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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서(判書) 윤공(尹公) 계(堦) 신도비명 병서.
근세의 이름난 공경(公卿)들을 열거할 적에 기량(器量)ㆍ재식(才識)ㆍ문예(文藝)가 겸비한 이로는 매양 하곡(霞谷) 윤(尹) 공을 으뜸으로 치는데, 대체로 한때의 사론(士論)이 그러한 것이다. 공의 휘는 계(堦), 자는 태승(泰升)이다. 그의 선대는 해평(海平)에서 시작되었는데, 사공(司空) 군정(君正)으로부터 5세 동안 고려에서 크게 드러나 동방의 갑을족(甲乙族)이 되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고관(高官)이 서로 이어졌는바, 호가 오음(梧陰)인 문정공(文靖公) 휘 두수(斗壽)에 이르러서는 선조(宣祖)를 보상(輔相) 하여 큰 훈업(勳業)이 있었는데, 이분이 공에게 증조가 된다. 조 휘(暉)는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 휘 면지(勉之)는 첨정으로 찬성에 추증되었다. 비(妣)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참판 섬(暹,1562~1620)의 딸이다.
공은 천계(天啓) 임술년[壬戌年,1622년(광해 14)] 6월 27일에 태어났는데, 생김새가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의젓이 이미 대인의 기상이 있었다. 13세 때에는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마침내 나았다. 15세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을 만났다.
이때 찬성공은 영산 현감(靈山縣監)으로 있다가 고을의 군졸들을 동원하여 북으로 올라가고 인심은 놀라 이산하는 터였는데, 공이 홀로 현아(縣衙)에 머무르면서 백성들을 효유하여 위안시키고 공사(公私)의 비용을 일일이 적어두고서 부친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니, 온 경내가 칭찬하고 감복하였다.
무인년(戊寅年,1638,인조 16)에는 판서공이 심양(瀋陽)에 갔다가 포로로 잡혀온 여자 아이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전대에 들어 있던 돈을 주고 그 아이를 빼내 돌아왔는데, 공이 그 아이의 행동거지가 천인(賤人) 같지 않음을 보고 사부 집 아이라 생각하고서, 모부인에게 고하여 그를 비복들과 섞여 있게 하지 말도록 하고는 그 아이로 하여금 손[客]이 올 때마다 엿보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아이가 울면서 말하기를 “저기 온 사람이 바로 나의 어버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 손을 맞아와 조용히 앉아서 그 까닭을 갖추 고하니, 손이 즉시 만나 보기를 원하자 공이 그리 못하게 하고 날짜를 기약하여 은밀히 보내 주었다.
그러자 판서공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능히 덕을 세웠으니 반드시 음덕의 보답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그 여자는 부귀한 집으로 들어가 귀현하게 되었는데, 비록 한집안사람이라도 그가 누구인 줄을 몰랐다.
신사년(辛巳年,1641,인조 19)에 초시에 합격하고 또 성균관의 제술(製述)에 장원하였는데, 시관(試官)이 공의 백록동부(白鹿洞賦)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은 속유(俗儒)의 솜씨로 된 것이 아니다.” 하여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경인년[庚寅年,1650(효종 1)]에는 삼장(三場)을 관통하여 사마시에 올랐는데, 그후로 과거에는 누차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갑오년에는 사옹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을미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현종(顯宗) 신축년(辛丑年,1661,현종 2)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제3위로 뽑히었는데, 이때 김공 석주(金公,錫胄)는 제4위였는바, 상이 모두 사제(賜第)하도록 명하자 대신이 김공 석주를 가리켜 상의 지친(至親)이 들어 있어 혐의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상이 장원한 사람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방시키니,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이어 공에게 사산감역(四山監役)이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인년(壬寅年,1662,현종 3)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의 을과로 급제하고 즉시 승정원 주서직을 섭행하고 승문원에 예속되었는데, 이때 균전사(均田使)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공을 불러 균전랑으로 삼았다.
갑진년(甲辰年,1664,현종 5)에는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가 훈련도감을 주관하면서 또 공을 낭청(郞廳)으로 임명하고 크고 작은 규획을 일체 공의 말에 따라서 하였는데, 이윽고 후궁(後宮)에 소속된 사람을 형장(刑杖)한 일로 의금부에 갇히어 삭직되었다가, 그후 얼마 안 되어 대신의 천거로 인해 곧바로 6품에 올랐다.
을사년(乙巳年,1665(현종 6)에는 전적ㆍ감찰ㆍ예조 좌랑을 제수 받았다. 이해 겨울에 찬성공의 상을 당하였다. 앞서 찬성공이 한 달 이상 병을 앓고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이 급히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리니, 이로 인해 수일 동안 더 연명(延命)되었다.
무신년(戊申年,1668,현종 9)에는 직강으로서 나가 황해도 도사를 겸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에게 균전(均田)의 임무를 겸대시킨 것은 대체로 공을 재간이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공은 높고 낮은 토지를 두루 다니면서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을 살피어 상하의 등급을 매겨서 오로지 백성들에게 유익하도록 힘썼으므로, 서도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하였다.
기유년[己酉年,1669(현종 10)]에는 사서가 되었고, 경술년에는 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어 호서(湖西)에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인재를 얻었다는 칭찬이 있었다. 돌아와서는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신해년에는 문학ㆍ정언을 거쳐 두 번 지평이 되고 세 번 장령이 되었다.
이때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상이 미곡(米穀)을 맡은 아문(衙門)에 명하여 미곡의 값을 내려 발매(發賣)해서 도민(都民)들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주관한 자가 대부분 이것을 인연하여 재리를 탐하였고, 특히 허적(許積)은 태복시 제조로서 범법한 것이 더욱 많았으므로, 공이 지평으로서 그 사실을 단단히 구명(究明)할 것을 계청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이 일을 조사해서 처리하도록 명하였는데,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사체에 부당하다는 이유로 그 명을 정지시키기를 청하였다.그러자 공이 탑전에서 그를 논핵하기를 “서필원이 겸대한 아문도 대간의 계(啓) 가운데 들어 있는데, 감히 혐의를 무릅쓰고 그들을 비호하고 있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자못 서필원만 비호하므로, 공이 쟁론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중신들만 비호하고 대관들을 꺾어 버리시는 것은 언로(言路)를 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내가 누구에게 사사로이 과실을 비호해 주었다고 말을 이렇게 하는가.” 하니, 공이 즉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미 지난 일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지금 신이 논한 일이 대신과 중신에 관계되기 때문에 이렇듯 엄한 분부가 있는 것이니, 이것이 사사로이 비호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신으로 하여금 미곡을 가장 많이 받은 자를 지적하여 진술하게 한다면 조사를 하지 않고도 신이 하나하나 셀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의 노염은 퍽 풀리었으나 끝내 결정한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공이 인피하였는데, 다른 대관이 처치하여 공을 체직하기를 청하므로, 상이 특별히 처치한 대관만 축출하여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때 경기 관찰사 오정위(吳挺緯)가 자기 형 정일(挺一)을 경릉(敬陵 조선 덕종(德宗)의 능호) 근처의 금지(禁地)에 장사 지냈는데, 오정위는 인조의 손자인 복창군 정(福昌君楨), 복선군 남(福善君枏)의 외삼촌으로서 기세가 막강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으나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자, 공이 그 조사관을 잡아다 치죄하기를 청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고 여겼다.
