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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2 - 삼국시대2 조조의 영욕: 관도대전과 적벽대전
1. 관도대전 :
조조가 헌제를 영천군 허현으로 모시고 있을 때인 196년에 하북을 평정하여 수십만 대군을 가지고
호령하던 원소는 199년에 공손찬을 섬멸했으며, 조조는 황제를 끼고 명분을 갖추어 주변 세력
을 정리하고 내실을 다지니 결전은 불가피한데... 원소 세력은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주
였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서주, 예주 였으니 하북 4주에 세력을 갖고 있었던 원소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탁, 광양, 어양, 우북평에만 자기 세력이었지 유주의 극동 지역은 요동
공손씨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선우보와 염유는 조조측에 기울어 있었으며 병주
는 원소가 태행산의 흑산적을 격파하고 조카 고간을 자사로 임명하긴 했지만.....
흑산적 지도자이자 공손찬의 동맹이던 장연은 상산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청주는 원소가 아들 원담을 자사로 임명해 평정했지만 그 전에 주민 상당수가 청주병이란 이름으로
조조에게 넘어가버렸고, 영토는 원소 세력을 이끄는 원담과 공손찬의 장수 전해의 싸움으로 인해
황폐화되었으니... 중앙 정부를 장악한 조조와 개부의동삼사 원소 사이에 청주 지방군벌에 대한
경쟁적인 회유전이 벌어지던 상황이었으며 장패가 공격해온지라 병사를 동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반면 조조는 연주, 예주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사례 지역은 예전에 이각, 곽사, 장양이 부하
들의 배신들로 피살되거나 잔당들이 토벌되어서 세력권에 넣었으며... 서주 지역은 여포의
패배와 원술의 몰락, 유비군의 해산을 성공시킴으로써 조조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얻기는 했으나.... 자신에게 위협적인 세력을 중원의 핵심 지역에서 모두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원소의 관도대전 개시는 협천자(協天子) 이점을 가진 조조가 세력을 불리기 전에 적의 심장부를 치려는
시도이니 청주를 맡고 있어야야 할 원담이 그와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모았음을 시사하는데... 옛 본거지인 예주와 여남군, 천자가 있는 허현을 공격하는 군대가 그의 장수들
이 아니라 독립세력인 유비와 유벽이라는 것은 주 공세에서 병력을 많이 빼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유비에게서 막 서주를 빼았은 데다가 서주 대학살로 인해 초토화됨은 물론 조조에 대한 반감
으로 뿌리가 깊었고.... 사례 지역 역시 서주와 비슷한 시기에 평정했으며 동탁에 의해서 초토화
되었기에, 조조는 사실상 연주와 예주 전력으로 원소에 맞서야 했던 셈으로 4개 주에 수비병을
분산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었고 유비의 예주 여남군 지역 호응 및 수도 허현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원소는 북방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배후의 위협을 줄이고 오환족등 기마대를 활용하고 있었으며,
조조를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으로 규정한 시점과 조조에 의한 동승 이하 700명의 대숙청
사건이 절묘히 겹쳤으니 동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를 원소가 영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원소가 명분을 얻었으니... 유비가 온다니 업성에서 이백리 밖까지 몸소 나와 극진히 예우합니다.
투입 병력은 삼국지연의에서는 70만 대 7만, 사서상으로는 10만 대 1만으로 조조군은 원소군
과 10배 이상의 병력차가 있는데.... 배송지는 이에 대해 반박했으니 아무리 봐도 1만은
터무니 없는게 조조가 처음 군을 일으켰을때 군사 5천이 있었고, 청주의 황건적을 흡수
한데다가 군사를 모병한걸 생각하면 원소군 10만에 대해 조조군은 4~ 5만 정도 라고 봅니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러 서주로 진군하자 원소의 대군이 남하하니... 일단 우금의 활약으로 격퇴
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원소군이 백마에 있는 조조군의 장수 유연을 공격하자 조조군이
이에 대응하여 서전인 백마, 연진에서 전투를 벌였으니, 관우의 비범한 무예가 빛을 발하는데
일기토(一騎討) 를 통해 백마 전투에서 원소군의 맹장인 안량의 목을 베는 성과를 얻은 것입니다.
