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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1절 - 3절
우리는 6:47-49에서 예수님에게 나아와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제 7장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이방인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하여 반석 위에 세운 집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1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은 어두움에 있는 백성들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의 가르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생명과 권세와 능력 있는 말씀에 놀라며 기뻐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후에 나타나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나타내시고 말씀을 전하셨지만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향하여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차별하는 이방인 백부장과 그의 종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 자신에게 생명과 구원과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버나움과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2-3절).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본 구절에서는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마태는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마8:6).
그 종은 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종이 인간적인 소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병으로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만이 아닌 그리스도없는 인생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소망없고 절망적인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가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으로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엡2:1-3, 12).
우리도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비극적인 존재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비천한 가운데 처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대한 유창한 말을 잘 합니다. 그런 비천하고 없는 소외된 영혼에 대하여 손길을 내밀기를 주저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기도: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생명과 구원과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시며, 비천하고 없는 소외된 영혼에 대하여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하옵소서. 모교회 성도가 선교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도와주게 하시며, 선교사의 경제적 필요가 채워지며, 선교사들이 사역을 충분히 준비하며, 문화에 적응하며, 영적 생명력과 풍요로운 경건 생활을 누리며, 사탄의 공격에서 보호받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4절 - 7절
백부장에 보낸 유대의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4-5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유대의 장로들이 이방인 백부장을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10-11장에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가족과 함께 복음을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이방인 백부장 사건은 이후에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됨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음에도 회당에 나가 유대인의 일신교에 마음을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부장의 종의 절망적인 상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의 비극적인 상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고 했습니다(6-7상반절).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말에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부장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장로들의 말과 같이 백부장이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은 공로를 볼 때 합당하다는 말을 듣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증거했습니다(엡2:8-9).
백부장은 예수님을 간절히 요청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능력과 숭고한 위엄과 거룩하심과 인종, 민족, 계급,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을 도와주고자 하시는 그의 자비하심을 깊이 생각해 볼수록 그는 더욱 자신이 부끄러웠고 자신이 앞에서 주님께 요구한 것이 합당치 않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백부장의 모습은 유대인들과 비교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신 말씀과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은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와 더럽히기를 원하지 않사오니 제가 주께로 가겠나이다고 겸손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하반절에서 백부장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하신 일을 보고서도 배척하고 미워하며 죽이려고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방인 백부장이 겸손히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는 믿음을 나타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 허물과 죄로 죽은 비극적인 상태에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선교사들의 가정이 가족관계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며, 선교해야할 공동체와 연합하는 진정한 자산이 되며. 소명과 헌신을 굳게 하며, 토착민 사역자를 세우며, 본국으로 돌아온 뒤 잘 적응하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8절 - 11절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8절).
백부장은 “나는 군대 장교입니다”고 말하지 않고 남의 수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온전히 높이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비교될 수 없는 자들임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못 박혔다는 말은 자기 영광과 교만과 거짓과 자랑을 행하며 죄의 종노릇 하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종과 군인은 어렵지 않게 명령을 듣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켜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9-10절).
이스라엘에도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눅5:5-6).
그러나 백부장은 나면서부터 이방인이었지만 그가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감과 분별력과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는 주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의 종을 치유하심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백부장이 보내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이 겸손히 예수님을 믿은 일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11절).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실 때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7:28-29).
병과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눅6:17-19).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눅5:29).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진지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임을 잊지 않게 하시며,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다다가게 하옵소서. 무슬림 개인과 그 가족의 눈과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해 열리게 하시며, 무슬림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위험에서 기켜주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12절 - 15절
예수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왔습니다(12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서 백부장을 만난 것이나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을 만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시고, 불변적이며, 유효한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시139:16).
다윗은 자신의 몸이 어머니 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이미 보셨으며, 모든 것을 아셨기에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기우지 못하며, 하나님의 책에 인생을 창조하실 계획과 방법과 생명의 시작과 자라갈 모든 과정이 다 기록되었다고 고백하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안에 있음을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안에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모압 여인 룻이 보리 추수 때에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이삭을 줍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극적이고 아무 소망이 없는 모압 여인 룻을 이스라엘로 인도하시고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훗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과부가 독자인 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은 이 여인에게 큰 슬픔이고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과부가 위대하시고 그의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능력과 숭고한 위엄과 거룩하심과 인종, 민족, 계급,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을 도와주고자 하시는 자비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큰 은혜인 것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맨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13-15절).
