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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았나?
1. 문제의 제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침례(baptism)를 죄인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십자가의 예표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면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마 3:16)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선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을 얻게 되어 있는데 요르단 강의 침례는 이것을 상징한다.(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홍해를 건넌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침례를 받은 것으로 표현한다.(고전 10:2)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고’(고전 10:2)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의 침례만을 말하곤 하는데 사실 요르단 강에서도 홍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에서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백성 앞에서 언약 궤를 메니라. (요르단이 수확할 때에 항상 그것의 모든 둑에서 흘러넘치므로) 궤를 멘 자들이 요르단에 이르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서 잠기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물들이 일어서고 솟아올라 사르단 옆의 도시 아담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무더기 위에 쌓이며 평야의 바다 곧 염해로 내려가던 물들은 모자라서 끊어지매 백성이 똑바로 여리고를 마주보며 건넜더라. 주의 언약 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르단 한가운데서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마른 땅을 건너더니 마침내 온 백성이 깨끗하게 요르단을 건너니라.’(수 3:14-17)
그러므로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2번의 침례를 받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받는 것을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순점이 발견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의 침례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했는데도 불구하고 요르단 강에서도 침례를 받아야 되는가 하는 의문이다.
오늘은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알아보자.
2. 하나님의 창조목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 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이것을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생명이 같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고 자신의 씨를 이식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표다.
3.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창조될 때 영생을 가졌지만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 3:22)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우리의 육체의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이고 분리되면 사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해서 죽는다는 말은 육체가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의미다. 만일 아담이 범죄함으로 육체의 죽음이 왔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in the day)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 3:17) 라고 범죄하는 바로 ‘그날 안에(in the day)죽는다’고 하였는데 아담은 930살까지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연결됨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만들어지거나, 혹은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요 1:12-13)
천사는 비록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에 1회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운명이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사람 농사를 짓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열매는 본성에 속한 사람의 몸이 영에 속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성경은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던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제3자, 곧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4.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가 없더라도 한 번 침례(죽음)을 통해 거듭나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사건은 항상 두 번씩 일어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두 가지 위치가 있다.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 때 유프라테스 강을 두 번 건넜고, 이스라엘 민족도 홍해와 요르단강을 건넜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을 쳐서 생수를 먹는 사건도 두 번 있었다,(출 17:6, 민 20:11)
레위기의 율법의 제사의식에서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 제물도 희생물과 헌물로 두 종류였는데 희생물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제물로서 공통점은 둘 다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피를 제단주위에 뿌려 죄를 용서받았고, 헌물은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 번제단에서 헌물을 태웠는데 번제단의 불은 소멸시키는 불이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음식으로 드신다는 의미다. 희생물은 말 그대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리적 위치고, 헌물은 영생을 얻기 위한 유기적 위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용서가 거듭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어겨 자동차 사고로 다쳤다고 하자. 교통법규를 어긴 것은 법리적 문제고, 다친 것은 유기적 문제다. 사고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 되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법리적 문제와, 선악과를 먹은 유기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소위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의 시편이라고 하는 시편 22편에서도 전반부 1절-24절까지는 희생물로서의 메시아를, 25절이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헌물로 드려지는 메시아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러한 두 가지 위치로 드려졌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께서 여기는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여’ 라고 하였는데 이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위치다. 창조주 앞에 있는 피조물은 한 없이 작고 창조주는 무서운 심판자가 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심판자이신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희생물의 위치다.
