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 제54호 김양헌씨의 수필평)
수필은 있어도 문학은 없다?
김양헌(문학평론가)
-전략
『대구문학』2002년 겨울호에는 이 외에도 열네 분의 수필이 실려 있다. 사람살이의 애절한 사연, 여행에서 얻은
견문, 일상의 사소사에서 깨달은 생의 의미등을 담고 있는
작품들 모두 나름대로 감동을 주는 바가 있다. 대개의 작품들이 수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세계를 무리없이 표현하였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또한 가지런한 편이어서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한 특이한 사안을 찾기는 어렵다. 십여 년
전부터 간혹 읽곤 했던 수필이라는 것의 느낌이 편안하게
다가올 따름인데, 이것은 아마도 별반 티나지 않는 형식에
일상적인 정서와 평이한 인식이 실려 생겨나는 도덕적 당위성 때문일 터. 이런 편안함이나 잔잔한 감동이 필요없는
정서는 아니나, 예술적·문학적 가치와 연관지어 보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필자의 식견이 좁은 때문인지 몰라도, 수필은 30여년 전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나 지금 작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는
듯 하다. 혹자는 이것을 수필의 장점으로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삶의 양식이 현저히 달라지고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예술로서의 의미는 그만큼 줄어들게 마련이다. 현대 예술과 문학의 본질은 보편성과 항구성을 담보하면서도 끊임없이 기존의 인식과 형식을 허물고 존재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수필이 문학과
예술의 한 하위 갈래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안주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필자가 읽은 작품들의 내용이나 형식은 김규련,
김진태, 정혜옥 세대가 수십 년 전에 이루어 놓은 수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규보나 박지원 같은 더
옛날 사람들의 작업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쓴 글은 당대 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삶이 만나 이루어진 양식이다. 이후에 나온 후배들은 마땅히 그들의 작품을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이해하고 그 한계를 극복한 자리에서 글쓰기를 해나가야 예술가로서의 존재 의의를 지닐 수가 있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사이에 등단하여 활동하는 신진들의 글을 보면, 문학사나 수필사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고 오로지
수필이란 틀에 잘 맞추려는 안타까운 욕망만 비칠 따름이다. 문학사는 잘 쓴 작품들을 단순하게 나열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첨예한 정신의 변화 과정에 대한 심오한 통찰의
기록이다. 몇 십 년 전 양식을 되풀이 베끼기만 한다면 그것을 어찌 문학이라 하겠는가?
물론, 수필이 문학의 주류에서 뒤쳐진 게 대구 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중앙에서 발간하는 수필 전문지의
작품들도 예술성의 측면에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의 소위 수필가는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수십 년간 인간과 세계에 대해, 진리와 예술에 얼마나 치열하게 탐구해
왔는지 거의 모르고 있고, 그 성과나 잘잘못을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듯하다. 당연히, 예술사적 의미를 지니며 현대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작품을 생산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문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주요 잡지가 수필을 싣지 않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문학과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맞서 싸우지 않는 글은 요행히 수필은 될 지 몰라도 문학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호사가들의 대중지향적 고상함과
글쓰기에 대한 사적 욕망을 충족해줄 뿐이다.
수필이 이렇게 일상적 귀족주의라는 반역사적이고 비예술적인 퇴행성의 갈래로 전락하기 이전에도 문학의 중심부에 진입한 적은 없었다. 수필이 오래 전부터 산발적으로 존재하긴 했지만 문학의 한 갈래로 인정된 것은 서구의 문학
이론이 들어온 뒤의 일이다. 일제시대 부터 1960년대까지
많은 작품이 창작되고, 20세기 이전의 문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경기체가나 가사 등이 독자적인 교술 갈래로 부각되면서 수필도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수필은 늘 변방에 머물렀고, 1960년대 이후 계속 퇴락의 길을 걸었다.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수필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 비전문가의 산문집이 더 우수한 문체와 깊이 있는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필가와 달리 그들은 그들은 자기가 잘 아는 전문분야를 집중적으로 써내면되기 때문에 깊이가 있게 마련이다. 보통 사람도 삶의 절실함이 있기 마련이어서 문장을 만들 줄만 알면 누구나 수필 한 두 편 정도는 잘 쓸 수가 있다. 그러나, 수필가는 어떤 소재가 주어지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글을 지속적으로 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은 수필가로 등단하는 절차를 의미없게 만들고, 문학으로서의 수필과 일반적인 산문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만들어 수필의 입지를 더욱 좁혀 놓았다.