연진으로 쳐들어온 원소군의 맹장 문추 또한 순유의 계략으로 전사했지만 조조군은 도하 거점
인 백마, 연진을 내주며 원소의 도하를 막지 못하고 관도까지 밀려나게 되는데... 하지만 조조
의 획에 따른 후퇴였으니 시간이 흐르면 보급선이 길어지는 원소군에게 상황이 불리해질
수 밖에 없었고, 관도에서 버티기만 해도 원소군은 보급으로 무너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8월 원소가 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십리에 이르자 조조군도 맞서 동서로 수십리
에 이르는 장대한 진영을 펼쳤으니..... 한진춘추에 따르면 허유가 원소에게 조조군은 여러
군대를 나누어 대치하게 하고 원소 본인은 다른 길로 황제인 헌제를 탈취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원소가 거절한 것으로 보아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것 입니다.
원소가 토산(土山) 을 세우고 높은 망루를 만들어 화살을 쏘아댔으며 땅굴을 파 조조의 진영을
기습하니.... 조조는 땅굴 안으로 뜨거운 쇳물을 부어 막아내고 벽력거도 만들어 원소의 진영
을 격파하는데, 그러나 토산에서 원소군이 조조군 진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니 조조군 병사들이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 합니다.
저수는 지구전을 해서 조조를 말려 죽이라는 조언을 하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구전
이었으니 대치한지 오래돼 백성들을 피폐하고 곤궁해져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원소에게 호응하는데,
조조는 상황이 불리한데다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자고 할 정도로 몰렸지만
순욱이 원소는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하니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하였기 때문에 조조는 끝까지 버팁니다.
한편 여남에서는 유벽이 원소에 호응해 허도를 경략하기 시작하자 원소가 유비를 보내 유벽
을 도우니 여남 주변의 많은 군현이 호응했고 수많은 무리가 모였으니.... 조조가 근심
했으나 조인은 유비가 원소군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 군사들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후 기병으로 유비를 공격해 돌아가게 만들고 유벽의 둔영을 깨뜨립니다.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승이 도착하자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써서 서황을 보내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불태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하지는건 오히려 조조군이니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돼
병사들이 피폐해져 함락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조조는 6개월 동안 잘 버텨왔지만, 외부의 정세는
조조에게 나빠지는데다 원소의 후방 교란으로 인하여 보급난 까지 겹쳐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10월 군량이 보름치 밖에 남지않은 상황에서 기회가 찾아오니 원소의 모신 허유가 심배와의 갈등
끝에 조조에게 투항한 것이니.... 조조는 말 그대로 맨발로 뛰쳐나와 허유를 맞았으니 원소는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등 5명에게 군사 2만여명을 이끌고 호송하게해,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오소라는 곳에 숙영하는 상황이었는데 허유는 순우경을 공격하도록 말합니다.
좌우에서 의심했으나 순유와 가후가 조조에게 따르도록 권했고, 조홍을 남겨 관도의 본진을 수비
하고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순우경이 지키던 오소의 식량고
를 급습하는데, 원소는 증원군을 더 보내자는 장합의 조언을 무시하고 곽도의 조언으로 오소구원
보다 조조의 본진을 향하니 장합과 고람이 이끌던 주력군은 조홍의 방어로 함락하는데 실패합니다.
조조는 경기병대로 구성된 원소 구원병력이 뒤에서 오는데도 군사를 나누어 맞서라는 주변 조언도
무시하고는... "적이 등 뒤에 오면 말하라!(賊在背後,乃白!)" 라 명령한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격렬하게 저항하는 순우경군을 집중 공격하니, 구원병력이 오소에 다다르기 전에 순우경군이
무너지고 원소의 보급선은 불타버렸으며 직후 조조는 뒤돌아 서서 원소의 구원병까지 격파합니다.
