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종착역 01 (2019 사토아이코)
01 재혼자유화시대 (40세 1963년 부인공론 12월호)
01-1 첫 결혼이 파탄이 난 체험
나는 재혼한 사람이다. 약 14년전에 이혼하고 그로부터 거의 7년 후에 재혼하였다. 32세 때의 일이다. 최초의 결혼이 파탄이 났을 때 나는 두번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하여 질렸다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주위에 말한 것도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의미했는지, 그리고 내 자신이 결혼생활에 얼마나 부적당한 여자인지를 자각하였기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이 헤어진 것은 남편의 모르핀중독이 표면상의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모르핀 중독이 아니었다고 해도 결혼생활의 파탄이 될 뭔가 다른 사유가 발생했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그 무렵부터 들었다.
나와 보조를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남자 따위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지금까지 주위의 몇 사람인가로 부터도 듣기도 하였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즉 나는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했을 뿐만아니라 타인과 함께 생활할 때의 나 자신에에게도 싫증이 났던 것이다. 나와 같은 아주 이기적인 여자는 평생 고독하게 생활하는 것이 제일 어울리는 생활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과 헤어진 나는 어머니의 등골을 파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등골이라고 해도, 그 무렵에는 이미 아버지도 사망했기 때문에, 정말 의지할 곳 없는 별볼일없는 등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적어도 2, 3년 안에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집에서는 아버지도 오빠도 글을 쓰고 생활했기 때문에 약간의 재능만 있으면 문학으로 밥을 먹는 일 따위는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때까지 아무런 문학적 경력도 없었고 소양도 없었다. 소녀 시절부터 특별히 책 읽는 것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글로 표현하겠다는 갈망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문학에 뜻을 둔 것은 그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시절부터 나는 참으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도 벌써 꽤 오래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곤했다. 나의 소녀시절이라고 하면 태평양전쟁 발발부터 말기에 걸친 가장 암담한 시대에 해당하는데, 나는 내가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을 이 시대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고난의 시대일수록 용맹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자유가 없으면 없을수록 높은 이상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천성이 굼뜨고 게으른 아가씨였다. 이런 시대에 상급학교에 가본들 어차피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도나 꽃꽂이 등의 신부 수업 등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직업을 갖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마음속 깊이 숨은 사색의 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내가 한 일이라고는 배급타러 줄을 선 것이나 방공연습의 사다리 오르기에서 1등을 하고 우쭐했던 것 정도인 것 같다.
그런 나였으니, 스스로 자립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전혀 막막했다. "적어도 사교성이 좋다든가, 얌전하다든가, 눈치가 빠르다든가, 참을성이 있다든가 하면 장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머니와 언니가 절실히 그렇게 말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결국 나에게는 작가가 되는 노력을 해보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길이 없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약간의 글재주가 있다는 자부심이 나를 지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학교 시절의 글쓰기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나, 오빠에게 보낸 편지 등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단지 그 정도의 것이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허약한 등골을 파먹기 전에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01-2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다
우리나라에는 "소박데기" 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늦게 겨우 결혼한 여자"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또 "두 번째(재혼녀)" 라는 표현도 있다. 이 세 단어는 각각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비판적인 뉘앙스를 담아 만들어진말이다.