공이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재이로 인하여, 귀척이 횡행하고 환관이 교만한 것과 재상은 중히 여기고 대간은 가벼이 여기는 것과 군제(軍制)가 타당성을 잃어 낭비가 많은 것과 궁장(宮庄)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극력 말하였다.
또 인하여 임금이 몸소 검약하여 사치의 풍속을 바로잡고, 유일(遺逸)을 초빙하여 세자를 보양하며, 각 관서의 재화(財貨)는《주례(周禮)》의사회(司會)에 의거해서 장부에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관향사(管餉使)는 그곳 방백(方伯)들이 각각 관장하며, 황주(黃州)는 병사(兵使)가 목사를 겸하는 것을 폐지하고, 삼남(三南)에는 불필요한 영장(營將)들을 혁파할 것 등을 청하였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임금이 한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고 측근에 있는 신하들을 멀리하여, 날로 경연(經筵)을 열고 조용히 도를 강론해서 나라 다스리는 요점으로 삼으라는 데에 귀착시켰는데, 장장 만여 언이나 되는 말들이 당시의 병폐를 절실히 지적하였으므로, 상이 온후한 말로 비답하고 이를 비국(備局)에 내려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때 역적 허적(許積)이 정(楨)ㆍ남(枏)과 결탁하여 요직에 앉아 권세를 부리면서, 공의 말이 자기들을 비난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정 등과 함께 소장을 올려 공을 서로 공격하니, 공도 상소하여 인피하고 면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임자년[壬子年,1672(현종 13)]에는 사신 일행으로 장차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가 이윽고 종부시 정으로서 제주 목사에 승진되었다. 이때 제주도에 기근이 거듭 들어 진구 정책을 잘 수행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상으로부터 엄격히 간택하라는 전교가 있자, 이조에서 공을 천거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이 한창 허적의 간사하고 횡포한 정상을 극력 논박하려 했기 때문에 조의(朝議)가 조정이 시끄러울 것을 염려하여, 적임자를 간택한다고 칭탁했을 뿐 실상은 공을 소외시킨 것이다. 공은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변방 무어(撫禦)하는 방도를 조목조목 진술하고, 곡식 수천 곡(斛), 베 수천 필을 청해 얻어가지고 가서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진구하되 반드시 노약자를 우선으로 하였다.
또 장정(壯丁)들을 뽑아 곡물과 양식을 주어 빈 땅을 개간하여 생업으로 삼게 하였고, 유생들에게 과시(課試)를 실시하였으며, 장졸(將卒)들을 훈련시켜서 성적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여 권징(勸懲)하는 바가 있게 하였고, 공장(工匠)들의 토목공사를 일체 혁파하니, 부임한 지 반년 동안에 치화(治化)가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마침 포악한 무리들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므로 공이 그중 괴수 8인을 조사 체포하여 경상(境上)에 효시(梟示)하고 그 사유를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제멋대로 처형했다는 이유로 공을 체포하라는 명이 내렸다. 그러자 제주도민들이 분주하며 호곡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바다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큰 비바람을 만나 노[楫]가 꺾이고 배[舟]가 갈라지곤 하여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넘어지고 엎어지고 하므로, 공은 제문을 지어 신(神)에게 제를 올렸는데, 정신과 기색이 편안하고 조용하였다. 서울에 당도하여서는 형리(刑吏)로부터 문초를 받고 끝내 삭직되기에 이르렀다.
갑인년(甲寅年,1674,현종 15)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연해(沿海)의 열읍이 자주 경비를 허술하게 하므로, 공이 일심으로 그들을 진무(鎭撫)하되, 사전의 대비를 더욱 강구하여 양식을 많이 저축하고 무기를 수선하며, 영액(嶺阨) 등 요해처에 진보(鎭堡)를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며, 한창 백성들의 고통을 잘 다스려 크게 작위(作爲)함이 있게 되었는데, 마침 청 나라 사신이 책봉(冊封)과 조제(弔祭)의 일로 이르렀으니, 이때가 금상(今上) 을묘년 1월이었다.
이에 앞서 역적 남(枏)이 연경에 사신 갔다 돌아와서 ‘신하가 강하다.[臣強]’는 말을 선조(先朝)에 주달하였는데, 그 뜻은 실상 구신(舊臣)들에게 화를 밀어붙이고 왕국을 교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남의 외종형 오시수(吳始壽)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 나라 칙서에는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선왕(先王)께서 강신(強臣)에게 압제받은 것을 청 나라 황제가 애처롭게 여겨 두 번이나 치제(致祭)를 했다.” 하고, 인하여 거짓말로 “통역관 장효례(張孝禮)가 윤계를 만났을 때에도 이런 말이 있었다.”고 주달하였다.
그러자 공이 재차 소장을 올려 오시수가 전혀 없는 말을 날조한 정상을 극력 논핵하여 말하기를 “전후로 봉사신(奉使臣)과 접반신(接伴臣)이 아무도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다만 남(枏)이 이 말을 앞서 제창했고 오시수가 뒤에 화답하여 온 나라가 의혹하게 되었으니, 오시수가 딴 사람을 끌어들여 증거를 댄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통절하였으므로, 허적ㆍ윤휴가 이를 걱정하여 형리의 국문을 요청하기에 이름으로써 일이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화락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천도는 밝은 것이니, 내 말이 장차 절로 밝혀질 것이다.” 하고, 공사(供辭)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그러자 허적이 마지못하여 죄인을 너그러이 처결한다고 칭탁하고 삭직만을 청했다가, 다시 윤휴의 말을 따라 경성(鏡城)에 유배시켰다. 7월에 홍주(洪州)로 양이되었다가, 병진년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경신년(庚申年,1680,숙종 6)에 이르러 연경에 간 사신이 조명(朝命)을 인하여 ‘신하가 강하다.’는 말의 근거를 장효례(張孝禮)에게 물으니, 장효례가 ‘본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에 오시수가 처형되었다.
무오년(戊午年,1678,숙종 4)에는 당인(黨人)이 공을 진주 목사로 내보냈다. 진주는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었으나, 공은 송사의 판결을 마치 물 흐르듯이 척척 해냈고, 수년에 걸친 포곡(逋穀)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고 편의함을 따라 그 양을 채워 놓으니, 온 경내가 공을 칭송하였다.
기미년(己未年,1679,숙종 5)에는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시배(時輩)들이 공을 미워하여 다시 잉임시키도록 계청하였으니, 대체로 그곳이 장려(瘴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경신년 여름에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枏)과 허견(許堅)의 역모가 발각되어, 공이 형방(刑房)으로 국문에 참여하였는데, 문곡(文谷) 김공 수항(金公壽恒)이 옥사를 심리하면서 일마다 반드시 공과 의논하였고, 입대(入對)했을 적에 상도 공에게 자문한 것이 많았는데, 사리에 맞게 응대하여 감형(減刑)시킨 것이 많았다.
