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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_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국방부 시계도 건전지를 새로 끼웠던지 제대로 흘러 놈도 어느덧 일병 계급장을 달고 나름대로 군생활의 노하우를 조금씩 터득하고 있었다. 하기사 어느 놈이 죽던 시계는 반드시 돌아가는 법이니 국방부 시계라고 별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히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날은 무슨 일인지 하여간 어떤 졸라 얍삽하게 생긴 중사 하나와 하사 새끼 하나가 동시에 들이닥쳐 보안점검을 한다고 온 중대 내무실의 관품함을 온통 들쑤시고 다녔다. 그때는 내무실(요샌 명칭도 생활관이라고 한다던데)의 개인 관품함이라고 해야 가로 세로 오십센치쯤 되는 사각형 나무상자에 문이 달려있었고 거기에는 양말이니 빤스니 국가가 우리에게 준 거지같은 기본물품과 함께 책이나 니베아핸즈 크림 등의 자질구레한 사적인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겉 문짝에는 자그마한 액자를 일괄적으로 보기 좋게 달아두었는데 그 속에는 애인이 있는 놈은 “영자야 기다려라!” 같은 유치 찬란한 글을 함께 써서 붙였으며 군생활이 일년 이상 지나 애인이 도망 가버리게 된 상병급에서는 가족사진을 넣어 두는게 보편적이었는데 곧 집에 갈 고참들이나 이도 저도 별 관심이 없던 일부는 그냥 연애인 사진이나 한 장 어디서 구해 넣곤 했다.
그때 나는 내 관품함의 액자에 참신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인 여배우의 사진을 중대장이 개인적으로 구독해서 보던 신문에서 오린 다음 끼워두고 날마다 재미없고 졸라 따분하던 내 군생활을 지켜보도록 했었다. 조금 촌스럽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이쁜 구석이 없지 않았던 그녀는 오롯이 812일간의 내 군역을 함께 했던 무척 의리 있는 여자 였으니 내가 제대하고 나서도 엑스트라를 전전하더니 내가 직장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술맛을 알아가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나와서 어울리지 않기 무지막지하게 큰 부엌칼을 휘두르더니 이어 등신 같던 선조를 진맥하는 여자 어의로 변신하였다.
하여튼 그날 나의 관품함에 어떻게 분탕질쳤던지 그 개쉐이 기무대 새끼들은 여러권의 책을 가지고 가버렸었다. 나중에 보안검열이 다 끝난 그날 저녁 무렵에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서 밥띠꺼리 세 개를 달고 우리의 지휘관을 하던 중대장이 날 불렀다. 그러고는 그 얍삽한 쉐이들이 뺏어갔던 나의 책들을 돌려주었다.
문민정부가 막 들어선 그때는 군대의 권위의식과 보안의식이 많이 완화되었는지 아니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옳은 말을 졸라 싸가지 없게 하는 유시민의 어떤 현대사책이 별 국가안위에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했던지 놈들은 나의 책들을 단순히 소속 지휘관에게 맡기고 가버렸던 모양이었다. 하긴 시바 나처럼 멍청한 놈이 읽는 책이 뭐가 그리 대단하며 내가 국가를 위협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사고를 칠 종북주의자 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조금만 더 버티면 집으로 갈텐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등신같은 짓을 하겠는가?
나에게 책을 돌려주던 그 중대장은 낮고도 위엄 있게, 그리고 동네형처럼 애정 어린 목소리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멘트까지 곁들여 주었다. 하긴 나중에 알긴 했지만 그 당시 기무대장이 우리 중대장과 해사 동기였으니 별 시답잖은 걸로 껀 수 올려봐야 나중에 동기한테 ‘시발놈’ 소리밖에 들을게 뭐 있었겠는가?
지금은 말똥가리 세 개를 달고 내가 근무하던 사단에서 무척이나 똥폼 잡는 연대장이 되어있는 그 중대장은 뒷걸음쳐 나오던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이 정해병! 사범대 다니다 왔지? 그 소대 **이 말이야. 글 한번 가르쳐 봐! ”
“.............”
자고로 명령이라면 그것이 처녀 부랄이라도 구해 와야 하고 원산만에 정박해 있는 소련의 핵잠수함 민스코호의 프로펠러 나사까지 훔쳐 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앞으로 나의 제대신고를 해야 할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으니 어찌 개길 수가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내가 심심할 때 읽던 책을 그 악마같은 보안부대원의 손에서 뺏어주지 않았던가?
