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서 중량교, 어린이 대공원, 성남 쪽으로 길게 뻗은 8차선 도로에 연접한 마장동 가까운 어떤 동네.
그 큰도로를 가운데 두고 지하철 역사와 동네가 마주하고 있다. 동네를 사방으로 상가가 에워싸고 있으며
도로보다 살짝 낮은, 소쿠리 속 같은 곳에 60, 70평 남짓한 제법 넓직한 2, 3층짜리 가옥들이 백여 채 들어앉아 있다.
지은지 30여년은 족히 지났으리라. 하나같이 빨간 벽돌집들은 많이 낡아서 네모 번듯했던 벽돌들이 마모되어
귀 언저리가 닳아지거나 벽돌사이의 접합부분의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고' 페인트 칠을 한 담장들은 몇겹인지도
모르게 결이 서서 너덜거리는 모습이 흔하게 눈에 띄었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자란 푸르른 나무들만 아니라면
그닥 생기있게 느껴질 동네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큰 도로에서 이어지는 골목길 가에 어떤 2층집, 대부분 지붕이 기와집인데 이집은 슬라브 지붕이다.
마당에 큰 감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 덩쿨이 담장을 온통 푸르게 장식하고 있다.
이곳에 신혼부부 주니와 보라가 이사를 왔다. 그간 좁은 집에서 고생하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니 주니와 보라는
서로 제방 꾸미는 일에 열심이었다.
남편 주니는 크고 볕 잘 드는 남향받이 방을 골라 서재로 삼았고, 아내 보라는 안으로 깊게 들어앉은
목욕탕 딸린 방에 폼나는 장롱이며 화장대를 새로 들여 안방을 꾸몄다.
동네 뒷쪽에 길쭉한 마을 공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간단한 체육시설이며 녹지가 형성돼 있고 나무 벤치도
여러개 있어서 저녘이면 식사를 마친 주민들이 나와서 끼리끼리 한담을 나누거나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월 보름, 오월 단오, 칠월 칠석 등의 절기엔 마을 주민들이 징이며 꽹과리 장구 등을 갖추고 농악놀이를 하고
마을주민들이 모이는 행사에는 의례 농악대가 한바탕씩 풍물을 울려대는데, 한 달에 두어번씩은
풍물소리가 마을을 들썩이게 하곤 했다.
결혼한 지 다섯해가 되어도 주니와 보라에겐 아이가 없었는데 이사한 지 채 1년도 되지않아 병마가 보라를
덮쳤다. 여자들에겐 흔한 병이지만 자칫 2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는 병이어서 보라는 수술보다는 힘겹게 병마와
맞서 싸워야 했고 친정 어머니가 와서 함께 거하며 병 수발을 들어야 했다.
한데, 보라는 안방이 싫었다. 잠은 물론이고 잠시 옷을 갈아 입으러 들어가는 것 외에 따로 안방에 들어가는 일을
꺼렸다. 안방 문을 열면 음습한 기운이 느껴질 뿐아니라,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농악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덩 덩 궁덕궁...덩더 궁덕 덩더 궁덕... 궁다다 궁다다 궁덕궁덕...'
무한 반복으로 들려오는 농악소리.....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거의 새벽에야 잠이 드는 주니, 투병으로 인해 수척한 모습으로 미리 잠자리에 든 보라.
와장창....
"저리 가지 못해! 이놈들아 어서 가버리란 말이여~"
부엌방 쪽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잠이 깬 주니가 총알같이 부엌방문을 연다.
"어머님,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러세요"
" 저 저... 저 놈이....저 놈이 나를 쫓아다니네. 저 놈이...."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어머님 진정하세요."
주니는 물 한컵을 따라서 장모에게 건네주며 등을 다독여 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예순 후반의 노인네를 겨우 안정시키고 들은 얘기인 즉,
"김서방, 다른 일이 아닐세. 내가 아까 저녘에 안방에서 막 자리에 누웠는데 불빛이 환하게 비춰서
이상하다 싶었네. 도둑이 들었나 하고 눈을 떠보니까 아, 글쎄 장롱에서 커다란 눈깔 두 개가
화광을 뿜으면서 나를 노려보지 뭔가. 첨에는 도둑놈이 후라시를 비추는 줄 알고 내가 살짝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봤네. 아무도 없더구만. 그래도 어떤 놈 소행인지 내 눈으로 확인할라고 옥상 계단으로
올라가서 그 창문 있는 쪽을 비춰봤네. 아무도 없더구만."