남편도 잃고 독자까지도 잃고 큰 슬픔과 절망적인 과부에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부를 따라오며 슬퍼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청년에게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고 그를 살리셨습니다.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그의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예수님은 큰 슬픔과 절망에 싸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왕상17:21과 왕하4:34-35절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하나님께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떴습니다(왕하4:34-35).
엘리야 선지자는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 기도했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엘리야 선지자보다 온 힘을 다해 분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주(主)이십니다.
기도: 위대하시고 그의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능력과 숭고한 위엄과 거룩하심과 인종, 민족, 계급,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안에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복음전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의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개척한 교회가 효과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하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16절 - 17절
신15:1-2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갑자기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사건을 말하다가 빚을 면제하는 말씀을 읽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사회에 또 다른 계층인 빈곤하고 억눌리는 사람들, 즉 채무자, 가난한 자, 종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오늘과 같이 과소비로 인하여 빚을 지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려주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많은 가정들이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넉넉하게 살던 가정이라도 남편이 갑자기 죽으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어머니는 가정을 꾸리는 일이 너무나 힘들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빚을 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빚을 갚기 위해 종으로 팔려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남편을 잃은 과부는 자녀들까지 빼앗기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부채와 빈곤과 종살이가 결합된 고통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이러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어려운 상활을 회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비의 규정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므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비천한 영혼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베푸신 것을 본받아 사회에 가난하고 비천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하였습니다(16절).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고 말씀합니다(17절). 유대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지역 넘어서 다른 지역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위대하시고 그의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능력과 숭고한 위엄과 거룩하심과 인종, 민족, 계급,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을 도와주시는 자비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위대하신 생명과 구원과 사랑과 자비하신 예수님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생명과 구원을 얻으며 변화됩니다.
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비천한 영혼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베푸신 것을 본받아 사회에 가난하고 비천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게 하시며, 모든 세대에 위대하신 생명과 구원과 사랑과 자비하신 예수님은 전파되게 하옵소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6,645개 종족 집단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18절 - 22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고 말했습니다(18-20절).
마11:2에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책망하므로 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세례요한과 같이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주님앞에 부끄러움없이 서기를 힘써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제자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은 예수님이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강력한 사역을 행하실 분으로 생각했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의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증거했습니다(눅3:17).
요한은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지금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취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의심하는 연약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한의 연약함을 자비하심으로 덮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가지지 못하는 연약함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더욱 자라가야 합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22절).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35:5-6, 61:1을 보면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사61:1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에게 “너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연약한 것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된 것이며, 이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오늘 우리가 소외되고 연약하고 질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와야 함을 교훈합니다.
기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의롭게 살므로 고난을 받게 하시며, 세례요한과 같이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주님앞에 부끄러움없이 서기를 힘쓰게 하시며, 우리가 소외되고 연약하고 질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울 수 있게 하옵소서. 인구 규모가 매우 작은 종족 집단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며, 세계의 교회가 미전도종족을 향한 비전을 품게 하시며, 세상 모든 종족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굳게 갖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23절 - 25절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바울 사도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롬9:33 사28:16인용)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두운 마음, 편견, 육체적으로 아는 자는 실족하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1:44).
이 말씀을 보면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한 큰 신상을 본 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았는데 손을 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이 신상을 쳐서 부서뜨리므로 그 신상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신상은 세상 나라를 의미하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며,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그 나라는 망하지도 아니하며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이 말하는 뜨인 돌은 그리스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서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는 누구나 멸망받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면 인간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회복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나라에 거하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25절).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있을 때 요한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백성들에게 요한의 사역으로 그들이 이익을 누렸고, 요한의 투옥으로 그 혜택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연약한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강직하며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의 소유자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주님을 믿고 복음을 굳게 지키는 강직함과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 거하는 호화로운 사람이 아닌 세상 것에는 결핍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치부를 위하여 살지 않았고, 쾌락과 안일을 위하여 살지 않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강하게 훈련되었고, 성령의 사람이었으며, 불의한 것을 책망하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자였음을 예수님은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신적인 것들의 결핍과 고난을 기쁘게 여기며 받습니까? 나 자신은 힘이 있거나 세상적인 유익을 줄만한 사람에게 가까이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외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두지는 않습니까?
