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거치대의 다리를 펴고, 길 다란 망원경을 꺼내 설치한 뒤 그것을 난간으로 가져갔다. 망원경의 초점이 흐릿해 몇 번을 맞추고 나서야 겨우 앞이 보였다. 십칠 층 건물 옥상 구석에서 그는 지금 저만치 떨어진 빌라를 훔쳐보고 있는 중이었다. 옥상 난간을 타고 에어컨 실외기 수십 대가 나란히 일렬로 놓여 있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은 전부 두 곳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가 손잡이를 돌린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며칠 전부터 이곳 옥상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동네에 십칠 층짜리 건물은 이곳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망원경에 오른쪽을 눈을 갖다 대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나서야 빌라를 찾을 수 있었다. 언덕빌라 504호는 아직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빌라는 말 그대로 동네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전부터 그곳을 꼭 훔쳐보리라 마음먹었다. 지금껏 훔쳐보지 못한 곳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이곳저곳에 망원경을 설치했다. 딱히 누구에게 걸린 적도, 의심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그의 신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말자.
그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골프백에 망원경을 넣고 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그저 골프를 치는 사람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골프백에 별 희한한 물건들을 넣고 다니는 그였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하물며 그의 가족들마저도.
그가 골프백을 메고 나오면 가족들은 당연히 골프를 치러 가는구나, 여길 뿐 그가 한적한 옥상에 올라 누군가를 훔쳐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으로서 충직했고 한 여자의 지아비임과 동시에, 두 아이의 믿음직한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출판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그의 유일한 취미는 골프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왜? 골프백을 매고 다니니까. 주말이면 항상 골프백을 매고 집을 나섰지만 그는 정작 가족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그가 편집국장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접대하기 위해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그것에 별반 불만을 갖지 않았다. 가족들과 어디 나들이를 가면 좋으련만, 하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집에서 십칠 층 건물은 꽤 멀었기 때문에 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골프백을 트렁크에 싣고 차를 몰아 나오면서 그는 씨팔, 욕지기가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웬 놈의 차들이 이렇게 많아, 하여튼. 그는 안 그래도 좁은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면서 행여 부딪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그의 차는 이번에 새로 출시된 신형 자동차였기 때문에 긁히기라도 하면 속이 탈 것 같았다.
그는 건물 가까이 차를 주차시키곤 트렁크에서 골프백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위를 한번 바라보았다. 좋아. 그는 개선장군처럼 떳떳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반듯한 모자를 쓴 경비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를 제지하거나, 심문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걸어 십칠 층까지 단숨에 올랐다. 건물이 건물인 만큼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럽게 옥상 문을 열고 어깨에 메고 있던 골프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옆구리 지퍼를 열어 삼각대를 꺼내 다리를 폈다. 동이 트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커튼이 걷히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망원경을 504호에 고정시켜 놓고 하는 수없이 그는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흡연석을 따로 마련해 놓은 듯, 모래를 한 움큼 담아놓은 철제 재떨이에 꽁초가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문득, 아직 불씨가 채 가시지 않아 연기가 나는 담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더 신중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이 미욱스럽게 느껴졌다. 행여 자신의 행위가 발각될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옥상의 비상구는 돌출되어 있어 구석이 져있었다.
그는 첫 번째 돌출된 문 구석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는 아차, 싶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돌출된 문 앞까지 다가갔다. 분명 누군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후-우 하는 한숨 섞인 소리가 났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집어 삼켰다. 극도의 긴장에서 오는 오랜 버릇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빼꼼 모퉁이를 넘어다보았다. 머리가 부스스한 웬 여자가 난간을 마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한담. 돌아가야 하나. 이제 곧 있으면 동이 트고 커튼이 걷힐 시간이라 그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우면 내려갈 테지, 생각했지만 꼬락서니를 보니 아예 옥상에 밤을 샌 것처럼 보였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다시 여자를 돌아보려는데 그는 그만 뜨악했다. 저만치 떨어진 두 번째 비상구 출입문에 자신처럼 몸을 바짝 벽에 기댄 체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데없는 타인의 출현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남자는 얼핏 봐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머리가 희끗하게 벗겨진, 쉽게 말해 대머리였다. 대머리는 여자를 바라보느라 그를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조심스럽게 그는 다시 의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아직 발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망원경은 그대로 두기로 하고, 골프백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는 골프백 안에서 손바닥한만 무전기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몇 해 전 해외 출장을 다녀온 친구에게서 받은 무전기였다.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두 아들 갖다 주라며 건넨 것이었지만,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올 것이라 믿은 그는 그것을 골프백에 넣어 두었다. 이어폰이 달려 있어 통화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소곤소곤 말해도 내장스피커 기능이 있어 무전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역시 외국제품이라고 생각할 만큼 고급스러운 자태를 발하는 무전기였다. 두 아들은 그 사실을 일절 모른 채 지금껏 살아왔다.