조조의 판단은 삼국시대에 있었던 전투 단위 싸움들에서 지휘관이 내린 최고의 판단 중 하나로 뽑을 수
있겠는데..... 원소군의 경기병을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다면 오히려 순우경군을 밀지 못하고 작전
이 실패할 수 있었으니, 조조는 오히려 과감하게 순우경을 격파함으로써 포위될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조조의 본진을 공격해 조조의 뒤를 끊으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오소의 패배 책임을 두고 분쟁이
벌어진 결과.... 곽도가 조조의 본진을 치기 보다 순우경 구원을 우선한 원소의 부장인 장합을
참소하자, 장합은 두려워해서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진지를 불태워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합니다.
정상적인 군신관계라면 이런 참소가 받아들여질리 만무하지만 전풍의 예에서도 보듯, 원소는 자기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라면 무고한 신하 하나 죽이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
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으니.... 장합이나 고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800기의 군사만 이끌고 황급히 달아났고 원소군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원소가 여양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는 점으로 보아 장합의 배반 여파로
총사령관 원소의 생사마저 불분명한 지경에 놓였던 모양이니.... 결과적으로 조조군은
절대적인 열세를 오소 전투로 원소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창정
에 있는 원소군을 쳐서 깨뜨리고는 항복한 원소군 포로 5만여명을 모두 다 파묻어 죽입니다.
관도대전 직후 조조는 원소 진영에 있었던 서신들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들이
발견되었으니 원소와 내통하던 이들은 처벌하는게 마땅하지만... 조조는 그냥 이것들을 열어보지
않고 모두 불태운 다음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마라고 당부했으니, 이는 자기가 그만큼 관대하다는
의미 퍼포먼스인데...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물리쳤음에도 그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소의 세력이 원담, 원상, 고간의 셋으로 동강났음에도 워낙에 강대했기에 잔존 세력을 모두 무너
뜨리고 하북을 평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니... 실제로 조조는 원소가 죽은 이후에도
공격하지 못했으나, 후계자 분쟁이 시작되고 나서야 원소의 잔존세력들을 공격하니... 심배를
제외한 원씨가문 진영 인사들 대부분은 눈치 보다가 적당한 기회에 배반해서 조조에게 붙습니다.
2. 적벽대전 :
적벽대전은 관도대전, 이릉전투와 더불어 삼국지 3대 전투로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인데.... 적벽대전이 일어난지 1000여년이 지난 1363년
진우량과 주원장의 대결인 파양호 전투로 부터 모티브를 얻어서 각색한 것이라고
하는데, 츠비 (赤壁: 적벽)는 엄청난 수역으로 원래 명칭은 푸이(蒲圻: 포기) 였습니다.
조조는 원소와 아들들을 처리하고 208년 6월 한나라 승상에 오른후 7월에 남하헤 형주를 침공해
9월에 항복을 받아내니... 유비군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을 받았으나 하구로 도망치는데 성공
하자, 조조는 가후가 말리는데도 강동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는데 정욱은 손권이 조조를 감당
할수 없으니 빼어난 명성에다가 관우와 장비같은 용장을 가진 유비와 손을 잡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비가 패퇴할 동안 208년에 형주의 유표가 죽자 오나라에서는 노숙이 유표의 세력을
흡수하려고 했지만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해버렸고.... 유비는 장판파에서
추격해오던 조조의 오천 기병에게 한바탕 당한뒤라 천여명으로 줄어 곤궁해 졌습니다.