또 허적의 집에 있는 서찰(書札)들을 찾아 들이어 승정원에 내렸는데, 공이 아뢰어 이를 불태워 버려서 모반에 가담했던 자들을 안심시키니, 세상에서 공의 너그러운 도량을 칭찬하였다. 허견이 처형될 적에 그 아비인 허적도 의당 연좌시켜야 했는데, 상이 그에게 죽음을 면해 주려고 하자,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그러자 상이 다시 공을 돌아보고 물었는데, 공은 법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옳다.” 하였다. 옥사가 끝나자 도승지에 발탁 임명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윽고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어서는 상정법(詳定法)으로 인해 쌓인 폐단을 바로잡고 수신(帥臣) 중에 탐오한 자를 제거하니, 인심이 모두 기뻐하였다.
신유년(辛酉年,1681,숙종 7)에는 연경에 갈 부사(副使)로 내정되어 들어와서 공조ㆍ호조의 참판과 대사간이 되었다. 공이 연경에 이르니, 이른바 예부(禮部)의 관원이라는 자가 우리 국서(國書) 가운데 들어 있는 구어(句語)를 지적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하고, 자기 황제로부터 조사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칭하면서 우리 사신으로 하여금 국왕에게 허물을 돌리도록 강제(强制)하였다.
그런데 이때 상사(上使)는 나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서장관(書狀官)은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았으므로, 공이 홀로 나서서 준엄하게 척언(斥言)하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인데, 그 자식으로 하여금 제 아비에게 허물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어찌 대국(大國)에서 번방(藩邦)을 대접하는 예의이겠는가.비록 책망을 만번 받더라도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니, 저들도 공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서로 돌아보며 가 버렸다.
그런데 밤에 그들이 사람을 보내 오천(五千)을 뇌물로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 크게 꾸짖고 글을 써서 통역을 시켜 보이기를 “아무리 훌륭한 아낙네라도 쌀 없는 밥은 짓지 못한다.” 하니, 저들도 어찌할 수 없어 끝내 무사하게 되었으므로,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놀라서 안색이 변하였다.
임술년(壬戌年,1682,숙종 8)에는 동지중추ㆍ동지의금부ㆍ부총관ㆍ비변사 유사당상이 되었다. 이때 호조 판서의 자리가 비었었는데, 공이가망(加望)으로 뛰어 승진되었으므로, 재능을 알아서 대우해 준 데에 감격하여 정성을 다해 재정을 다스리니, 아무리 흉년이 들어 부세가 줄어도 국가의 비용이 결핍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1683,숙종 9)에는 사론(士論)이 혼란해지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우암 선생을 마구 업신여기고는, 공이 우암 선생을 위해 시배들을 배척하여 마침내 군사를 옮겨 적을 먼저 공격할 계책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소장을 올려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무함하니, 상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심지어 ‘가소롭다’, ‘해괴하다’는 전교가 있기까지 하였다.
공은 이때 강교에 나가 있으면서 상소하여 해면을 요청하였는데, 영상 김수항(金壽恒), 우상 김석주(金錫胄)가 경연에 나아가 공의 억울함을 해명하여 말하기를 “호조를 관장하는 1년 동안의 비용이 10만 곡(斛)도 항상 부족했는데, 금년에는 세입이 3만 곡뿐이었는데도 윤계가 재정 관리를 잘하여 힘쓴 바가 많았습니다.” 하고, 인하여 또 공의 무함 입은 정상을 자세히 변명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용서하는 전교를 누차 내리었으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시호도감(諡號都監)을 맡아 애쓴 것 때문에 정헌(正憲)에 승진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명성대비(明聖大妃 현종 비)가 승하하여 혼전도감 제조(魂殿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1684,숙종 10)에는 숭정(崇政)에 오르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다섯 차례나 불러도 나가지 않다가, 성상께서 매우 재촉하는 분부를 내리므로, 공이 그제야 억지로 나가 숙배하고 말하기를 “형조의 정사는 사람의 생사에 관계되므로 조금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니, 판결을 반드시 공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한재(旱災)로 인해서 죄수를 심리하는 데에 들어가 참여하여, 진실한 덕을 힘쓰고 형옥을 삼가라는 것으로 매우 간절히 경계를 드리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는데, 곧 다시 빈사(儐使)로 의주(義州)를 왕래하다가 도중에서 강도 유수(江都留守)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공이 보장(保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진강(鎭江)의 목장(牧場)을 다른 데로 옮기어 백성들이 이곳을 경작하도록 허락할 것과 갑진창(甲津倉)을 건축하여 군량미를 저축할 것과 또 기내(畿內)의 삼영(三營) 및 연백(延白)ㆍ해미(海美) 등의 군(郡)을 모두 강도에 소속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그런데 이때 지평 최규서(崔奎瑞)가 시인(時人)의 지시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사리사욕을 꾀한다는 것으로 공을 탄핵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원망을 무릅쓰고 일을 담당하는 자는 반드시 비방을 듣게 마련이다. 강도에 요즘 설시(設施)한 일이 많았기에, 이른바 백성의 원망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지금 이 일로 인하여 파직을 청하니, 내가 실로 한심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 일로 체직되고 서반직에 부쳐지자, 강가의 정자로 물러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 북쪽 백성들이 국경을 범한 데 대한 조사가 있어, 청 나라 사신의 위협하는 말이 먼저 도성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이 그들을 빈접할 사람 구하기를 어렵게 여겨 그 직임을 공에 맡기고, 청 나라 사신이 관소(館所)에 도착하여서는 의금부가 그 조사하는 일을 관장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문곡 김공이 상께 청하여 또 공에게 판의금부사를 겸대시켰다.
그러자 공은 기회의 방편을 보아 임시의 편의에 맞추어서, 위로는 국가의 곤욕을 면하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보전하니, 김 정승이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병인년에 송도 유수에 제수되자, 세 번 사양하여 겸직인 태상시 제조ㆍ내자시 제조까지 체직되었다.
이때에 당습(黨習)이 더욱 고질화되어 우암 선생 이하 덕망 높은 중신들이 모두 침곤(侵困)을 당하자, 공은 더욱 당세에 뜻이 없어 교외의 초막집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있으면서 여기서 생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그런데 마침 관서(關西)에 방백이 결원되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을 그 자리에 천거하여 그곳의 묵은 병폐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서영(西營)의 빚진[負債] 무리들이 공의 엄격하고 명백함을 꺼리어 유언비어로 동요시켰고, 응교 조상우(趙相愚)는 연석(筵席)에서 갑자기 강도(江都)의 일을 거론하여 공을 무함했는데, 말이 매우 추악하고 모욕적이었다. 그래서 공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자신을 형관(刑官)에 내려서 분명하게 실상을 조사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의 아들 세기(世紀)가 등문고(登聞鼓)를 두드려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였고, 문곡 김 정승은 상께 아뢰기를 “강도의 규정은 월름(月廩) 이외 군량 등의 곡물은 달마다 계산하여 위에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일을 조정이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만일 해부(該府)로 하여금 전후의 공부(公簿)를 가져다 상고하게 한다면 사실 여부를 당장 가려낼 수 있습니다.