수필을 수준높은 문학의 장으로 끌어올릴 의지를 지닌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점들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그것과 싸워나가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야만 어떤 예술이든 스스로 존재할 수가 있다. 낡은 옷을 벗고 어설프게나마 새 옷을 걸쳐야 존재 이유를 지닐 수가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가장 첨예한 시대이고, 자연과 인간의 보조화가
극에 달한 시기이다. 작품 외적 자아가 작품에 직접 개입하여 주체와 객체를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갈래는 수필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양식은
수필이 가장 쉽게 창출할 지도 모른다. 수필이 고답적인 관조의 양식에 얽메여 있는 동안, 시와 소설은 이미 교술성과
허구성을 접목하는 방법적 전략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지조 또한 수년 전부터 "열린 시조"의 기치아래 인적,
물적 자원을 집결하고 자유시에 필적하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여 현대문학으로서의 의미를 되찾고 있다.(최근 몇
년 사이 주요 문학지에 시조를 싣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수필에서는 아직 그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론적으로 주창하며 나서는 이도 없고, 작품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다. '대구수필' 제 21집에 실린 대다수도 수필다운 수필, 수필을 쓰기 위한 수필에 불과하였다. 수필을
버림으로써 수필을 새롭게 세우려는 의지는 읽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도 김인기의 「삶은 누더기와 같고」와 홍억선의「꽃재 할매」는 가능성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 김인기는 제문을 차용하는 형식적 실험을 하고 있다. 제문의
양식을 활용하여 객체를 대상으로 던져두지 않고 주체에게
끌어들여 자아화하는 서정적 양식을 보여준다. 말이 흘러가는 길을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유려한 문체도 주목할 만하다. 「꽃재 할매」는 수필의 본질인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을 차단하고 작품 내적 서술자의 독백으로 진술되는 형식이다. 간명한 내용이라 수필의 이름으로 발표했을
뿐 사실상 소설의 양식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다. 다른 갈래의 양식을 충분히 소화하여 새 양식을 숙성시키지 못한 때문에 인식의 전환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두 수필가가 보여
준 인식의 깊이나 허구의 양식을 도입하는 문체상의 파격은 지금 쓰여지고 있는 형태의 수필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을 살려서 수필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궁극적으로 수필이 아니면 도저히 쓰여질 수 없는 문학의 한 영역을 확보하려면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수필계의 전반적인 인식과 체제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지금 대구의 수필계는 "영남수필"과 "대구수필"로 크게
나뉘어 있다. 십여 년 전부터 동인 차원의 인원을 넘어선
다수의 회원을 확보하다보니 이제는 각각 수십 명이 참여하는 협회차원의 모임이 되었다. 이런 형태는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다. 변별성이 거의 없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두
패로 갈라진 것도 못마땅한 일이지만, 큰 그룹을 만듦으로써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기존의 틀에 동화하도록 한다는 점은 실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이런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모임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창조성을
갉아먹는 악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며, 새로운 형식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배척하도록 만들 터. 그렇다면 해결책은 자명하다. 적어도 1990년대 이후 등단자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좋겠지만, 두 모임이 현재의 상태로 존속하더라도
함께 고민하고 치열하게 탐색하는 여러 개의 작은 동아리들이 활동하는 방향으로 전체 구도가 바뀌지 않으면 사실상 새로운 작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앞서 홍억선과 김인기를 예를 들었지만, 이들도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결국에는 기성세대의 양식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터. 본인들은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김정옥과
허창옥 세대는 이런 그릇된 체제의 희생양이라 할 만 하다.
1990년대 전반기에 이들은 인식의 깊이나 문체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영남수필에 소속된 뒤 점차 상투적인 인식으로 퇴행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제는 초기의
신선함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다른 수필가와 변별성을 유지하려는 잠재된 욕망이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감정의 과잉을 조장하기도
한다. 지난해 발간된 『영남 수필』은 책을 구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대구문학』에 발표된 김정옥 「나래 의상실에서」는 이런 폐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수필 중 유일하게 타자에 대한 인식이 자아 안에 존재하는
내적 타자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감정의 과잉과 인식의 편협함으로 중간부터는 도덕적 상투성과
비현실적 인식에 매몰된다. 이식과 문체가 비교적 좋은 수필가인데도 불구하고, 시와 소설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이슈가 되었던 문제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고 타자에 대한 페미니즘적 시각도 읽기가 어려우니,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시야가 얼마나 좁고 상투적인가를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필가 모두가 첨예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구 지역에서 발간되는 문학지를 보면,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 모두 문학이 되리라는 소박한 인식으로 일기 수준의 수필보다 더 형편없는 시나 시조를 발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문학판의 중심에는 뛰어난 시인과 작가가 일구어온, 첨예한
인식을 담아내는 다양한 형식과 존재를 탐색하는 치열한
에너지가 들끓고 잇다. 그것이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모델을 제공하고 힘이 되어 새로운 창조의 불꽃을 피울 수
있게 한다. 불행하게도 수필에는 그런 역동적인 판이 없다.
전범은 낡고 힘은 고갈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른 문학판에라도 뛰어들고 예술의 여러 갈래를 기웃거리며 수필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수필은 결국 호사가들의 여기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