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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환의 문학이야기(4)
도깨비 이야기와 창조적 메시지
허명남의 『사라진 김서방을 찾아라』를 읽고
Ⅰ. 이야기 들어가기
허명남의 『사라진 김서방을 찾아라』는 전래 되어 오는 도깨비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묶어 재구성한 작품집이다. 도깨비의 마음씨, 도구, 이름, 취미, 변신 등의 주제로 편집했다. 도깨비의 착한 마음씨를 알 수 있는 착한 일을 하는 이야기를 작품의 시작과 끝으로 배치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깨비’의 객관적 상관물로 ‘김서방’이라고 하여 독자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한 것으로 새롭고 뛰어난 발상이다.
<김 서방밖에 몰라서 그래. 나도 김 서방이라고 불러 줘. 그 이름이 좋아. 흐흐흐.>
인상 좋고 너그러운 도깨비의 모습이 이웃집 아저씨 같이 다가오는 대목이다.
동화의 전신은 우화로 불교설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童話(동화)’라는 어휘는 ‘法童子說話集(법동자설화집)’에서 ‘童’자와 ‘話’자를 취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초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렸던 ‘당나귀 이야기’도 인도의 ‘수피 우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솝 우화’도 인도에서 서구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솝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상징 중에 하나인 ‘도깨비’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대중들에게 심오한 경전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화로 이야기하듯이 ‘도깨비 이야기’도 도덕윤리의 메시지를 재미있게 전하기 위해서 만든 우화이다.
우화는 동화의 본질적인 요소인 환상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동화성을 가진 이야기이다. 요즈음에 와서 동화라는 이름으로 소년소녀소설들을 쓰고 있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동화의 장르 개념을 재정립해야만 한다. 환상적인 요소가 없는 동화는 동화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화’와 ‘아동소설’이라는 장르로 구분하여 창작하거나 발표하여야 한다. 이러한 장르의 개념 정립은 동화를 쓰는 동화작가들부터 먼저 솔선해야 한다.
여기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래되어 온 도깨비이야기로 익히 알고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재미있게 읽히면서 도깨비에 대한 공부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시도와 편집이 돋보이고 가치로운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도 동화의 목적인 ‘재미성’과 ‘교훈성’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본다.
‘재미성’으로 치우치면 줄거리 중심인 ‘이야기’가 되고, ‘교훈성’으로 치우치면 주제 중심인 ‘메시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동화는 이 두 요소가 가장 잘 어울리게 조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학예술의 미학이다. 즉 전경을 통한 후경을 나타내는 예술적 방법이다.
도깨비 이야기는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동화의 목적인 재미성과 교훈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을 회피한다.
Ⅱ. 이야기 펼치기
허명남의 『사라진 김서방을 찾아라』는 전래동화인 ‘도깨비이야기’들을 재편집한 것으로 착한 일을 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작가가 직접 이야기 내용을 설명하면서 안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저학년 아동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본다. 어쩌면 이러한 구성은 옛날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면서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도깨비를 만나 부자 된 오서방>에서 물에 빠진 오서방을 김서방이라고 부르는 도깨비의 순수함이 잘 드러나 있다. 결국 도깨비는 오서방의 말에 자기도 김서방이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그런데 목숨을 구해준 김서방에게 고기를 사다준 오서방은 친구가 되어 달라는 김서방에게 친구가 된다. 김서방의 부탁으로 메밀묵을 건네주니 고맙다고 오서방에게 금덩이를 하나 준다. 계속해서 호박죽, 막걸리를 갖다 주자 계속해서 금덩이를 준다.
부자가 된 오서방은 귀찮게 구는 김서방이 점점 싫어진다. 금덩이도 수상하고 느낌도 좋지 않아 오서방은 김서방과 헤어지기로 한다. 찾아온 김서방은 세상에서 돈이 제일 무섭다고 하며 오서방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알아낸다.
다음 날 밤 오서방은 대문에는 말 머리를 매달고, 집 주위에는 말 피를 뿌려놓는다. 도깨비는 분해서 마당으로 돈을 마구 던진다. 그 돈으로 오 서방이 논을 사자 속은 김서방이 논에다 자갈을 퍼넣는다.
오서방은 도깨비를 또 속여 풍년이 들어 더 큰 부자가 된다.
도깨비의 순진무구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키우는 오서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경제논리로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꼬집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러할 지가 의문이다. 마냥 도깨비의 착한 마음만 강조하고 있어 자칫하면 아동들이 정당한 노력보다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지 걱정이 되는 마음은 지나친 생각일까?
그러나 오서방과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해 주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못내 허전한 것은 이야기 속에서 그러한 헛된 욕심이 도깨비로 인해 반성하게 되는 이야기로 재탄생되었으면 현대적인 수용으로 바람직하겠다.
하나의 팁으로 도깨비는 뿔이 없다는 사실을 일본의 요괴 ‘오니’를 들어 잘 알려주고 있다.
김서방의 도구인 도깨비감투와 도깨비방망이, 도깨비책과 도깨비등거리, 도깨비맷돌에 얽힌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늙고 가난한 갓장이 할아버지가 도깨비감투로 가난을 면하는 것을 넘어 도둑질까지 하다가 결국 다리까지 다친다. 숨겨둔 보물들도 모두 낙엽으로 변하고 갓장이 할아버지는 도깨비감투를 잘라버리고 다시 갓을 만든다.
지나친 욕심은 결국 화를 불러온다는 인과응보적인 도깨비 이야기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소년이 도깨비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자 형이 아우의 흉내를 내다가 도깨비에게 잡혀 엉덩이에 뿔이 난다.
