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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정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서산자족
수암 류진(1582-1635) 연보
1582년(선조 15년 壬午) 7월 28일 서울 사제私第에서 서애 류성룡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 났으니
휘諱는 진袗이요 자는 계화季華며 호는 수암修巖이다. 선생은 나면서
훌륭한 자질이 있어 겸근인후謙謹仁厚하고 단정강직하여
식견이 고상원대高尙遠大하였다.
1589년(선조 22년 己丑) 8세: 7월 25일 어머니 전주이씨(광평대군 5대손 이경女)의 상고를 당하여
상중범절이 어른과 같았다.
1591년(선조 24년 辛卯) 10세: 9월에 어머니 복상을 마치고 문충공의 이종질
김치중金致中공에게 글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년 壬辰) 11세: 4월에 왜란이 일어나 자형 이문영(대산 이상정선생의 5대조)공을
따라 영동산곡嶺東山谷으로 피난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癸巳) 12세: 잠시동안 가산嘉山에 머물다가 윤 12월에 문충공을 모시고 서울
묵사동墨寺洞으로 돌아와 경사經史를 읽었으며 피난 다닌 내용을
국문國文으로 썼다.
1597년(선조 30년 丁酉) 16세: 2월에 부인 권씨를 맞이하였으니 현감 채采의 따님이며
충정공 충재선생 벌 의 증손녀이다. 여름에 문충공의 명령으로
종자형從姉兄 노경암盧敬庵公(겸암선생의 사위 )에게 사서四書를 배웠다.
1598년(선조 31년 戊戌) 17세: 11월에 문충공이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올 때
모시고 내려 왔다.
1599년(선조 32년 己亥) 18세: 하회로 돌아와 문충공에게 중용中庸을 배웠다.
1601년(선조 34년 辛丑) 20세: 3월 5일 백부 겸암선생의 상고를 당하고
8월 21일 할머니 정경부인의 상고를 당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癸卯) 22세: 2월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甲辰) 23세: 7월 문충공의 공훈으로 호성원종공신록扈聖原從功臣錄 2等에 올랐다.
1605년(선조 38년 乙巳) 24세: 4월 백씨伯氏의 상고를 당하였다.
1607년(선조 40년 丁未) 26세: 5월 6일 문충공의 상고를 당하여 7월 수동에 장사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庚戌) 29세: 윤3월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 및 성시省試에 장원壯元하였다.
장조카 졸재공에게 맹자서孟子書를 가르키다.
1612년(광해군 4년 壬子) 31세: 2월 해서지방에 역변(金直哉 逆獄)이 일어나 그 괴수
金百言+咸이 선생을 무고하여 하옥되었다. 이 때 도성의 선비들이 모두
선생의 하옥을 전해 듣고 억울하게 여겼으며 심상공희수沈相公喜壽,
한음이상공 덕형漢陰李相公德馨 같은 이가 잇따라 선생의 애매함을
진달하여 3월에 보석되었고, 6월에 석방되었다.
이에 앞서 중씨仲氏 세마洗馬공이 선생 일을 걱정, 동행하며 주야로
울면서 심통해 한 끝에 병을 얻어 선생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5월 26일
졸서卒逝하여 9월에 장사하였다.
이로 부터 선생이 중씨의 서거를 원통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중씨의 별세는 나의 죄라"하고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심상삼년心喪三年을 지냈다.
임자록壬子錄을 지어 옥사의 전말을 기록하였다.
겨울에 하회 옥연정사로 이사하였다.
옥연정사에서 졸재공에게 朱子를 가르키다.
하회마을 남쪽 秀峰 아래에 바위가 있어 俗名이 秀巖이라 선생이
秀를 修로 바꾸어 스스로 修巖이라 號를 지었다.
1614년(광해군 6년 甲寅) 33세: 9월에 졸재공과 청량산을 유람하다. 유산기遊山記가 있다.
1616년(광해군 8년 丙辰) 35세: 정월에 사헌부장령을 역임한 천지가 출생하였다. 10월에 유일遺逸로
禦侮將軍世子翊衛司世馬를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 9년 丁巳) 36세: 9월 상주 중동현 佳士리에 새로운 터를 잡으니
鄭愚伏(經世),李倉石(埈) 두 선생이 내방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庚戌) 37세: 봄에 가사리로 거처를 옮기고 위빈팔경渭濱八景인 쌍매당,백률원,
타맥대,자운잔,지천석,장천암,수륜기,관란대시를 지었다. 애석하게도
그 시는 전하지 않는다. 중동현에 향약을 실시하였다.
졸재공이 가사리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다.
1619년(광해군 11년 己未) 38세: 정우복선생에게 문충공문집 교정의 일을 의논하였다.
1620년(광해군 12년 庚申) 39세: 정월에 한강 정구선생을 곡하고,겨울에는 노경암公을 곡하였다.
1623년(인조 1년 癸亥) 42세: 3월에 인조가 반정하고, 4월에 조정의 신하들이 선생의 학행을
천거하여 특별히 봉화현감을 제수받았다. 백성들로 부터 큰 신임을 얻다.
<9월에는 부인 안동권씨가 숨을 거두었다.>확인 要
1624년(인조 2년 甲子) 43세: 7월에 감사 민성징閔聖徵공이 선생의 치적을 상주하여 표리表裏(상으로
받은 옷감)를 하사받았다.
9월에 부인 권씨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 오니 군민이 去思碑
(임지를 떠나는 지방수령의 공적을 칭송하여 세우는 비석)를 세워 칭송하였다.
12월에 형조정랑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년 乙丑) 44세: 졸재공에게 신독愼獨하라는 가르침을 주다.
1626년(인조 4년 丙寅) 45세: 8월에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받아 부득이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곧 돌아왔으며(당시 鄕職으로 있던 공주출신의 사람이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을 무고하면서 발생한 원옥寃獄을 신속하게 해결함으로써
이서李曙의 칭찬을 받았다), 11월 榮川(현 영주)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곧 퇴임하였다. 이 해에 河沃의 따님 河氏부인을 맞이하였다.