주니는 장모의 얘기를 듣자 며칠전에 겪었던 이상한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방송국에 원고를 다 넘기고
피곤에 지쳐서, 취한 잠깐의 낮잠에서 막 깨어나는데 비몽사몽간에 통이 좁고 긴 월남치마를 입은 여인이 머리맡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다가 후닥닥 다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첨엔 보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락에서 아무 소리도
없어서 올라가 보니 먼지가 수북히 쌓인 어두운 다락엔 커다란 물탱크 하나만 눈에 띄였다.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알 수 없는 웃음을 띈채 사라진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가뜩이나 심약한 몸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는 보라에게 주니는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보라는 병원에 실려가 힘든 수술을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몇 해 동안이나 수술 후유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보라는 여전히 안방에서 들려오는 풍물소리를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아랫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됐다.
"새댁, 이 동네가 말이야. 원래, 큰 밀가루 공장이 있던 터라는 구만. 한데, 큰 불이 나서 그 밀가루 공장이
다 타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몇 사람 죽었다고 하대?"
보라는 남편에게 그 얘기를 전했고 안방에서 들려오는 풍물소리에 관해서도 얘기를 하자, 남편 주니 또한
안방에서 풍물소리를 자주 들었던 일이며 얼마전, 보았던 젊은 아낙네에 관해서도 얘기를 털어 놓았다.
부부가 서로 얘기를 맞춰보니 틀림없이 그 집은 귀신붙은 집이었다. 보라는 빨리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주니는 늘 빠듯한 시간 속에서 일하다 보니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에 치일 정도로 많은 일이 주니에게 쇄도했고 자연, 새집을 장만할 수 있는 경제력도 확보가 됐는데
이사를 쉽게 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방엔 늘 음습한 기운이 드리워 있고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풍물소리, 게다가 장모가 장롱 귀신에게 위협까지 당했던 터라, 식구들이 서로
의논 끝에 장모의 권유대로 용하다는 도사를 찾게 됐다.
자초지종을 들은 도사가 수십장이나 되는 고가의 부적을 써 주면서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다.
주니와 보라는 그 부적을 받아다 현관을 비롯한 각 방의 문지방 위에 붙이고 각자의 베갯속, 지갑 속, 속옷에
부적을 넣고 또 속옷 속의 부적은 하루에 한 장씩 그 도사의 지시대로 태웠다.
부적을 받아온 날부터 안방의 풍물소리는 사라졌다. 보라는 혼자서도 그 안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일이 있은 지 몇달 지나지 않아 6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던 것이지만
그 집은 주니 부부에게 늪과도 같은 곳이었다. 빠져 나가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깊숙이 끌려들어가는 늪.
첫댓글 등골이 오싹한데요~
전 어릴적 생시로 두번 꿈에 한번 이렇게 그림자형상의 사람이 저를 쫓아오고 창문을 넘어오는 무서운 경험이 있었어요
지금은 꿈을 구면 초특급 sf 환타지를 자주 구지만요~^^
이 보라돌이는 어렸을 때 환청을 듣거나 불가사의한 형상을 보거나 한 적은 없었답니다.
불가사의한 체험은 한 번 했었지만요.
청년시절 여름 수박밭에 가다가 혼불은 두번 보았습니다 만은 ...
무서움증인지..초등때..여름 칡흑같은 밤 여고 운동장을지나 샛길로 집을 가는데 분명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머니께서 밤에 누가 부르면 대답하지말고
절대 돌아보면 안된다..곧동 묘지도 달이 밝으면은 지나갈 수 있는데 안개끼고 이슬비 오면은
도저히 혼자는 못지나가겠데요..다만 남자 둘이라면은 문제없지만요..
청년때..담력을 기른다고 요굴이라는 고향 공동묘지입구에서 혼자씩 같다오기 내기도 했지요..
무서움은 마음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개구쟁이 시절 공동묘지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는 꼭 무리지어 갔었죠.
