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타인 1세, 풀네임 세바스타인 프리드리히 폰 로엔그람은 알렉산더 1세의 장남으로 우주력 824년생이다. 이름은 증조부인 세바스타인 폰 뮈젤의 이름을 딴 것이며 그가 태어났을 때는 아직 힐데가르트 섭정황태후의 섭정기였고 로엔그람 왕조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던 번영기로서 아버지보다도 더 안정된 치세 속에서 성장하였기에 나름대로 굉장히 치열하게 성장해야 했던 아버지보다는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물론 차기 황제인 황태자인 신분인 만큼 그 역시도 아버지만은 아니라도 엄격한 제왕학 교육을 받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를 좌우명으로 삼았을 정도로 치열하게 성장하며 또 실력을 쌓은 청소년기의 아버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널널하였기에 실력 또한 아버지만큼 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페잔 명문대 차석 졸업, 정치학 석사, 사관학교 상위권 성적으로 수료 등의 엘리트 경력을 밟으며 차후가 기대되는 인재였다.
세바스타인 1세가 본격적으로 떠오르는 계기는 그의 나이 50이 다 되어가던 우주력 873년이었다. 이 때에 황제는 이미 일흔을 넘긴 고령인데다 많은 주변인들의 사망으로 심신이 많이 쇠한 상태였으며 더하여 구 제국령과 구 동맹령 신영토 등의 정치적 문제들을 겪으며 이 모든 것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하였고 그 끝에 떠올린 것이 공동 황제 제도였다.
특히 알렉산더 1세는 이 3가지에다가 공동 황제를 한다면 아무래도 경력의 차이로 새로 즉위한 황제가 먼저 즉위한 황제에게 배우는 모양새가 되고 이는 자연스레 후계자를 좀 더 확실하게 교육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세바스타인 1세는 이미 황태자로서 20여년동안 후계자로서 육성되고 있는 상태였으나 황태자와 황제의 무게감은 다르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즉위한 세바스타인 1세, 세바스타인 1세 시기에는 슬슬 민주공화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로엔그람 왕조를 전복한다든가 할만한 이들은 아니지만 세바스타인 1세는 이러한 상황이 향후 로엔그람 왕조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대 왕조인 골덴바움의 우악스러운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라인하르트 1세와 알렉산더 1세의 방침이 아닌 바, 또한 본인 역시도 그들의 방식이 옳고 전제군주제가 우수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대규모 정치적 숙청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제국의 위대함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일종의 애국주의 운동, 애국주의 사업이었다.
세바스타인 1세가 추진한 애국주의 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었다. 하나는 현 체제의 우수성을 보이는 것. 일단 주된 방법은 이전대로 계속해서 우수한 통치로 제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아니면 그 혜택으로 제국을 계속해서 지지하게 만드는 것. 이러한 방식은 성공적이라서 알렉산더 1세 단독통치기를 이어 세바스타인 1세 공동 통치기에도 많은 제국민들은 자발적이든 반자발적이든 대부분 제국의 지지자로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유를 염원하는 자들에 의한 민주공화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아얘 막을 수는 없던 만큼 다른 방식도 필요했다.
그래서 내놓은 방법이 제국의 위인들과 업적을 기리는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된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와 무엇이 다르기에 세워지고 존속될 이유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줄여 말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말하는 것으로 폭정으로 시작되었다지만 무려 500년이나 되는 역사의 골덴바움 왕조, 그들의 탈주자 집단이지만 민주공화주의로 인해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던 자유행성동맹은 오래된 역사와 정치체제 그 자체가 그들의 정통성이었다.