1627년(인조 5년 丁卯) 46세: 정월에 後金軍의 침공이 있어 호소사 정우복선생의 천거로 선생이
상주의병장이 되었다. 곧 청도군수가 되어 봉화에서 처럼 선정을 베풀고
12월에 사직하고 돌아 오니 군민들이 류후진인정비柳候袗仁政碑라는
거사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 비문에 이르되 "아들처럼 사랑하고
부형처럼 아끼어서 백성들의 골수에 배었으니 그 어찌 잊으리오(愛如子
愛如父治民髓其可忘)"라 하였다. 유생들을 깨우치는 글을 지어 주었다.
1628년(인조 6년 戊辰) 47세: 둘째 아들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百之가 출생하였다.
9월에 과의교위세자익위果毅校尉世子翊衛가 되었다가
12월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다.
1629년(인조 7년 己巳) 48세: 정월에 예천군수가 되었다가 12월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오니 군민이
군수류진유애비郡守柳袗遺愛碑라는 거사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비는 현재 의성군 다인면 서리에 있다.
1631년(인조 9년 辛未) 50세: 2월에 전라도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3월에 다시
합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정우복, 이창석 두 선생에게 문충공문집
교정의 일을 의논하고 아울러 서문과 발문을 청하였다.
1632년(인조 10년 壬申) 51세: 정월에 점필재 김종직선생 묘廟에 관전을 급給하였다.
이 때 문충공문집을 해인사에서 간행하였다.
향약향약을 도약장都約長에게 반포하였다.
1633년(인조 11년 癸酉) 52세: 5월에 관직 합천군수을 버리고 돌아오니 군민이
류후진만고인청비柳候袗萬古仁淸碑라는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 비명碑銘에 이르되 "봄바람의 온화한 德이요 얼음같은 맑은
지조로다. 찾아주심 늦었으며 떠나가심 빨랐으니 잊으려 하온들
그 어찌 잊을손가(一團心德 萬壑淸氷來暮去速欲 何能)"라 하였다.
합천읍내 함벽루 가는 길목에 현존한다.
1634년(인조 12년 甲戌) 53세: 7월에 우도右道의 여러 士友들과 여헌 장현광선생을 모시고 낙동강에
선유船遊하였다. 9월에 한성서윤漢城庶尹이 되었다가
10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장령 姜鶴年을 구하는 계啓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대간들로 부터 공격을 당하였다.
1635년(인조 13년 乙亥) 54세: 정월 하회를 거쳐 수동의 문충공묘소에 참배하고 도산서원에 참예한 뒤
13일 영주 귀학정(백암 김륵公의 증손부인 따님댁)에
이르러 급환으로 별세하였다.
이 때 온 고을 인사들이 모여 애도하고 박회무朴檜茂公이 장사를
주관 치송하였다.
원근遠近이 선생의 부음에 모두가 경악하였으며, 6월에 선산박곡에
장사하니 道內의 많은 향원鄕院 유생들과 士友들이 잇따라 치제하고
회장자會葬者가 수백인이었다.
1640년(인조 18년 壬辰) : 정월 군위군 소보면 어의곡으로 이장하고 前부인 권씨를 합장하였다.
1656년(효종 7년 丙申) : 9월에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가, 10월에 다시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증직받았다.
1662년(현종 3년 壬寅) : 士林이 병산서원에 종향從享하였다.
<愚川 정칙 1601-1663은 안동지역의 선배 중에 덕이 있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찬양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앞장섰다.
그리하여 퇴계의 문인이었던 학자 분지 남치리(1534-1580)와
류성룡의 3자인 류진(1582-1635)을 각각 노림서원과 병산서원에서
제향하게 하였다.>
남긴 저서로는 사체집략四體集略,문집 약간권, 수암집,
국문 임진록 및 임자록 등이 있다.
뒷날 목재 홍여하선생이 행장 글을 쓰고
입재 정종로선생이 묘갈명을 지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2006년 5월, 부용회,16쪽-19쪽을 옮겨 적음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해제 6-안동지역편-, 한국국학진흥원,
수암집, 312-313쪽 보완
출처 :풍류하회 원문보기 글쓴이 : 이한방 ------------------------------------------------------------------------------------------------
[생원진사시] 광해군(光海君) 2년 (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1[장원(壯元)] 1위
1582(선조 15)∼1635(인조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성룡(成龍) 이다.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 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사양하였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무(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판서 이서(李曙) 의 경탄을 샀다.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생애를 보냈다. 光海君日記 류진(柳袗) 1582(선조 15, 임오) ~ 1635(인조 13, 을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영의정 성룡(成龍)의 제3자. 노경임(盧景任)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때 무고를 받아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덕형(李德馨)․심희수(沈喜壽)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인조반정 뒤 봉화현감(奉化縣監)이 되고, 이어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오래 묵은 원옥(寃獄)을 해결하였다. 1627년(인조 5) 허위보고를 하였다 하여 청도군수(淸道郡守)에서 파직되었으나, 1634년 재등용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부친인 성룡(成龍)과 같이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수암집(修巖集)』이 있다. 만년에 상주(尙州) 낙동(洛東)으로 이거했다. 넷째 아들 지평(持平 : 류진)은 8녀를 두었는데 김시민(金時敏) · 신숭구(申嵩耉) · 금처겸(琴處謙) · 이상일(李尙逸 갈암伯兄) · 김종준(金宗準) · 정도응(鄭道應/우복孫) · 곽문용(郭文溶) · 이재관(李在寬)에게 각각 시집갔다. 그리고 2남을 두었는데 첫째 어은 류천지(柳千之)는 익위(翊衛)요 둘째 이송당 유백지(柳百之)는 세마(洗馬 : 유단)에게 출계하였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仁祖實錄․嶺南人物考 류현우 06. 