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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의 신의 문제
1. 우리의 실존적 모습 인식과 키에르케고르 -- 가면(마스크) 벗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기 어떤 흰 가면을 쓴 사람이 있다. 그는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뒤덮었다. 모자를 썼으며,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물같이 연결된 컴컴한 망으로 둘러싸인 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조용히 단상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동그랗게 메어놓은 새끼줄을 쓰다듬는다. 갑자기, 온 몸에 둘러친 천과 모자를 차례로 거칠게 집어던진다. 잠시 후, 다시금 그 새끼줄을 쓰다듬는다. 동여맨 새끼줄 안으로 목을 들이민다. 고개를 심하게 흔들며 단상에서 내려온다. 계속해서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반복한다. 그리고, 뭔가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듯 그물로 연결된 컴컴한 그 공간에서 미친 듯이 날뛴다. 자신을 둘러싼 얽히고 설킨 그 그물들을 쥐어뜯으면서. 그러기를 한참 후, 멈칫한다. 그의 눈이 빛난다. 유리창 없는 투명한 틀을 통해 무언가를 본 것이다. 그 '무언가(X)'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X에게 조심스러이 다가가 살려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뭐냐고 묻는다. 창틀과 그것을 통해 나온 '무언가'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경의에 찬 표정으로 그 창틀 앞에 선다. 그리고는 창틀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짝짝이 맞춰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거칠게 뒤돌아 선다. '무언가'를 보여준 이 창과 단상에 매어놓은 새끼줄 사이를 갈팡질팡 한다. 흐느낀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아먹은 듯, 그 단상위로 경건하게 올라선다. 목을 맨다. 모든 것이 끝난 듯. 그러나 아니다. 끝까지 벗지 않았던 흰 가면을 온 힘을 다해 얼굴에서 분리하려 한다 - 도대체 그 흰 마스크가 뭐기에. 어쨌든, 그는 온갖 몸부림으로 흰 가면을 벗고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도 차분한 발걸음으로 무대에서 유유히 사라진다. 이는 10분 남짓한 어느 '대사 없는 연극(Mime)'의 대강의 스토리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화두로 던진 것일까. 이 마임은 대사도 제목도 없다. 그이가 무대에서 보여준 것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우리의 정신 상태, 그 모습을 까뒤집어 외면화했으니 당황할만하다. 그러나, 자신이 처해온 실존적 상황을 되새겨보자. 우리는 항상 들뜨고 자족한 상태에서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어느 샹송의 가사에서처럼 사랑하는 이와 함께이면 언제나 인생은 장미 빛이라고 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순간은 짧고도 긴 인생의 항로에 비추면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행복하다고 되뇔 수 있는 시간보다도 적어도 불행은 아닐지라도 여러 갈등 속에서 불안해하고 답답해하는, 혹은 아무 감응 없이 세월을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내 인생은 너무 텅 비었다고, 허무하다고 고민하고 어떤 이는 행복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에 대해 자문하며 내적으로 방황하곤 한다. 그렇다. 까마득히 깊은 안개에 둘러싸여 우리는 저마다 걷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왜, 어찌하여 걸어가고 있는가. 왠지 두려워 주위를 서성거려도 본다. 타인들뿐이다. 소리 질러 외쳐도 본다. 결국,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걷기는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우울과 절망, 답답함 앞에서 당당하고 비굴해하지 않으며 걸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그 최후의 해결방안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수많은 '각각의 나'이다. 그 '각각의 나'는 지금 그렇게 각각 묻고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모든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하고 말이다. 여기, 우리와 똑같은 번민으로 괴로워한 현대 철학자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하는 '키에르케고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한 철학자가 있다. 사실, 그가 죽은지 한 세기 반이 흘러서 물질적으로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 졌지만, 우리는 정신적으로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럽다. 따라서, 항상 뭔가에 목말라 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저마다 처한 실존적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사실, 어쩌면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려고 하는 노력조차 무가치한 정신적 행위로 치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리는 본능적으로 참답고 영원한, 진정한 안식을 희구하는 바, 이 염원만으로도 충분히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접근해 봄직한 것이다. 이제 그의 삶과 사유들을 좇으며 그가 가리키는 고뇌의 끝은 어디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키에르케고르의 일생을 통한 고뇌 -- 두 지진 1) 운명적인 성격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 Aabye, 1813-1855)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유복한 모직상인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은 심각하고 엄숙하고 우울한 종교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지적인 두뇌와 재치있는 변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풍부한 유머를 지니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의 기조를 이루는 것들 - 우울하고 냉소적인 성향, 스스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결백한 것, 종교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경건성, 끊임없는 자기 성찰 - 은 모두 아버지 미카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1) 키에르케고르의 선천적으로 우울한 성향은 코펜하겐대학 신학교에 입학 - 18세부터 - 하여 쓰기 시작한 그의 일기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우수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는 야누스와 같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 얼굴로는 웃고, 한 얼굴로는 운다'2) 그런데, 이러한 선천적인 우울한 성향에 더욱더 불을 붙이는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를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장에서 은밀하게 '큰 지진'이라고 지칭한다.3) 그럼에도 그가 이 '큰지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으므로, 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명백한 두 가지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유추해 나가기로 하겠다. 