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기차여행(5) - <광주역>, <장성역>, <김제역>, <정읍역>
1. ‘익산’에서 숙박하고 호남선 역답사를 시작한다. 먼저 <광주역>으로 이동한다. ‘광주역’은 광주의 중심에 있지만, 이제 그 위상을 잃고 있다. KTX가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 대합실은 크지만 사람들은 적다. 비어있는 공간이 변모하는 영역의 위치를 말해준다. 역 구석에는 ‘광주역’에 주차하고 ‘광주송정역’으로 이동하는 셔틀열차를 이용하면 훨씬 저렴하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이용이 적다는 증거이다.
2. 역 광장으로 나와 ‘광주시청’ 방향 쪽으로 걸었다. 역과 시청을 연결하는 중심도로이다. 도로 중간에는 1980년 광주항쟁 때 시민군과 호흡했던 ‘양동시장’이 나타났다. 시장 옆에 서있는 조각상과 표지석은 아직도 그때의 고통과 연대의 기억을 조명하고 있었다. 광주의 중심을 걸으면서 과거 80년대 광주에 왔을 때의 무거웠던 마음이 생각난다. ‘광주항쟁’에 무관심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종의 부채감은 광주를 걸으면서 무언가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들과의 시선에서 어색함을 느끼게 하였다. 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광주에서의 발걸음이 무겁지 만은 않았다.
3. ‘광주역’에서 <장성역>으로 이동했다. ‘장성’은 전라남도의 시작점이다. 역에서 내리자 도시 전체가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장성의 상징이 바로 ‘엘로우 시티’였던 것이다. 장성은 역과 도심이 가까운 곳이다. 역에서 군청까지는 20분도 채 안 걸렸다. 청사를 지나 외곽 마을과 주변 야산까지 둘러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장성은 나에게는 유독 아픈 기억을 주는 장소이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중장비 운영이 결정적으로 파산을 맞은 곳이 바로 장성이었다. 대여비도 제대로 수금하지 못했고, 그나마 수금한 돈은 고용한 기사가 착복하였다. 그렇게 빚이 늘어났고, 결국 우리는 파산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 쇠퇴 속에서 나는 ‘교대’ 진학을 결정했다.
4. ‘장성역’에서 <김제역>으로 이동했다. 열차로 이동하면서, 무궁화 열차 중간에 있는 카페 칸이 매우 효과적인 여행공간임을 발견했다. 우선 창 쪽으로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책상이 있어서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여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커피나 음료를 눈치안보고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편안한 공간이었다. 무궁화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조용히 창밖을 보면서 두 사람의 열차 데이트도 즐길 수 있다) ‘김제’는 고대의 ‘벽골제’가 있을 정도로 넓은 평야와 벼농사로 유명한 곳이다. 김제의 도로를 걸으면서 넓게 펼쳐진 논들을 본다. 대한민국의 겨울에 만나는 논의 모습은 어느 곳이나 동일하다. 추수가 마무리된 논은 간혹 철새가 날거나 둥근 볏집 포장물들이 흩어져 있다. 차이는 포장물의 색깔일 뿐이다.
5. ‘김제역’에서 오늘의 숙소가 있는 <정읍역>에 도착했다. 정읍역도 제법 복잡하고 활기가 차있었다. ‘정읍’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은 ‘혁명도시’라는 문구였다. 19세기 말, 국가의 폭력과 약탈에 분노한 농민들이 궐기한 ‘농학농민운동’이 바로 정읍의 고부에서 전봉준의 주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안내문은 정읍을 비롯하여 혁명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도시들의 모임을 안내하고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 중엽까지는 ‘혁명의 시대’였다. 너무도 강고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혁명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도 수많은 무고한 죽음이 발생했다. 이제는 ‘혁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혁명’이 필요하다면 다만 개인적인 정신적 ‘혁명’만이 요구된다. 그렇게 각성되고 혁명된 ‘정신’이 최소한의 고통과 희생을 통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21세기는 혁명이 아닌, 철저하게 ‘개혁’의 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혁명의 도시’라는 문구가 주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허구적인 구호라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첫댓글 - 전라도 광주! 이제는 혁명도시 연대회의로......... 藝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