1.27 김숙영;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사건으로 인하여 선성김 백암선조[휘:늑]께서 칠순의 연세로 강릉부사로 좌천되시면서 그당시의 역사의 흐름은 100 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뼈아픈 과거라 할수 있습니다 . 06.01.27 22:50 류현우;녜~~. 한 사건으로 두 가문에서 고통이 있었군요. 이 무옥으로 인해 修巖선조께서 옥살이를 하실 때 중형 道巖(諱 단, 生物派祖)은 옥바라지를 하시다가 딸 하나를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선성김문에서도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래도 다행스럽게 무고가 밝혀지고 우리가문도 선성김문도 이어지고 있음을 다행하게 생각~~~ 06.01.27 ------------------------------------------------------------------------------------------ 愚川 入鄕祖 修巖(諱 袗)先祖의 行積 1582년(선조 15년) 7월 서울 사제(私第)에서 문충공(文忠公)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백부는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조부는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이다. 휘(諱)는 진(袗),자는계화(季和)이며 호는 수암(修巖)이다. 총명하고 슬기로웠던 자질이 어릴 때 부터 언행이 의젓하고 숙성하였을 뿐 아니라 겸손하고 단정하며 정직하였다. 부모에게 효성도 지극하였다. 여덟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여막을 떠나지 않았고 비애함이 어른과 같았다. 열한 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서애(西厓)는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고 修巖은 자형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영동 산골에서 난을 피했다. 그 동안 죽을 고비가 몇 번 있었어나 나이 어린 그의 슬기로 무사히 넘겼다. 16세에 안동 권씨 현감 채(采)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종자형인 경암 노경임(敬菴 盧景任)公에게 사서(四書)를 배웠으며 서울에서는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다. 西厓께서는 아들의 높은 자질을 보고'너 같은 자질을 얻기 어려운데 退溪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如爾美質難得 恨未及退陶)라 하였으며 그 뒤 다시 낙향해 있던 아버지로부터 중용을 배웠다(18세). 修巖께서는 위기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인격도야에 힘썼다. '온 종일 가만히 앉아 있기는 쉬워도 잠시동안이라도 마음을 잡아 두기는 어렵다'(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는 修巖의 좌우명이었다. 22세에 향시(鄕試), 29세에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모두 장원을 하였다. 1612년(31세) 해서지방에서 일어 난 김 직재의 무옥에 연루되었다 해서 하옥되었다. 修巖은 옥중에서도 언행이 평상시와 다름 없었는데 다섯 달 뒤에야 그의 무실(無實)이 밝혀져 풀려났다. (중략) 1616년(광해 8년, 35세)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 하회 옥연정을 떠나 상주 중동현 가사리에 터를 잡으니 우천파의 입향조가 된 것이다. 1623년 봄에 인조반정이 있었고 이 때부터 왕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 일천(逸薦)으로 경상도 봉화(奉化)현감에 제수되어 그 곳의 토호와 오리(汚吏)의 협잡을 밝혀 전재(田制)를 개정하고 부세(賦稅)를 감면하는 등 선정을 하였다. (중략). 일천은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은 사람을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관직에 임명하는 오늘로 말하면 특채(特採)이다.1624년(43세) 형조정랑(形曹正郞)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가 재차 부름을 받아 소임을 다 하였다.(중략) 1626년(45세)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군수에 제수되고 미처 부임전에 일어났던 정묘호란의 다급한 때(1627년 정월) 호소사(號召使, 의병을 불러 모으는 관리)정경세의 천거로 한동안 상주의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627년 다시 경상도 청도군수(淸道郡首)로 전임했다. 1628년 세자익위사세익(世子翊衛司翊衛),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다. 1629년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경상도 예천군수에 부임하여 그 다스림이 봉화에서와 같았다. 修巖께서 부임한 어느 고을이든 임기가 끝나기 전에 떠나곤 했는데 군민들에 의해 거사비가 세워졌다. 1631년(50세) 2월에는 전라도사(全羅道使)에 임명되었어나 부임하지 않았다가 3월에 합천군수에 임명되어 고을의 원으로 치적을 올렸다.(중략). 이 때 해인사에서 '서애문집'이 간행되었다. 1633년(52세) 5월에 관직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니 군민이'류후진만고인청비(柳侯袗萬古仁淸碑)'를 세워 그의 공을 칭송하였다. 1634년(53세)에는 우천에 머물면서 우도의 여러 사우들과 스승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을 모시고 낙동강에서 선유(船遊)를 하는 등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기도 했어나 그 해 9월 다시 벼슬길에 올라 한성서윤(漢城庶尹), 10월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공적인 일에 강직하고 시시비비가 분명했던 그는 (중략).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수명이 다함을 예감했는지 이듬해임 1635년(인조 13년) 정월 초에 우천을 나서 하회를 거쳐 수동의 西厓墓所에 참배하고 도산서원에 들린 후 영주 귀학정 (龜鶴亭)에 이르러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가 1635년 정월 13일이었으며 修巖의 나이 54세였다. 그 곳 고을의 임사들이 모여 애도하였고 특히 박회무(朴檜茂)가 장사를 주관 치송하였다. 