또 조상우가 처음에는 염초(焰硝)의 일로 말을 했다가 그 말이 사실과 어긋나게 되자, 또 말하기를 ‘본디 이 일만을 오로지 지적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참으로 매우 불미스럽습니다.” 하였다.그리하여 사계(査啓)가 올라가자, 특별히 판부(判付)를 내리기를 “윤계가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한 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조상우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남을 무함하였으니, 마음 씀이 가증스럽다. 언론하는 자를 비록 중하게 추궁할 수는 없으나, 파직시켜서 그를 징계하노라.” 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정묘년에는 호남 관찰사와 판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체직되었고, 또 좌참찬, 판의금부사, 상방과 와서의 제조를 제수 받았다.
무진년(戊辰年,1688,숙종 14)에는 장렬대비(莊烈大妃)가 승하하자 공이 패초(牌招)를 받고 나아가 숙배하고, 인하여 산릉도감 제조ㆍ공조 판서가 되었다. 인산(因山)이 끝나자 숭록대부에 승진되고 광주 유수(廣州留守)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己巳年,1689,숙종 15)의 화가 일어나자 흉당들이, 공이 이익(李翊)ㆍ이수언(李秀彥) 등과 함께 모두 우암 선생과 친한 사람들이라 하여 일시에 찬축하였다. 이때 공은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는데, 유배의 명을 들은 즉시 떠나서 마치 좋은 곳에 가는 것처럼 하였다.
공이 배소에 이르러서는 문밖을 나오지 않고 조용히 앉아 글만 볼 뿐이었다. 이때 우암 선생은 제주로부터 체포되어 올라오는 도중에 사사(賜死)의 명이 이어서 내렸는데, 금오랑(金吾郞)의 기별이 잘못 공이 유배된 고을에 이르자, 온 집안이 놀라 두려워서 부르짖어 울었다.
그러나 공은 태연하게 담소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평생을 점검해 보매 아무런 죄과가 없었으니, 무리한 침해가 이르더라도 오직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하고는, 즉시 잠자리에 들어 밤새도록 코를 골며 잘 잤다. 그후 임신년 12월 20일에 하찮은 질환으로 배소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71세였다.
다음해 4월에 장단부(長湍府) 서쪽 어룡포(魚龍浦)에 장사 지내고 정경부인에 추증된 부인 홍씨(洪氏)를 합장하였다가, 20년 뒤인 임진년에 그 뒷산 해좌(亥坐)로 묘를 개장하였다. 갑술년에 태양이 다시 밝아져서 흉당이 모조리 축출되자, 특명으로 복관시키고 사제하였으며, 뒤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홍 부인은 관향이 풍산(豊山)인데, 참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영(霙)의 딸이며, 모당공(慕堂公) 이상(履祥)의 손녀이다. 부인은 자품이 착하고 현명하였는데, 13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고 시집 사람들을 접대하는 데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니, 온 종문(宗門)이 그를 본보기로 삼았다.
병인년(丙寅年,1626,인조 4)에 태어나서 임진년(壬辰年,1712,숙종 38) 3월 18일에 별세하였다. 2남 2녀를 길렀는데, 장남 세강(世綱)은 첨정이고 다음 세기(世紀)는 판서이며, 딸은 도정(都正) 조태래(趙泰來)와 군수 이관수(李觀壽)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통덕랑 휘길(暉吉)의 딸이며 북평사 간(衎)의 손녀로서 정경부인의 봉호를 친히 받았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남 세수(世綏)는 지금 관찰사가 되었고 세위(世緯)는 부사이고 세경(世經)은 어버이 상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딸은 현감 이형보(李衡輔)와 사인(士人) 송상유(宋相維)에게 시집갔다.
장방(長房)의 장남 택(澤)은 군수이고 다음은 숙(潚)과 혁(湙)이며, 사위는 이사제(李思濟)이다. 차방(次房)의 계자(繼子)는 식(湜)이고 서자는 탁(濁)이다. 삼방(三房)의 장남 식은 양자로 나갔고, 다음은 섭(涉)ㆍ흡(潝)ㆍ급(汲)ㆍ복(澲)이다. 사방(四房)의 아들은 집(潗)이고 사위는 이재(李在)이다.
도정의 아들 행빈(行彬)은 시직(侍直)이고 도빈(道彬)은 대사간이다. 군수의 아들 도원(道原)은 진사이고 도운(道運)은 좌랑이고 다음은 도재(道載)이며, 사위는 진사 구만희(具萬喜)와 박사인(朴師仁)ㆍ정달선(鄭達先)이다. 사위 송상유의 아들은 필태(必泰)ㆍ필징(必徵)이고 3녀는 어리다. 내외 증ㆍ현손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저술한 《동사(東史)》 3책, 《제의(祭儀)》 1책, 시문(詩文)과 장소(章疏)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은 흉금이 넓고 기국이 준정하여 바라보면 의연해서 범할 수 없는 위의가 있다. 공은 사마공(司馬公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평생에 남을 대해서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無不可對人言者]”는 것으로 성(誠)을 수립하는 요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나 벼슬할 때나 항상 진실에 전일하였다.
젊어서 조부모와 부모를 받들 적에는 인자와 효성이 서로 성대하였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과거 급제를 늦게 하여 부모를 제대로 녹양(祿養)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가슴 아프게 여겼다. 자매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들과 똑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종족들에게도 인자하여 계(稧)를 만들어 화목을 도모하고, 보첩(譜牒)을 편찬하여 친친(親親)의 정의를 폈다. 시골에 사는 외종형이 매우 가난하여 공의 전장(田莊)을 팔려고 와서 공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고 즉시 문권(文券)을 작성하여 주었다. 평소의 행위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평상시에는 음식과 의복 등을 일체 소박하게 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서사(書史)를 열람하였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광대히 펼쳐나가되 붓만 들면 당장 이루어냈고, 사부(詞賦)에 더욱 뛰어나서 굴원(屈原)ㆍ송옥(宋玉)의 성운(聲韻)을 깊이 터득하였다. 제가(諸家) 방기(方技)의 설(說)을 빠짐없이 섭렵하여 운명론에 뛰어났으나 또한 그런 일 하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다.
일심으로 공직을 수행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이 없이 하였는데,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권귀(權貴)라 하여 용서하지 않았으며, 비록 진퇴양난의 곤경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좌절된 적이 없었다.
추밀(樞密)을 맡았을 적에는 온갖 일을 구획하여 처리함에 있어 민첩하고 주도하고 상세하였으므로, 늙은 아전들이 놀라 혀를 내두르며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분이라고 하였다. 지방에 나가 목사ㆍ관찰사를 지낼 적에는 호령이 명백하고 엄숙하여 세력 있고 교활한 무리들이 자취를 거둠으로써 가난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어, 만나는 곳에 따라 공적(功績)이 다대하였다.
국가의 큰 계책을 당하여서는 마치 강하(江河)가 터져내리듯 세차게 결행하였고, 사세가 지극히 어려운 때에 처해서는 마치 칼로 소 뼈마디의 빈틈을 갈라내듯 치밀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은 비록 옛날에 일컫던 통달한 재식(才識)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나았겠는가.
