겁니까? 아닙니다. 돈이라는 신을 위하여 여호와라는 중간매체를 이용하는 것뿐이죠. 여호와여 빕니다. 돈이라는 신이 나에게 찾아오게 해주세요 그것 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에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한글자로 육, 육신에서 찾습니다. 육신은 성령과 반대개념입니다. 육신은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어요. 자기 하고 싶은대로, 욕망하는 대로, 요구의 변화가 일어나는대로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아무리 신을 향하고 찾고 해도 그 테두리에 무엇이 쳐져 있습니까? 율법에 갇혀 있는 꼴임을 알려 줍니다.
육이 뭐냐? 욕심내는것? 죄짓는것? 다 아닙니다. 육이 뭐냐? 율법에 갇혀 있는 신세. 이것이 육입니다. 좋은 말 할 때 적어 놓으세요. 율법에 갇혀 있는 신세를 육이라고 합니다. 영은 뭐냐? 그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하는 아들의 영을 받은 겁니다. 율법의 종이 되는것은 육신이고, 거기에서 벗어난 겁니다.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갈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겁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서 나는 부처를 안믿고, 마리아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상숭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육이 뭔지를 모르고 있기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참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육이란 스스로 자기에게 우상을 만들어요. 복습하는 식으로 다시 정리해봅시다. 우상을 만들 때 뭘 집어 넣는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법을 집어 넣어요. 법을 집어 넣어야 이것이 굳어져요. 두부만들 때 간수 집어 넣어서 굳히는 것과 같아요. 허황된 세상 변화에다가 나한테 나에게 규칙을 정해버리면 나는 이렇게 가치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두부처럼 굳혀 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새로운 변화를 만나고 새로운 욕망이 다가올때면 다시 어떻게 합니까? 옛것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금지의 법으로 다시 만들죠. 이런짓을 한다는 것이 주님앞에서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쓰잘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데, 십자가의 피로 구원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맨날 십자가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나의 규칙을 의지하면서 나 잘났어. 나 오늘도 성경 3장 읽어서 벌 안받을거야. 십일조 해서 저주 안받을거야 이따위 짓을 하는데 그런짓을 양산화 시키는 그런 교회. 그래서 저는 그런 교회를 우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우상의 집단이고 욕망의 집단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수상쩍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걸 확대재생산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확대재생산이라고 합니다. 좋은 말로 했지만 사실은 이유없는 재생산이라는 뜻입니다. 왜 장에 갑니까? 몰라! 거름지고 장에 가는 거지요. 거름지고 장에 간다 참 멋지게 자본주의를 표현한 말입니다. 원래 모든 자본주의가 시장에서 형성되거든요. 거름지고 장(시장)간다.
애 장에 가나? 그래야 비로서 내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뭐가 들어 있는지를 알거든요. 여러분이 한 십년간만 산속에 있게 되면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런데 시장에 가면 돈이 없는 자에게는 금지된 것이 있어요. 사람이 금지된 것이 있을 때 거기서 욕망이 발생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면 탐심이 시동을 거는 겁니다.
집에 있을때는 그냥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요. 그런데 막상 백화점의 쇼윈도를 보게 되면 상품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돈 50만원이 없는 사람은 사지 말라고 금지를 적어 놓았어요. 백화점의 가격표가 금지의 법입니다. 어떤 상품이 150만원이라는 것은 150만원 없거든 아예 보지도 말라는 뜻이거든요. 금지되어 있으면 언젠가는 먹고 말거야 치토스! 이래가지고 욕망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150만원짜리의 불만을 터뜨리는 거예요.
내 청춘이 왜 이모양인가? 내가 이래서 인생이 망가지는구나. 내가 150만원짜리 옷도 못하는 신세로 만족해야 하는가? 이것은 나의 본모습이 아니야. 이것은 나에게 너무나 실망스런 일이야. 뭔가 억울한것 같아. 뭔가 허술해. 이것으로 멈출수 있는 그런 내가 아닌데. 언젠가는 입고 말거야. 150만원짜리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신앙의 흉내를 낸다고 내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해봅니다만 그것도 한 서너번을 하게 되면 사탄도 하도 신물나서 고마 해라. 나, 마이 묵으다 아이가? 네 본색대로 해. 그런 흉내내지 말고. 솔직하게 터놓고 그냥 나는 돈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고 해. 사탄아 물러가라 열대번 하다가 주여! 저도 열대번은 했잖아요라고 핑계대고 제멋대로 하는 거예요.
그냥 하면 좀 그렇지만 나름대로 사탄보고 물러가라고 했기 때문에 덜 미안하잖아요. 이걸 위장이라 하는데 위장이란 가면쓰기입니다. 고대그리스의 연극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페르소나죠. 고대 그리스의 연극무대는 오늘날의 진짜 무대의 앞쪽에 있는 조명비추고 하는 그런 장소가 연극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쪽의 오늘날의 무대에 해당되는 장소는 배우들이 쉬는 장소였습니다. 나중에 앞쪽의 것이 없어지고 뒤쪽으로 옮겨져서 본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전문배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면을 바꾸어 쓰고 연극을 했습니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가면을 계속 바꾸어서 쓴다는 여기서 나오는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인격개념, 페르소나 개념입니다. 위(位) 개념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고대의 연극개념에서 나온 철학을 경유해서 삼위일체가 튀어 나온겁니다. 한사람이 하고나서 가면쓰고 또 바꾸고 빨리 빨리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연극개념에서 이런 이런 행동은 나쁘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고, 어떤 것을 써도 그것은 하나의 허상이고 가면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보들리야르가 그런 소리 했습니다. 사람은 실상을 찾아가는 그 과정은 허상의 연속일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상이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상인가? 하고서 다가서면 곧장 허상이었구먼! 하고 바뀌게 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죽어도 사랑해라고 해놓고는 일년뒤에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가 됩니다.
자꾸 바꾸는 겁니다. 정말 사랑해? 그건 나도 몰라 그러면 모른다고 해야죠.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스트레스 받잖아요. 자기합리화가 안되니까요. 이 시간의 결론은 뭡니까? 우상속에 누구 있다? 내가 있고. 이 우상속에서 신으로 밀어 부치면서 신에게 접근하려고 하는것도 누구다? 나다. 결국 인간은 악마의 말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뒤에 무엇이 되었어요? 이미 자기가 작은 신인 되어 있는 상태에서 큰 신으로 가는데 그 모델로 누구를 삼는가 하면 여호와를 잡고 예수를 잡는 겁니다.
자기가 추종하는 세력으로 부처를 삼기 위한겁니다. 사실은 부처가 좋은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내가 위대한 부처라는 것이고,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죠. 이렇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이 전부가 다 우상인데 이걸 한마디로 로마서에서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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