修巖께서는 향리에 돌아와 있을 때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할 만큼 가난했는데 안빈자락(安貧自樂)하였다. (중략) 修巖께서는 저술로 상례제설(喪禮諸說) 사례집략(四禮輯略:현재 찾지 못하고 있음), 격치설(格致說), 자경설(自警說), 등을 남겼으며 수암집(修巖集) 4권 3책이 있다. 또한 한글로 수기문학(手記文學), 가사문학이라고 하는 임진록(壬辰錄)을 지었다.(중략) 그리고 修巖께서는 선비로서는 특이하다 할 농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지었다. (중략) 정부인(貞夫人)은 안동 권씨이고 정부인의 증조부는 충정공 충제 권벌(忠定公 忠霽 權벌)이다. 재취 정부인 진주하씨(晉州河氏)이다. 修巖과 정부인 權氏 墓는 합장(合葬)으로군위군 소보면 어의곡에 있으며 정부인 하씨의 묘는 우천 가사리 타막대에 있다. 슬하에 2子 8女를 두었다. 처음 墓는 선산 박곡에 있었다. 1656년(효종 7년) 9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좌승지(左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의 증직이 있었고 10월에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을 증직받았다. 가선대부는 종 2품의 품계이고 뒤의 관직도 종 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1662년(현종 3년)修巖께서는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참고문헌: 愚川과 先賢 (柳 時中 著) 류현우 2004년 8월 14일 愚川의 開基 愚川은 西厓의 3子인 修巖 (諱 袗)의 후손들이 세거지를 이룬 곳이다. 우천은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于勿里)이다. 우물리는 우물, 우물곡, 우무실이라고도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원 가사리와 주변의 사동(일명 뱀골) 주남면(현재 의성군 단밀면)의 정곡(속칭 솥골)등이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우천 문중 사람들은 물론 연령이 지긋한 사림 후손들은 지금도 이 곳을 우천이라 부르고 있지만 일반 사람에겐'우물리'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은 일문의 하회와 다른 경우이다. 하회는 그대로 동리 이름으로도 통하고 있다. 우물리(于勿里)에는 '작은 마을', '큰 마을'.'가사리','솥골','뱀골' 등 자연취락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천은 광의(廣意)로 이 전 지역을 일컽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마을' 곧 지금의 수암종택(修巖宗宅)이 있는 곳만을 가르키기도 한다. 謙菴과 西厓를 배출한 하회 마을은 명당으로 이름이 나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낙동강물이 하회를 S형으로 휘돌아 흐른다 하여 '태극형(太極形)', 중앙에서 볼 때는 마치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다. 연화부수형은 꽃과 열매를 한꺼번에 갖추어 유종의 미를 이룸과 동시에 향기가 높은 아름다운 꽃이므로 자손이 번창하고 청사에 향기로운 위인(偉人)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祥)스러운 연꽃도 물 밖이나 물 속에서는 피지 않고 수면에 떠야 필 수 있기 때문에 집 터를 너무 높게 하거나 낮게 해도 좋지 않으며 또한 동리에 우물을 파도 길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날 이 마을을 누구나 하회(河回)라고 하는데 옛 어른들은 하외라 하는 수가 많았다. 이 두 이름은 '강물이 휘돈다'는 뜻에서는 같다. 하회에 못지 않게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 우천이다. 우천은 일월산, 속리산, 팔공산 세 산맥의 종단지이며 또 낙동강, 위강(渭江)의 두 강이 여기에 합류하므로 옛 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만나는 지점,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이라 했다. 다섯 잎을 가진 매화는 땅에 떨어지면 향기를 내뿜기 때문에 발복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1618년(광해 10년) 修巖께서 하회에서 우천으로 옮겨왔고 지금의 종택이 있는 곳이 아닌 가사리에 터를 잡았다. 修巖께서는 우천으로 오기 전 부형집에서 살림을 나와 마땅한 곳이 없어서 하회 마을 건너 부용대 중턱에 있는 옥연정(玉淵亭)에서 거처하였다. 옥연정은 西厓를 따르던 산승(山僧) 탄홍(誕洪)이 10년간 탁발하여 모은 재물로 西厓께서 45세 되던 해에 완공한 것인데 西厓께서는 틈만 나면 이 곳에 와서 독서에 몰두하였다 한다. 효우(孝友)가 남다른 修巖께서 장성한 후 하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601년백부(伯父)상과 조모상을 입었고 1605년 맏형 여(衣如)公이 28세로 요절한데 이어 1607년 하회에 와 있던 아버지 서애의 별세를 맞았으며 1612년에는 중형 단(衣耑 )公이 서울에서 33세의 나이로 요절하니 남자로는 어린 조카 원지(元之)公, 修巖 아들 천지(千之)公, 세 숙질이 고적하게 남았기 때문에 修巖은 대소가의 어려운 살림을 돌보게 되었다. 修巖께서 하회에서 우천 가사리로 옮겨갈 때 본인은 37세, 장조카 류원지公(호가 拙齋) 21세의 청년이었다. 우천파의 개기(開基)터인 가사리는 修巖이 그곳에 터를 잡을 당시에는 불모지였던 모양이고 그 후 몇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처음 가시밭을 헤치고 터를 잡아'시리(柴里)'라 하고 농토를 일구어 뽕나무를 심으니'시상촌(柴桑村)'이 되고 많은 선비를 배출하니'가사리(佳士里)'라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떠한 연유로 修巖께서 이 곳에 터를 잡고'우천(愚川)'이라 했는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문헌에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추측해 본다면 부형이 살았던 하회에서 그리 멀지 않고 (보행거리 80리) 수려한 경관이 하회와 흡사하며 게다가 이 곳 또한 명당으라 한 데 있었던 것 같다. 우천 동리는 3面이 江으로 둘러 쌓여 두 강(낙동강과 위강)이 합치는 곳에 부용대처럼 내려 깎은 듯한 천인대가 있고 그 밑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구전(口傳)에 의하면 서애께서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公에게 아들 修巖의 택지를 상주 쪽으로 부탁하였다는 말도 있다. 정경세公은 西厓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요, 역시 문인인 창석(蒼石) 이준(李埈)公과 더불어 당시 상주가 배출한 대유(大儒)였으며 상주는 또한 西厓께서 일찌기 목사로 선정을 편 일이 있었던 곳이다. (중략) 修巖께서 가사리에 와서 살 던 집은 초가의 허술한 집이었다. 그러다가 백수십 년쯤 지난 뒤에 修巖의 현손(玄孫)인 柳聖魯公께서 지금의 종택자리에 옮겨 왔다. 옮겨 올 당시의 집도 역시 삼간초옥이었으며 지금의 종택 안채 뒤편에 있는 바위 위였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愚川과 先賢(柳 時中 著) 愚川의 學問