항상 자기자신을 철학의 문제로 삼았던 키에르케고르이기에 이 '큰 지진'에 대해 그냥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 두 지진 종교적으로 엄숙하고 경건한 그의 부친 미카엘이 유년시절 추위와 굶주림과 고독에 못 견디어 한때 신을 저주한 적이 있음의 사실과 함께 모친과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파생된 결혼이 그 중 한 사건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 안네는 원래 그의 집 하녀였는데 미카엘의 전처가 슬하에 자식하나 없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미카엘은 안네를 아내로 받아들인다. 사실, 안네와의 관계는 그 전부터 - 아내로 맞아들이기 전 - 비밀스럽게 미카엘에 의해 계속되어 왔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이러한 출생에 대한 사실들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갔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아버지 미카엘의 비양심적이고도 비종교적인 언행은 그로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을 것이다.4) 이와 같은 추측은 그 후 잠시동안의 그의 외도 즉, 방탕했던 그의 생활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가족에게 신의 저주가 내려졌다고 굳게 믿으며 자신에게도 이 저주는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그의 형제들은 큰형만을 제외하고는 - 어머니 안네도 함께 - 모두 일찍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의 이 믿음은 그에게 있어서 더욱 당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일기 중 '큰지진'에 대해 딱 한번 언급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들 중의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는 한사람의 불행한 인간을, 그의 모든 희망의 묘 위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봄으로써, 나의 주위에 죽음의 침묵이 점점 더 에워싸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어떤 하나의 죄책이 온 가족에 덮혀 있음에 틀림없다. 하느님의 벌이 가족 전체에 내려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제거되고 하나의 실패한 시도로서 말살되어야 하는 것이다.”5) 다음 사건으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사색이나 작품에 낱낱이 베어있는 "레기네 올센'이라는 여인과의 사랑에 대해 조명해 보겠다. 평생 그의 여인이었으나 그만의 여인이지만은 않았던, 비극적인 그러나 그러기에 영원할 수 있었던 사랑에 대해서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를 외치고 자기 시대에 상당히 반항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지극히 냉철한 머리를 가진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해 보이는 철학자에게도 단 한번뿐이었지만 그것으로서 충분했던 사랑이 있었다.6) 키에르케고르의 나이 24세, 당시15세였던 레기네 올센의 자태에 첫 눈에 반한 그는 3년 후 18세가 된 레기네와 약혼한다. 그러나, 이들의 약혼은 1년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역설적이게도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파기된다. 말하자면, 이 파경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순전히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문제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이는 종교적 엄숙성과 우울한 성향이 강한 키에르케고르가 결혼을 앞에 두고 여러 불안과 고민에 사로잡히게 된 것에 기인한다.7) 더군다나 자기 가족에게 큰 저주가 내려졌다고 믿는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합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부조리였다.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천성적인 결백함의 기질과 엄격한 결혼관은 결혼 생활 자체에 자신감을 잃게했다. 이로써 부친의 비밀을 알게 된 키에르케고르가 불안과 절망에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마침내 참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레기네와의 약혼을 파기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학 사상은 과학 사상과 달라서 언제나 인간 및 그 생활에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철학 사상의 이해에는 먼저 그 사상가의 생애와 그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당연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철두철미한 자기 성찰의 인간이었다. 더욱이, 그는 가장 주체적이고도 실존적인 사상가였기에 항상 자기 자신의 문제들이 모든 사색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자기가 없는 철학, 자기를 떠난 철학, 자기를 문제로 삼지 않는 철학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는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훌륭한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또는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하자. 그러나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남의 구경거리를 제시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객관적인 것을 그때 그때마다 결코 본래적인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서로 얽히어 있는 것, 그리하여 전 세계가 무너져 버리더라도 내가 그것을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나는 갈망하고 있다.8)
그에게 있어서의 ‘실존’은 단지 ‘그냥 존재하는 것(is)’의 ‘있음’의 의미나 ‘그렇게 됨(become)’의 ‘생성’의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 그가 일생동안 그토록 고뇌했던 ‘실존(existence)’이란 무엇을 뜻할까. 구체적으로 실존적 주체적 사고란 어떠한 것을 뜻하는가? 더 나아가,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통해 물려받은 암울한 성격 그리고 큰 지진과 어우러진 엄청난 그의 고뇌들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과연, 그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3. 키에르케고르의 삶의 문제들 우선, 대강의 윤곽을 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키에르케고르의 일기를 보자.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 내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낸들 그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인식의 명령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명령을 통해서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내 안에 생생하게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 그런데, 가장 중요한 그것이 내게 없었다. 