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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시인이 아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나 역시 일상 생활인으로부터 시인으로 즉 생활하기에서 시 쓰기로 전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직업이 학문을 하는 대학 교수인 까닭에 더 그러할 것이다. 학문이란 이성과 논리에 의해서, 시 창작이란 감성과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양자는 본질적인 상반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학문과 같은 이성적 사유는 오른쪽 두뇌가, 시 창작과 같은 감성적 사유는 왼쪽 두뇌가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평소 직장 생활에서 - 예컨대 논문 쓰기나 강의와 같은 지적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 오른쪽 두뇌에 의존해 있다가 갑자기 시를 쓰기 위해 왼쪽 두뇌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기계가 아닌 한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오랜 시작 생활을 통해 나름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다음과 같다.
생활하기와 시 쓰기 사이에 시간적으로 일정한 공백을 둔다. 두뇌활동을 잠시 멈추고 아무런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는 일이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멍한 상태에서 텔레비전만을 본다든지, 무념무상의 상태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 폭음에 시달려 본다든지, 혼자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든지 하는 것 따위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만나는 일도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란 놀면서 일하는 사람, 시란 놀면서 쓰는 어떤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나이가 들면서 습관화된 것으로 겨울 한철을 山寺산사에서 보내는 일이다. 그 동안 내가 자주 머물렀던 산사들로는 두타산 삼화사, 치악산 구룡사, 달마산 미황사, 설악산 백담사, 금강산 화암사 등이 있었다. 엊그제는 백담사 만해 마을에서 20여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시인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작품이든 아니든 누구나 시를 쓰면 모두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 등단이라는 어떤 독특한 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을 우리가 관용적으로 특별히 시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그가 이제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단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문단 등단이란 지금부터 그가 아마추어로서의 위치를 버리고 프로페셔널한 시 쓰기의 차원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공인하는 절차이다. 그것은 잘 쓰고 못 쓰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느냐의 차원이다. 실제 작품의 우열을 따질 경우라면 문단에 등단하지 못한 사람들 -- 아마추어가 쓴 시가 문인으로 등재된 사람의 작품보다 더 훌륭한 예는 수없이 많다.
시와 발상: 시적 발상을 얻는 일은 일종의 선과 같은 행위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 쓰기가 선과 동일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종국적으로 선은 대상도 긍정도 부정도 벗어나 완전한 자유 혹은 무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지만 시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 초기 단계에서 양자 모두 대상을 부정하거나 대상을 무화시킨다는 점만큼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하므로 나의 시 쓰기는 대상에 대한 조용한 명상에서 시작하여 나와 이 세계를 무화시킨 후 마침내 어떤 결정적인 순간, 하나의 깨우침을 얻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깨우침이 있게 되면 남는 것은 다만 그것을 언어를 통해 미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단계일 뿐이니까 깨우침이야말로 바로 시라 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도 시 쓰기는 또한 선에 비유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적 형상화란 수십 년의 시작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자신의 어떤 비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시도 예술이냐고 묻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시가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과는 본질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시가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매개에 있다. 음악이 청각을, 미술이 시각을 매개로 하는데 비해 시가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매개로서 청각이나 시각이 그 자체 하나의 감각이고 언어란 - 감각이 아니라 - 어디까지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미술에서 붉은 색은 색 그 자체가 감각적으로 인지시켜주나 시의 경우 ‘붉다’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붉은 것이 아니라 ‘붉다’라는 발음을 ‘紅’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자는 단지 약속체계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관념적이요 기호전달 적이다. 음악이나 미술의 기준에서 볼 때 문학이 예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학(=시)이 예술의 일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의미의 예술이 아닐 뿐이다. 그리하여 미학에서는 문학처럼 매개가 기호(=언어)인 예술을 관념예술, 미술이나 음악처럼 매개 그 자체가 감각인 예술을 물질 예술이라 불러 구분한다. 여기에 바로 문학 혹은 시가 지닌 숙명이 가로 놓여 있다. 