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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고 코치로 있는 서재환은 좋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목표에 매진하고 있다. |
-코치 생활이 벌써 꽤 됐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후 지난 2001년부터 코치를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야구를 계속하려고 운동을 하다가 부상 때문에 포기했는데 처음에 우연한 기회에 성균관대에서 코치를 시작했고, 1년 후에 경기도 일산 주엽고교의 창단팀 코치로 갔다. 창단하는 팀이라 아무래도 전력도 떨어지고 이기는 게임을 못하니까 자신감도 없고 참 힘든 2년간을 보냈다. 그 후에 화순고, 속초상고, 광주송원대학, 성남서고를 거쳐서 작년 10월부터 서울고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팀을 자주 옮긴 편이다.
▶나를 원하는 팀들이 많았나보다(웃음). 그것보다는 선배님들이 참 많이 도와주셨다. 모두 추억들이 많지만 특히 속초상고는 기억에 남는다. 아무래도 기본기 등이 떨어지고 특히 겨울에 눈이 진짜 많이 와서 동계훈련을 할 수도 없었다. 엉덩이까지 눈이 쌓일 정도이니. 그래서 겨울에는 재응이 경기와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등 녹화한 것들을 매일 매일 애들에게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목표의식도 생기고 또 2005년 겨울에는 재응이가 합류해 20일 정도 훈련을 함께 하면서 정말 선수들이 몰라보게 발전을 했다. 자발적으로 왜 운동을 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참 열심히들 했다. 그 해 청룡기대회에서 강팀이던 장충고를 꺾고 8강에 오르기도 했었다.
-동생 이야기가 나왔는데 함께 미국에 갔었는데.
▶1997년 11월말에 재응이랑 함께 메츠로 갔다. 당시 IMF가 터지고 금방이어서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처음에 나는 미국 간다는 생각도 안했었다. 해태에서도 지명을 한 상태였고 당시 인하대 4학년이어서 졸업하면 국내 프로로 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진 야구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1년을 하든 2년을 하든 꼭 한번 부딪히고 또 배우고 싶었다.
-당시는 외야수였는데.
▶인하대에서는 주로 좌익수를 봤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야, 외야 전 포지션을 다해봤다. 고교 때는 내야와 투수를 봤는데 어깨를 다치면서 외야로 돌았다. 포수도 해봤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 야구를 한다면 포수나 3루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 도전은 조금 막연한 결정이 아니었는지.
▶주위에서는 만류도 많이 했다. 대학에서는 스타급은 아니더라도 공수에서 두루 잘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야구하면 편하게 할텐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하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미국 생활의 시작은 어땠나.
▶처음에 가서 두 달 가까이 영어 학원을 다니다가 메츠 캠프에 합류했다. 처음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시스템도 전혀 모르고. 그땐 메이저리그 선수를 봐도 누가 누군지 몰랐지만 떠올리면 보비 보니야, 아그바야니, 옥타비오 도텔 등이 기억이 난다. 캠프가 끝나고 루키리그에 잠깐 있다가 싱글A로 갔다. 그런데 싱글A 초반이니까 4월에 타석에 나섰다가 투수가 던진 공에 왼쪽 손등을 맞아 뼈가 금이 가고 말았다.
트레이너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계속 뛰었는데 갈수록 아프고 손이 퉁퉁 붓고 통증이 극심해졌다. 결국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으니 뼈가 금이 갔다고 했다. 그 때 재응이도 팔꿈치가 아팠다. 그래서 둘이서 두 달쯤 쉬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해 조금 뛰려는데 시즌이 끝나고 말았다. 가을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어 학원을 정말 열심히 다녔다. 당시 재응이는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다.
-서코치의 미국 생활이 길지는 않았는데.
▶그 다음 해인 1999년에는 일단 비자가 늦어져 스프링 캠프가 끝날 때쯤에야 겨우 미국으로 갔다. 당시만 해도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래 있었으니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몸도 제대로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캠프에 합류해 처음 방망이를 드는데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제대로 준비도 안하고 시즌을 맞은 셈이었다. 그 시즌에는 재응이도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나도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당시 에이전트를 맡았던 분이 중간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메츠에서는 당시 오마 미나야 부단장이 나의 거취 때문에 계속 에이전트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그것이 내겐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답답했던 미나야 단장이 나중에 우리가 플로리다 캠프 시절 묵었던 하이디 아줌마에게 연락을 할 정도였는데 이미 나에 대한 상황은 정리된 상태였다. 방출이었다.
-동생이 팔꿈치 수술을 받았을 때도 심란했을텐데.
▶물론이다. 난 싱글A에 있었고 재응이는 더블A로 갔는데 5월 하순에 팔꿈치가 아파서 캠프로 와 함께 있었다. 당시 교민이신 윤성현씨(하이디 아줌마네로 더 알려진 서재환 형제가 머물던 집) 댁에 있었는데 재응이가 갑자기 술 한 잔 하겠냐는 것이었다. 웬만해서는 내게 그런 말을 안 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맥주깡통을 건네 길래 일단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재응이가 힘들게 말을 꺼내더니 이틀 후에 수술을 받으러 간다고 했다. 처음엔 장난인줄 알았는데 진짜 그렇다는 말을 듣자 정말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내가 아팠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둘이서 밤을 새며 그날 그 집에 있는 술을 전부 마셨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버스 타고 원정을 떠났는데 정말 힘들어서 혼났다. 뭐가 그리 서글펐는지.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재응이까지 수술을 받게 되니 서글픔이 북받쳤던 것 같다.
