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世 이병호(李秉灝)
[생졸년] 1892년(고종 29)~1964년 / 수(壽) 72세
삼성 이병철회장의 제종(6촌) 형님.
자(字)는 서경(書卿)이요, 호(號)는 홍당 이니 화헌 종욱(和軒 宗郁)의 11세손이다. 고종(高宗) 임진년(1892)에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학산(學山) 이적우(李績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품행이 단정하였으며, 얼굴이 온유하였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이 있었고, 일찍이 곽면우(郭俛宇)와 정애산(鄭艾山)을 찾아 학문의 귀중한 것을 알았으며, 갑인년에 조심재(曺深齋)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이로부터 문리는 깊어졌고, 덕행과 문장이 여러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홍당집이 있다.
석판본 홍당문집(弘堂文集) 6권 3책 완질 / 1994년 景仁文化社 발행.
홍당문집(弘堂文集) - 이병호(李秉灝) 시문집(詩文集)
[생졸년] 1892년(고종 29)~1964년 / 수(壽) 72세
경상남도 의령군 학산(學山) 이적우(李績雨)의 장자(長子)로, 근대 유학자 이병호(李秉灝)의 시문집. 6권 3책. 석인본이다. 1966년 아우 상수(相修), 아들 만희(萬熙)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성순영(成純永)의 서문, 권말에 조규철(曺圭喆)의 발문이 있다. 시(詩) 가운데 120여 수는 만시며, 연시가 많다. 나머지는 친구들과의 화답시, 여행시의 풍물 묘사, 고적 답사, 기타 여러 가지 감회를 읊은 시들이다. 형태별로는 칠언절구가 대부분이고, 오언절구·오언율시·칠언율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시어는 평이하고 단조로운 편이나 품위와 운치가 있다.
서한은 조긍섭 · 하겸진(河謙鎭) 두 스승과 김황(金榥) · 성순영 · 김재화(金在華)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데, 경서와 성리학에 대한 문답으로 당시 영남 유학계의 동향을 보여 준다. 잡저는 이 책의 핵심으로서 저자의 심오한 성리학 이해와 해박한 경전 지식을 보여 주는 논문이 많다.
그 가운데 <독율곡답우계서(讀栗谷答牛溪書)>는 이이(李珥)의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를 16단락으로 나누어 분석, 비판한 장문의 논술로 이황(李滉)의 호발설(互發說)을 변호한 것이다. 주희(朱熹)와 이황의 설 및 전통적인 영남학파의 주리설(主理說)을 근거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논문이다. 참고자료로 이황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와 이이의 <심성정도(心性情圖)> 및 저자 미상의 <우담설(愚潭說)>을 붙였다.
<독농암잡의(讀農巖雜義)>는 김창협(金昌協)의 학술과 인물 논평을 비판한 것이며, <선사사칠설보(先師四七說補)>는 조긍섭의 심성설 중에서 미진한 점을 보완한 것이다. <독회봉답김이회심문단변(讀晦峯答金而晦心問段辨)>은 조긍섭ㆍ하겸진ㆍ김황 세 사람간의 이기심성론에 관한 논쟁을 정리 비판한 흥미 있는 장편 논설이다. 근세 영남 유학의 철학적 관심과 경향을 보여 주는 자료다.
<잡지(雜識)>에는 경학·성리학·예설 기타 잡다한 학문적 명제와 당시 유림의 세태에 대한 논평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서·기·발·명 등도 모두 유창한 문장이다. 특히 <회계실기(晦溪室記)> <매산재기(梅山齋記)> <조심명(操心銘)> <지신명(持身銘)> 등은 담담한 선비의 풍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많은 애사·제문·묘지명·묘갈명·행장 등은 당시의 영남 유림에 관한 인물 자료로서 근세 유학사 연구에 요긴한 자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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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堂 李秉灝의 學問과 그 시대적 意義
2013년 성균관대학교 김동석 교수 논문 발췌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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