즉 시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차원의 영역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예술의 감각적 매개와 달리 언어란 본질적으로 의미를 수반한 기호체계이고 그 의미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사상 즉 철학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는 감각 즉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의미 즉 철학의 영역에까지 진입하지 않는 한 도저히 쓰여 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소위 ‘무의미’라 하여 의미의 해방을 부르짖는 시 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기가 어렵고 또 아무리 굿을 해도 미술이나 음악을 시봉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코 훌륭한 작품의 반열에 올라서기가 어렵다. 다만 그 스스로 시의 위의를 자해하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모든 훌륭한 시가 궁극적으로 미학과 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많다. 또 시는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시어는 일상어와 달라 본질적으로 난해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론에서는 이 같은 시의 본질적 난해성을 혹은 애매성(ambiguity - 언어에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난해성), 모호성(obscurity-존재론적 조건에서 기인된 난해성), 막연성(vaguenes-거짓말에서 오는 난해성)따위로 구분하기조차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는 가능한 쉽게 쓰여 져야 한다. 적어도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조차 난해하여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를 지닌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난해한 시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시라는 것은 난해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읽어 보면 뻔한 내용인데 그것을 일부러 어렵게 조작한 시들이 - 기왕에 조작하려면 독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조작할 일이지 -- 의외로 많다. 무두 시적 사기로 무엇인가 이득을 보려는 행위이다.
시 쓰기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것을 쉽게 쓴 시, 둘째, 쉬운 것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가 그것이다.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시인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의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우열의 순서를 매긴다면 우수한 것부터 ①넷째, ②첫째, ③둘째, ④셋째가 될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시야말로 시의 상지에 속한다.
시를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일 시를 잃게 되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또 가장 고귀한 것도 아니다. 시는 인생의 일부이자 동시에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경우엔 시대나 상황에 따라, 개인적인 경우엔 어떤 특별한 계기에 따라 나는 시를 버릴 수도 있고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가난으로 처자식이 굶고 있는 상황임에도 시를 붙들고 앉아 무위도식하고 있다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때는 시 쓰기를 접어두고 우선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 국권이나 인권이 짓밟혀 인간다운 삶이 빼앗긴 상황이라면 시를 버리고 나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싸울 능력이 없는 자라면 시를 무기로(수단으로)삼아 투쟁해야 한다. 문학의 본질이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 때 그 상황에서는 하나의 순수한 예술로서 작품을 쓰는 것보다 사회에 뛰쳐나가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전체 삶의 가치라는 기준에서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나 깨나 시에만 매달려 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 시를 쓰는 까닭에 자신을 훌륭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내가 시를 쓴 시인인 까닭에 훌륭하다. 굳이 시를 쓰려고 고심하지 마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무엇인가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인간에겐 이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 많다. 시는 무작정 시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재능이 있어 할 수 없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쓰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정호승
나는 스스로 시를 버린 적이 세 번이나 있다. 1982년에 시집 ‘서울의 예수’가 나오고 87년 ‘새벽편지’가 나올 때까지 5년 동안, 90년에 ‘별들은 따뜻하다’가 나오고 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나올 때까지 7년 동안, 그리고 99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가 나오고 지금까지 3년 동안, 나는 철저하게 시를 버리고 살아왔다.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등단한 지 3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도합 15년 동안이나 시 한 편 쓰지 않고 시를 버리고 살아왔으나 시는 지금까지도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 마치 ‘돌아온 탕아’를 둔 아버지처럼, 내가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 따뜻하게 맞이하고 돼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집’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제는 시가 나를 버려도 내가 시를 열심히 찾아가 효도할 생각이다. 이제 느린 것은 두렵지 않으나 멈추어 서는 것은 두렵다.
나는 일찍이 마흔 하나에 ‘월간조선’에서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10년 동안 ‘수절’을 하다가, 21세기가 시작되는 벽두에 ‘현대문학북스’라는 출판사를 창업하고 위탁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지난 연말에 그만두고 다시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출판인이 아니고 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친소유무를 떠나 이해득실과 손익계산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표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들을 이제 내 스승으로 삼고 있지만, 나는 늘 이렇게 깨닫는 일이 늦어 막대한 시간을 그 대가로 지불한다. 월간조선을 그만뒀을 때도 마찬가지다.