우천에는 문집을 낸 분이 7분, 유고를 남긴 분이 4분이다. 문집으로는 수암(修巖) 류 진(柳 袗)의 수암문집(修巖文集)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강고문집(江皐文集)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의 낙파문집(洛坡文集)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계당문집(溪堂文集) 극암(克菴) 류흠목(柳欽睦)의 극암문집(克菴文集) 직재(直齋) 류휴목(柳烋睦)의 직재문집(直齋文集) 과재(果齋) 류도승(柳道昇)의 과재문집(果齋文集) 등이 있다. 유고(遺稿)로는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 류명하(柳命河) 이안당(易安堂) 류성림(柳聖霖)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신 류희춘(柳會春)등의 유고가 있다. 이 밖에 현재의 우리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한글 가사(歌詞)이다.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임진록(壬辰錄), 임자록(壬子錄) 류인목(柳寅睦)은 북행가(北行歌)를 지었다. 문집이나 유고를 남기신 분 가운데 학문으로 유림(儒林)에 널리 알려진 분으로는 수암(修巖) 류 진(柳 袗)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이 꼽힌다. 이렇게 글 잘 하는 분이 계셨다는 것은 서애학통(西厓學通)이 우천문중의 가학(家學)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의 유학사에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양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영남학파의 근원을 말 하는데 있어서 여러 설이 있으나 도산서원이 배출한 세 분의 후계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 구(鄭 逑) (이우성 교수) 이 가운데 서애(西厓)를 스승으로 하는 서애학통이 성립한 것이다. 서애학통은 안동과 상주로 나누어진다. 안동 하회쪽은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우헌(愚軒) 류세명(柳世鳴), 주일재(主一齋) 류후장(柳後章) 등의 쟁쟁한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상주가 이 학통의 큰 줄기로 성립하였다. 서애(西厓)는 일찍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빼어난 문하생과 우천파(愚川派) 선비들을 중심으로 성립되는 학문이 바로 서애학맥(西厓學脈)이 되었다. 요컨데 상주에서의 서애학맥은 우복(愚伏), 창석(蒼石),월간(月間), 사서(沙西 ,諱 全湜), 수암(修巖), 어은(漁隱)을 거쳐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의 고루(高壘)가 솟아오르고 나아가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광장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우성 교수) 참고문헌: 愚川과 先賢 (柳時中 著) 목민관(牧民官) (현감, 현령, 군수, 부사, 목사)으로서의 관직을 거치신 분 ◇ 류교조(柳敎祚, 통정대부(通政大夫) 청송도호부사) ◇ 류인목(柳寅睦, 양산군수) ◇ 류도석(柳道奭, 통정대부(通政大夫), 자인현감) 최종관직(最終 官職) ◇류 진(柳 袗, 통훈대부(通訓大夫), 司憲府持平, 正 5品) ◇ 류천지(柳千之, 통훈대부(通訓大夫), 司憲府掌令, 正 4品) ◇류광억(柳光 澺,통훈대부(通訓大夫),司憲府持平, 正 5品) ◇류심춘(柳尋春,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正 3品 당상관) ◇ 류후조(柳厚祚,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議政府 佐議政),正1品 ◇ 류주목(柳疇睦,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 從 5品) 증직(贈職) ◇ 柳 袗,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從 2品) ◇ 柳聖魯,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正 2品) ◇ 柳 潑,숭록대부(崇祿大夫), 議政府佐贊成, 從 1品) ◇ 류심춘(柳尋春,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正 1品) 음직(蔭職) ◇ 류경하(柳經河. 능참봉(陵參奉), 修巖의 손자) ◇ 류만식(柳萬植, 통덕랑(通德郞), 正 5品) 수직(壽職) ◇ 류우조(柳佑祚,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 正 3品) ◇ 류근목(柳謹睦, 통정대부(通政大夫), 正 3品)
근거자료: 愚川과 先賢 (柳時中 著) 남대(南臺): 조선시대 학문과 덕행이 높은 사람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나 장령(掌令) 또는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 헌납(獻納)과 같은 대간(臺諫)의 벼슬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남대(南臺)로 벼슬에 나간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그 가문에도 큰 명예이고 영광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정승 열 명이 죽은 남대 한자리보다 못하다' '남대벼슬 한 장이 대감 세 자리보다 낫다' 라는 말이 있다. 우천에서 수암(修巖)선조와 어은(漁隱)선조께서 남대(南臺)벼슬을 하셨습니다. 일천(逸薦), 또는 천일(薦逸) 남대와 채용방식이 비슷하지만 벼슬이 사헌부나 사간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남대를 포함한 광범위한 뜻으로 말하는데 은일(隱逸)이라고도 합니다. 우천에서는 수암(修巖), 어은(漁隱),강고(江皐)先生, 계당(溪堂)先生께서 이에 해당합니다. 불천위(不遷位) 원래 사대부에서는 고조부까지 4대봉사를 하고 대가 갈려 4대가 지난 조상은 조매(신주나 위패를 땅에 묻는 것)를 하고 더 이상 기제사를 모시지 않게 되어 있으나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행이 높은 분에게는 왕명으로 영원토록 위폐를 옮기지 않고(不遷)모시게 했는데 이것을 불천위(不遷位)라고 합니다. 