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1. 삶이 물질적으로 피폐해졌을 때, 국가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도움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국가 복지정책’의 기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원의 실질적인 도움 이외에도 지원받는 사람이 느낄 인간적 모멸감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고, 인간적 존중을 통해 개인의 자존감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의 복지 시스템은 각각의 개인에게 ‘빈곤의 증명’을 요구하고, ‘개인의 무능력’을 밝히도록 하며, 개별적인 사정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가가 요구하는 형식적 절차에 종속되도록 강요한다. ‘복지’는 약간의 물질을 제공하는 댓가로, 개인의 ‘정신’을 극단적으로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 2016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뉴캐슬 지역을 배경으로 절차와 규정만을 강조하는 ‘복지정책’의 행정적 경직성과 개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행위를 냉정하면서도 치열한 방식으로 고발한다. 목수였던 다니엘은 심장병 치료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사소한 절차의 문제로 기각된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다시 ‘질병수당’ 재심사를 요청하거나, ‘실업수당’을 신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쉽지 않다. 질병수당 심사는 오랜 시간이 다시 소요되는 과정이며, 실업수당 또한 취업을 위한 노력의 증거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이제 대면을 통해서는 제시될 수 없다. 오로지 ‘컴퓨터’를 이용한 시스템에 접속하여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3. 영화는 블레이크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한 고군분투를 따라가면서, 런던에서 이주한 가난한 여성 A의 이야기를 병행한다. 이혼 후 두 아이와 함께 뉴캐슬로 이주한 A 또한 다양한 이유로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행정적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제제를 받는다. 옆에서 이런 모습을 보던 블레이크는 그녀를 돕게 되고 그러면서 그녀의 가족과 가까워진다. 적은 돈이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그녀에게 주고, 그녀의 망가진 집을 고쳐주며,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이면서도 따뜻한 도움을 제공한다. 하지만 ‘가난의 비극’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뛰어들고, 블레이크는 자신의 물품을 중고업자에게 판다.
4. 현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해지지만, 복지수당의 지급은 쉽지 않다. 블레이크가 복지기관에서 시도했던 수많은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현재적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랜 시간 입력한 정보가 작은 실수 때문에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무력해진 사회적 약자의 비참한 실존이다. 개인의 사정에는 관심없고 작은 항의에도 제제를 들먹이며 협박하는 직원들의 행정적 경직성은 ‘빈곤의 증명’만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존엄을 갉아먹는 ‘복지’의 차가운 얼굴인 것이다. 분노한 블레이크는 복지기관 벽에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쓰고 개인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는 복지정책의 무능과 문제에 대해 항의한다. 지나던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그것이 단지 블레이크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5. 영화는 수당 지급 심사를 앞두고, A와 함께 온 복지기관에 출석한 블레이크의 갑작스러운 심장병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누구보다 정직했고, 근면했으며, 이웃에게 친절하고 따뜻했던 한 늙은 남자는 국가가 만든 ‘복지의 미로’ 속을 헤매이다, 결국 그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로 속에 갇혀 사라진 것이다. 블레이크는 끊임없이 사람을 봐달라고, 사람이 겪는 고통에 주목하라고 외치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목소리에 무관심하고, 지원이 필요하다면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복지’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면, 지원을 해주는 과정에서 인간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형식화되고 규격화된 복지시스템은 ‘무임승차’에 대한 감시에만 몰두한 채,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적 아픔에는 무감각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효율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결국 인간을 차별하고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영화는 경고한다.
6.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사회적 약자의 항의는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재되고, 일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최근 대한민국 사회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가 단지 그 목소리가 너무 많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목소리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을 통해 점검되고 판단하여 수용되어야 한다. 최소한 그들의 목소리가 지닌 ‘정당성’을 인간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감정’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자 요인이다. 하지만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건이나 상황이 지닌 문제의 심각성이나 파장의 강도와는 관계없이, 감정적 방식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어 무관심이나 과잉의 형태로 대응하게 만들 뿐이다. 문제의 중요성은 나에게 주는 ‘감정’적 자극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치밀한 분석은 필수적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최소한 타인의 개입없이 ‘자신의 힘으로 문제에 접근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칸트가 말한 ‘계몽’의 의미,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라는 점도 추가되어야 할지 모른다.
첫댓글 - 삶의 권리에 대한 기본 인식이 복지정책의 출발이리라. 절차를 위한 엄격한 형식도 무시할 수 없고...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할 수도 없고.... 정책이 아닌 친절에 의존하기도 그렇고... 공허한 말들은 떠돌고... 정답은 없고 노력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