기도: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는 누구나 멸망받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면 인간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회복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나라에 거하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됨을 알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신적인 것들의 결핍과 고난을 기쁘게 여기게 하옵소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거룩하고 질서정연한 집중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아메리카인 안에 종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근본적인 토착화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26절 - 28절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26-27절).
세례 요한 이전의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고, 그의 오심을 본 자로서 다른 선지자들보다 나은 사람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사자는 세례 요한임을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말라기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들은 참으로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지적했습니다(요1:29). 그리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는 뒤로 겸손히 물러났습니다. 그는 의를 선포하므로 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는 이전의 선지자들보다는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절).
세례 요한은 그보다 앞선 선지자보다 크고, 여자가 낳은 자보다 큰 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극히 작은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실 영광스러운 복음사역 이전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자들보다 크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실 때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눅11:27).
유인들은 자신들의 족보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임을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한 남자의 가치는 그의 조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되었고, 한 여성의 가치는 그녀가 낳은 아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그랜트 오스본).
바로 이러한 유대의 배경에 의해서 한 여자는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28).
예수님과 교제하며, 그 복음을 순종하는 생활이 가장 고상하고, 복된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나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지,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증거했습니다(고전15:19)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온갖 위험과 핍박과 시련을 받는 일에 자신을 내어던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던 경건한 사람들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함과 비천함과 조롱과 시련과 핍박을 당하고 수고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같이 쾌락을 누리지 못하기에 그 실망은 너무나 큰 것이며, 더 불쌍히 여김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나 자신은 주님과 교제하며, 복음을 순종하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므로 가장 행복한 자임을 확신하며 기뻐합니까? 우리는 결코 부활의 소망없이 망하는 자들과 같이 않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어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며 복음의 영광과 풍성함을 누리며, 부활의 소망을 갖지 못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둔다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 예수님과 교제하며, 그 복음을 순종하는 생활이 가장 고상하고, 복된 삶임을 알게 하시며, 주님과 교제하며 복음의 영광과 풍성함을 누리며, 부활의 소망을 갖지 못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둔다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29절 - 30절
28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장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복음의 영광과 풍성함과 충만함과 부요함을 누리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복음의 영광과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은 복음의 영광과 은혜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림을 감사합니까?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고 말씀합니다(29-30절).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는 세리를 포함한 모든 백성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가 전한 말씀이 의롭다는 것을 세례를 받음으로써 인정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구원과 죄사함과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고라신, 뱃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인근의 고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뱃새다 들녁에서 오천명을 먹이시는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이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항상 다니셨습니다. 특히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전도의 본거지로 삼으셨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고을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 후에 그 고을들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마11:20-24).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라고 자부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때 회개치 않고 강퍅한 가운데 그대로 있는 자들은 고라신을 비롯한 고을들이 심판을 받았듯이 결국 하나남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지만 그들은 악하게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오래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파송하셨을 때부터 선지자들을 배척하였던 조상들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묘를 돌보면서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그들과 같이 선지자를 대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선지자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는 무서운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며, 마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한다면 그리스도를 배척한 고을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시돈과 두로는 어느 누구도 보내어져서 복음을 듣지도 못했고, 주님의 권능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므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치 않은 세 고을들 보다는 그 받을 형벌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주 교만한 가버나움과 유황불로 비참하게 멸망한 소돔과 비교하십니다.
오늘의 세대도 주님 당시의 고을들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대는 인본주의가 극도로 만연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시키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에도 회개치 않습니다. 인생들이 교만해 질대로 교만할 때 소돔과 같은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며, 영광스러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며, 윤리 도덕적 타락, 음행, 사치하면서 가난한 영혼들의 부르짖음에 손을 내밀지 않고, 불법, 값싼 복음을 만들고(사유화), 복음보다는 자기 교회와 교단의 행위와 전통을 따르는 교인을 만드는 행위들은 회개하여야 할 일입니다.