공이 일찍이 자제들을 가르쳐 이르기를 “선비는 반드시 먼저 경전(經傳)에 힘써서 이를 신심(身心)으로 체험하여 견식을 넓힌 다음에야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와 임금 섬기는 예절을 알아서 이를 사업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글을 다 좋아하나 그중에도《중용》한 권은 일찍이 손에서 놓지 않아 이것으로 도움된 것이 많았다.
또 친구는 의당 단정한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나는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중에 충직(忠直)을 서로 면려하여 막역한 친구로 삼은 사람은 권정숙[權正叔 권격(權格)]ㆍ신원서[申元瑞 신명규(申命圭)]ㆍ김원회[金元會, 김징(金澄)]등 두세 사람에 불과한데, 그들이 조정에서 행사한 것은 모두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너희들은 이를 알아야 한다.” 하였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갔을 적에 홍기천[洪沂川 홍명하(洪命夏)]이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대가(大家)의 이름난 선비로서 절로 의당 청현직을 두루 역임할 것이나, 제우(儕友)들로부터 추천의 협조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궁달(窮達)은 본디부터 정해진 것인데, 어찌 권력 있는 자에게 힘을 빌리겠습니까.” 하니, 홍기천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공을 칭찬하였다.
상서 김만중(金萬重)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윤계가 을묘년에 올린 상소 및 공사(供辭)는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정당하여 흉적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함으로써 끝내 그 음모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영구히 전할 성대한 사업이다.”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사류(士類)들 사이에 공공연히 전송된 말이다.
아, 하늘이 걸출한 사람을 낸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었을 것인데, 때늦은 뒤에야 벼슬하기 시작했고 승진의 길도 만년에야 열리어 이미 동류들의 기대한 바에 어긋났고, 인하여 또 성품이 강직하여 시속과 어울리지 않아 뜻이 서로 부합된 사람이 드물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 쓰인 것이 항상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사이에 있었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만년에는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의당 큰일을 할 수 있을 듯했으나, 군소배들에게 원망을 받아 끝내 화의 그물에 걸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솜씨를 만분의 일도 펴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진퇴와 영욕은 시운의 비색함과 형통함에 달린 것이거니와, 끝내간당비(姦黨碑) 가운데 성명이 들어가 광영을 누리게 되었으니,그 자격도 없이 재상 자리를 훔쳐 앉아서 한갓 직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풍자만 받는 자와 비교하면 그 득실의 차이가 어떠한가.
공의 이른바 막역한 세 친구 가운데 그 한 분은 바로 나의 선인(先人)이다. 공이 일찍이 나를 조카와 같이 보아주었기에 나 역시 공을 부형처럼 우러러 받들었었다. 그런데 내가 중년에 멀리 깊은 산중에 틀어박혀 있다가, 무진년 봄에 매씨의 병 때문에 서울로 들어갔더니, 공이 즉시 찾아와서 밤새도록 친절히 얘기해 주고, 인하여 이르기를 “명년에 큰 화가 일어나면 대로(大老 송시열을 높여 이른 말)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그리되면 이 나라를 어찌해야겠는가.” 하면서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명년에 이르러 과연 그렇게 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하나의 시초[蓍]요 거북[蔡]이었던 것이다. 공은 또 평생의 일을 매우 자상하게 죽 얘기하여 마치소옹(邵翁)이 숙필(叔弼)에게 하듯하였으니, 이 또한 뜻한 것이 있었던가 싶다.
지금 묘문(墓文)의 부탁을 받고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는 못하나, 생각건대, 미미한 나의 좁은 식견으로 어떻게 높낮이를 평정하여 금세와 후세에 믿음을 받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사행(事行)만 갖추 기재해두고 높은 안목으로 사람을 잘 평정하는 자를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날에 외재(畏齋) 이 상공 단하(李相公端夏)가 나에게 이르기를 “소싯적에 동춘 선생을 배알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자네는 윤태승(尹泰升)을 아는가? 그의 사람됨이 그의 조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보는가?’
하시기에, 대답하기를 ‘이 친구가 진실로 동배들의 추중을 받기는 하나, 오음에 비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니,선생이 이르기를 ‘만일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반드시 많이 뒤지지 않을 것이네. 자네는 윤태승을 잘 안다고 할 수가 없구려.’라고 했다.” 하였으니,
아, 선생의 이 말씀 한마디는구정(九鼎)ㆍ대려(大呂)보다 소중하여 이것이 후세의 정론이 되기에 충분하므로, 삼가 들은 말을 기록하여 고신(考信)에 대비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성대했던 오음(梧陰) 노인은 /翼翼梧翁
큰 집의 마룻대와 들보였는데 / 大廈棟梁
그에게 훌륭한 손자 있으니 / 曰有賢孫
전대의 미사를 배태하였도다 / 胚胎前光
강하같이 광대한 흉금이요 / 江河之胷
철석같이 견고한 마음이었네 / 鐵石之腸
소년 시절부터 문단에서 / 妙歲詞場
좋은 명성 높이 드날렸고 / 聲價高驤
늦게야 조정에 들어가 / 晩儀王庭
임금 정사 돕는 데 뜻 두었네 / 志在贊襄
수의 입고 조정에 나아가 / 繡衣霄漢
조양에서 봉황새가 우는 듯/ 噦噦朝陽
강직한 말로 상소하니 / 囊封抗直
권귀들 등에 가시 진 듯 불안했네 / 權貴背芒
두 번이나 지방관에 좌천되자 / 再屈棘棲
백성들은공황이라 칭하였고 / 民曰龔黃
제주 목사로 나가서는 / 觀風海方
수양의 정사를 먼저 폈네 / 政先修攘
큰 악인이 임금을 속이고 / 巨慝誣上
공을 끌어 거짓 증거 댈 적에는 / 援公證枉
확고하게 바름을 견지하여 / 確乎秉正
실로 남의 이목에 빛이 났네 / 實光瞻仰
사신으로 연경에 갔을 때는 / 杖節燕山
오랑캐가 무례하게 으르댔지만 / 虜喝無狀
꺾이지 않고 곧은 말 다하여 / 辭直不挫
기개가 천길이나 솟구쳤네 / 氣湧千丈
왕이 이에 공을 가상히 여겨 / 王庸嘉乃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 邦賦是掌
강도 유수 관서 관찰사 되어서는 / 都留關闑
여기저기서 공을 치고 밟았지만 / 左右拳踢
참소의 말이 어찌 먹혀들리요 / 讒言胡得
임금님이 밝게 비춰 아시었도다 / 天鑑昭燭
공이 간악한 자 제거하는 데는 / 盖公癉姦
마치 매가 참새를 쫓듯 했는데 / 如鷹逐雀
전후로 변방에 쫓겨난 것은 / 前後投荒
원흉에게 거슬린 때문이라오 / 職忤元惡
겁화가 하늘에 가득찼으나 / 劫火彌空
공의 지조는 바뀌지 않았으니 / 公守不易
마치 저 유안세(劉安世)처럼 / 有如元城
은산 철벽과 같았었네 / 銀山鐵壁
어진 이 좋아한 게 무슨 죄라서 / 好賢何罪
한 번 배척받고 회복되지 못하여 / 一斥不復
성상의 돌보심 유종의 미 못 거두니 / 聖眷未終
백성들에게 복이 없음이로다 / 蒼生無祿
그러나 좋은 운수 거듭 와서 / 泰運重來
화의 기록 깨끗이 씻겼으니 / 昭洗禍籍
저 빛나는 사책(史冊)에 / 煌煌竹帛
명성과 덕망 영원히 높으리라 / 永高名德
초목 무성한 저 묘역 / 欝彼佳城
화려한 무덤의 비탈에 / 華藏之麓
우뚝 선 비석 있어 / 有屹桓楹
백세토록 부서지지 않으리라 / 百世無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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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사회(司會):
주관(周官)의 이름. 천하의 재용(財用)에 대한 회계(會計)를 주관하였다.《周禮 天官 司會》
[주02] 가망(加望):
조선 시대에, 관원을 천거할 경우에 그 관직에 해당한 품계보다 한 품계 낮은 관원을 삼망(三望)에 넣거나 삼망 밖에 더하여 넣는 것
을 말한다.