이것은 마치 내기 집도 얻고 가구도 장만했지만, 거기서 인생의 희비를 같이 나눌 연인을 아직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가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 사람이 평안함과 의의를 얻는 것은 그가 자신을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길은 절망이라고 하는 저 따분한 저주받은 동행자 곧, 삶의 ‘이로니(Ironie)’를 면할 길이 없다. 내면적 근거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9) 1) 실존적 사고의 성격 -- 헤겔과의 비교를 통하여 당시 유럽의 정신계는 헤겔 철학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으며, 덴마크의 사상계 헤겔적 체계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합리적 지식과 전통적 심정적인 것의 일치, 철학과 그리스도의 신과의 일치 그리고 사상(이념)과 현존하는 사회질서와의 일치를 말하는 헤겔적 객관적 순수 사고의 체계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다.10) 헤겔에 의하면, 세계는 절대 정신11)의 나타남이며 그의 변증법은 이 절대정신이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을 필연적인 전개로 파악하는 체계적 논리였다. 여기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12)으로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변증법적인 필연성에 따라서 체계화되고 개체는 전체의 개념 속에 포괄되며, 진리는 전체13)가 된다. 따라서, 헤겔에게는 항상 전체, 보편, 일반, 체계적 원리가 문제였다. 헤겔 체계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나의 사고가 곧,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사고와 존재는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순간 순간을 괴로워하고 버거워하며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 지 모르는, 항상 선택의 사거리에 있는 우리에게 헤겔의 사고체계(사유)가 시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볼 때, '무한한 결단'이란 있을 수 없다. 결단은 오직 '주체성'에만 있는 것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전체가 진리라고 하는 헤겔에 맞서 '주체적인 어떻게'와 '주체성이 진리'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가장 정열적인 내면성의 자기터득에서 확보된 객관적 불확실성이 실존자에 대해서 존재하는 최고의 진리라는 것. 즉, 객관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무한한 정열을 가지고 선택한다고 하는 모험 속에 비로소 진리는 성립된다는 것이다.14)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적 사고의 특징은 바로 자기의 존재와 존재하는 일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사고 즉, 그가 말하는 주체성은 곧 '자기에 관계하는 사고'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은 헤겔처럼 우주와 전체를 파악하려는 존재자체에 대한 사고가 아닌 고뇌를 걸머진 현실의 구체적인 피와 눈물을 가지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분노하는 낱낱의 인간 존재에 대한 사고의 체계로 결론 내릴 수 있겠다. 2) 실존의 참모습 주체적 실존적 사고의 주체는 시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하느냐고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해서 변증법적이며, 이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이란 그 어디에 있다고 하는 정적인 자기의 상태나 도달된 정적인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본래의 자기를 깊게 자각해 가는 노력의 과정에 있다. 이러한 '자기됨의 노력'속에 나타나는 실존은 크게 세 단계로 -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 질적으로 구별되고, 이 때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넘어감은 '결단'의 비약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세 단계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시간의 지남과 더불어 올라가는 외형적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15) - 심미적 단계(미적 실존) 실존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낮은 단계이다.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이 단계의 사람은, 단지 바라보거나 즐기기만 할 뿐 행위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며 구미가 당기는 것이나 오락거리만 쫓아다니며 산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는 나비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다니듯이 이 단계의 사람은 결코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쾌락의 가능성 속에서 떠돌며 재치있게 삶을 향수한다. 결국, 인생의 목적은 건강, 아름다움, 부, 명성, 지위, 재능, 미적 감각의 만족 같은 자기 인격의 밖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자기 이외의 것,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이 삶은 필연적으로 절망으로 끝나게 되며, 이 절망한 인간은 점점 더 깊은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그 자신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소외됨으로써 이로니(Ironie)에 빠진다. 즉, 쾌락을 추구하던 주체는 도리어 욕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인생의 공허감만 느끼게 곧, 본질적인 의미에서 비현실적으로 남게 될 뿐인 것이다. 이 상태로부터의 해결책은 결국 이러한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기를 참으로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고 자문해 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쾌락적 감성적 자기에 밀려 무시당했던 양심이 눈을 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절대적 선택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결단'으로서 실현되는 것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이윽고 현실에 이르고 현존재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립할 수 있다. - 윤리적 단계(윤리적 실존) '선택과 결단'은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을 고찰하는 본질적인 범주로서, 이는 '윤리적 단계'의 특색을 나타낸다. 곧, 이는 반성적 의지적 결단에 의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영원한 인격으로서의 나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윤리적 단계에 들어서 실제로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신에 이르고 자신의 과제가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가족, 사회, 민족에게로 돌아가게 해준다. 