침착해야 된다고 마음먹은 그는 무전기 하나를 허리춤에 찼다. 하나를 남자에게 주기로 했다. 자신과 남자 사이에 여자가 있으므로 쉽사리 그쪽으로 다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철수하기엔 멋쩍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대머리를 돌려보내느냐, 자신이 돌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벽에 붙어 이번에는 남자를 넘어다보았다. 대머리는 여자를 주시하느라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대머리에게 무전기를 건네기로 작정한 그가 벽을 등진 채 한쪽 손을 흔들어댔다. 여기 봐라. 대머리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대머리는 그런 그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보라고. 답답한 마음에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시멘트 돌조각을 집어 그쪽으로 던졌다. 작은 돌조각이었기에 그다지 소음이 발생하지 않았다. 대머리가 흠칫 놀라더니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역시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다대는 시늉을 해보이며 무전기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몇 번 앞뒤로 흔들어 보였다. 던질 테니 받으라는 시늉이었다. 대머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빼꼼 여자와 무전기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시구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때서야 대머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잡아야 할 텐데. 최대한 팔의 힘을 빼고 고각으로 해서 무전기를 던져야 했다. 그는 아래에서 위로 팔을 한번 휘둘러 무전기를 던졌다. 그러져 무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대머리에게 날아갔다. 제발, 잘 받아라. 제발.
그때까지도 여자는 난간을 마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나 말이오? 그래 당신, 당신 말고 또 있어? 그러는 댁은 누구요.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닐 텐데, 묻는 말이나 대답하시지. 그는 야멸치게 무전을 쳤다. 옥상에는 내가 먼저 올라왔소, 그러니 당신이 먼저 누구인지 밝혀야 할 것 아니오. 누가 먼저 올라온 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당신 누구야? 대머리가 그를 바라보며 눈을 꿈뻑이더니 대답했다. 저 애 애비 되는 사람이오. 저 애?, 저 여자가 당신 딸이야? 대머리가 대답대신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좋아,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자 데리고 그만 내려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소. 왜,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내가 한가해서 당신한테 무전치고 있는 줄 알아, 보니까 당신 딸이라는 저 여자, 밤을 샌 것 같은데, 그만 데려가서 재워, 응? 그는 몹시 화가 나있었다. 좋게 말할 때 그만 꺼져라, 는 말을 그 나름대로 회유적인 말로 대치시켰다. 대머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무전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저 애는 몽유병 환자요, 저러다가 자리에 폭, 쓰러질 거요, 그럼 그때 데려가면 되는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몽유병이라는 대머리에 말에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켰다. 저 애는 매일 밤 이 건물 옥상에 올라온다오, 몽유병을 앓고 난 뒤부터 저 애는 매일같이 올라와 몇 시간을 저러고 있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오, 그러면 난 저 애를 업고 낑낑대며 집에 갈 뿐이오, 집이 가까우면 모를까, 저 애를 업고 집까지 갈 생각을 해보시오, 딸을 업고, 그것도 정신이 몽롱한 딸을, 마찬가지로 그런 딸을 지켜보느라 정신이 몽롱해져 있는 애비가, 집으로 낑낑대며 업고 가는, 그런 부녀父女를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있느냔 말이오. 무전을 통해 대머리의 격정 섞인 토로가 전해지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저 여자가 쓰러져야만 당신도 내려갈 수 있다, 이 말이군. 대머리가 무전기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이어폰을 낀 귀에서 극심한 소음이 느껴지면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좋아, 좋아, 그럼 저 여자가 쓰러지려면 얼마나 남았지?
그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여자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을 하니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드시 이번에는 504호를 훔쳐보아야 했다. 이제껏 그는 목표물을 두고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군 생활에서 베인 의지였다.