[주03] 간당비(姦黨碑) …… 되었으니:
현인(賢人)의 유에 끼었음을 뜻한다. 간당비란 북송(北宋) 시대에 간신(奸臣) 채경(蔡京) 등이 현유인 사마광(司馬光)ㆍ정이(程
頤) 등 3백 9인을 간당으로 지목, 이들의 성명을 기록하여 세운 비를 가리키는데, 남송 시대 주희(朱熹) 역시 간신 한탁주(韓侘胄)
등으로부터 위학(僞學)이란 비난을 받고 자신을 저 간당비 고사에 비유하여, 70세가 되던 남송 이종(南宋理宗) 기미년(1259)에 치
사(致仕)의 윤허를 받고 나서 지은 시에 “늘그막의 영광은 간당에 이름 적힌 것이요,
과거의 수치스러운 건 시신의 관이었네.[老去光華姦黨籍 向來羞辱侍臣冠]”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주희의 말을 다시 인용하여 비
유한 것이다.《朱子大全 卷9 詩》
[주04] 소옹(邵翁)이 …… 하듯:
소옹은 송(宋) 나라 소옹(邵雍)을 가리킨 것이고, 숙필(叔弼)은 구양비(歐陽棐)의 자이다. 구양비가 일찍이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소옹을 뵙자, 소옹은 자신의 평생 이력(履歷)을 매우 자상하게 얘기해 주고, 작별할 때 다시 부탁하기를 “족하(足下)는 오늘 내가 한
말을 후일에 잊지 말아다오.” 하였는데, 구양비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가, 20년 뒤에 구양비가 태상 박사(太常博士)가 되어 소
옹의 시의(諡議)를 짓게 되어서야 소옹이 그전에 부탁했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고사이다.《宋元學案 卷9》
[주05] 구정(九鼎)ㆍ대려(大呂):
구정은 우(禹) 임금이 온 천하의 쇠를 거두어들여 주조한 솥으로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에 서로 전해 온 보기(寶器)이고, 대
려는 큰 종(鐘)의 이름으로서 역시 주 나라의 보기이다. 전하여 매우 귀중한 것에 비유된다.
[주06] 조양(朝陽)에서 …… 우는 듯:
아주 뛰어난 인물을 비유한 말. 조양은 해가 맨 먼저 뜨는 산 동쪽을 말한다. 당(唐) 나라 때 한원(韓瑗)ㆍ저수량(褚遂良) 등 직신들
이 직언으로 폄적을 당하여 죽은 후로 모두가 직언하기를 어려워하던 터에, 황제가 봉천궁(奉天宮) 짓는 것을 가지고 어사(御史) 이
선감(李善感)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기쁘게 여겨 “봉황새가 조양에서 운다.”고 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唐書 韓瑗列傳》
[주07] 공황(龔黃):
한(漢) 나라 때 지방을 잘 다스려 순리(循吏)로 이름이 높았던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합칭한 말이다.
[주08] 수양(修攘):
국경의 방비를 잘 수리하여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것을 뜻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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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判書尹公堦神道碑銘幷 。
近世名公卿。歷數其器量才識文藝兼備者。輒以霞谷尹公爲首。蓋一時士論然也。公諱堦字泰升。其先起海平。自司空君正。五世大顯於麗。爲東方甲乙族。入我朝簪組相承。至文靖公諱斗壽號梧陰。相宣廟有大勳業。於公爲曾祖也。祖諱暉。判書贈領議政。考諱勉之。僉正贈贊成。妣淸州慶氏。參判暹女。公以天啓壬戌六月廿七日降。相表異凡兒。嶷然已有大人氣像。十三母夫人疾革。血指和藥以進。疾遂瘳。十五遭丙子虜難。時贊成公宰靈山。起縣兵北上。人心駭散。公獨留縣衙。曉諭安集。籍其公私費。以待大人還。一境稱服。戊寅判書公赴瀋。見被俘女兒心憐之。以橐金贖還。公見其擧止不類賤人。意謂士夫家子。告母夫人勿令婢僕混處。敎其兒客來輒窺觀。一日兒泣曰彼來者乃吾親也。公邀客靜處。具告以故。客願卽見。公止之。約日而密遣之。判書公喜曰。汝能樹德。必有陰報。後其女入高門貴顯。雖一家人亦不知爲誰也。辛巳發解。又魁泮製。主文者得公白鹿洞賦曰。此非俗儒手段。自是聲名大震。庚寅貫三場登司馬。其後屢擧不中。甲午除司饔參奉不仕。乙未丁內艱。顯宗辛丑。擢謁聖第三名。時金公錫胄居第四。幷命賜第。大臣言其有肺腑嫌。上只存其魁。餘皆罷。公論惜之。除公四山監役不就。壬寅中增廣乙科。卽攝堂后隷槐院。時閔老峯鼎重以均田使辟公爲郞。甲辰洪沂川命夏主管訓局。又差郞廳。大小規畫。一從公言。俄以杖掖庭人。下理削職。未幾用大臣薦直陞六品。