![]() 서재환(오른쪽 끝)이 코치로 있는 서울고 야구부는 요즘 훈련 경기 등에 여념이 없다. |
-2년간 마이너 생활에서 얻은 것이라면.
▶야구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경기 때 집중력이나 플레이가 정말 대단했다. 실전에서의 정신 자세가 틀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야구에 대한 시야가 달라졌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지도자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큰 재산이 되고 있다. 후회는 절대 안한다. 한번쯤 더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야구할 생각은 안했나.
▶물론 와서 훈련을 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투수를 하다가 어깨를 다친 후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요즘처럼 재활 의학 등이 발달했으면 어쩜 지금도 야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는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아프면 좀 쉬고 더 뛰고 더 운동하고 하는 식이었다. 나도 참 미련했다. 어깨가 아프다고 진짜 더욱 더 운동을 많이 했다. 미국에 있을 때도 매일 얼음찜질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깨가 귀국해서도 너무 아팠다. 광주일고에서 훈련을 했는데 몸을 어느 정도 만들고 오랜만에 캐치볼을 하려고 했는데 어깨가 넘어가질 않았다. 너무 쉬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배팅을 해보니 어깨가 빠지는 통증이 왔다. 당시 한 프로팀에서 테스트를 받기로 했었는데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요즘도 선수들과 함께 배팅도 함께 하고 그러는데 오히려 코치를 하고나니까 어깨가 덜 아프다. 이번에 광주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도 선수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배팅 대결을 펼쳐 이기기도 했다. 원래 통뼈에 펀치력은 좀 있었다. 미국 첫 해에도 홈런 6개를 쳤었다. 아직 미련이 많이 남지만 이젠 지도자가 나의 길이다.
-야구를 하면서 아무래도 계속 동생 서재응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많이 쏟아졌는데.
▶사실 어려서는 내가 야구를 훨씬 잘 했다.(웃음) 솔직히 어릴 때는 자존심도 상하고 그랬지만 재응이는 정말 대단한 선수다. 어려서 재응이는 키가 작고 왜소해서 야구를 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지금 정도로 컸다.(178cm) 재응이는 늘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고2때 겨울에 집을 갔는데 멀리서 허벅지가 몽둥이만하고 몸이 정말 좋은 애가 걸어오는 것이다. 속으로 ‘야, 몸 좋다.’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오면서 형!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몸도 커졌지만 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고 광주일고 허세환 감독님이 재응이를 진짜 잘 지도해주셨다. 그때부터 청소년 대표로 뽑히고 재응이가 잘나가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다녀오더니 몰라보게 달라지더라. 다른 좋은 선수들의 공을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면서 정말 좋은 투수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에게 늘 재응이의 이야기를 한다.
-기분이 안 좋았을 때도 있었을텐데.
▶물론 그렇다. 미국에 갈 때도 그랬다. 마치 내가 재응이 뒷바자리를 위해서 미국에 간다는 식으로 기사가 난 것으로 보고 그 신문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야구를 하면서 어느 순간에 이것이 현실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잘 하는 사람과 밑의 그림자. 내가 혼자 착각하고 산 것이었다. ‘내가 항상 재응이보다 야구 잘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아니더라. 그때부터 재응이가 야구는 나보다 잘한다고 인정을 했다.(웃음) 그리고 재응이가 메츠에서 처음으로 풀타임으로 뛰게 됐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형제애가 참 좋아 보인다.
▶어려서는 싸움도 많이 했다. 체격도 상대도 안 되면서도 깡다구가 좋아서 툭 하면 덤볐다. 길 한가운데 누워서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안 일어난다고 해서 내가 사과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나보다 훨씬 커지더라.(웃음) 그렇지만 참 재응이에게 고맙다. 미국에 혼자 두고 왔는데 정말 힘들었을텐데 항상 전화하면 밝은 목소리로 힘 하나도 안 든다 말하며 잘 버텨주었다. 언젠가는 함께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형제가 나이를 먹을수록 닮는 것 같다.
▶이번에 조카들이 모두 귀국했는데 나를 보고 아빠인줄 착각하기도 했다.
-동생이 한국에서 잘 할 것 같은가.
▶물론 부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성격 자체가 좋기 때문에 잘 할 것 같다. 부상도 많이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낙관적인 성격 때문에도 잘 할 것 같다.
-미국 도전을 일찍 접은 것은 좀 아쉬움이 있다.
▶재응이는 둘째 종우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다. 그리고 나이를 생각한 것 같다. 이왕이면 뛰어난 모습으로 홈 팀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본인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재응이보다 더 유명한 지도자가 돼야 하지 않겠나(웃음). ‘저 사람에게 배우면 야구도 잘 할 수 있고 모든 면에서 인간적으로도 좋아질 수 있구나.’ 그런 말을 듣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성남서고부터 현재 서울고까지 홍상욱 감독님 밑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다. 그 분의 포용력을 배우고 있다. 물론 화를 내실 때는 내시지만 어린 선수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격을 존중해 주시는 것을 보면 그런 점들을 많이 배운다. 난 완벽한 것을 좋아해서 운동장을 처음 나올 때의 정신자세부터,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하게 하는 것부터, 기본적인 예의범절 등 모든 것에 완벽하기를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편이다. 앞으로 경험도 쌓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유능한 코치님들도 만나고 배울 것들이 너무 많다. 고등학교 야구가 쉽지 않지만 꼭 좋은 지도자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