실은 그때 나는 문청 시절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을 쓰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나는 결국 문학의 장르 중에서 나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만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인생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죄가 가장 크다는데, 나는 이렇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뒤늦게 깨달아 인생을 허비하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용서하시라. 지금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시 시의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은빛 니켈로 만든 십자고상이 하나 놓여 있다. 평생 십자가에만 매달려 살아온 청년 예수를 바라본다.
그가 잠시 고개를 들고 나를 보더니 “짜식!” 하고는 싱긋 웃는다. 나는 그 맑은 웃음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묵상한다. 예수의 손에는 십자가의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 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 삶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시를 쓸 수 없었다. 나의 삶 또한 만남과 헤어짐의 모자이크라는 것을,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과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일만큼이나 불가피하다는 것을, 불행이 인간을 향한 신의 가장 확실한 표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다.
그 동안 내가 쓴 시들은 고통이 잠깐 잠잠해지고 난 다음에 집중해서 쓴 시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문예지에 꾸준히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벼락치듯이 한 권 분량의 시를 써서 급하게 시집을 내곤 하였다.
깊은 사색의 사막을 건너지 못하고 무슨 자위하듯이 시를 썼으니 그 시들이 오죽하랴. 그 동안의 고통을 위로 받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다 보니 나로서는 자연히 그런 방법으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괴테는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름다운 색채는 바로 빛의 고통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결과다. 고통과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이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자 어느덧 50대 중년의 사내가 되고 말았다.
상처 없는 사람은 결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사람에겐 오히려 그 상처가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이제 그 상처의 힘으로 다시 시의 길을 가려고 한다. 세상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할 길이 있다. 이제 그 길이 시의 길임을 확신한다.
어린 시절 나는 시를 내 현실적 삶의 한 방편이나 도구로 활용했다. 시의 본질적 가치를 중요시하기보다 시가 왜 나의 현실에 필요한가 하는 데에 먼저 시의 가치와 효용을 두었다.
고3 때는 문예장학생을 모집하는 유일한 대학인 경희대학교에 무시험 입학하기 위하여 시를 썼으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문단에 등단해야만 졸업 때까지 문예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어서, 그 장학금을 받기 위하여 또 열심히 시를 섰다. 이렇게 나는 시를 무기 삼아 현실적 난관을 타개해 왔고, 그때마다 시는 기꺼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시는 나로 하여금 시대와 현실을 제대로 보는 밝은 눈을 지니게 해주었다. 내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의 말석에 엉덩이를 디밀었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된 지 불과 석 달 뒤였으며, 이후 1979년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나의 20대는 줄곧 유신시대와 그 시기를 같이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 겁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약한 나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으며, 긴급조치가 선포될 때마다 국가가 국민에게 자행하는 그 거대한 테러 앞에 쥐새끼처럼 벌벌 떨었다.
그때 나는 70년대의 젊은 시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 있는 자는 행동하였으며, 나처럼 용기 없는 자는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 비굴하게 느껴졌다. 한두 해도 아니고 7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김지하 시인을 감옥 밖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나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70년대의 모든 시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지금도 김지하 시인에게 감사와 부채 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도 그때 시는 섬약하고 용기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그나마 시를 쓰게 해주었다.
비록 목소리는 작고 여리고 부드럽고 잔잔하나 그래도 그러한 목소리로 한 시대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만일 시가 없었더라면 유신시대를 사는 동안, 나는 더욱 부끄럽고 비참했을 것이다. 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군사독재시대의 한 모퉁이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시인들, 김창완 김명인 등과 함께 시동인지 ‘반시’를 결성, 소위 현실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것도 시가 내게 베푼 은혜 중의 하나다. ‘민중의 차원 속에 동화하지 못한 오만한 언어에 대하여, 시의 본질인 정신보다는 수단일 뿐인 언어세공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맥락으로부터 이탈해 버린 관념적인 세계성에 대하여 부정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고 천명하던 ‘반시’ 창간사의 한 구절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이제 탕아의 심정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인 시의 가슴에 안기니 평화롭다. 시가 배불리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순수한 내 피와 살이 되어 내 영혼을 맑게 해주는 것만은 자명하다.
