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나는 찜질방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노인의 수북한 서류더미, 식당 아주머니의 한숨 소리를 머리에 담고서 나는 탈의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면도 하는 걸 깜박했지만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전에는 나만의 일 인 시위라고 해야 할까. 나는 면도을 일부러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데 소비가 많을 수록 그것은 위선적 문화를 키우는 것이라는 개똥 철학 탓이었다.
찜질방을 나오자 먼산 설경의 운치 앞에 찌든 맘의 기지개를 편다.
곧은 은행나무 가지와 구부러진 버들나무,팔 벌린 플라타나스, 잡목 덤불들..
잎을 모두 떨궈버린 겨울나무들은 눈 그치면 흰색 테두리가 나무의 골격과 드러내며 빛을 갈망했던 그들의 장엄한 서사를 말해준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가는 길에 어느 아주머니 하얀 복실이를 애지 중지 안고 산보 나서는 걸음이 보인다
허기진 내면을 애완견에 온기로 데울 기대도 너무 하지 말라
달팽이가 상추를 먹는 것도 경이로운데 고양이 기르는 분은 오죽할 것이며 강아지 주인은 닐러 무삼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교란시키는 방해 전파로 된다는 걸 말한다면 너무 심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
옷을 챙겨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무실에 들어서면 내 자리의 컴퓨터를 켜는 순간부터 짜증스럽다. 거래처의 대금 회수는 안되고 업무 시설은 열악해 윈도우 XP가 대중화된 시절에서 윈도우 98을 써야하는 실정이었다. 조직의 따분한 하루 일과에 점심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4분기 영업 실적표를 무슨 숫자로 메워야 하나 몇시간 씨름했는가 싶었는데
"김 과장 점심 먹으러 안 가?"
팀장이 팀원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내려갈 채비를 하면서 체면 치례 말을 건넨다.
"저는 잠 좀 자겠습니다."
다들 식당으로 나서고 빈 사무실.
나는 물통에 미숫가루 3숟가락과 커피믹스 한 봉을 풀어 물에 흔들어 마시며 중국어 교재를 소리내어 읽었다.
점심시간이 10분 쯤 남았을떄 사무실 근처 잿빛 공터 벤치에 나가 앉았다.
6천원 짜리 점심 먹고 4천원 짜리 커피 물며 나오는 직원들을 쳐다는데 내 발치에 떠밀려 온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가을 바람이 낙엽을 쓸면서 묻어 온 찟어진 낙엽처럼 은빛 날개 2개의 고추잠자리의 주검
한때 허공을 자욱하던 꽃가루처럼 자유롭던 녀석들이
다가운 추위에 기운을 소진하고 땅위에 스러졌다.
눈비에 젖으며 땅으로 녹아들 그 주검에게 나는 물었다.
새봄의 따스함에 세상이 기지개를 필때면 흙한줌이 되어있을 너는 무엇으로 환생하고 싶으냐?
민들레의 홀씨가 되어 못가본 세상을 유람하고 싶으냐
낙랑장송의 솔잎 하나되어 매미들의 합창과 더불어 살고프냐
먼지바람에 나부끼며 호수가 청명한 곳 창가에 어리고 싶은게냐
리비아에서 귀국후 노가다 업무로 소일하는 내 처지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새끼 발가락 틈새에 또 가려워져 온다.
달고 살자 무좀균을
안고 살자 아픈 추억을
상처의 분비물일랑 금과옥엽 진국의 글귀로 마당의 돌멩이에 새길 지어다.
"이삿짐 보관 컨테이너 건 어떻게 됐나? 이번달 내에도 대금 회수 안되면 털고 마무리 하라고 했잖는가?"
소장의 꾸지람이었다.
저녁 8시였지만 의왕의 물류기지로 귀사하여 창고 업무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6개월째 찾아 가지 못하는 창고 한켠의 사무실 이삿짐이 우리 영업소엔 큰 골치거리였다.
부실 영업채권 보고서를 메울 일이 난감했다.
보관비용을 한푼 못 받고 10개월이나 지연된 20피트 이삿짐 보관용 컨테이너를 오늘은 결판을 내야 한단다.
세상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고들 말한다.나는 부실채권을 만드는 업자들이 미웠다.
소장은 보관하던 이삿짐을 빼서 처분하라고 했다.
물류 창고 한켠에서 알바생들이 작업해 놓은 컨테이너 내용물들을 두리번 거려 보았다.
가구들 , 책들
자잘한 다이어리들은 헌책방에도 폐지수집상에도 버리기에 자잘한 것들이었다.
그 손때 묻은 종이의 이력이 창고 불빛에 반사되 야롯한 광채를 내었던 탓일까?
내 손은 그 중 커피색 다이어리에 뻗어져 종이들을 들척이고 있었다.
순간 눈에 불이 켜지는 대목
대형 사채업자들 계보가 그려진 다이어리 페이지가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이삿짐의 주인에게 최후 통첩성 문자를 보냈다.
10분후 전화가 걸려왔다.
장 사장이라는 인물은 1주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저도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뭔가 명분이 있어야죠.10달동안 약속을 못 지켜 오신 분을 새삼 어떻게 또 믿으라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을 믿어 달라고 했다. 명동 외환은행 부근에 사무실을 내고 어음 할인업을 해오며 사채업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 오던 차에 일시적인 자금 경색이라고 했다.