그 증거로 그 말들을 입에 올릴 때 사람들은 반드시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다. "저사람 두 번째래요..." "어머, 세상에... 와... 그랬어요." 그리고 이런 말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여기서만 하는 얘기예요." 마치 그 일들이 그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인간적 결함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서른의 여자나 이혼이나 재혼이 그 사람의 인간적인 결함에 원인이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달리기가 서툴러서 운동회에서 꼴찌를 하거나 넘어진 것과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왜 여자는 "실패"를 두려워할까? 왜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불행은 숨겨야 할 일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인생의 실패는 더 나아가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그 외에 실패가 갖는 의미를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운동회에서 잘못하여 넘어진 아이가 일어나 뛰어갈 때 어른들은 감동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도 여자가 그 삶에서 넘어졌을 때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가 여학생 시절, 사소한 사건으로 몇 명의 학생이 여교사에게 질책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도 그 질책을 받은 그룹 중 한 명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여교사의 질책을 몹시 불합리하게 생각하고, 해가 져도 학교에서 돌아가려 하지 않고, 분통이 터진 나머지 교실 안에 웅크리고 마음껏 통곡한 것이었다. 그때 목놓아 울고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문득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잘난 척하다니, 저 선생님, 네 번째 주제에." "네 번째?" 나는 우는 것을 중지하고 물었다. "네 번째는 뭐야?"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지금 남편, 네번째..." 꾸중을 들은 아쉬움 속에서 그녀는 그 교사에 대한 최고의 결점을 찾은 것이었다.
멍청이라든가 심술할매라든가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최고의 욕설이 "네 번째"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네 번이나 한 교사에게 학생을 꾸짖을 권리가 있는가!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을 여러 번 한다는 것은 그토록 큰 인간적 결함이라는 통념은 그런 어린 여학생의 머리에도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간바리(힘냄)"에 대한 매우 강한 찬미의 정신이 있다. 아이를 둔 과부가 부업으로 일가를 지탱했다는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사람을 감격스럽게 한다. 하지만 아이를 버리고 재혼한 여자는 냉랭한 이기심으로 비판받기 쉽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이 간바리 정신에 결여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한마디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현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깨뜨린다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도 연속되는 동안은 아직 견디기 쉬운 법이다. 힘들면서도 타성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통이라는 것은 인내하는 것보다 오히려 "단절"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자신도 상처받는 것의 고통을 딛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딛고 넘어, 그리고 새롭게 나아가는 힘을 발휘할 때 사람은 정말로 그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이나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은 자칫 이 비교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재혼을 단행한 여자는 안이한 길을 택한 것처럼 비판받고, 당사자 자신도 마치 전과자라도 된 것처럼 주눅이 들어 장황하게 쓸데없는 변명을 하곤 한다. 더 약한 사람이 되면 세상 일반의 그러한 통념에 져서 본의 아니게 무리한 간바리를 자신에게 강요하고, 그래서 더욱 초라해져 가거나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01-3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내가 서른두 살에 재혼했을 때 남편은 스물일곱 살의 초혼이었다. 더구나 남편의 집은 일가권속, 기업형농장의 견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집안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너무나 심한 언밸런스에 놀라워 했다.
어느 이름 있는 부인의 경우는 놀란 나머지, 평소의 침착함도 잊고, 신발을 1미터나 팽개치고 현관을 뛰어올라, 병으로 누워 있는 남편의 베갯머리로 가서, "큰일, 큰 사건, 시노하라씨의 차남이, 다섯이나 연상의 데모도리(소박데기)와..." 라고 외치는 것도 모자라 냉수로 착각하여 컵에 담긴 남편의 약을 마시고 말았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장애와 불안이 있었다. 진작부터 결혼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나였고, 생활의 안정보다 문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초의 계획과 달리 내 소설은 몇 년이 지나도 팔리지 않고 가끔 인정해 주는 잡지사가 생기면 이상하게 망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문예수도라는 동인잡지에서 활동하는 한편, 한 병원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계속 쓰고 있었는데, 그 시절이 그때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혼할 때 나는 아직도 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끊어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출발점에서부터 전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것은 재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 재능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작가로서의 "인간적인 자격" 이라는 것에 대해 절망한 것이었다. 그 절망을 내게 준 악마가 지금의 남편 시노하라(다바타 무기히코 *1928~2008)였다.
그는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그 자신의 현실을 극복하며 쌓아온 정신의 강인함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그와 문예수도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그는 마이니치신문 학예부 기자로 우리 집 근처에 살던 무카이 준키치(*1901~1995)화백에게 마이니치 신문소설 삽화를 가지러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파친코 가게에서 돈을 다 써버리고 우리 집으로 귀가용 버스비를 빌리러 왔다.