그리고 누가복음메 보면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눅 23:46) 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의미는 심판자와 죄인의 관계가 아니라 다시 친근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돌아 온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근원적으로 정한 사람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영이 된다는 말은 번제헌물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목표인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 죽을 운명(mortality)의 몸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의 몸으로 바뀐다고 하면서 이것을 다시 사망의 죽을 몸이 승리이신 하나님께 삼켜졌도다 라고 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 15:54)
그리고 다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본성에 속한 죽을 운명의 몸으로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의 최종목표에 도달하려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 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구약의 제사의식에서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헌물을 번제단에서 태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음식을 드신다는 의미다. 이것을 바울은 ‘죽을 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진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침례도 죽음을 상징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 왜 하필 십자가를 통해서만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시는가? 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다.(히 12:29) 그러므로 하나님은 용광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죄가 있든 없든 타서 죽지 않을 자 없다. 여기서 번제단과 십자가의 개념이 나왔고, 침례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우리는 내가 죄 없었다면 하나님을 만나 죽지 않았을 텐데 라는 낮은 관념을 버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자신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이식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그분의 목표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요 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래서 사람은 본래부터 죄가 없다 하더라도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우리가 소위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이 영에 속한 몸이다. 영에 속한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믿지 않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고 참외 씨를 심으면 참외가 나듯이 우리 사람도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그 씨의 열매, 곧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생명이신 예수님의 씨를 심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불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좋은 쇠든 나쁜 쇠는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새로운 철로 재창조되듯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두 가지 위치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 위치와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대로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유기적 위치가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면서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는다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직 죄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한번 정해진 것이었다. 본성에 속한 몸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가 않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에 속한 몸에서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아 영에 속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류에게 여자의 씨를 주시겠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셨고, 이 씨는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셨는데 이 씨가 바로 영생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씨란 영이라는 의미이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육체로 그대로 계시면 우리에게 씨(영)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서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전 15:20) 열매와 씨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을 통해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는 말은 씨가 되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예수님이 요한복은 12장 24절에서 하신 말씀도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곧 영생의 씨가 되기 위해 죽는다는 말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표를 달성하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애물이 제거됐다고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물이 제거되면 목표를 확보하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5. 결 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본성에 속한 몸이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아 한번은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도록 정해져 있다.
그것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어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이 율법을 통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낚시꾼이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를 낚시 바늘 앞으로 모이게 하기 위해 떡밥을 뿌린다. 떡밥은 고기를 잡을 수 없지만 낚시 바늘 앞으로 인도한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다. 율법은 바로 사람 낚는 어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떡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면 일부러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나? 물론 그렇지 않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떻게 될지 미리 아시기 때문에 대비책을 마련하신 것이다.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인류를 율법을 통해 확실하게 죄인으로 정죄하셨지만 이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원자를 찾게 했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계획을 더 효과적으로 성취하는데 활용하신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 33)
아무튼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죽을 몸에서 죽지 않을 몸으로 바뀌도록 운명 지어졌다.(고후 5:4)
이 과정을 구약에서는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신약에서는 하나님께 삼켜진다, 또는 성령침례라고 말한다.
‘그때에 내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였노라.’(행 11:16)
침례라는 말 그대로 잠긴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삼켜지는 것’은 곧 성령이신 하나님께 잠기는 것임으로 ‘성령침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 침례를 받는 것도 단순히 죄 사함만을 의미하는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내가 삼켜진다. 또는 잠긴다. 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께 귀중한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그래서 예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향해 ‘죽지 않고 잔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분을 비웃더라.‘(마 9:24)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민족도 죄와 관계없이 유기적인 영생을 얻기 위해 요르단 강의 침례를 받았듯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마 3:15)
구약시대에도 이방인이었던 시리아의 군대 대장 나아만도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을 치유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그가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르단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그의 살이 다시 나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고 그가 정결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요르단의 의미에는영구한, 영생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영생이신 하나님께 잠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는 것은 영생이신 하나님께 잠겨지는 성령침례를 상징하는 것이다.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영생이신 하나님께 잠겨져야 한다. 우리에게 침례(죽음)은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위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이 운명이 싫어 선악과를 먹는 날에 육체가 죽지 않는다고 말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지금도 종교와 과학의 공동목표는 육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에 있다. 그리고 특히 여러 이단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단 교주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실 진짜 사망은 하나님과 완전 분리되는 둘째 사망이다.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계 20:14)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은 첫재 사망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체의 사망은 첫째 사망인데 이것은 사실 원래부터 정해진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의 육체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밤에 자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을 예표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을 예표한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이 없는 새예루살렘에 가면 밤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밤이 없을 터이므로 낮에 그 도시의 문들을 결코 닫지 아니하리라.'(계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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