옛 이야기에 보면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 남편을 여의고 긴긴 밤의 외로움을 달래다가 목숨을 끊으려다 지나가던 소금장수에게 구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그 여인은 질질 짜다가 자신을 구해준 그 무식한 놈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그의 여인이 되는 법이다. 죽은 양반 남편보다는 살아서 자신을 쾌락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무식쟁이 소금장수가 더 좋은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나는 죽다 살아난 여인네가 되기로 한 나는 소금장수라는 중대장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대로 돌아온 나는 즉시 지금까지 내 밀리터리 다이어리의 주인공인 놈을 호출했다. 그리고 놈에게 한글을 떼어주고자 하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알렸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듣는 놈의 얼굴에는 배움을 향한 한줄기 희망의 불빛이 아니라 중학교 시절 우리 모교 옆 서씨 성을 가진 아저씨의 자전거 가게 앞에서 곧 껍데기가 그을릴 복날 똥개의 두 눈에나 나타날 만한 서글픔과 운명의 애잔함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그때 놈은 초중고 12년의 괴로움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절망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글도 못 읽는 자기에게 12년 동안 학교에서 매시간 마다 들어야 했던 선생의 지랄같은 소리가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니 놈이 죽지 않고야 어떻게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인가?
나는 먼저 놈과 나를 같은 야간근무조에 편성하도록 조치했다.
남자들이라면 잘 알 듯 군대의 근무는 주로 2인 1개조로 편성되는데 대부분 2시간씩 연속된다. 철책이나 해안의 경계임무를 맡은 군인의 경우 주 임무가 대적 경계이기 때문에 하룻밤에 두세번 정도 근무를 서야 한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후방에 위치해 있었고 유사시 상륙작전이라는 국가전략기동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훈련위주로 편성되고 운영되고 있긴 했지만 누구나 하룻밤에 한번 정도는 근무에 투입되어야 했다.
근무지역으로 보자면 주로 탄약고나 위병근무에 투입되었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취침을 하는 건물인 병사(兵舍)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경계하는 동초(動哨) 근무를 서기도 했었다. 나는 근무를 짜던 후임 작전병을 협박해 나를 동초근무에만 넣도록 하고 그 파트너로 놈을 배정시켰다.
내가 놈과의 근무를 동초로 변경한 것은 깊은 교육적 고심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원래 동초 근무란 부대의 건물주위를 늙은 영감 산보하듯 뱅글뱅글 걸어 다니며 경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높은 놈들의 눈을 피해 헛짓거리를 한다던가 근무 중에 짱박혀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교육적인 환경을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야간 동초근무에 나간 나와 놈은 근무수칙에 나와 있듯이 빈총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병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보면 병사(막사)의 정면 현관에 도착하게 되는데 우리나라 관공서 어디나 그렇듯이 현관 앞에는 각종 구호와 자질구레한 헛소리들이 씌여진 간판을 만나게 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부터 해병의 긍지, 선봉중대 구호, 중대장 복무방침, 상륙작전 개념까지 별별 쓸데없는 내용이 여기 저기 빼곡이 씌인 간판이 흐릿한 보안등 불빛아래 서 있었다.
그렇게 병사 현관 앞에 도착하면 나는 놈에게 으레 ‘받들어 총’을 명령했는데 놈은 가장 기합든 군입답게 최고의 예의를 표시했다.
누구에게 ‘받들어 총’으로 인사를 했냐고?
바로 그 간판들에게 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간판들 중 하나를 턱으로 가르키며 먼저 읽었다.
“나는 국가 전략 기동 부대의....”
그러면 놈이 그 간판을 보며 내가 읽은 그 구절을 따라해야 했다.
“나는 국가 전략 기동 부대의....”
그렇게 한 간판을 세 번 읽고 나면 나는 놈을 앞세워 마실다녀 오듯 또 병사를 한 바퀴 휙 돌아왔다. 그러곤 놈에게 아까 읽은 그 간판을 찾아서 첨부터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국가 전략 ????? .......”
“이런 쉬박쉐이 보게? 선임이 모가지 터지게 읽어준 걸 고새 다 까먹어? 쪼그려 뛰기 100개 실시!”
그랬다. 놈은 앞서 내가 시범 보이며 읽었던 그 간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쪼그려 뛰기 100개나 오리걸음 100미터, 총물고 서있기, 유격 PT체조 8번 온몸비틀기 등의 교육적 체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가쁜 숨을 쉬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놈이 다시 공부에 집중할 자세가 되었음을 파악한 나는 다시 놈이 들을 수 있도록 똑똑한 목소리로 한 문장씩 먼저 읽어 주었다. 그러면 놈은 최대한 정신을 차려 새겨 읽었다. 당시 놈이 글을 알아서 그 간판을 읽었는지, 아니면 뒤지게 맞을까봐 두려워서 아예 내용을 외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룻밤 두 시간의 근무시간을 투자하면 한 개의 간판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밤마다 부대를 뱅글뱅글 돌며 학문의 길만 걸었던 것이 아니니 우리도 가끔은 책걸이를 하곤 했었다. 앞서 말했듯이 놈은 특기를 살려 야외훈련용 고체연료를 대대창고에서 긴빠이(훔쳐) 해오고 나는 피엑스에서 라면을 구해와 배수로에서 당직사관에게 들키지 않고 끓여 먹곤 했다. 배움의 흐뭇함을 구수한 해물탕 라면의 면발과 국물로 적시던 그 맛이 그렇게 맛있었다......