우천의 불천위(不遷位)는 수암(修巖), 강고(江皐),낙파(洛波) 세 분이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천 종택에는 수암(修巖)의 사당만 있고 강고(江皐)와 낙파(洛波)를 위해서는 사당 터만 닦았을 뿐 별묘(別廟)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때가 조선 말기의 혼란한 시기였고 당시 宗孫 류도석(柳道奭)公께서 낙도에 유배를 가는 등 가화(家禍)가 있었으며 물질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愚川과 先賢(柳時中 編著) -------------------- ----------------------------------------------------------- 수암 류진과 임진록考-홍재휴-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中 1)선계先系와 생평生平 지은이의 휘諱 진袗이요 字는 계화季華니 호를 수암修巖이라 하였다. 姓은 류씨로서 관은 풍산이다. 조선 인조조의 문신이니 선조조때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에 山河再造의 功을 이룬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이다. 비는 전주이씨로 현감 경坰의 따님이니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수암은 선조15년(1582년)에 경제京第에서 태어나 인조13년(1635)에 54세로 한 생을 마쳤다. 유년기(1-14세)에는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자랐으나 일찍이 8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고 귀향하여서는 거상居喪을 어른과 같이 하였다. 다시 상경하여서는 11살 되던 선조25년(1592)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문충공은 호가扈駕하여 西行길에 오르고 자형姉兄인 한산인 이문영(수은 이홍조 父/대산 이상정의 5대조)을 따라 강원 평안 황해도 등지의 山谷間을 두루 돌며 목불인견의 참상과 인심의 후박을 골고루 보고 겪으면서 피란의 쓰라림을 직접 체험하였다. **홍재휴, 2004, '수암 류진과 임진록고', 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보고사, 291-313 ----------------------------------------------------------------------------- 修巖集 조선 중기의 문신인 수암 류진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수암집은 현재 3종류의 이본異本이 있다. 1734년 후손 위하와 성화가 편집 간행한 2권 2책의 목판본 및 1833년 간행된 원집 4권 2책과 연보 2권 1책을 합쳐 총 6권 3책의 목판본이 전한다. 본 해제의 텍스트는 서문과 발문이 없는 탓에 간행시기와 간행자를 알 수 없는 목판본으로서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시 76首와 소疏,계사啓辭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2는 書68편만 수록되어 있다. 권3은 記 2편, 발跋 2편, 잡저雜著 6편, 제문祭文 8편, 묘지명墓誌銘 1편, 행장 1편, 유사遺事 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 4는 유록遊錄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은 조선 중기의 정치사와 사상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며, 특히 편지 글은 상례喪禮 이해에 유용한 자료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해제 6-안동지역편-, 한국국학진흥원, 수암집, 312-327쪽 --------------------------------------------------------------------------------- 류진은 호가 修巖으로 서애의 셋째 아들인 동시에 제자이다. 아버지 서애로 부터 家學的인 바탕에서 유학교육을 받아 진사시험에 두각을 나타냈다. 수암은 誠과 敬을 위주로 공부햇는데 추천으로 현감과 지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반대파의 모함으로(북인 정인홍의 문인 문홍도) 서애선생이 낙향함에 따라 성리학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 서애는 늘 수암의 학문적 자질을 보고 퇴계선생 밑에서 직접 배우지 못했음을 한탄하곤 하였다. 수암은 산수를 즐기는 한편 다른 스승인 상주 외서 우산에 사는 우복 정경세선생과 학문적 교류의 편의성 등으로? 37세 때(1618년) 상주 낙동강변에 있는 가사리로 이사하였다. 그리하여 안동과 상주에 거주하던 그의 학문상의 벗들은 낙동강 물길을 오가며, 두 고을 사대부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공동 목표를 추구했던 것이다. 수암은 중동면 가사리에 살면서 퇴계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이웃 선비들과 협동으로 중동현에서 향약鄕約을 실시함으로서 상부상조하는 기풍을 진작할 수 있었다. 김호종, 2000, 서애 류성룡과 안동 상주지역의 퇴계학맥, 22-23쪽, 한국의 철학 28호, 경북대 퇴계연구소 --------------------------------------------------------------------------- 류현우; 西厓는 자제들께 유훈을 남깁니다...<이 곳 하회는 땅이 좁아 가족과 종(노비)과 함께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큰집(지금의 양진당)은 이곳 하회에 남고 너희들은 하회를 떠나가서 살아라~~~> 그러나 유훈을 받들기도 전인 1605년 어린 자제 한분(졸재공,8세)을 남기고 찰방할배가 돌아가시고 1607년에는 西厓할배께서 서세하시고 이어 1612년 道巖할배께서 돌아가시니 어린 拙齋公을 돌보시다가 拙齋公 혼인을 시킨 후 修巖은 우천으로 우거를 하십니다. 우천으로 오시기 전에는 옥연정에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修巖께서 우천으로 우거하시는 도중 우천 고개를 넘으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회를 떠나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유훈을 따르기 위함이었지요... 자식 없이 돌아가신 道巖할배는 二松堂(諱 百之)으로 하여금 後嗣케 하여 의성 생물에 터를 마련하여 지금의 생물파가 되었습니다. 道巖할배는 하회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물이 어딘지도 모르고 생물파의 입향조가 된 것입니다... 우천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류천파 역시 문경존도에 터를 잡았고 겸근재할배는 예천지역에 터를 잡았습니다.. 모두 선고의 유훈에 따른 것입니다. 