석수장이가 망치질을 백 번을 해도 돌덩이에 금 하나 가지 않다가 백 한 번째 내리치자 돌덩이가 둘로 갈라지는 경우, 그것은 백 한 번째의 망치질 때문에 돌덩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망치질 횟수가 모두 합쳐져 쪼개진 것이다. 나는 이제 백 번을 하고 백한 번째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는 백한 번째의 망치질에서 돌이 깨어지는 순간에 태어나는 그 무엇이다.
무엇보다도 내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의 그릇이, 나라는 한 인간의 그릇이 간장종지만큼 작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그 그릇에 시라는 간장을 조금 담아 남들이 밥 먹을 때 조금씩 찍어먹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시로서 무엇을 이룰 생각은 버릴 것이다. 산다는 일이 무엇을 이루는 일이 아니듯, 시 또한 현실적으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흙탕물이 질퍽한 연못에 떠 있는 아름다운 수련과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수련은 더러운 오물들이 떠다니고 온갖 쓰레기들이 가라앉아 있는 진흙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자신을 멋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을 뽑아 올려 백색과 홍색의 꽃을 피운다. 주위의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없는, 그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 뽑아 올리는 수련의 뿌리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싶다. 그런 뿌리의 마음이 되어야만 현재의 악에서 미래의 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하되 사랑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제 시를 열심히 쓰되 시에 얽매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몇 차례나 시를 버리는 ‘탕아’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물새는 물에 젖지 않고 물에 뛰어든다. 나는 시를 쓰는 물새가 되어 물에 뛰어들다가 그만 물에 젖어버려도 좋다. 물에 젖지 않고 물에 뛰어드는 물새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어떤가. 그래도 물새는 물새가 아닌가.
왜 시를 쓰는가(김기택)
30대 초반이던 어느날 회사에서 외출했다가 들어오니 책상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를 보는 순간,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전에 한 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 본선에서 거론조차 된 적이 없었고, 신춘문예 사고를 보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투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뜻밖이었다. 어쨌든 별 희망 없이 지루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되었고, 한때의 취미로 머물다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던 나의 시 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나는 시 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원으로 생활하고 있을 무렵, 안양에서 동인지 활동을 하는 친구, 선후배들과 어울려 습작을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의 습작이란 직설적으로 과격하게 마음을 토해내는 배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의 맛은 없었지만 후련하기는 했다. 그 나이 그 환경에서는 매우 유익한 공부였고 약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탄 기억이 있다. 주어진 제목이 ‘토끼’였는데, 토끼에 대해 쓸 만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추운 겨울에 친구들과 하교 길에 얼어 죽은 토끼를 발견하고 배가 고파 주워서 구워 먹었던 이야기를 썼다. 상 탄 것은 좋았는데,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글을 낭독하라는 것이었다.
전교생 중에는 함께 죽은 토끼를 구워 먹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그 친구들이 들으면 어떡하나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끝까지 낭독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낭독을 거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글 쓰는 일을 꺼리게 된 것 같다.
내 등단작은 ‘꼽추’와 ‘가뭄’이다. 정적이고 어두운 시들이다. 안에서는 무언가 터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싸고 있는 육체와 삶은 불구이고 억압적이고 폐쇄적이다. ‘꼽추’ 앞부분에는 불구에다 노인에다 거지인 사람이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한 인간으로서는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다소 과장되게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폐쇄된 어둠 속에서 노인이 일생을 억눌러온 등뼈를 부수고 보기 흉한 불구의 등을 터뜨리고 나오는 상상을 한다.