<우리 공부의 교재와 교실이 되었던 곳>
사랑이 넘치는 선임의 교육철학과 기합든 놈의 열의와 적절한 육체적 고통으로 버무려진 배움의 시간이 흘러 무딘 놈의 머리도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어달 지나자 놈은 쓰지는 못해도 읽는 것은 띄엄띄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받침이 복잡한 글자는 힘들기는 했지만 대략 비슷하게나마 읽어 나가는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르치는 일이 나의 천직이 아닐까 착각하기도 했었다.
시바 그게 다 허접한 개꿈임을 나중에 알기는 했었지만....
놈의 그러한 발전을 직접 점검해 본 중대장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한편의 감동임을 자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마 그 당시에 지금처럼 인간극장이 있었다면 자기와 놈과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일주일동안 아침 7시 55분마다 KBS에 나올 수 있다고 야무지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지나가듯 중대선임하사에게 했던 모양인데 월남전에 참전해서 전투는 뒷전으로 하고 월남 꽁까이를 겁나게 많이 따먹었다던 그는 무척이나 고무된 얼굴로 자신의 벙커로 나를 불러들었다.
출근만 하면 늘 자신의 빵카에 짱박혀 졸거나 중대장이 없으면 작전하사에게 외출증을 끊어 부대밖으로 나가 청룡다방 미쓰김의 손바닥 관상을 보는 일로 하루 하루 소일하던 선임하사는 그날 따라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러나 높은 놈들이나 여자들이 갑자기 상냥하게 나올 때는 항상 긴장되는 법이다.....
“어야 정해병, **가 인자 글을 읽는다메?”
“예 그렇슴다. 완벽하지는 않슴다.”
“그래 그래. 알아 알아. 근데 말야........”
나는 그 월남전 용사의 말을 듣고 월남 정글에 비처럼 뿌려졌다는 고엽제를 홀딱 벗고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전해들은 그는 우리의 이러한 교육활동을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것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 발전적인 방향에 써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야, 정해병아, **가 군대 오기 전에 노가다판에서 포크레인 시다바리 했잖아. 그 놈 그대로 두면 앞으로 인생이 노상 시다바리하고 만다. 그라니까 니가 가르쳐서 포크레인 자격증 따도록 공부시켜 바레이. 내년 상반기 군면허 시험이 있으니까 공병대대 내 동기 김상사 한테 잘 바 돌라고 말해 놓으꾸마!” 였다.
시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놈이 IQ 210의 머리로 세 살에 4개 언어를 마스터하고 네 살에 미적분을 풀고 일곱 살에 NASA에 연구원으로 특채된 김웅룡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뜻도 모르고 더듬거리며 겨우 단어를 꿰어 맞추며 읽는 놈에게 우리 동기 중에도 명석하기로 유명했던 이종인이라는 친구만 땄다는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마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한번 해 보겠다는 답을 던지고 그날 나는 중대선임하사관의 벙커를 나왔다. 그 후로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놈이나 나나 심드렁했었고 나도 그해 늦은 가을날 제대를 했기 때문에 놈의 포크레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몇 해 전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죽도시장 어느 횟집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나와 만난 놈은 아직도 공사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직접 부리는 인부도 꽤 많아 보였고 돈도 좀 모은 눈치였지만 나는 포크레인 자격증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놈의 능력으로 보아 어떤 방식을 쓰던 자신의 일을 하는데 포크레인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힘들이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날 놈이 끌고 온 꽤 괜찮아 보이는 자가용을 보고는 내가 한마디 던졌었다.
“저기 니 차 말인데...... 별 문제 없나?”
“선배님 괘안심다. 동생 면허로 몰고 댕겨도 한 번도 안 걸렸다 아임니까.. 하하하....”
요새 애들은 다섯 살쯤이면 한글이나 영어를 동시에 공부하고 한자나 중국어까지 배우고 아홉 살이면 구구단은 물론이고 인수분해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예전에 과학고에 근무할 때 올림피아드에서 지방과학고 학생으로는 아주 좋은 성적에 해당하는 은상을 받은 내 반 학생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는데 수상자 명단에 금상을 받은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4학년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 하기도 했었다. 나랑 놈하고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남들은 일곱 살이나(이건 우리 마을의 안재우라는 놈이 해당된다.) 여덟살에 들어가는 학교를 나는 아홉살에 들어갔었다. 그래도 이름은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누나의 구박을 받으며 겨우 석자의 한글을 배우고 학교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동안 공부를 못한다고 시껍을 했었다.
남들은 4시간 후에 집에 가고 나서도 나는 네 다섯명쯤의 나머지 공부 동기들과 교실에 남아서 합격할 때까지 글자를 써야 했다. 그때 6학년이라서 매일 우리반 청소를 하러 왔던 누나에게 담임샘은 동생 공부 좀 시키라고 그랬는데 나는 그 말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찌하다 인생을 이렇게 살고 있지만 그때 함께 교실에 남아서 점심을 굶어가며 나머지 공부를 하던 친구 중 한명인 우리 친구 **도 요즘 잘 살고 있으니 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님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얄마
니 쫄따구 대단하다 군대 올때까지 한글 안땟고 살아온 뱃씸이 엄청나다야
그라고 싶어 그랬으까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