시력이 좋았던 그는 특수부대의, 그것도 저격수 보직의 특등사수였다. 저격수, 라는 보직에 그는 만족했고, 다른 사병들과 달리 오로지 저격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다른 사병들이 삽 하나로 산을 깎아 내릴 때 그는 김일성의 얼굴이 그려진 표적에 십자망선을 일치시키곤 했다. 그가 저격수가 된 건 순전 뛰어난 시력 덕분이었다. 당시 그가 속한 부대에서는 시력이 뛰어난 사병들을 따로 축출했고, 저격병 양성을 실시했다. 정확히 그때부터 그는 망원렌즈를 접했다. 고참들은 백발백중인 그의 저격 솜씨에 감탄하며 그를 OK라고 불렀다. 그의 이름인 오계익을 발음상 OK라고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저격은 언제나 표적에만 머무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김일성의 이마에 총탄을 박진 못했다. 그리고 제대를 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념이 투철한 군인은 아니었다. 단지 시력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특수부대, 그것도 저격 특등사수가 된 것 뿐이었다. 당시 그의 시력은 삼 점 영이었다.
그의 시력이 자연 태어났을 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다. 막 자궁을 통과해 머리를 비집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의 각막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선천성 각막혼탁증. 유전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부모는 각막 때문에 고생하는 아들에게 육백만원을 들여 각막이식을 시술했다. 누구의 각막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의 시력은 월등 좋아졌다. 친구들은 당시 방영되던 외화를 회자시켜 그를 육백만원의 사나이라고 부르기 일쑤였다.
각막이식 후 그에게 희한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초능력이 생겼다느니, 눈을 바꿔달더니 투시능력이 생겼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것은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대번 사람 얼굴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혹시 귀신을 들린 건 아닌가, 걱정하는 부모 덕분에 무당을 찾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좋아진 시력을 다른 용도에 써먹었다. 줄곧 다른 집에 사는 여자를 훔쳐보거나, 정사장면을 목격하는데 사용했다. 나름대로 유용하게 사용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확히 그때부터 그의 취미생활이 시작됐다. 저 집에는 누가 살까, 저 여자는 매일 남편과 어떤 체위로 즐길까 하는 자못 고차원적인 궁금증에 그는 매료됐다.
군을 제대하고 나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최고급 망원경을 구입한 것이었다. 얼핏 천체망원경과도 비슷한, 삼발이가 달린 거취 형 망원경을 그는 육백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구입했다(당시 그의 부모 역시 어마어마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망원경을 구입하고 나서 그는 줄곧 한적한 옥상을 찾아 그것을 설치했다. 망원경을 고정시켜 놓고, 목표물을 포착되면 그것을 낚아채는, 마치 낚시꾼처럼 그는 통쾌해했다. 그런 통쾌함은 그의 주말을 책임져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때문에 난데없는 여자와 (물론 그가 제일 늦게 옥상에 올랐지만) 대머리의 등장이 그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동이 트면 저 자리 폭 쓰러질 것이오. 대머리의 말에 그가 산등성이쪽을 바라봤다. 산등성이 주변에 해가 걸쳐져있었다. 저 여자가 안 쓰러지면? 어떻게 할 거야, 당신. 그는 턱 끝으로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대머리가 다시 한 숨을 쉬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지지직하는 소음과 함께 극심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그건 걱정할 것 없소. 대머리의 말에 그가 빠르게 송신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확신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대머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그렇소, 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득 대머리가 말을 이어 무전을 쳤다. 이것만 부탁드리겠소, 저 애가 쓰러질 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몽유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현실과 꿈에 있어서 혼란을 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고 들었소,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그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러자 대머리가 그를 채근하듯 말했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오, 몽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강제로 깨우려고 하자, 그 사람은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곧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하오, 딴에는 뇌사라고도 하고, 다른 딴에는 심장마비라고도 하오, 몽유병은 말 그대로 꿈을 꾸면서도 현실로 착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오, 이를테면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그 충격 때문에 후유증을 앓다가, 그것이 심해지면 몽유병이 되는 것이오, 이제 이해가 되시오, 제발 부탁드리오, 저 애가 쓰러질 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대머리가 무전기에 이마를 대며 고개를 숙였다.