영원한 절대적 자기는 역사적, 사회적 자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친구 관계, 결혼 관계, 직업 관계에 들어갈 것을 명하며 개방성과 솔직함을 의무로 요청한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양심에 입각한 영원한 절대적 자기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그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도 완벽하게 윤리적일 수도, 양심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성실하면 할수록, 양심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지운 과제의 엄청난 요구 앞에 스스로의 무력을 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할 수 있을까. 이러한 난관에 봉착하여 윤리적 실존은 스스로의 양심 앞에 스스로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양심의 한계를 넘어 자기의 실존을 받쳐주는 다른 근거를 찾게 된다. - 종교적 단계(종교적 실존) 윤리적 실존이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심과 윤리에 입각한 보편성의 윤리는 부정되고 죄의 사실을 승인하는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게 된다.16) 그러니까, 실존의 궁극적인 모습은 종교적 실존이다. 결국,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핵심이자 그의 평생의 과제이다.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두 가지의 종교성으로 구분된다.17) 그 하나는 내재주의에 선 종교성 일반을, 다른 하나는 계시에 의한 초월 종교 즉, 그리스도교를 가르킨다. 전자는 생존이 실존으로 바뀌면서 절대적 목적에 절대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실존자는 자기 자신의 벽에 부딪치며 고뇌하게 되지만, 이 고뇌는 자기가 영원자와 관계 맺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영광스러운 고뇌'가 된다. 이 고뇌는 반성을 거듭할 기회를 제공하며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책감은 죄의식이 아니다. 자기 반성의 뉘우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더 강렬한 의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여, 후자는 유한한 인간은 홀로 죄의식을 느낄 수 없고 초월자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한다. 즉, 인간은 신과의 무한한 거리에도 불구,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죄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무조건 신 곧, 초월자를 믿어야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함이다. 3)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 - -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 상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습에 대하여 - 그리스도상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상은 한 마디로 "비천과 고뇌"의 그리스도이다.18) 그에 따르면, 비천은 높이 드리움에 이르는 영광의 길이기에 비천의 고뇌 없이는 높아짐의 영광이 있을 수 없고 영광은 비천의 고뇌를 그 내용으로 할 때에만 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비천에 의한 고뇌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뇌는 영원한 승리의 역설적 표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비천과 고뇌는 모범과 화해자로서의 그리스도와도 연관된다. 모범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기의 짐을 지고 고뇌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갈 때 사람은 이 모범과 자기와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깨닫고 절망한다. 이 때 모범되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가 끝까지 따라올 수 있도록 긍휼과 은총으로 도와주시는 화해자, 곧 구주가 되신다. -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습 성서를 읽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것처럼 마음에로부터 마음에로의, 님으로부터 나에게 온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19)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성서의 학문적 연구만큼 비인격적인 것이 없고 사랑하는 이가 자기에게 보내온 편지를 읽는 태도에서 동떨어진 것도 없다고 본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야말로 가장 성서에서 동떨어진 사람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순하고도 분명한 하느님의 요청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없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당위가 싫기 때문에 그것의 학문적 해석이나 연구를 통하여 거울 그 자체를 보는 일에만 몰두하고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은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 해석의 원리란 첫째, 성서를 읽을 때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것을 읽는 나 자신 사이에 '주체적 실존적 관계' 가 이루어 져야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의 일로서,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받아들어야 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한낱 옛날 책이 될 뿐이고,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의는 학설에 학설만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것이기에 말이다. 둘째, 누가 언제 그 말을 했느냐고 하는 성서의 말씀을 말한 '주체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다. 말은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활을 떠나서는 그 말씀은 헛된 것이 되고 말기에 말씀을 선도하신 당시의 역사적 현실 곧, 비천한 그의 모습도 함께 기억하고 음미해야 한다. 이는, 물론 이성적 인식 작용으로서가 아닌 '신앙'을 바탕에 깔고 행해야 함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한갓된 역사가 아니다. 