乙巳拜典籍,監察,禮曹佐郞。是年冬丁贊成公憂。初贊成公寢疾月餘。一日猝谻。公急進指血。賴延數日。戊申以直講出爲黃海都事。廟堂兼畀公均田之任。蓋才公也。公歷遍原隰。相肥瘠第上下。務在益下。西民頌其德。己酉拜司書。庚戌由文學拜持平。掌試湖西。有得人稱。還拜兵曹正郞。辛亥由文學正言再爲持平。三爲掌令。時歲大饑。上命米穀衙門減價發鬻。以救都民之急。主管者多夤緣牟利。而許積以太僕提調。所犯尤狼藉。公以持平啓請重究。上命査處。刑判徐必遠以事體不當。請寢命。公於榻前劾之曰。必遠所帶衙門。亦入於臺啓中。乃敢冒嫌周防。上頗容庇必遠。公爭曰殿下每掩覆重臣而摧折臺官。非開言路之道也。上震怒曰予於誰某。私護其過。而言若是。公卽厲聲曰旣往不須言。今臣所論。事涉大臣重臣。故有此嚴敎。此非私護而何。若使臣指陳其受穀最多者。不待行査。臣可歷數。於是天怒頗霽。然無發落。公引避而他臺處置請遞。上特黜處置臺官爲鏡城判官。時畿伯吳挺緯葬其兄挺一於敬陵近禁地。吳以楨,枏之舅。氣勢張甚。朝家遣官審覈而不以實報。公請拿治其査官。不少饒。人難之。在正言時。因災異極言貴戚橫而宦寺驕。宰相重而臺諫輕。軍制失宜而耗費衆。宮莊濫多而民生怨。因請躬儉約矯侈俗。招遺逸輔元良。各署財貨。依周禮司會籍記上聞。兩西管餉。使其方伯各自管攝。黃州罷兵使之兼牧。三南革營將之宂設。末乃歸之於人主之一心。惓惓以親賢士遠近習。而日開經筵。從容講道。爲治國之要。縷縷萬餘言。切中時病。上優批。下備局議處。時賊積締結禎,枏。當路用事。以其語多譏斥。故與楨輩上章交攻。公亦疏避乞免。而上終不允。壬子以小行人將赴燕。俄以宗簿正陞濟州牧使。時島中荐饑。賑政難其人。上有極擇之敎。銓司以公應命。然公方欲極論積之姦橫。朝議慮其紛紜。托以掄揀而實外之也。公臨行請對。條陳撫禦之方。請得穀布數千斛匹。悉心賙濟。而必先老弱。且選丁壯給種糧墾曠土。以爲生業。課試儒生。訓鍊將卒而賞罰之。俾有所勸懲。工匠營造。一切革罷。半年之間。治化大著。會有獷悍輩相聚爲盜。公譏捕其巨魁八人。梟於境上而啓其由。朝家以擅刑有拿命。島民奔走號哭。久而不止。至中洋遇大風雨。楫摧舟坼。舟中人皆僵倒。公操文祭神。神氣安間。及對吏竟至削職。甲寅拜黃海道觀察使。時沿海列邑數虛警。公一意鎭撫。而尤講於陰雨之備。增峙糧儲。修繕器械。就嶺阨要害處。請設鎭堡。方將爬櫛民瘼。大有作爲。會北差以冊封弔祭至。今上元年乙卯正月也。先是逆枏使燕還。以臣強之說達于先朝。其意實在於嫁禍舊臣。交亂王國也。至是枏之內兄吳始壽爲遠接使。刱出北書所無之言。以爲先王受制強臣。可汗憐之。致祭至再。仍誣達通官張孝禮見尹某時亦有是說。公再上章極論始壽白地造言狀曰。前後奉使與儐伴之人。俱不聞此言。獨枏倡之於前。始壽和之於後。擧國疑惑。則無怪乎始壽之攙引別人爲證。言甚痛切。積鑴患之。至請廷尉問。事將不測。公怡然曰。死生命也。何怖焉。天道昭明。吾言將自白。供辭無所撓。積不得已托以疏決請削職。而從鑴言竄鏡城。七月量移洪州。丙辰蒙放。及庚申赴燕使臣。因朝命以臣強之說質於孝禮。孝禮謂本無是言。於是始壽伏法。戊午黨人出公爲晉州牧使。晉本難治。公聽斷如流。積年逋穀甚多。不責於民。從便塡準。一境頌之。己未以病罷。時輩嫉之。啓請還仍。蓋以瘴癘地故也。庚申夏特授同副承旨。時枏,堅謀逆事發。公以刑房參鞫。文谷金公壽恒按獄。而隨事必議。及入對。上亦多諮詢。公應對中窾。多所平反。積家書札搜入而下政院。公奏而火之。以安反側。世稱公德量。堅之伏法。積當緣坐。上欲貸死。入侍諸臣皆曰可。上顧問公。公執三尺不撓。上曰承旨言是矣。獄竟。擢拜都承旨。策原從勳。俄拜咸鏡道觀察使。矯詳定之積弊。鋤帥臣之貪汚。群情胥悅。辛酉充赴燕副价。入爲工后曹參判大司諫。及至燕。所謂禮部官。摘抉國書中句語。謂之不審。而稱有可汗査命。勒令使臣歸咎國王。上使不知所出。書狀官稱病不起。公獨挺身嚴斥曰。君臣猶父子。使其子歸咎其父。豈大國待藩邦之禮也。雖萬被喝責。有死而已。彼知其不能屈。相顧而去。夜遣人索賂五千。公又大責。使譯鞮書示曰。雖有賢婦。不得炊沒米飯。彼亦莫之如何。卒無事。聞者變色。壬戌爲中樞禁府同知,副摠管,籌司有司堂上。時度支缺。公以加望超陞。感激知遇。竭誠經理。雖年饑稅縮而國用不匱。癸亥士論橫潰。世道大變。正言朴泰維侵侮尤菴先生。而以公爲大老斥時輩。遂作移兵先擊之計。上章構誣。上下嚴批。至有可笑可駭之敎。公出江郊。陳疏乞免。金領相壽恒,金右相錫胄。登筵白公之冤曰。度支一年之費。十萬斛常不足。今年稅入止三萬。而尹某善爲經紀。多所拮据。仍又悉辨其被誣狀。上屢下開釋之敎。而公終不出。俄以諡號都監勞進正憲。冬明聖大妃賓天。差魂殿都監提調。甲子陞崇政拜刑曹判書。五招不進。聖旨敦迫。公乃黽勉出肅。以爲秋官之政。關人死生。不可毫釐差失。裁斷必公而明。因旱災入參審理。以懋實德愼刑獄。陳戒切至。上嘉納之。未幾以病辭遞。旋以儐使往來灣上。道拜江都留守。公以保障不宜疏虞。請移鎭江牧場。許民耕作。築甲津倉。以儲糧餉。且以畿內三營及延白,海美等郡。皆屬江都。上皆許之。時持平崔奎瑞受時人指。以病民營私劾公。上怒曰任怨當事者。必招訿謗。江都近多設施。所謂民怨。職由於此。而今乃因此請罷。予實寒心。然竟以此遞。卽付西樞。而退居江榭。適有北民犯越之査。淸差恐嚇。先播都下。廟議難其儐接。屬之於公。逮北人到館。禁府掌其査事。文谷金公請於上。又以公兼判金吾。公相機方便。適其權宜。上以免國家之辱。下以全多人之命。金相益加敬重焉。丙寅拜松都留守。三辭得遞。兼太常內資提調。