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가. 불경죄를 저지른 작가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젊은 시절 한대 교회 문턱에서 어른거리기도 했지만 그저 귀동냥으로 예수의 일대기 정도만 전해들은 정도라 교회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불경스럽다 할 정도다.
그렇게 전해들은 내용들조차 나는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십자가를 멀리 했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도 그리스도의 삶이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삶이 파란만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 서문에서 카잔차키스는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투쟁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크레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혁명의 열기에 휩쓸려고, 커서는 철학에 심취했고 불교에 심취했으며 레닌에 심취했고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귀착한 특이한 이력이 근저에 깔려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면에서 살피고 싶었다. 따라서 카잔차키스는,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
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순수하게 소설로 읽을 때 그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도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고통에 시달렸고, 그때부터 고통은 신성하다고 여겨졌으며,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실패했다.”
그러함에도 자칫 읽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으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경계하고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어떻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 교황청은 그의 진의가 어떻든 예수에 대해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것에 격분한다. 그들이 그것이 소설이든 허구이든 신성한 분을 건드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죄악이라고 여긴다.
나. 다른 시각으로 세상보기
유다는 선이 굵고 강직하며 예수에게 나름대로 바른 말을 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예수로 하여금 자기 삶을 깨닫고 되돌아보게 하는 인물 역시 유다이다. 내가 들어본 유다는 그저 열 두 제자 중 한 명이지만 나중에 예수가 잡혀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어떻든 베드로와 유다의 인물 비중이 성경과 소설이 서로 뒤바뀐 듯해서 흥미롭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예수와 마태오의 대화 중 하나이다.
마태오는 예수의 행적이나 말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가 기록한 것은 어느 날 예수가 보고 싶다고 했다. 마태오는 기뻐하며 공책을 내밀었다. 이때 카잔차키스는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예수는 그가 적은 것을 보고 ‘거짓말’이라고 부정했다.
자기도 조상을 잘 모르며, 자기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자렛에서 태어났으며 동방박사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누가 팔을 걷어 부치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태오는 천사가 가르쳐준 대로 자기는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순응한다. 종교적 절묘함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낳게 한 결정적인 부분은 예수의 탄생이다.
자라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세상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영성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예수는 “보잘 것 없는 내가 결코 신이 보내신 메시아일 리가 없다”며 계시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예수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번뇌한다.
결국 예수는 사막으로 나아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말씀’을 전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된다. 대략적으로 성경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카잔차키스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한다.
예수는 군중 선동죄에 의해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고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메고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게 된다. 그 이전에 이미 그는 이를 직감하고 유다에게 부활을 이야기했었다.
다. 무한으로 치닫는 작가의 상상력
그는 못 박히자 피를 흘리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천사가 나타나 예수에게 “신께서 당신(예수)을 불쌍히 여겨 십자가 처형을 면해주셨고, 이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허락하셨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하며, 그를 인간 세상으로 이끌어 간다.
예수는 그가 천사라는 자기소개에 별 저항 없이 따라 간다. 예수와 천사는 울부짖는 유대인 사이로 빠져나왔다. 수호천사는 ’당신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며,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초원에서 살을 섞고 하나가 된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찾으러 나선 사람들에게 잡혀 돌에 맞아죽고 만다. 수호천사는 다시 예수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고 두 번째 선물로 예수를 또 다른 마리아에게로 데려간다. 그녀는 마테오와 쌍둥이였는데 죽은 라자로의 동생이다.
예수는 그때부터 두 자매와 함께 살게 되었다. 두 자매는 부지런히 아이들을 낳았으며, 그 바람에 집 안에는 아이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모두 행복해 했다. 이러한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사울이 찾아왔다. 그는 지금은 바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즈음 예루살렘에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했으나 다시 부활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소문이 돈다. 사도 바울이 거짓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바울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통 받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선 예수의 거짓 죽음과 거짓 부활이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두 사람은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예수는 바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가고 예수는 다시 은둔자로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예수의 머리는 하얗고 수염은 백발이 되었다. 마당에서는 아이들과 손자들이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의 집을 방문했다. 옛날의 제자들이었다. 예수는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들 모두 백발이었다.
각자가 자신들이 그 동안 걸어온 길을 이야기했지만 유다는 자신의 이야기보다 예수에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데 달아났으므로 그를 배반자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수호천사를 악마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 동안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악마의 유혹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최후의 유혹’인 이유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집을 나와 사라졌다. 예수는 뒤늦게 이를 깨닫고 그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두 아내가 그를 붙들었다. 그 순간 흑인 소년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예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도, 아이들도, 마을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겁쟁이, 도망자, 배반자가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최후까지 명예롭게 그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켰으며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그가 ‘하느님!’ 하고 소리치며 기절한 아주 짧은 한 순간에 ‘유혹’이 그를 사로잡아 못된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다. 모두가 악마가 보낸 환상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꿋꿋하게 살아서 바다와 뭍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