그의 역사는 성스러운 역사로서 역사밖에 초연히 서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각 시대와 직결되어 있어 인격 예수와 전인적으로 만날 수 있음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 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키에르케고르에게 그리스도교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애 그 자체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전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그와 함께 '동시성'을 이룰 수 있는 삶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비천과 고난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우러르며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 그러기 위해서 그의 비천의 고난과 동시성을 이루며 사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삶은 육체에 대한 죽음, 자기 부정, 금욕과 복종의 길을, 조소와 박해에 굴하지 않는 피흘림이 없는 순교의 길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이러한 본받음의 고뇌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곧, 그리스도 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이러한 취지 아래 당시의 교회 신자들을 맹렬히 비판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몸소 고뇌하며 뒤따르는 일없이 이 세상을 향유하려던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리스도의 고뇌를 본받는 일을 잊어버리고 일반적인 인간의 고뇌-신앙자, 비신앙자에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뇌-와 혼동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뇌와 죽음에 의한 은총을 헛되게 하는 시민적 그리스도교와 현세적 행복의 교회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항의하고 싸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선포할 "고난 당하는 진리의 증인"으로 단독자를 내세운다. 키에르케고르는 근대라고 하는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윤리, 종교적 내면성을 잃어버리고 무리의 하나가 된 사람들을 무리에서 떼어 낱낱의 단독자로서 하느님 앞에 홀로서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한낱의 사람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내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일깨운다. 4. 단독자 -- 개념과 성격 그리고, 그 시사하는바에 대하여 1)단독자의 개념과 성격 처음 키에르케고르가 단독자란 말을 썼을 때는 '내가 기쁨과 고마운 마음으로 나의 독자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였다. 20) 여기서 '저 사람'이란 그의 약혼자였던 레기네 올센을 뜻한다. 그러나, 그 후 '단독자'란 말이 뜻하는 바는 점차로 일반화된다. 이 일반화된 '단독자'는 모든 사람이 그것(단독자)이며 또 그것일 수 있는 단독자로서 그 전형은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즉, 여기서의 단독자는 특별히 탁월하거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단독자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의 단독자이며, 단독자임을 자신의 영예로 여겨야만 하고, 더욱이 한 사람의 단독자임에 참으로 자신의 축복을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독자란 말에는 '오직 한사람'이라는 것 - 누구나 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서 또한 모든 사람이 단독자가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과 '누구나'라고 하는 것이 함께 스며있다.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사실, 주의를 환기하여 그리스도 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단독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단독자이어야 한다는 의무를 즉, 바로 그리스도교에 관계해야 하는 방식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 그것은 지극히 고독한 일이다. 그것은 무리를 거슬러 혹은 떠나서 가장 진실된 자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감을 뜻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실존의 삼단계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찾을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단독자의 보기를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에서 찾는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 관계된 이 사건 - 모리아산 사건21) - 을 바라보는 키에르케고르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모순속에 사람을 불면에 빠뜨릴 수 있는 불안이 있다. 그리고 이 불안이 없다면 아브라함은 이미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의 불안은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이 것 곧, 보편자와 단독자가 서로 모순 대립되는 갈등에서 비롯된다.22) 사실, 아브라함의 의도는 인륜적, 보편적인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신앙이 바탕이 된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순전히 사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브라함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윤리적 목적도 없이,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인륜적으로 정해진 세계를 체념하고 그런 끔직한 짓을 행하려 했을까. 결국,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사회나 국가의 이념보다 높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위해 윤리적 보편적인 것과 충돌하고 신앙한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는 윤리적인 것의 무한한 체념을 통해 더 높은 목적 곧, 신앙을 실현하고 참다운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가 되는 것, 그것은 실존의 삼단계에서 관찰할 수 있듯,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아래에 있은 다음에 이제 보편적인 것을 돌파하고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위에 있는 개별자가 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이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뜻한다.23)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나 종 엘리에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에 대해 말로써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 '절대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에 대해 말로써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코르사르 사건'24)이후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은 더욱 심화된다.25) 즉,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단독자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적인 범주가 되도록 더욱 힘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무엇'이냐고 하는 객관적 문제'가 아니라, 단독의 개인이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관계하느냐'고 하는 주체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주체적 사고의 쟁점은 '무엇'에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고 대상의 진리, 비진리는 문제가 안 된다. 