기도: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복음의 영광과 풍성함과 충만함과 부요함을 누리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누리는 것임을 알게 하시며,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며, 영광스러운 복음을 받았음에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며, 윤리 도덕적 타락, 음행, 사치하면서 가난한 영혼들의 부르짖음에 손을 내밀지 않고, 불법, 값싼 복음을 따르며, 복음보다는 교회와 교단의 행위와 전통을 따르는 교인을 만드는 행위들을 회개하게 하옵소서. 성경번역사역과 아메리카 곳곳의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성경번역단체 더블유비티(WBT)와 실(SIL)위에 주님께서 함께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31절 - 34절
또 이르시되 “이 세대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31-32절).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오늘에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제의하면 많은 아이들이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제의하면 그 놀이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트집을 잡고, 따분해 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변덕스럽고, 다투는 아이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너희(유대인) 트집자들이 하는 투이다. 너희는 어린애와도 같다. 너희는 사소한 일에 열을 올리며, 무책임할 뿐 아니라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는 자들이며, 너희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소하고 세상적인 일에 열을 올리고, 이리저리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풍성한 삶을 따분하게 여기며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34절).
이 말씀은 너희는 한 때 요한에 대해서 열중해 있었다. 너희는 그의 엄격함과 회개에 대한 명령에 대하여 흠을 찾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세례 요한이 너무나 거칠고 천하며, 그의 증거는 너무나 엄격하다. 아니 그는 미쳤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데 너희는 나에 대해서도 세례 요한에게 대했던 것처럼 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차별당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들 세리와 죄인들에게 찾아가셔서 함께 하시며, 삶을 나누시며 그들을 치유하시고 돌보시는 자비를 베푸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영혼들을 차별하며, 도와주지 않았고 자신들만 거룩한 자들로 여기면 예수님에게 손가락질하며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거룩한 삶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탐식가요 폭주가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
너무 사교적이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구멍난 복음’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스턴스라는 분은 그의 친구가 성경 66권을 모두 살펴보면서 가난, 부, 정의 억압을 다루는 대목과 구절마다 밑줄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동료 하나가 와서 가위를 가지고 그 구절들을 모두 성경에서 잘라냈는데 그 결과 성경책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간신히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도 시험해 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성경에서 가난과 정의를 다룬 구절은 2천개에 가깝다고 합니다.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가 전도사 시절에 광산에서 비참한 광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광부들은 고흐의 희생적인 삶에 감동을 받으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다른 사람을 요구하지 않고 고흐 전도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흐 전도사님의 사역을 기뻐하며 지원하여야 할 교회가 광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사역은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교회는 누구의 친구입니까?
기도: 사소하고 세상적인 일에 열을 올리고, 이리저리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차별당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들 세리와 죄인들에게 찾아가셔서 함께 하시며, 삶을 나누시며 그들을 치유하시고 돌보시는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선교에 대한 비전이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시며, 신세계 곳곳에 기독교 대중매체가 지속적으로 구원의 영향력을 미치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35절 - 38절
예수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5절). 여기 ‘모든 자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지혜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여 회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옳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지혜는 범죄하여 소망없는 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게 됨을 인하여 지혜가 옳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과 권능을 행하신 것과 그의 말씀을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지혜(진리)는 바뀌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임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오늘도 복음의 지혜는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를 듣고 믿는 백성들은 생명과 구원을 얻으므로 복음의 지혜는 진리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는 비난하고 멸시하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구원과 소망을 주시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나사렛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 출신이기에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의 친구하는 명칭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비천하고 고난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격려해주시는 이름이 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옳다 함을 얻고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고 말씀합니다(36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다른 두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교만과 죄인인 한 여인의 겸손함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셨으며, 이방인과 부정한 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바리새인과도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한하고 차별하고 장벽을 쌓아 놓은 사람들은 없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초청받지 않은 사람들이 오찬이 베풀어진 집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내 벽을 따라 죽 앉아서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시하고 때로는 초청받은 손님 중 어떤 이들로 하여금 대화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37-38절).