대머리의 간곡함은 무전기를 통해 그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여자가 쓰러질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하니, 그로서도 굳이 채근할 이유 없을 듯 했다. 빌라의 커튼이 걷히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고마운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머리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는 슬며 고개를 내밀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태 여자는 난간을 마주보고 있었다. 담배는 타 피운 모양이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걸친 여자의 머리는 부스스하다 못해 산발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몽유병이 길래, 여기서 밤을 샌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몽유병에 대해 어디서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뭐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남을, 하다못해 저 대머리에 딸을 동정한단 말인가. 그는 다시 무전기를 허리춤에 차고는 삼각대 망원경이 있는 난간 구석으로 갔다. 대머리는 출입문에 서서 슬몃슬몃 여자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에 눈을 대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건물 아래 주변을 살폈다. 빌라에 커튼이 걷히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마당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덧 누럿누럿 해가 산등성이 밖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때문인지 좀 전보다 시야가 더 밝아졌다. 망원경으로 휘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그는 한 곳에 망원경을 고정시켰다. 차들이 밀집한 주택가 골목을 남자 한 명이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에 가느다랗고 한쪽이 휘어진 철사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얼핏 보아도 이십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망원경을 돌릴까 하다가, 대번 수상해 보이는 남자의 행동이 미덥지 않아 계속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주택가가 밀집한 골목은 오가는 사람이 없어 말 그대로 한적했다. 으슥한 곳에 숨어든 남자가 손에 든 철사를 고급승용차 운전석 문에 끼워 맞추며 몇 번 들어 올리는 행동을 반복 했다. 저런 병신. 고급승용차를 터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경보음이 울릴 텐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희한한 일일세. 미리 경보기를 제거한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남자는 손쉽게 차문을 따서 열고는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차 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남자는 익숙하게 차 내부에 있는 오디오며, 네비게이션이며 고가의 것들을 슥슥 힘들이지 않고 그것을 해체해서 밖으로 나왔다. 순식간에 일이난 일에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단한데. 그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남자에 행동에 정의감이 불타거나,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남자는 고급승용차를 미리 눈여겨 점찍어 놓았을 것이었다. 때문에 경보기를 제거하기 위해 차량 밑바닥에 기어들어가 경보기 선을 해지했을 터였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체한 것들을 들고 유유하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고급승용차만 노리는 전문 털이범 같았다. 어디론가 향하는가 싶더니 골목 인근 주차된 차에 그것을 던져놓고는 그대로 시동을 걸어 십칠 층 건물 쪽으로 차를 몰아오는 남자였다. 이쪽으로 오는 건가. 그는 남자가 자신이 있는 건물 쪽으로 오는 것 같아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는 난간에 기대 아래를 바라봤다. 남자의 차는 어느새 건물의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남자는 건물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놈이 혹시.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남자가 씨익 웃는 듯하더니 그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예의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 그의 차 운전석 문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그는 아차 싶었다.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경비는 무엇을 하고 있지. 순찰이라도 돌고 있는 걸까. 건물 아래 풍경은 그야말로 휑했다. 주차된 차라고는 고작 남자의 차와 그의 차뿐이었다. 인적 역시 드물었다. 눈앞에서 털이범의 행각을 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그때 자신의 차에는 경보기가 달려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 남자는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경보기를 제거 할 것이 분명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지금이라도 뛰어 내려가 남자를 붙잡으면 그만이었다. 그는 문득 언덕빌라를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커튼이 걷혀진 상태였다. 젠장.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남자를 제지하기 위해 내려가느냐, 계속해서 504호를 훔쳐보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때 문득 대머리가 떠올랐다. 그래, 대머리를 시켜서 남자를 제지하게끔 하면 되겠군. 적어도 그러면 자신은 504호를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그가 대머리에게 무전을 쳤다. 나 말이오? 그래 당신. 왜 그러시오? 내 말 듣기만 해. 저 여자는 내가 지켜봐 줄 테니까 당신, 나 좀 도와줘야겠어. 대머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무슨 말이오? 당신이 내려가서 내 차를 털고 있는 놈 좀 잡아줬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신고까지 해주면 더 고맙고. 직접 하면 될 것 아니오. 대머리가 냉랭하게 내뱉은 말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난 잠복중인 형사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지켜보고 있는 빌라에는 지금 조직폭력배 수십 명이 은거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저 아랫놈을 잡기에는 시간이 빠듯해. 그러니까 당신이 좀 내려가서 대신 잡아줬으면 하는데, 어때? 그는 좀 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대머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자를 한번 바라보았다. 당신을 어떻게 믿소. 당신이 형사인지, 아니면 단순한 관음증 환자인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냔 말이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켰다. 이봐, 난 형사야. 내 일을 도와주면 내일 신문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당신 이름이 실릴 수 있는 거야. 