사실,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하는 '선택과 결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전체가 진리'라고 했던 헤겔에 맞서서 "주체적인 어떻게와 주체성이 진리"라고 단언한 것이다.26)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 진리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사고자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업신여긴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주체성이 문제가 될 때에는 언제나 사고자를 떠나 서 있는 진리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실존하는 사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진리에 관계하느냐고 하는데 있다. 헤겔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을 실존 사상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헤겔은 마치 모든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 가능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인간은 극히 미련한 것이어서 세계와 우주의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27) 따라서, 진리의 비판 기준은 사람이 가지는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내적 행위이므로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여부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주체성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한낱 감정28)- 말하자면, 광기 같은 것 - 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단락 짓는다. '무엇'도 함께 주어진 '어떻게'가 있다. 사실, 그 '어떻게'가 올바로 주어진다면 '무엇'도 또한 주어진다. 이는 신앙의 '어떻게'이다. 이것은 분명히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는 다시 '객관성'을 확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신앙의 어떻게'는 '무엇'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신앙의 어떻게'이며, 이 내면성을 정당하게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관계의 어떻게'로서 파악된 주체성의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 객관성을 찾는다 함은, 주체성의 정열이 그의 극한인 신앙의 정열에까지 높아졌을 때, 주체성은 동시에 내재성을 버리고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 던져 넣어야 할 어떤 것을 찾아냄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는 곧, 실존하는 신의 현실성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그에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것이고, 진정한 주체성은 여기서 객관성을 확보한다. 진정한 주체적 사고자는 그 자신의 주체성에 대하여 객관적 태도를, 자기밖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관 안에서 승화된 객관'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적으로 로마 위정자들에 의해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강력한 이단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예수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에 대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쓸데없이 거지 행색을 하며 사람들에게 대가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그의 모습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럽게 조차 비쳤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성경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삶’으로 얘기치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네들은 그가 베푼 이웃에 대한 대가 없는 무한한 희생과 사라에 감동을 받고 조금이나마 그에 부합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삶을 한없이 우러러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이미 객관화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신앙은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로써 객관적인 불확실성 곧, 부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독자의 내면적 행위이다.29) 만일 우리가 객관적으로 하느님을 잡을 수 있다면 굳이 믿음의 행위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신앙을 붙잡기 위하여 단독자로서 객관적 불확실성 속에 몸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감각 기관에 의한 실질적인 감각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으로 그와 함께 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의 단독자는 무한한 내면성의 정열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앙의 진실을 확보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단독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독자는 대중, 공중, 집단, 다수, 얼마만큼, 류, 사람의 무리, 표본인 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거짓되고 악한 세상과 충돌하면서 드러나는 순교하는 ‘진리의 증인’을 지칭하게 된다. 이리하여 단독자의 개념은 종교적인 범주와 개념을 갖기에 이른다.30) 2)단독자의 시사성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으로 인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사상가 - 일체의 사회 윤리에서 멀리 떠난 개인주의, 종교적 금욕주의를 주장한 무세계적 자기 독백적인 고독한 사상가 -로 간주되며,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심밖에는 가지지 않았던 극단적인 보수주의지, 심지어 근대적 퇴폐의 한 징후로, 개인주의적 반동적 비합리주의 철학의 선구로 낙인찍히기도 한다.31) 사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진행된 사회적,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출판된 그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의 국민 전체를 흥분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848년의 슬레스버, 홀스덴 분쟁에 얽힌 독일과의 전쟁에도 ,1849년의 절대 왕정의 붕괴와 자유 헌법 시행으로 이끌어간 국민주의적, 자유주의적 운동에도 무관심했던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 정치적 변혁을 겨냥한 운동을 비롯하여 대중, 저널리즘, 국교회 등에 노골적인 혐오와 불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모든 저작 활동의 사상 전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하는 문제에 있기에, 정치적 문제에 거리를 둔다.32) 어쩌면, 그가 영락없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왕실 