죄지은 한 여인이 행한 일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청을 받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정도였다면 수가성의 여인과 같이 부정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담대하게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오늘 범죄한 인생들이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갈 때 죄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 여인은 올 때에 향유를 담은 옥합을 준비했습니다. 그 향유는 옥합을 깎아서 만든 비싸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목에 줄을 두르고 거기에 작은 향유병을 메고 다녔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나드를 사용했다면 일반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인은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뒤로 가서 발 곁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발 곁에 선 여인은 서서 울었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여인은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죄인된 자신을 보게 되므로 울음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보통 향유는 머리에 바를 때 사용하는 데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 당시 노예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께 종으로서 겸손함으로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기도: 오늘도 복음의 지혜는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있으며 이를 듣고 믿는 백성들은 생명과 구원을 얻으므로 복음의 지혜는 진리임이 입증되고 있음을 알게 하시며,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께 종으로서 겸손함으로 사랑을 드리게 하옵소서. 라틴아메리카에 마약을 막을 만한 효과적이고 실행가능한 정책이 세워지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총체적인 악의 구조를 키우고 있는 만족하지 못하는 악의 욕구를 끝내주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39절 - 43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39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던 유대인들과 같이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정죄할 줄만 알았지 자비와 용서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모습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그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단절된 집단이 되었고 정죄하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겸손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거룩하다고 하면서 세상은 죄악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같이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없는 모습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가 없이 정죄하거나 비판만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라고 말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시몬이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고 한 마음의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향유를 붓는 여인의 지난날 죄된 삶과 지금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선지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여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권위를 가지신 거룩하신 구주이십니다. 시몬은 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눅7:23). 예수님은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셨습니다(41-43절).
시몬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그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500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마18:21-35).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랍비들은 사람의 죄는 세 번까지 용서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2절에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베드로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에 대하여 무한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무한히 용서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사랑을 체험한 자입니다(엡4:32).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가 없이 정죄하거나 비판만하는 모습을 버리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형제를 무한히 용서하게 하옵소서. 라틴아메리카의 폭력범죄 살인범죄를 뿌리뽑기 위해 지도자들이 연합하며 국민들이 끈질기게 인내하게 하시며, 탐욕을 제어하며 천연자원을 성경적인 청지기 정신으로 돌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44절 - 49절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 네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다고 하셨습니다(44절).
시몬은 예수님은 성의없이 존중함없이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청을 받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 가장 귀한 향유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고, 입맞춤으로 맞이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집에 찾아오는 보통 손님에게 하는 예의도 갖추지 않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눈물을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에 바를 때 사용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그 여인은 노예가 하던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6절).
감람유는 값싼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에게 그 흔하고 값싼 감람유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던 유대인들과 같이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정죄했고, 죄인인 여인을 받아들인 예수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시몬에게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존중해 주셨고, 질문에 대답한 시몬에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시몬은 죄인인 여인을 가까지 하지 않았고, 이러한 여인이 향유를 붓는 것을 가만히 두고 있는 예수님도 잘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는 올바른 교리를 따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없는 냉혹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7절).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을 때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듯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며 죄인인 여인을 용서받지 못할 자로 멸시하는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나 자신은 사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께 사랑을 드립니까?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고 말씀합니다(48-49절).
시몬과 함께 앉은 사람들은 죄를 사하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혹시 나 자신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육체대로 즉, 세상의 정서 속에서 예수님을 알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육에 속한 것은 육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신령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의도하신 다른 뜻은 앉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 여인을 죄인으로 멸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죄책으로 괴로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과거의 죄책과 현재의 실패를 이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정죄당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기도: 사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께 사랑을 드리게 하시며,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라틴아메리카의 토착종족의 생존권과 자치권, 자기결정권을 얻으며,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일에 기독교인이 온전한 화해의 길로 이끌며, 원주민 복음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옵소서.
가정예배
읽을말씀: 누가복음 7장 50절 - 8장 1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50절). 평안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얻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인은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증거했습니다(엡2:8-9).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증거했습니다(롬4:1-3, 3:23-29, 엡2:4, 7).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무능한 자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 사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결코 없다고 증거했습니다(갈6:14).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옛사람이 죽었으며, 육체를 따라 행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받은 것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으로 새로지음받은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갈6:15).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다고 말씀합니다(8:1).
예수님 오시기 580년 전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의 비극적인 고통을 당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그 전에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데 세례 요한이 와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일이 지금 일어난다고 백성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돌아오신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라!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원과 생명과 화평을 주시며, 주님께서 마음과 삶에 다스림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6:3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하며,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같이 나라이 임하옵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등 모든 방면에 복음이 들어가므로 변혁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장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한 것은 그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가르침을 듣고 배우므로 미래에 복음의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기도: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하시며,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등 모든 방면에 복음이 들어가므로 변혁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성령으로 새로워지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시며, 제자훈련과 영성개발하며,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까하는 소비자적 태도를 버리게 하시며, 경쟁하는 세계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기도가 교회 생활에 뿌리를 내리며, 복음이 보편적 진리라는 신뢰와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되찾을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