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월일전( 惺月一全, 1866~1943) "참선 계율 겸비…수행포교로 조선불교"
성월일전
참선 계율 겸비…수행포교로 조선불교 수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부산 범어사를 대표하는 문구이다. 눈 밝은 납자들이 정진했던 참선수행 도량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선찰대본산은 성월일전( 惺月一全, 1866~1943)스님이 주석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의상대사가 개창해 화엄십찰(華嚴十刹)의 수사찰(首寺刹)이었지만 임진왜란 후 군막사찰(軍幕寺刹)이 된 범어사를 일신한 성월스님은 선율(禪律)을 겸비하고 수행과 포교에 적극 나섰다. 또한 조선불교를 수호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성월스님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참선 계율 겸비…수행포교로 조선불교 수호
범어사 선찰대본산으로 사격 일신
금어선원 개설ㆍ경성포교당 개원
○…부산 범어사로 출가한 성월스님은 15세 되던 해 은사 보암정호(寶庵定浩)스님의 법호와 법명을 운(韻)으로 한시(漢詩)를 지었다. 소년 시절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시이다.
부산 미륵암 주지 백운(白雲)스님의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寶殿主人翁(보전주인옹) 逍遙無爲庵(소요무위암) 匿붙κ테�(정호명월림) 浩哉淸風拂(호재청풍불).”
“보배 전당 주인옹이, 하염없는 암자에 소요하도다. 안정하니 밝은 달이 다다르고, 넓으니 맑은 바람 불어오네.”
성월스님의 한시를 들은 다른 스님들이 “삼생동자(三生童子)가 재삼래(再三來)”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부산 범어사에 모셔져 있는 성월스님 진영.
○…금강산 마하연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간병(看病) 소임을 맡았다. 큰방 대중이 115명, 후원 대중이 20여명 등 마하연은 전국에서 모인 납자들이 깨달음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열반당(涅槃堂)에는 70대 중반의 현계(賢溪)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유점사에서 부목(負木)으로 일하다 50세를 넘기고 출가한 스님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진하여 ‘말뚝도인’으로 불리었다. 상월스님은 상좌 하나 없는 현계스님을 극진히 간병했다. 늦깎이였지만 흔들림 없이 정진하는 모습에서 출가자의 진면목을 배웠다. 현계스님의 임종게가 백운스님(전 범어사 강주)이 펴낸 <성월대선사>에 실려있다.
“금강뫼 일만이천봉은 어이하여 뾰족뾰족한가? 문수대성 지혜검도 이 보다 더하리야? 봄이 되니 왼산이 마냥 푸르러 생기 돋고, 여름 오니 풀과 나무가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우네. 가을이라도 달도 밝은데 울긋불긋 단풍이 고와라. 만산홍엽(滿山紅葉)이 2월화(二月花)보다 낫다건가! 북풍한설 나부끼니 보현해회(普賢海會) 여길레라. 허공을 타파하고 머리 돌리니 화장세계 목전에 분명코나. 어화 벗님네야. 열반의 길 묻지 마소. 사바세계 그대로가 미타정토(彌陀淨土) 아니던가."
○…“성월수좌는 소지 소임이 천직입니다.” 소지(掃地)는 마당을 쓰는 소임이다. 성월스님은 오대산 상원사(당시는 상원암)에 머물 때 소지 소임을 맡았다. 눈이 오거나 낙엽이 떨어지면 앞서 깨끗하게 치우는 것이 소지의 중요한 일이다. 적멸보궁까지 오르는 길을 낼 때면 눈을 쓸며 작은 번뇌까지 함께 비웠다. 눈과 마주하며 화두를 들으니 공부가 더 잘됐다고 한다. 낮에는 눈 치우는 울력을 하고, 밤이면 선방에서 용맹정진한 것이다. “성월스님은 무쇠로 된 사나이야. 하루 종일 눈을 치워 피곤할텐데 조는 법이 없어.” 도반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정진할 때 스님의 도반은 산짐승들이었다. 그들 또한 불성을 지닌 존엄한 존재였기에 스님은 성심을 다해 자비를 베풀었다. 두 마리의 노루와 한 쌍의 토끼, 그리고 두 마리의 산양 새끼는 어느덧 스님과 한식구가 되었다. 스님은 그들에게 법명을 지어 주었다. 노루는 덕운(德雲).해운(海雲), 토끼는 미가(彌迦).해탈(解脫), 산양은 무염(無厭).대광(大光)이라 했는데, 이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지식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범어사 주지로 있을 무렵 다른 스님들과 일본 사찰(寺刹) 여행에 나섰다. 총독부가 조선 승려를 회유하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일본 진종(眞宗) 본원의 초청을 받았는데, 육식(肉食)으로 공양을 차려 놓았다. 조선 스님들을 업신여기고 놀리려는 일본 승려들의 장난이었다. 대부분 아무 말을 못했는데, 성월스님이 나서 할(喝)을 했다.