그래도 못 믿겠어? 대머리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 딸은 형사라는 사람한테, 그것도 이곳 옥상에서 몹쓸 짓을 당했소. 그런데 내가 형사라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소. 그는 번뜩 정신을 들어 대머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대머리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아보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던가.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 먹히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때 대머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형사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소. 난 단지 딸을 데려가면 그만인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낭패였다. 물론 대머리가 자신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임을 예감은 했지만, 형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몹쓸 짓? 무슨 말이지?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대머리가 다시 깊은 숨을 들어 마시고는 말했다. 한 달 전에 저 애는 이곳 옥상에서 몹쓸 짓을 당했소. 그것도 형사한테. 한동안 딸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 후로 저렇게 몽유병을 앓고 있는 것이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몽유병은 정신적인 쇼크를 받은 곳을 무의식중에 찾게 되는 현상이라고 들었소. 저 애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제발 저 애가 쓰러질 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부탁하오. 대머리가 다시 무전기에 이마를 대며 간절하게 말했다. 그로서는 별반 도리가 없었다. 504호를 훔쳐보느냐, 전문털이범을 잡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털이범을 잡기로 결심했다. 망원경은 그대로 놓아둔 채 그는 무전기를 허릿춤에 다시 찼다. 대머리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가 비상구로 통하는 문고리를 잡는 순간 여자가 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머리가 손에 쥐고 있던 무전기를 떨어뜨렸다. 갑작스런 여자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자는 심하게 몸을 비틀어대며 경련을 일으켰다. 여자의 비명은 한적한 건물 전역에 들릴 정도로 컸다.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누군가 수상하게 느낄 사람이 있을 것이고, 옥상으로 오를 것이 분명했다. 순찰을 돌고 있을 경비가 올라 올 가능성이 컸다. 난감한 상황에 그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꽈악 움켜쥐었다. 젠장. 그는 다급하게 구석에 설치한 망원경 쪽을 바라봤다. 경비가 올라온다면 분명 자신의 의중을 떠볼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경비는 자신이 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었다. 그는 경비가 올라오기 전에 망원경을 해체하기로 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여자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대머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본채 만 채 망원경을 해체해서 골프백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허릿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까지 골프백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차, 싶은 마음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대머리가 나머지 무전기를 갖고 있는 것을 깜박했다. 그가 대머리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가려 할 때 여자가 몸을 휙 돌려 그와 대머리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은 뒤집혀져 있어 흰자위가 보일 정도였다. 대머리가 여자를 만류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할 찰나에 그보다 앞서 여자가 빠르게 그를 향해서 달려왔다. 그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피해 여자와의 충돌을 피했다. 여자는 그대로 달려가 맞은편 난간 앞에서 멈춰 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와 대머리의 시선이 동시에 여자를 향했다. 여자는 한 발을 들어 난간에 올려놓고는 몸을 천천히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난간을 타고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와 대머리가 동시에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사람이 죽는다. 그의 머릿속에선 오만가지 단상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적어도 이 상황에서 여자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면 좋지 못한 결과가 따른 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서서히 난간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과 그가 난간에 바짝 몸을 밀착 시키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때 여자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흰자위로 뒤덮여 있던 여자의 눈에 동공이 보였다. 조금 전 비명을 지르며 날뛰던 여자의 모습은 온대간대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 그것도 삼류 저급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그에게 일어났다. 만약 그가 여자와 어떤 불가분의 관계였다면 관객에게 기립박수를 받을만한 장면이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와 여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생판 일면식이 없는 사이였음으로 삼류 저급 영화의 결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여자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울지도, 놀라지도 않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대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이 여자의 눈과 마주침과 동시에 여자의 내면이 마치 영사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고스란히 눈앞에서 재현됐다. 육백만원의 각막이 효력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런. 그는 짤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가 어렸을 적 보았던 외화의 주인공이었다면 멋진 배경음과 함께 뛰어내려 여자를 구하겠지만 그는 단지 시력만 좋을 뿐이었다. 불과 채 몇 초 되지 않은 순간에 그는 여자의 모든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대머리를 한번 쏘아보다가 그대로 멱살을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개자식. 자기 딸을 욕보여.
건물 아래에는 경보기 선을 제거한 남자가 막 머리를 비집고 나오려는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