욕심이 많으면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이야기로 남을 따라 하는 행동은 값어치가 없다는 교훈을 준다.
가난한 총각이 농사를 지어가며 공부를 하지만 과거에는 매번 낙방하고 만다. 어느 날 밤 당산나무 아래에서 도깨비책을 얻어 책속에서 나온 사람들로 농사를 짓게 하고 공부에 열중했지만 또 낙방을 한다. 그 이유를 도깨비가 알아내어 총각이 과거에 합격한다. 도깨비책은 총각이 땅속 깊이 파묻었다고 한다. 그 책을 찾기만 하면 벼락부자가 될 것인데 아쉽다.
매관매직하는 비리를 폭로한데 오늘날의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역사적으로 씁쓸하다.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박서방이 오래된 기와집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다음 날 그 집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사온 돼지고기를 골짜기 빈집으로 가서 팔아 도깨비맷돌을 가져오라고 한다.
맷돌을 가져오자 할머니들이 맷돌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박서방이 맷돌로 부자가 되자 형이 맷돌을 빌려간다. 형은 멈추는 방법을 몰라 논바닥까지 뜨거운 국물로 넘쳐가게 한다. 겨우 맷돌을 멈춘 동생이 형 식구들을 데려오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보물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어느 날 소금장수가 맷돌을 빌려간다. 소금장수의 욕심 때문에 배가 가라앉아 지금도 바다 속에서 맷돌이 소금을 쏟아내어 바닷물이 짭조름하다고 한다.
욕심이 지나치면 패가망신은 물론이고 자연의 섭리까지 변화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진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가 도깨비의 진실이자 우리들의 이상향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욕심 때문에 오히려 고통 속에 산다. 왜냐하면 이상향은 현실의 삶이 불행한 사람들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바라지 않으면 불행하지 않을 것이고,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칠 서방의 이야기에서 ‘돗아비’에서 ‘돗가비’로, ‘도까비’로 그러다가 ‘도깨비’로 변했다고 어원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는 도깨비가 신령으로 부각된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의 삶에 인격체로 모셔오는 민속신앙으로 도깨비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도깨비들이 풍물놀이를 하는 이야기와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는 것과 도깨비와 씨름을 하는 것 등은 도깨비들도 인간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도깨비 이야기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인간들이 도깨비와 어울려서 못다한 소원을 풀기를 원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지금 현재의 삶이 불행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불행하기 때문에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도깨비 이야기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조상들의 소원이 담겨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김서방이 여자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도깨비는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능력을 가진 것을 보여주는 일면일 뿐이다. 도깨비가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도 그것으로 덕을 보자는 인간의 심리가 깔려있는 이야기의 한 면일 뿐이다.
이러한 기적들을 바라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안빈낙도의 생활태도가 꿈을 쫓는 도깨비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라고 본다.
Ⅲ. 이야기 마무리기
허명남의 『사라진 김서방을 찾아라』는 전래동화로 재미성과 교훈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처럼 도깨비 이야기는 우리들의 소원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신령의 이야기이다.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신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무속이나 민속신앙으로 폄하하는 것은 종교처럼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신학은 말 그대로 신에 대한 학문이다. 학문은 언어개념으로 진술되는 지식일 뿐이다. 과학보다 더 황당무계한 면이 비일비재하다. 과학은 외부세계인 물질을 대상으로 가설을 세워 실험을 통하여 증명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성립한다. 그래서 과학문명은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이 가져오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의 손과 발로 만든 과학문명의 이기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말과 글로 허황한 세계를 구축하여 놓고 신기루 같은 환영을 실재하는 것처럼 믿으라고 하는 집단종교의식으로 말미암아 정신세계마저 황폐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그러한 환영보다 우리들의 도깨비 이야기가 더 인간답게 다가온다. 미신이란 것은 아직 인간의 능력으로 그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르는 명칭일 뿐이다. 오늘날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옛날에는 기이하고 신기한 현상으로 미신이라고 했다. 알 수 없거나 알지 못했던 현상들을 인간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알아내거나 발견해 내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이롭거나 유리한 미신은 ‘기적’이나 ‘이적’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게 한다. 기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없거나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한 자연의 이치가 은하계의 별보다 무수히 많을 뿐이다. 겨우 몇 가지를 알아놓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거리는 인간의 모습이 마치 걸음마를 갓 배워 한 발짝을 떼고 좋아라고 폴짝거리는 어린 아이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인간을 빙산에 비유하고 나무에 비교하기도 한다. 빙산처럼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줄기와 가지, 그리고 이파리보다 땅속에 묻힌 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지치기를 하면 나무는 더 왕성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가 잘리면 그 웅장한 나무도 시들어 죽고 만다.
도깨비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무한정으로 숨겨져 있는 비밀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어 가치롭다. 이러한 가치들을 좀 더 현실의 생활에 와 닿게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구성으로 창조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기를 갈망한다.
새로운 해석으로 창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할 때 단순한 옛날이야기의 소개로 그치고 만다. 즉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창작품이 아니라 옛이야기를 재편집하는 이야기책이 되고 만다. 과감한 재구성과 참신한 재해석으로 현대적 메시지를 전해줄 때 옛날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창작동화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동화와 아동소설의 구분은 분명해야 하겠지요. 감사합니다.
이 시대 동화가 나아갈 길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류석환 선생님, 제 동화를 정성껏 평해주시고 갈 길을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경험상으로 옛이야기도 필요하지만, 동화작가로서 지금의 이야기를 도깨비 소재로 재미있게 써보고 싶습니다. 격려에 힘입어 오래 걸리더라도 완성을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