“우리 조선불교는 대승불교이다. 보살계 가운데 식육계(食肉戒)를 받아 지녔으니, (육식을) 먹을 수 없다.” 일격을 당한 일본 승려들은 즉시 사과하고 채식(菜食)으로 공양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 승려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려는 뜻을 분명히 했던 스님의 수행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권상로(權相老) 선생은 <고찰순례기> 범어사 편에서 “오성월(吳惺月).김경산(金擎山) 등 여러 존숙(尊宿)들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기만 하여도 도기(道氣)가 줄줄 흐르고 선풍(禪風)이 슬슬 불어서 사람을 엄습(掩襲)하는 듯한 감이 있음으로 저도 모르게 합장존경(合掌尊敬)하지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한다”고 적고 있다.
○…성월스님은 석전. 만해. 진응(震應). 금봉(錦峯). 종래(鍾來). 담해(湛海). 경산(擎山). 상호(尙昊). 법린(法麟) 스님 등과 함께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 정책에 맞섰다. 친일 성향의 원종(圓宗)에 대항해 범어사에 임제종(臨濟宗) 사무소를 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인재를 키우지 않은데 있음을 절감한 스님은 사람을 키우고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 경성에 포교당을 세웠다. 범어사 경성포교당은 만해스님의 밀명을 받은 청년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곳으로 지금의 현대화랑 자리에 있었다.
○…흐르는 세월은 누구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허망한 세월에 끄달리지 않는 자유를 누릴때 돋보이는 것이 수행자 아닐까. 소임을 놓고 물러난 어느날 상월스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無常迅速(무상신속) 生死事大(생사사대)
常自愧(상자참괴) 歸源正宗(귀원정종).”
“무상은 신속하니, 생사는 큰 일이다.
항상 스스로 참회하고 으뜸의 바른 가르침으로 돌아가라.”
<사진> 선찰대본산 현판이 걸린 범어사 일주문.
○…선찰대본산으로 사격을 일신하기 위해 수옹.경허스님을 범어사로 모셔 선원을 개설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1910년 2월에 범어사내원청규(梵魚寺內院淸規)를 제정하는 등 범어사가 선종 수사찰의 위상을 갖추도록 했다.
숭유억불로 피폐해진 조선불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또 한번의 위기를 맞이했을 무렵 9개의 선원을 열었던 성월스님의 원력은 범어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중흥의 일대 계기였음에 틀림없다.
이성수 기자
■ 임종게 ■
大忘人世落草盡(대망인세낙초진)
一朝廓然萬事休(일조곽연만사휴)
忘情絶盧寐不夢(망정절로매불몽)
唯言得意居無憂(유언득의거무우)
“인간 세상을 크게 잊어 향하(向下)소식 다하니
하루 아침 확연히 깨쳐 온갖 일을 쉬도다
정을 잊고 생각이 끊겨 잠자면서도 꿈이 없나니
그 뉘 뜻 얻었다 하여 근심 없음에 산다 하는가”
■ 행장 ■
해인사 퇴설당서 득도
선학원 설립 선풍 진작
1866년 7월15일 울주군 온사면 우봉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오철근(吳哲根). 부친은 오사홍(吳士洪) 선생, 모친은 김씨였다. 7세 되던 해 부산 범어사에서 보암정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일대시교를 마친후 범어사 미륵전에서 100일 용맹정진 기도 후 주유만행(周遊萬行)했다. 스님은 금강산.오대산.설악산.묘향산을 순례하며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亞字房)에서 용맹정진하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가행 참선 수행했다. 퇴설당에서 정진하던 어느날 깊은 밤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게송을 읊었다.
“大千本來空(대천본래공) 空空無空空(공공무공공)
無一法可得(무일법가득) 八萬四千劫(팔만사천겁).”
이때 스님의 세상나이 30세였다. 한동안 해인사에 머물던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에서 혜월(慧月)스님과 불법(佛法)을 논한후 양산 통도사 백운선실(白雲禪室)에서 수옹(睡翁)스님과 안거 정진했다. 범어사로 돌아온 스님은 금강암에 선사(禪寺)를 열고 23명의 납자와 함께 정진했다. 이때가 1899년으로 산중선방(山中禪房)의 효시(嚆矢)로 여겨지고 있다. 잇달아 안양암.내원암.계명암.원효암.대성암.원응정사 등에 선사를 개설하고 경허(鏡虛)스님을 초빙해 계명암에서 무차선회(無遮禪會)를 여는 등 범어사를 참선 근본도량으로 장엄했다.
스님은 참선뿐 아니라 계율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4년 만하율사(萬下律師)를 모시고 금강계단을 설립해 천불여래대소승계법(千佛如來大小乘戒法)을 복원하여 계맥과 전통을 다시 세웠다.
43세 되던 해 담해(湛海)스님을 이어 총섭(總攝)으로 추대되어 가람을 중건하는 등 불사에 진력을 다했다. 학교를 설립하고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인재불사에도 관심을 보였다.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던 선방을 통합해 금어선원(金魚禪院)을 개설했다.
본사 주지를 3차례 역임한 스님은 1943년 8월9일 사시(巳時)에 열반에 들었다. 세수 78세. 법납 71세였다. 비는 1988년 범어사 경내에 건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