결국 유훈을 따르지 못한 분이 일찍 돌아가신 맏자제(찰방할배, 諱 여)였는데 큰집(양진당)과 졸재할배는 하회를 같이 지키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 보면 결국 유훈을 따르지 못한 게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훗날 충효당이 완성되면서 양진당과 충효당은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하면서 가문이 발전하였고 다소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나라 최고의 양반부락(세거지,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백파인 양진당에서도 많은 후손들이 가깝게는 광덕으로, 멀게는 의성 사촌으로 이거해 갑니다. 假說입니다. 1605년 백형께서 돌아가시고 1607년 西厓께서 서세, 1612년 중형 별세 후에는 집안은 修巖이 돌보게 됩니다. 당연히 조카인 拙齋도 修巖의 보살핌을 받게 되지요... 修巖께서 유훈을 충실히 따르셨다면 1618년 우천으로 우거하실 때 拙齋公도 修巖을 따라 우천으로 왔어야 합니다. 장손인 拙齋께서 우천으로 함께 우거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지만 만일 함께 우거를 하셨다면 忠孝堂은 지금의 하회가 아닌 우천에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06.08.11 ---------------------------------------------------------------------------------- 병론屛論의 학문 연원; 퇴계-서애학맥/권오영, 2003,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1. 이황-류성룡학맥 이황-류성룡-정경세-류진-류원지-류세명-류후장--박손경-정종로-류심춘-류주목(상주지역) ---류규 류후장-류성화-류운-류종춘-류상조 -류이좌-류도수(의성 사촌) -류철조-류도헌 류심춘-류주목-이만윤 -류도귀 -권술봉 -이중경 -조승기(영양 주실) -이계로(노루골) 2.풍산류씨의 가학연원 류중영-류운룡 -류성룡-류진-류원지-류의하-류후장-류성화-류운-류종춘-류이좌 -류심춘-류주목 -류규 -류성증 -류세철 -류세명 류경심 류빈 류중엄 이황-류성룡학맥의 학맥은 정경세가 상주 출신이고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이 상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상주지역에 그 학맥이 전해지고 있었다. 류심춘은 처음 종숙부從叔父 류광렴에게 나아가 학업을 익혔으나 다시 정종로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그것은 정종로의 6대조인 정경세가 류성룡을 통하여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산재전陶山再傳의 적嫡'(퇴계 제자인 서애의 제자 우복을 퇴계嫡統) 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종로가 류성룡의 학통을 이은 '우리집 학문연원(吾家淵源)'이라고 하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그 뒤 류심춘의 손자 류주목의 문하에는 안동의 학자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한편 안동 하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맥은 철저히 가학의 형식을 띠고 전수되었다. 류응목柳膺睦은 위의 풍산류씨 가학연원도家學淵源圖를 그린 뒤, 그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입암(류중영)부군부군께서 사문斯文을 천명하여 자식을 가르치고 스승에게 나아가게 했고 귀촌(류경심) 권옹(류빈) 파산(류중엄) 여러 종제從弟와 함께 가학을 닦았다. 입암부군이 겸암(류운룡) 서애(류성룡) 두 부군에게 전하였고 겸암부군이 먼저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편지로 장려를 받아 다른 사람이 얻기 어려운 바를 많이 얻었다. 서애부군이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니 '하늘이 이 사람을 태어나게 했다'는 칭찬이 있었는데 박약博約하고 장경莊敬하여 마침내 그 도道를 전傳하였다. 서애부군이 한번 전함에 수암(류진)부군이 있고 두번 전함에 졸재(류원지)부군이 있으니 성리性理의 학學에 조예가 깊다. 졸재부군이 우눌(류의하)에게 전하고 회당(류세철) 우헌(류세명) 두 公이 재종질再從姪로서 졸재의 문하에서 직접 배웠다. 우눌부군은 주일재(류후장)에게 전하여 서호(류성화) 화계(류성증) 임여재(류규) 외재(류종춘) 강고(류심춘) 학서(류이좌) 등 제공諸公에 이르기까지 上下 10世의 안에 家學의 전수가 차례대로 한 세대도 빈 적이 없었다." 류응목에 의하면 류성룡은 학문을 함에 정밀하게 생각하고 실천을 주로 삼아 마침내 이황의 道를 전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은 學行을 돈독하게 힘썼고 청수淸修하고 검약儉約하였으며 家傳의 지결旨訣을 얻었다. 그 뒤 류원지는 류성룡의 長孫으로 계부季父 류진에게 나아가 학업을 익혔는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천인이기天人理氣의 오묘함과 인의성정仁義性情의 뜻을 깊이 탐구하여 두루 꿰뚫지 않음이 없어 앞 사람이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을 많이 밝혀 후학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권오영, 2003,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게, 312-315쪽 ------------------------------------------------------------------------------------ <풍산류씨 家學 淵源> 류중영(류경심)-류중엄 류운룡 류성룡-류진-류원지 류진-류원지-류의하 류세철 류세명-류후장-류성화 류성증-류운 류규-류종춘 류심춘-류이좌 류후조 류진-류원지-류세명-류후장-류성화-류운-류종춘-류상조 류이좌 류철조 류운-류심춘-류주목-류도수 류도헌 이만윤 류도귀 이중경 조승기 이계로 류진-류원지-류세명-류후장-류규 박손경-정종로-류심춘-류주목-허훈 류도헌 류도원 이만인 이만윤 류진-류원지-류의하-류후장-이집 류성화-류례 류종춘 류규-류치목 류상조 류이좌-- --류광목 류도휘 류지영 --------------------------------------------------------------------------------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류진은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 반양명학(反陽明學),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재난인 임진왜란에서 국가를 구한 명재상을 길이 추앙받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세째 아들이다. 그의 개결한 인품과 선정(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군민들이 합천군 황강(黃江) 기슭 함벽루(涵碧樓) 옆에 세운 만고인청비(萬古仁淸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전해오고 있다.