무섬증이 많아서요. 그것도 한 낮에.... 정말, 해골이 빛이 나는지 살펴보기도 했구요.
물론 실제로 해골을 본적은 없지만요.
낮에 읽어서 그런가 안무섭네요.. 귀신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것 같습니다. 집에 기운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것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 어머니가 무당을 불러다가 굿도하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다 어머니의 사랑이였고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주 튼튼히 자랐습니다. 보라돌이님 늘 건강 챙기세요.. ^^
울 엄마 말씀에 의하면 내가 아기 때도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아픈 적이 있다는군요.
납량특집입니다. 전 아직까지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가끔은 누군가 나를 부른듯한 소리가 있었지만 잘못 들었으려니 생각할 뿐 깊게 상념에 빠져 본적도 없구요.울 어머니가 귀신은 없다고 하셨고 인간들이 만들어 내고 점쟁이가 돈 벌어 먹으려고 하는 짓이다 그래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식에 얽메이지 않으셨지요.그렇지만 주위의 지인은 과거 레슬링 선수였는데 귀신에게 홀렸는데 마누라가 방망이로 때려도 의식이 없었고 아프지도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불가사이한 일이죠.
불가사의한 일을 몇 차례 겪어서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란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일정 부분 인간의 의식이 그런 불가사의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설에는 의견을 함께 합니다.
저도 어린시절 그랬답니다.. 황달로 죽어갈때 약으로 안되었는데 누가 개똥참외을 쓰라해서 낫았다더군요..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시름 시름 앓아서 한달간 학교을 못갔지요. 초등 친구들이 저을 얼굴이 하얗고 약한 친구로 알다가 커서는 못알아 보더라고요. 불가사의한 힘으로 낫기도하고 아프기도하죠.
죽은 사람의 혼이 저승으로 가지 못한 불쌍한 혼령들이었네요...
아무래도 화마가 인명을 상한 곳이니까 크게 천도재를 올렸어야 했지 않았나 합니다.
장모님이 그날 밤 후레쉬 들고 옥상 올라가셨단 소리에
한번 더 놀랐었죠. 어떻게 옥상까지.... 월남치마 입은 아줌마 인상은
지금도 선한데, 어쩜 그 집에서 그런 일들이 연속 일어났을까?
부적도 참 신기했고. 새벽1시쯤 멀리서 들러오던 덩덩 덩덕궁 풍장 소리
뻔히 들으면서 더나 무서워 할까 말도 못했던 시절.
한 사람은 몸으로 모진 고생을 했고, 또 한사람은 다행히
작은 집이라도 살 돈을 마련했던 집이라 돌아볼수록 아리송송.....
그 월남치마 아줌마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웃은거 같은데. 벌써 17년 전 일이네요.
개인사가 너무 드러나는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이서 겪은 일인지라
지금도 생각하면 그 집에서 살았던 6년간은 참 죽을둥 살둥이었던거 같네요.
2층집 아래 주인네는 잘 되던 식당집에 불이 나고,
살림이 쫄딱 쭐어서 이사갔는데 우린 2년을 더 버텼고.
마침내 글 쓰던 제일 밝은 서재방 바닥이 주저 앉기 시작해서
떠나야 한다 결심했었고, 그 집은 우리가 나가자 마자
곡괭이 들고 온 인부들이 꿍꿍 바닥을 파헤쳤고
때때로 떠돌이 고양이들이 쥐를 잡아 현관문 앞에 두고 갔는데
훗날에서야 그게 못된짓이 아니고 가끔 밥 챙겨주는
사람에 대한 선물이었단걸 알기도 했구요
흉가가 있나 봅니다.. 저는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온지 십년째인데 제가 시름 시름 아팠답니다. 남편 사업도 점점 안되고 주변이 찾아와서 상식으로 이해 못할 짓을 하고도 갔죠. 영적으로 무얼 본다는 사람에게 이 같은 일을 알리고 길을 찾아봤지만 결국 제 자신이 주변을 정리하기에 이르렀고 집주변에 나무을 심어서 집을 안정 시켜주었지요.
어느 시점에 도달으니 안정이되고 건강해지니 마음 만큼은 다시 편안해 지더군요. 집과 주인에 관계가 묘하게 작용되는 것 같아요.