한때 벤쳐 기업 경영자이기도 했던 그는 요즘은 해외 부동산 시행업을 한다고 자신의 이력을 자랑했다.
벤처열풍이 일던 시절 사채업자들 사이에선 각종 정부지원 자금이 유통되는 벤처기업이 자금을 세탁하는 창구로 각광받았다. 이 때문에 사채업자들이 벤처기업가 밀집해 있는 강남에 회사를 차릴 때 이를 알선해 주면서 이익을 보았던 인물이다.
전화를 끊고 일단 퇴근을 하기로 했다.
군포시로 나오는 퇴근길 버스역시나 오늘도 앉을 자리는 없다. 빼곡한 사람들 틈새에서 한 몸 중심을 가누느라 창가 벽에 손을 대고 체중을 의지해야 했다.
창밖으로 어두워져 가는 거리에 사람들의 바쁜 걸음들이 눈에 쓸쓸히 비친다.
몸은 쳐지고 마음은 찌뿌둥한 흐린날의 퇴근길.
유유자적하면서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추운 거리
오늘은 고시원으로 갈까나 찜질방으로 갈까나망설이다가 찜질방으로 향했다.
입실을 하고 들어선 탈의실 TV에서 나오는 뉴스
평소 내가 존경하던 촌철살인의 방송인이 여당에 입당한다는 보도였다.
보궐 선거에서 당선이 돼 만세 포즈를 취할 그 표정을 그려본다.
그 방송인의 여당 입당식에 또 낯익은 방송인 출신 여성 의원이 나란히 서서 환호하고 있다.
수년전 현직 대통령 탄핵에 앞장 섰던 인물
2004년 대통령 탄핵안을 상정하던 탈당 의원들 중에 추 의원이 있었고 얼마후 그녀는
방송 아나운서 출신 전 모 의원의 독설 무대에도 그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19세기 조선의 격동도 그러했었지
정조의 개혁정치 성과를 깡그리 부수고 남인계 실무진을 죄다 숙청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1800년도 보수회귀 정치가 빚어낸 불운의 19세기가 떠올랐다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의리의 주인공들
좋은 자리에서 품위를 강변하는 그들의 미소와 웃음소리가 먼 기억을 일깨운다
탕안에 몸을 불리면서 허공에 퍼지는 뜨거운 수증기 구름으로 리비아 현장 그 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IMF 직전 그분은 수출 역군으로 산업 훈장을 받았다."열사의 땅에서 함께 고생해온 임직원들과 함께 이 영예를 나누겠습니다."
카메라 후레쉬가 작열하자 그 분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그걸 보던 나는 씁쓸했다.
그 영예를 위해 무고하게 치뤄진 희생과 공연한 수고들
그해 사막의 초가을은 이상기후였다.
예년보다 일찍 다가온 우기.
공사 현장으로 실어 날라야할 중량물 콘크리트 구조물을 실은 우리 부서 차량들은 1주일째 운항을 못하고 있었다.
연이은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차들이 늪에 빠졌다.
하지만 그 분은 본부에서 무전 지시로 언성을 높였다. 운송 부서가 늑장을 부려 공기가 늦어지고 있다는 그분의 보고는 최고 책임자의 불호령이 되어 우리 현장에 쏟아졌다. 뚜껑이 열린 호랑이 소장은 결국 운행을 지시했다.
만약 내가 스무살 젊어진다면 대학을 갈 것을..
블도저 기사는 투덜거리며 우비를 쓰고 빗속을 헤치며 중량물을 실은 우리 차량이 움직일 길을터 갔다.
모두가 운행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본부의 압력은 거셌다.
600킬로 떨어진 구조물 매설지는 운송된 제품의 재고가 없어 며칠 째 놀고 있다며 우리 부서에 대해 공기 지연 탓을 돌리고 있었다.
공장에서 출하를 늦게 해온 선행 공정의 과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일찍 닥쳐온 현지의 우기
그 배경을 알면서도 책임을 일방 전가하던 분
그런 분의 추진력으로 맞춰진 공기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 때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려 놓는다. 돌아다 보니 아침에 본 그 노인이었다.
" 오늘 변호사랑 얘기가 잘 안되서 며칠 더 머물다가 집으로 가야 할 사정이라네.."
노인은 저녁을 먹었냐고 내게 물어 보았다.
첫댓글 예잘 봤습니다
빚지고 품위 유지하는 이들. 빚더미를 사다리로 삼아 허황된 꿈을 지탱하는 이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까지 힘빠지게하죠.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시는 분들이 당당함이 귀한 요즘입니다.
빚을 내어 결혼식을 치르는 분들.
카드빚을 내어 강연장에서 입을 옷을 준비하는 분.
품격어린 매너와 외모를 유지하는 데 정력을 소모하면 삶의 부채가 늘어나 어느 고난의 순간 파산를 맞이하죠. 이를 모면하려는 몸부림은 약물에 대한 의존으로 이어지더군요.
마약은 정신 질환에 대한 강력한 진통제와 같은 것.세계에 대한 수용력을 길러주는 교육과 지적인 투쟁 시기가 없이 신데렐라로 살아온 사람이 딱해 보입니다.
노인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분의 억울함이 좋은 결과로 해결되었으면..하고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