하지만 로엔그람 왕조에는 역사에서 오는 정통성도 정치체제에서의 정통성도 없었다. 왕조 국가였기에 공화주의자들에게서 정통성을 기대할 수 없었고 골덴바움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했기에 대부분의 골덴바움 왕조 지지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오직 시조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능력과 업적으로 정통성이 없어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라인하르트 1세의, 그리고 그 후손들의 선정으로 유지되는 체제였다. 만일 중간에 용렬한 황제가 한번 나온다면 언제라도 상황이 뒤집힐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세바스타인 1세가 택한 것은 선정과는 별개로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제국이 무엇을 했고 어떤 인물들이 있었기에 건국의 정당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세바스타인 1세는 조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된 선정으로 제국민들의 마음을 붙들어놓음과 동시에 제국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한 사업을 많이 벌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행사들이 라인하르트 1세 우상화 행사는 아니었다. 이 행사는 어디까지나 평생에 우상화를 혐오한 라인하르트1세의 의사를 존중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행사의 목적은 단순히 라인하르트 1세의 업적을 기리는 것만이 아닌 라인하르트 1세를 강조하는 것이었던 만큼 결국 그를 찬양하는 행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세바스타인 1세와 선정과 애국심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제국민들의 충성심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민주공화주의의 확산을 늦추는데 어느정도 기여하게 되었고 후세에는 로엔그람 왕조의 업적을 강조함으로서 로엔그람 왕조가 우주는 잃었어도 골덴바움 왕조와는 달리 시민들의 지지를 잃는 것은 막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당대에도 후대에도 비판하는 이들이 있었다. 비판자들은 선대 황제를 추켜세우지 않고(어디까지나 전제군주정의 왕조국가 치고) 현임 통치자의 업적만으로도 지지를 얻어 존속하는 것이 골덴바움 왕조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로엔그람 왕조만의 위대함인데 이미 알렉산더 1세 단독 통치기부터 기미가 보이기는 했다만 세바스타인 1세는 아얘 선황제를 추켜세우는 일을 대대적으로 행함으로서 그러한 위대함을 깎아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바스타인 1세가 라인하르트를 추켜세우는 것이 골덴바움 왕조가 루돌프를 우상화한 것처럼 무리한 수준이 아닌, 그저 그가 남긴 업적을 건조하게 홍보한 것 뿐으로 제국민들, 심지어 민주공화주의자들 중에서도 그의 업적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단지 그 업적을 왕조 존속의 정당성으로 활용한 것에 문제제기를 하였을 뿐.
그러나 비판자들의 비판 또한 뼈있는 지적이었다. 아무리 건국자의 의사를 존중해 우상화를 자제했다고 한들 의도상 결국 그를 띄워주는 것이었고 행한 주체의 특성상 객관성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시대적으로도 이 시대에 이르면 로엔그람 왕조를 건국한 1세대 인물들은 극소수 인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망했고 그 시대의 인물들 역시도 대부분 사망한 상황.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고 그를 만나 본적도 없는 이들에 의한 추앙은 그 특성상 100%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그의 업적이 거짓이 아닌데다 당시에도 엄청난 초인으로 여겨진 만큼 당시의 평가보다 더 뻥튀기된 평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러한 일로 인해서 제국 내에서는 라인하르트를 존경하는게 아니라 숭배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이들에 의한 과잉 충성과 자신들과 대척점에 있는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사적 제제가 등장하는 등 세바스타인 1세도 에상하지 못한, 혹은 생각 이상의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세바스타인 1세의 행보는 제국민들의 제국을 향한 충성심과 단결력을 한층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만큼의 부작용도 야기하였다. 라인하르트 1세가 생전에 그토록 혐오한 우상화가 의도치 않게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선조인 라인하르트 1세를 그토록 추앙한 만큼 반대로 말하자면 로엔그람 왕조는 라인하르트가 폭군으로 규정한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과 같은 이가 나오면 위기에 몰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바스타인 1세는 그래도 명군으로서의 치적을 남기며 라인하르트 1세에 대한 존경이 우상화로 타락하는 것을 막으며 노력하였다. 덕분에 그의 생전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로엔그람 왕조는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페잔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 벌어진 불운한 우주선 사고로 그와 함께 많은 고위 인사들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은 안 그래도 쇠약해져가던 알렉산더 1세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장례는 황제였던 만큼 황제의 예에 맞게 치뤄졌고 그의 죽음으로 로엔그람 왕조의 안정기는 저물어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