총각 때 서양 것들이 좋아 보여서, 어슬프게 팝송도 부르고
니체나 카프카 싸르트르 까뮈로 이어지는 정신사에 매료 되면서
꽤 도전적으로 살았거든요. 일테면 자기 존재에 대해 자신이 책임진다.
선택과 결정 행동화도 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권리를 주도한다.
뭐 그런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서 귀신의 존재 같은 건 인정할 수 없었답니다.
그 용맹스런 젊은 시절에는 안보이던 것들이 30대 후반 등장한 건데, 그때는 이미
동양학에 깊이 빠져 있었을 때였죠. 일테면 자연 앞에 경건해 진 시절이랄까요.
자신의 생명체가 유일무이한 개체가 아니란걸 느낄 때였죠. 그래서 제사 자체를
모시지 않던 장남이
조상님 굶은 넋신이 열 다섯이나 제 주변을 맴돌며 아우성 친다는 한 스님 말씀에
속으로 웃었더랬죠. 그땐 또 많이 아팠답니다. 방송국 엔지니어 한분은 훗날 저에게
'당신 3년 못 넘길 줄 알았어.' 초죽음 된 얼굴로 초인 처럼 KBS에서 수많은 일을 했더랬죠.
그 스님네 말을 반신반의하며 도봉산 영월암에서 조상님 천도재 지내기로 하고
밥을 열다섯 그릇 차리고 큰 바위 앞에서 밤새 경을 읽고 저도 함께 무르팍 꿇고
조상님들 굶은 넋신과 이야기 해본다고 했었죠. 시간이 가면서 달도 숨어 버린
그 도봉산 깊은 밤 촛불만 차가운 가을밤을 밝혀 줬는데, 사무치더군요. 제 목숨이
내 젊은 날 만용 때문에
일테면 실존주의에 빠져 우리 전통 뿐 아니라 기존 가치관을 부정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겠노란 그 만용 때문에 제사를 버린 게
죽은 조상넋신을 그리도 힘들게 했던가? 잠시 사무쳤답니다. 그런데
한 순간 5미터 쯤 떨어져 있던 세개의 촛불 중에 하나가 제 뺨을 스친듯
화끈하더군요. 뭘까? 순간 다시 찬 바람이 뺨을 식혔구요. 그날
제 뺨을 스쳐간 촛불인지 뭔지가 그 이후 내내 화두였답니다.
암튼 그때 이후로 제사는 챙겨 드리고 있구요. 돌아 온 탕아에 대한
조상님의 입마춤 아니었을까? 이딴 개인사가 나올 일이 아닌데
보라돌이님이 작은 판도라를 살짝 열은 모양입니다.
한번에 열다섯 그릇이나 되는 밥상을 올리셨군요.. 저도 젊은날에 만용이라 생각하면서 우리것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었네요.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네 인생에 겸허을 먼저 배워야함을 느껴봅니다.. 글을보니 저도 어머니께 회개의 마음이드네요.
생사일여... 제가 들은바로는 사람이 죽은날이 저승에서는 이승과같이 생일날이라고 하더랍니다. 후손이 죽은 조상께 제사드리는건 저승간 조상 생일밥이 되는격이라고 들었습니다.4대까지 기 제사를 드리는건 조상이 4대가지후손 제사밥을 먹곤 4대가 지나면 각기 이승에서의 닦은 바에 따라 신의 세계로 들어간다 합니다. 그러니 4대까지는 제사를 꼭 지내야 조상이 굶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고 복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다 합니다.
증조까지는 방안 제사로 모시고 고조 이전에 분들은 산에서 한식때..시제로 모시지요...
어렸을때 아버지를 따라 시제 모시러 모악산에 간 일이 있었네요.
모악산 자락 깊은 곳에 여러 기의 조상묘가 들어앉아 있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우리 종씨의 여러 자손들과 서로 안면을 트면서 집안 간 결속도 다지고
조상에 대한 자부심도 한층 드높였던 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잠 쫓을때 한번씩 읽으시면 잠이 확~~~~
고맙습니다 조은님.
아직도 몇 꼭지의 얘기가 더 남아있습니다.
차근 차근 마저 올릴 겁니다.
즐겁게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