그것이 우리가 친해지게 된 시작이었다. 그 이후 그는 파친코로 돈을 다 날리면 우리 집으로 왔다. 친밀감이 더해지면서 점차 뻔뻔해졌고, 급기야는 좋지 않은 곳에서 오가는 돈까지 빌리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친구 사귀기를 약 5년 정도 한 후에 결혼을 한 것이다.
당시 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문학의 독기에 부딪혀 글을 쓸 수 없게 된다는 정평이 나 있었는데, 마침내 나도 그 몇 번째 희생자가 되어 어느 시기 문학적으로는 완전히 죽고 말았다. 만약 나의 재혼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는 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힘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에 뜻을 둔 이상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만약 내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와 결혼했을 지 알 수 없다. 현실 생활에서 이른바 남편으로서의 그는 전혀 나에게는 이해를 초월하는 듯한 면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공통된 친구들는 그를 '봉쿠라(얼간이)'라고 불렀고, 그렇게 불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뭔데"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01-4 재혼자에게 훈장을
여자는 독신으로 있는 것보다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결혼하는 것이 좋다. 인내심만으로 이루어진 결혼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것이 좋다. 헤어져 혼자 무리한 노력을 하는 것보다는 재혼하는 것이 좋다. 매사에 "질린다" 라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자신은 이래서 안 된다고 단정짓는 사고방식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요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혹은 나 자신이 재혼한 것에 의해 성장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재혼을 했다고 해서 이번에 실패하면 이제 끝이다, 라고 위축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재혼에 실패하면 세 번째를 시도하면 된다. 세 번째에 실패하면 네 번째를 하면 된다. 세 번째 이상의 결혼자는 가슴에 훈장을 매달기로 하면 어떨까.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간 용사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여자에게 특히 찬란한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한다. 뭐냐 하면 여자는 강해졌다 강해졌다고 남성들이 치켜세우거나 놀리거나 듣기 거북한 말을 듣거도 하는 것 같은데, 양말짝 따위에 비해 강해졌다 강해졌다고 우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여성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남성으로부터 독립하지는 못한 것이 아닐까. 여성은 현실 생활 속에서 쓸데없이 센 척하고 있을 뿐, 아직도 그 정신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이혼이나 재혼에 대해 일반 여성들의 생각이 비판적인 것은 남성으로부터 여향을 받은 가치 기준으로 결혼이라는 것, 여자라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은 한 번 결혼한 여자를 고물이라는 관념으로 본다. 그리고 남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에 익숙해진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잃는 것이다. 여자의 이혼자(내지는 미망인)가 고물이라면 남자의 그것도 고물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자의 고물만 값이 떨어지고 남자의 고물은 떨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마치 여자라는 것에는 젊음이나 새로움, 육체적인 순결만이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자는 하찮은 물건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고물이면서도 신품 남자와 결혼해 잘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잘한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잘한 것은, 혹은 나보다는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렇다는 것은 한 번 결혼을 한 여자는 미경험자보다 남성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란 밤늦게 돌아오는 사람, 그러나 그렇다고 아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회사와 가정의 중간에서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 언뜻 보기에는 강하지만 마음이 약하고 밉상으로 보이기도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무난한 인물이라는 점 등....
이러한 인식이 몸에 밴 고물 아내는 신품 아내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이해심이 좋을 것이다. 싸우든 화해를 하든 속도가 빠르다. (역습의 급소를 찌르는 요령 등도 알고 있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다는 설도 있지만).
적어도 재혼자는 그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고 싶은 법이다. 요컨대 여자는 항상 여자 스스로 사는 것이다. 여러 기성 관념에 시달리지 않고 여자 자신의 생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여자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자 자신에 대해서이다.
(40세 196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