어린시절을 제외하고 생애의 절반을 하회(河回)에서 보낸 그는 37세 때 일가 독립하여 상주의 가사리(佳士里)로 이거하였다. 이 곳은 팔공산의 물줄기가 북으로 흐르는 위강(渭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팔공산과 일월산, 속리산의 맥이 이곳에서 끊어져 풍수가에서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8세때 모친인 정경부인의 상을 당하자 그는 어린나이에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두 형과 함께 거상하는 것이 어른 못지않았다고 연보에 기록돼있다.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웃사람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16세 때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경암(敬庵) 노경임(盧景任)의 문인이 됐다. 노경임은 그의 백부 류운룡(柳雲龍)의 사위였다. 아버지인 류성룡을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류성룡은 때마침 북인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아 하회에 낙향해 있었다. 그는 특히 중용(中庸)공부에 몰두하여 그 경의(敬義)를 깊이 깨달았다.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이학이론 [氣以成形理亦賦焉 기이성형이역부언] 비판론을 토론하여 이기론(理氣論)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간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부지암(不知巖)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수일간 묵으면서 삼개조의 문목(問目)을 올려 학문을 강마했다. 류진은 한편으로 34세 때에는 국담(菊潭)으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찾기도 했고 사수(泗水)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만나 학문을 묻기도 했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澗) 이전(李전), 사서(沙西) 전식(全湜)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봉화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봉화를 필두로 하여 일생동안 영주, 청도, 합천, 예천의 목민관을 역임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의 질곡을 풀어주기에 앞섰다. 인조가 이것을 알고는 표리(옷을 말함)를 내려 그를 표창했다. 합천의 목민관시절에는 영남사림의 종장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위토가 무단 점탈당한 것을 되찾아 종손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학문의 근본으로 하는 그의 위학정신(僞學精神)을 임지해서 향민에게 교육하기에 부심했다. 무고로 연류되어 목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중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나 언동(言動)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인조 4년에 형조정랑이 되었을 때에는 묵은 원옥(?獄)을 시시비비를 가려 명쾌히 판결하니 형조판서가 “공이 아니면 이 옥사를 그르칠 뻔 했다고” 하여 그의 강직함을 칭송했다. 때마침 강학년(姜鶴年)의 상소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장령으로 있던 강학년이 피폐한 민력(民力), 인심(人心)의 이산(離散), 도적의 봉기, 기강의 문란 등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소를 올리면서 인조가 천의(天意)에 반역하고 정사에 덕을 잃고 숭례(崇禮)를 지키지 않은 점을 질책한 사건이다. 언관으로서 군왕에게 직언하여 직책에 따르는 책임을 다한 점을 들어 강학년을 극구 옹호했다. 이 때에 그가 급환으로 세상을 버리니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관은 응천일록(凝川日錄)에서 [전 지평 류진은 영남선비들이 추앙하던 바였는데 과감하게 말하다가 시론(時論)에 배척당하고 갑자기 명(命)을 마치니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그의 강직한 인품을 극구 칭송했다.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된 상주의 의병군은 류진을 의병장으로 초대하였다.
이 책은 도산서원이 소장하던 『수암집(修巖集)』이다. 류진(柳袗, 1582~1635)의 시문을 총 4권 2책으로 엮어서 1734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유교넷제공 류진은 그의 성품에 걸맞게 대나무와 연꽃을 사랑했다. 그의 정전고죽기(庭前枯竹記)와 분지연기(盆地蓮記)를 지어 풍우(風雨)에 굴하지 않고 곧음을 자랑하는 그 절조를 찬양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의 한 표현이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몇 편의 수작(秀作)을 남기고 있다. 그 중의 한 편인 임진록(壬辰錄)은 국문학 사상 자조적(自照的) 수기문학의 백미(白眉)로서 높이 평가될 만한 귀중한 국문학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이문영(李文英-대산 이상정 5대祖)을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로 피난다니면서 경험한 사실을 후일 한글로 당당하게 기록한 임진록은 문학적 가치외에도 당시 관리의 부패상과 왜적의 잔학상, 왜적과 결탁한 도적들의 실상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데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임자록(한글로 기록) 한국 두견새에 관해 동물학적 견해를 밝힌 두견설, 상례제설(喪禮諸說), 사례집략(四禮輯略), 격치설(格致說), 자경설(自警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54세 되던 해에 영주 구학사(龜鶴寺)에서 급서(急逝)한 그에게 조정에서는 좌승지와 이조참판을 연이어 증직했으며 현종 3년에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되었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2008-08-27 오전 9:23:27 / 김성규객원기자
류진(柳袗){4}
[요약정보]
G002+AKS-KHF_12C720C9C4FFFFB1582X0
시대
조선 중기
본관
풍산(豊山)
성
류(柳)
자
계화(季華)
호
수암(修巖)
성별
남
생년
1582
연령
54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상세내용]
유진(柳袗){4}에 대하여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 이 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 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1627년에 청도군수 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1634년 지평 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 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이조참판 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嶺南人物考
수암(修巖) 류진(柳袗)
류진 역시 청렴한 목민관으로서 열화 같은 우국충정의 지사(志士) 교육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 선생은 1629년 병산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 ⓒ안동넷
본관이 풍산(豊山)인 류진은 선조 15년(1582) 아버지 류성룡의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났다.
류진의 호 수암도 마을 앞산의 봉우리인 수암에서 연유한다. 류진의 어린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류진은 10세 때 김치중(金致中)에게서 처음 글을 배웠다. 성품이 겸후단직(謙厚端直)하다는 평을 받은
노경임의 문하에서 특히 사서(四書)를 철저히 깨져 학문의 기틀을 잡은 그는 2년 뒤에는
>> 병산서원 존덕사 ⓒ안동넷
그의 연보를 보면 이 때 그는 아버지와 무릎을 맞대고 조선유학계에 중용연구로 이학(理學)의 거봉을 이룬
20세 미만에 벌써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둘러싸고 전개된 주자와 정여창의 이론을 섭렵한 그는 49세 때에
류진의 학적계보는 노경임과 류서애, 장현광의 세 사람을 징검다리로 하여 퇴계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22세에 향시급제 29세에 증광시, 성시(省試)에 연거푸 장원을 차지한 류진은 42세되던 인조원년에
봉화현감 재직시에는 전무(田畝)의 제도를 시행하고 감세조치를 취해 농토와 군민이 크게 늘어났는데
수암선생문집(修巖先生文集) 목판, ⓒ유교넷제공
그는 한편으로 흥학(興學)에 중점을 두어 오성(五性: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과 오륜을 밝히는 것을
류진은 남달리 강직했고 의를 보면 참지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 무옥사건에
시시비비가 분명했던 그는 그의 정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조 12년 그가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에
류진은 이 사건이 터지자 강학년을 극형에 처하라는 조정대신들의 벌떼같은 주장에 맞서 홀로 강학년이
46세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류진은 향리인 상주에서 반청창의(反淸倡義)의 선봉장이 됐다.
류진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의
류진이 11세때 임진왜란을 당해 매형
이 밖에도 김직재의 무옥에 연류되어 경옥(京獄)에 유치된 때의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출처] 수암(修巖) 류진(柳袗) - 김성규객원기자 | 안동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