옹호주의자,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한 정신적인 귀족주의자 등으로 이해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조국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가 엄청난 동란과 변혁을 겪고 있는 그 즈음에 정말로 전적으로 이러한 일체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좀 더 융통성을 갖고 이렇게 그에 대해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당시 복잡다단한 양상의 시대적 배경으로 정치 사회적 국내외 상황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 특별한 그만의 임무를 깨닫고 행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33) 그래서, 그는 사회 정치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는 주어진 사명에 따라, 사람들이 정치, 사회 문제에 열중하고 무리를 이루어 절규하는 데서 간과하기 쉬운 것 곧,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날카롭게 통찰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의한 수평화 과정이 이미 한 시대의 조류로서 이미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수평화 과정이 끝난 후 대중, 다수, 공중이 구원하는 힘, 자유를 실현하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그에 의하면 이것-신 앞에 선 '단독자'-뿐이다. 즉, 낱낱의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선별된 개인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흔들리지 않는 종교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운동 등 이러 저러한 운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것이며, 대중은 윤리적, 종교적 심판자로서는 비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 대중과 민중을 법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회, 정치적인 혁명 운동은 민중의 신화, 양의 지배라고 하는 악마의 복음인 민중의 소리와 하느님의 소리를 혼동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급무는 민중, 대중을 집단의 힘으로 결집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하는 일이며, 이 단독자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집단 사상이나 연합의 원리로 도피하여 다수를 하느님으로 삼는 집단적인 주체는 인격적 하느님과 단독자를 상실한 세속적 인간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세속적 인간주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유물론 내지 자연주의로 타락하여 하나의 끔찍한 종교로, 그리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키에르케고르의 염려대로 후일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에게 무비판적인 충성과 무조건의 복종 자기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시대의 문제가 단지 정치․사회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에 관한 내적․정신적 문제이며 따라서 정치․사회 문제는 필연적으로 종교 문제로 전환되고, 그 해결도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바꿔 생각하면, 이 단독자의 개념은 키에르케고르가 자기의 시대를 그만의 예리한 시각으로 섬세하게 이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최선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아래, 그에게 종교적인 형태로 인간의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은 단독자의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뜻했다.34) 이웃은 인간평등의 절대적이고 참된 표현이다. 만일 진실로 모든 사람이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한다면 그 때에는 완전한 인간평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정치적 평등권도 이룩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본래의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범주인 단독자의 개념이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고 정치 사회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파악, 종교적인 해결을 추구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사상의 참 면목이 있겠다. 5. 사랑의 실천 단독자는 고독하다. 단독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죄인으로서 자기 홀로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고독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임을 일깨워 준다. 참회자는 자기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고, 자기에게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타자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 하나님 앞에 내면적으로 기도한다. 모든 사람은 단독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거나 함께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무리 속에 몸을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단독자에게만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1) 이웃 사랑 단독자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한 대결 후, 다시 문을 열고 타자에게로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은밀한 기도실에서의 고독은 바깥의 '이웃'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고, 기도실에서 고독 중에 하나님을 만난 자의 다음 일은 타자 곧 이웃에게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타자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지만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 만나는 최초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는 죄를 고백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독해졌던 단독자는 곧바로 타자, 이웃과의 공동관계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의 고독은 다른 단독자 곧, 이웃과의 참된 맺어짐을 가능케 함을,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는 단독자는 이미 그 자체 속에 '이웃사랑'을 안고 있음을 뜻한다.35) 형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 자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몰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의 관계는 동시에 열리는 두 개의 문과 같다. 한쪽을 열면서 다른 쪽을 안 열 수 없고, 한 쪽을 닫으면서 다른 쪽을 안 닫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일요일만의 공동관계에서 일상의 공동생활에서의 사랑의 실천으로 옮겨져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라는 것과 함께 말이다. 