時黨習益痼。自大老以下宿德重臣。無不被其侵殢。公尤無意於當世。斂迹郊扉。爲終焉計。會關西缺方伯。廟堂以公薦擬。期洗宿瘼。於是西營負債之徒。憚公嚴明。飛語撼撓。應敎趙相愚於筵席。猝擧江都事誣公。語極醜衊。公再上章乞下司敗。明覈實狀。上不許。公之子世紀擊登聞訟冤。文谷金相白于上曰。江都之規。月廩外如軍餉等物。月計上聞。以故大小事。廟堂無不與知。若使該府取考前後公簿。虛實可立辨。且相愚初以焰硝事爲言。將歸失實。則又曰本非專指此事。其言誠甚不美。及査啓之上。特下判付日。尹某之爲國盡心。極爲可尙。相愚白地構誣。用意可惡。言者雖不可重究。罷職以懲之。然公終不赴。丁卯除湖南伯,判尹。皆辭遞。又拜左參贊,判義禁,尙方,瓦署提調。戊辰莊烈大妃昇遐。公承牌出肅。仍差山陵都監提調,工曹判書。因山畢。進秩崇祿。除廣州留守。亦不赴。己巳禍作。兇黨謂公與李翊,李秀彥等。俱是大老所親。一時竄逐。公配康津。聞命卽行。如赴樂地。及到謫所。足不出門。靜坐看書而已。時尤菴自濟州被拿。在道而後命繼下。金吾郞路文誤到公所配之縣。一家驚怖號泣。公笑談自若曰。吾點檢平生。無罪過。橫逆之來。唯當順受。卽就枕鼾睡終夜。壬申十二月二十日。以微感卒于鵩舍。享年七十一。越明年四月。窆于長湍府西魚龍浦。贈貞敬夫人洪氏祔焉。後二十年壬辰。改葬于後麓亥坐之兆。甲戌天日復明。兇黨盡黜。特命復官賜祭。後贈領議政。洪夫人貫豐山。參判贈領議政霙之女。慕堂公履祥之孫。姿稟淑哲。十三歸于公。事舅姑承君子待夫黨。各盡其道。宗門式之。生於丙寅。歿於壬辰三月十八日。擧二男二女。男長世綱僉正。次世紀判書。女適都正趙泰來,郡守李觀壽。繼配務安朴氏。通德郞暉吉之女。北評事衎之孫。親受眞誥。生三男二女。男世綏方爲觀察使。世緯府使。世經不勝喪早歿。女適縣監李衡輔,士人宋相維。長房男澤郡守,潚,湙。壻李思濟。次房繼子湜。庶男濁。三房男湜出繼。涉,潝,汲,𣾴。四房男潗。壻李在。都正男行彬侍直,道彬大司諫。郡守男道原進士,道運佐郞,道載。壻進士具萬喜,朴師仁,鄭達先。宋壻男必泰,必徵。三女幼。內外曾玄。多不盡書。公所著東史三冊祭儀一冊詩文章疏若干卷。藏于家。公胸襟恢廓而器局峻整。望之毅然有不可犯者。以司馬公無不可對人言者。爲立誠之要法。故居家莅官。一於眞實。少也奉大父母父母。慈孝藹然。非有事不離側。常以晩占科第。祿養未終爲至痛。姊妹早歿。撫育其子女。與諸子等。仁於宗黨。設稧講睦。裒輯譜牒。以敍親親之誼。有鄕居內兄貧甚。鬻公莊土。來言於公。公曰無傷也。卽成券與之。平日所爲多類此。居常飮食服用。一任朴素。終日端坐。繙閱書史。爲文章汪洋大肆。操筆立就。尤長於詞賦。深得屈宋之聲韻。諸家方技之說。涉獵無遺。而妙於談命。亦不屑爲。一心奉公。夙夜匪懈。在臺閣則知無不言。不饒權貴。雖遭跋疐。未嘗挫折。典樞密則區畫百爲。敏給周詳。老吏吐舌。謂未曾見。雄州大藩。號令明肅。豪猾斂戢。蔀屋晏如。隨所遇而綽有功緖。至於當國家大計。若決江河。處事勢至難。如刃導窾。若是者。雖古所稱通才達識。何以過此。公嘗敎子弟曰。爲士者必先用力於經傳。體驗身心。以廣見識。然後可知爲人之方事君之節。而能措諸事業。吾於書無不嗜好。而中庸一部未嘗釋手。多有所益。且於朋友。宜擇其端方。吾識人多矣。若其忠直相勉爲莫逆交者。不過權正叔,申元瑞,金元會數三子。而立朝行事。俱有可觀。汝曹識之。公釋褐。洪沂川謂公曰。子以大家知名之士。自當歷敭。而不可無儕友吹噓之助。公曰窮達素定。何可借力於當路耶。沂川憮然稱賞。金尙書萬重語人曰。某乙卯疏及供辭。辭嚴義正。使兇賊喪心。終莫售其陰謀。誠不朽事業。斯蓋士類之公誦也。嗚呼。天生傑人。意非偶然。而通籍後時。進塗晩闢。已非儕流之所期待。仍且亢不諧俗。與人寡合。以故其見用於時也。常在呑吐間。識者恨之。逮其晩年。致位崇顯。則宜若可以有爲。而慍于群小。終罹禍網。經濟大手。未展萬一。豈非數也。雖然進退榮辱。係於時運之否泰。而畢竟姦黨碑中姓名光華。其與世之竊據台鉉。徒取覆餗之剌者。得失如何也。公所謂莫逆三友。其一卽余先人也。公嘗姪視余。余亦仰公如父兄矣。余於中年。遠蟄窮山。戊辰春以妹病入洛。公卽臨訪。達夜娓娓。仍曰明年大禍作。大老亦將不免。國其奈何。爲之嗚咽不成聲。至明年果然。眞箇一蓍蔡矣。且歷說其平生甚詳。有如邵翁之於叔弼。斯亦有意存焉耶。今當墓文之託。義不敢辭。而顧以眇眇余管見。其何能評隲軒輊。取信於今與後。無寧具載事行。以竢世之持衡者可乎。記昔畏齋李相公端夏謂余曰。少時拜同春先生。先生曰子知尹泰升乎。其爲人。與乃祖梧陰何如。對曰此友固爲儕流所推重。然擬之梧陰。無乃過乎。先生曰若當艱虞。必不多讓。子不可謂深知泰升者也。噫。先生一言。重於九鼎大呂。此足爲來世之定論。謹錄所聞。以備考信。銘曰。
翼翼梧翁。大廈楝梁。曰有賢孫。胚胎前光。江河之胸。鐵石之腸。妙歲詞場。聲價高驤。晩儀王庭。志在贊襄。繡衣霄漢。
噦噦朝陽。囊封抗直。權貴背芒。再屈棘棲。民曰龔黃。觀風海方。政先修攘。巨慝誣上。援公證枉。確乎秉正。實光瞻仰。
杖節燕山。虜喝無狀。辭直不挫。氣湧千丈。王庸嘉乃。邦賦是掌。都留關闑。左右拳踢。讒言胡得。天鑑昭燭。蓋公癉姦。
如鷹逐雀。前後投荒。職忤元惡。劫火彌空。公守不易。有如元城。銀山鐵壁。好賢何罪。一斥不復。聖眷未終。蒼生無祿。
泰運重來。昭洗禍籍。煌煌竹帛。永高名德。鬱彼佳城。華藏之麓。有屹桓楹。百世無泐。<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