이 등단작을 보며 습작기를 돌이켜 보면, 내 시는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습작기의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열등하고, 환경도 보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앞날은 캄캄했고,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기댈 곳이 없었고, 그것을 헤쳐가기에 너무 무능하였고,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었으며, 몇몇 사소한 약점이나 버릇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 상상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내 나약한 성격에게 어떠한 상황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내 몸이 견뎌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극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시가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시는 직접적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어떤 극한 상황에도 처하게 할 수 있었고, 스스로 부과한 폭력과 수치를 남을 엿보듯 즐기면서 견디게 해 주었을 것이다. 시는 이러한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등단 초기에는 이상하게 동물시가 많이 씌어졌다. 왜 그 시기에 동물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들 속에 나오는 몇몇 동물들은 환경의 폭력을 견디느라 몸의 특정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 있거나 한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기능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을 견딘 상처가 육체화된 것이며, 그 폭력과 역사는 아직도 육체 속에 살아 남아 그 육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구경거리이거나 음식일 뿐이다.
동물시는 아마도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외부와 환경의 폭력을 견뎌낸 몸들, 거기서 생긴 상처와 두려움이 육체화된 현장을 관찰할 때, 나 자신이 매우 공격적이 되고 집요해진다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구경거리나 음식물이 되는 동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를 관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시집의 첫 작품은 ‘쥐’다. 쥐만큼이나 어둡고 칙칙한 시다. ‘호랑이’란 시도 있고 ‘거북이’란 시도 있는데, 하필이면 ‘쥐’가 첫 시집 첫 작품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선택하도록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내 시세계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운명적으로 규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쥐는 스스로 제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밝은 곳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자꾸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한다. 나도 지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한다. 평균적인 삶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가정 속으로, 너무나 흔한 외모여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장인의 모습 속으로 숨는다.
가능하면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압력에 눌려 나는 쥐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몽둥이가 있는 대낮의 한가운데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고 있다. 나는 자꾸 쪼그라들고 작아진다. 내가 쓴 ‘쥐’ 안으로 점점 갇히고 있다.
내 시에 불구나 미물이나 하찮은 것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이미 내 몸 속에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시는 정확하게 내 몸이 생긴 대로만 나온다. 꼴값하느라 그러는 건데 어찌하겠는가. 내 생긴 것과 다른 것을 쓰면 당장 표시가 난다. 안 들킬래야 안 들킬 재주가 없는 것이다.
등단 15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한 회사의 건물 속에, 한 가정의 가장 속에, 수많은 평범한 40대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숨어서 안 쓰는 척하며 최소한의 작품만 쓰고 있다. 일정 기간에 쓴 작품들이 모이면 시집을 낸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이런 행위는 무엇인가? 이런 시 쓰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혹시 시인이라는 외부적 프리미엄을 누리기 위한 습관적인 행위는 아닐까?
하기야 내 나약한 성격에 습관은 미덕이다. 고정 관념과 편견과 고집과 항상 다니던 길만 골라 가는 버릇으로 이루어진 이 습관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 성격에 확실하게 갈 길을 제시한다. 이 힘으로 나는 세 권의 시집으로 묶은 작품들까지 쓴 것인가?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이것도 이미 내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과도 싸워야 한다.
어쨌든 이 습관적 행위로 나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견디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선조와 내 몸 안에 쌓이고 고착되고 끊임없이 강화된, 약하면서도 고집불통인, 이 육체화된 상처, 육체화된 폭력을 가지고 나는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식욕이며, 성욕이며, 결코 멈추는 법이 없는 여러 욕망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응하고 그것들 때문에 한 시도 바람 잘 날 없는 마음에 아부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일방적으로 그런 요구를 들어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그러므로 그 욕심 사납고 고약한 일상생활과 부딪치며 수치를 감수하며 내 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왜 시를 쓰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시 쓰는 일은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한 방이면 박살나는 머리로 꿈꾸고 한 칼이면 순대나 쓰레기가 되는 심장으로 분노하는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이미 나 자신이 되고 내 인격이 되고, 내 생명이 되어버린 ‘육체화된 상처’와 ‘육체화된 폭력’을 견디는 일이라고. 대대로 물려받은 식욕과 성욕과 불안의 유산으로 매일매일 먹고 사는 일을 견디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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