그럼으로써, 불평등한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과의 참된 공동관계, 평등관계를 실현하려면 그리스도교적인 '이웃사랑'에 바탕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인격적인 사랑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2) 사랑의 지평 과연 인간이 진정하게 이웃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실현을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선택적인 편애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 완벽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사이의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이 연애와 우정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즉, 그 한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에 거스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애와 우정은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선호 또는 편애일 뿐이었다.36) 연애나 우정이 정열적으로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상대는 또 하나의 자기 또는 또 하나의 나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편애란 결국 또 하나의 자기에 의하여 점화된 자기 연소, 곧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와서 인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완벽한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실천(실현)의 본보기고 이상이다.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속박에서 한 걸음 지평을 넓힌 것으로서 연애나 우정과는 다른 사랑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일종의 의무로 이는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면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외적 세계의 변혁이 아닌 내적 영역에 있어서의 변혁이다. 곧, 밖으로 향하는 사랑을 안으로 향하도록 변혁하여 모든 것을 양심의 문제로 삼아 '정신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한 양심의 문제로 비추고 그것을 다시 인간의 문제로 바꾸는 것, 결국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사랑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의 문제이다.37) 이러한 정신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구별을 넘어서 보편성을 취하며, 모든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서 사랑한다. 이때 나와 이웃을 맺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다. 종합하여 볼 때,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하기에 합당한 완전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진지하고 진실하게 사랑하고 진지하고 진실하게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파악하고 현재 주어졌고 선택된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일 때 역시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그대가 만일 완전한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할 때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라. 그를 지금 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불완전이나 결점과 더불어 사랑하라. 비록 그가 끔찍하게 변했다 해도, 비록 그가 이미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매정하게 그대를 외면하고, 또는 그대를 버리고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그를 사랑하라. 비록 그가 그대를 배반하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라.38) 6. 나오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진정한 그리스도 인을 가르킨다. 진정한 그리스도 인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며 그 인격과 삶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오직 이 한가지를 진리로 여기며 온갖 고뇌와 시련을 극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정열로 하나의 진리를 믿고 섬기는 모험을 감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진리를 찾아 나선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그리고, 존재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모두 각자 다른 삶이지만, 알고 보면 이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진리가 있을까라고 곧잘 되뇌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 진리가 있음을 - 전제하고 믿는다.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적, 실존적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실존의 문제다. 철학자이기에, 학식자이기에가 아닌 인간으로서다.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이 살아있음은 바로 여기에 바탕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는 믿음을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신뢰는 가능하다. 어떠한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없는 모험이 되겠지만, 스스로의 믿음을 끝까지 따르는 자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유일한 실존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 인이 아니다. 그러면 수많은 비 종교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믿음이 비록 제각각이지만 충분히 주체적인 실존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믿음이건,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 믿음에 일관적안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실존을 지향하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바는 '자, 어서 참다운 실존 - 삶 - 을 위해 하느님을 믿으라'는 교화를 위함이 아니다. 그는 주체적인 진리를 부르짖으면서 이것만이 절대적인 진리와 함께하는 참다운 실존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무리 속에 숨어 정신적으로 무뎌지고 나태해진 우리를 끄집어내어 고뇌하며 실존하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 그 삶과 당당하게 겨루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 외국어대학교철학부 (http://maincc.hufs.ac.kr) 가우리블로그정보센터(GBC)
출처; 어둠에 갇힌 불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