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가지 위빠사나 지혜
위빠사나 지혜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대림스님․각묵스님 번역, 『아비담마 길라잡이(하)』, 초기불전연구원, 2002, 779-807쪽 참조) 첫 번째는 “명상의 지혜”인데, 수행자는 이 지혜에 의해서 오온이 여러 가지가 모여 있는 혼합물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대상의 특성이 무상, 고, 무아[三法印]라는 진리를 철저히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관찰하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생멸의 지혜”입니다. 이 단계에서 마음속의 빛을 볼 것이며 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사띠의 힘은 매우 강력해져서, 사띠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날카로워지고 기억력은 명석해집니다.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육체적으로 기뻐하고 정신적으로 기뻐합니다.
이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단계에서 수행자가, 부정적인 측면으로 그러한 즐거운 감각에 집착한다면, 번뇌의 전조가 되어 더 이상 높은 단계의 지혜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기쁨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보다 높은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데 있어서, 힘을 받고 결심을 단단히 하는 데 다소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기쁨이 일어날 때 단지 주시하기만 하고 모두 버려야 합니다.
빛이라든가 즐거운 느낌을 모두 버린다면,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소멸되는 것을 분명하게 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는 마음인 정신과, 감각의 대상인 물질 두 가지 모두, 그것들이 나타나자마자 금방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ārammanika) 두 가지가 쌍을 이루며 동시에 재빨리 사라진다는 것을 즉시 압니다. 이 체험이 “소멸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외부 자극으로부터 어떠한 느낌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고(무상), 만족스럽지 않으며(고),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무아)을 수행자는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 대상과 관련하여 그의 마음속에 생성된 느낌들에도 적용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영원과, 만족과, 실체가 있다는 것과 관련된 모든 관념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금방 소멸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움의 지혜(bhaya-ñāṇa)”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두려운 것은 재난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다음 단계인 “고난의 지혜(ādīnava-ñāṇa)”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기진맥진하고 모든 재난을 혐오하게 되면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a-ñāṇa)”로 이동합니다. 이 지혜가 무르익어서 거기서 빠져나오고자 할 때, 더욱더 노력하여 “해탈을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ñāṇa)”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수행자의 의지가 더 계발되면, “깊이 숙고하는 지혜(paṭisaṅkhā-ñāṇa)”를 획득합니다. 이 단계에서 그는 고요함 즉 삼매를 얻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합니다. 삼매가 강화되면 모든 조건 지어진 “상카라(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ṇa)”를 얻습니다.
청정도론에 두려움의 지혜와 그 이후의 지혜가 어떻게 계발되고 향상되는지에 대해서, 어부의 곤경에 비유하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떤 어부가 그물에 손을 넣어 보니 고기가 잡혀서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꺼내어 보니 그건 물고기가 아니라 세 가지 특징이 있는 독사였습니다. 무서워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는 잡은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잡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없애 버리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놓아줬다가는 뱀에게 물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판단이 서자 그는 뱀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세 바퀴 휘두른 다음에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달아나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알기 전의 우리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존재에 대단히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물고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어부처럼, “자아”에 대해서 기뻐했었습니다. 삼법인을 알게 된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공포에 휩싸이고,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본 것에 대해 혐오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마음과 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기 위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마치 어부가 독사를 멀리 던져 버리는 것처럼, 정신과 물질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하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기만 하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둑카(dukkha. 불만족. unsatisfactoriness. 고통. 苦. 괴로움)에 대해서 숙고하면 둑카를 발견하며, 둑카뿐이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 주장은 경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는 무상, 고, 무아는 피상적입니다. 이런 피상적이고 개념적인 지식(빤냣띠)은 수행자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스며들게 하지 못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현상들을 아는 데 도대체 무서워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맛 좋다고 하고, 향기롭다고 하고, 감촉이 좋다고 하고, 그 생각을 하면 기분 좋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무슨 생각을 해도 되고 마음대로 상상해도 된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이 가장 즐겁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수행해야 한다고 하면 몹시 따분해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일부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 데 ‘쉬운 방법’을 창안하려고 하는 이유겠지요.
그러나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행자에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상상할 자유가 있는데 즐거운 생각을 못하게 하면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어부가 메스꺼운 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수행자가 어떻게 이 물질과 정신으로부터 해방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소위 지식이라는 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원하는 지혜에 의해 배양된,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계발하는 것은, 지혜가 풍부한 사람에게도 어렵습니다.
정신과 물질에 연관된 상카라로부터 탈출하려고 할 때, 수행자는 독사를 멀리 던지려고 하는 어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깊이 숙고하는 지혜를 사용하여 그러한 상카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비상한 노력 끝에, 그는 열 가지 위빠사나 지혜 중에 가장 비범한 단계인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단계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