하지만 관우가 보존한 병력에다가 패잔병을 수습하고 유기가 1만명을 보충해 주었으니.... 적벽과
남군 공방전에서는 손권과 비슷한 2만명 정도를 보유했는데, 당양의 장판에서 유비를 만난
노숙이 이제 어찌할 요량이냐고 묻자 유비는 부러 옛 친구 오거에게 의지하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노숙은 장판에서 유비를 만나 손권과 결합하기를 설득하였고 제갈량에게는 제갈근과 친분이 있음을
밝히니... 유비는 손권의 영지였던 악현 번구에서 행군을 멈춘후 제갈량을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보내 동맹의 서약을 맺었는데, 당시 유비는 유기와 함께 강하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자치통감과
제갈량전에서도 조조군을 격파하면 정족 (형주의 유비, 양주의 손권)의 형태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시상에서 손권을 만난 제갈량은 "유비님을 도와주어 싸우도록 하십시오. 만약, 이길 수 없다고 생각
되면 그냥 조조한테 항복하시든가요." 하고 말하며 오나라의 국력을 무시하니... 손권은 부아가
치밀어 되문든데 "그럼 어째서 유비는 조조한테 항복하지 않는가?" 그러자 제갈량은 유비를
손권과는 격이 다른 인물로 추켜 세움으로써...... 손권을 겁 많은 졸장부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손권은 발끈하여 결연하게 항전의 의지를 밝히자 제갈량은 아직 유비에게 2만명의 군사가 있다면서
강노지말 고사를 예로 들어 조조군은 밤낮으로 달려 남하하였으므로 지친 데다가 형주의 인심
마저 얻지 못하고 있으니.... 유비와 손권의 군세가 힘을 합하면 솥의 세 발과 같은 균형잡힌 세력
을 이룰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니 손권은 납득되어 부하들과 동맹에 대해 심도있는 의논을 합니다.
제갈량은 "형주를 토대로 촉을 삼켜라" 고 말했고, 노숙은 "형주를 삼켜서 촉을 어렵게 만든
뒤 조조에 맞서라" 고 말한 바 있으니... 훗날 이 때문에 형주를 두고 서로 불같이 싸우게
되는데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로 형주를 적절히 나누어 형주 분쟁을 종결하려고 했지만,
노숙 사후 여몽은 형주 분할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유손 동맹은 기어이 파탄을 맺고야 맙니다.
조조의 편지에... “천자 말씀을 받들어 죄인을 처벌하였소.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모았소.
수군 80만명을 다스려서 장군과 함께 오에서 만나 사냥하려 하오.” 형주의 유종도 항복했으니 손권의
양주를 정복하겠다는 뜻으로 손권 자신이 10만이라고 칭하는 병력이었으나, 각지에 흩어져서 반란병
들을 토벌하던 세력도 있어서 전군은 동원할 수 없으니 8배라 장소와 진송을 필두로 항복을 주장합니다.
조조는 천자를 끼고 있어 명분이 있고 오나라 지리적 이점인 장강은 조조가 형주를 얻었기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유표의 몽충 1천척을 비롯한 잘 조련된 수군을 얻었으니 항복하자는 것인데,
손책과 손권이 구축한 세력은 동오 지역의 호족 연합체였기 때문에 난을 피하기 위해 손씨
세력에 가탁했을뿐, 한나라 황실이라는 중앙의 권위에 대항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없었습니다.
손책이 영입한 화흠은 조조에게 붙어버렸고 손씨 내부도 사촌형 손분은 아들을 볼모로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려 할 정도였는데.... 오직 노숙만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화장실에 가는 손권을 따라
잡아 처마 밑에서 만나서는 신하들이야 항복하면 적당히 대우를 받고 태수의 자리까지 오를수도
있으나, 주공만큼은 갈곳이 없으니 어서 대계를 정할 것을 권하자 손권은 파양에 있는 주유를 부릅니다.
파양에서 돌아온 주유는 사실상 한황실의 적인 조조를 오히려 이 기회에 무찔러야 한다며
항복측의 의견을 반박하고 네가지 이유로 인해 이길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 수전에서는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
2. 북쪽에는 아직 마초, 한수 같은 배후의 세력이 남아있다는 것.
3. 지금은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것이 없다는 것.
4. 중원의 사람들이 이 먼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라는 것.
손권은 전쟁을 결심하고 “사악한 적이 황실을 폐하고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지 오래되었소. 원씨 두 사람,
여포, 유표와 나만을 꺼렸을 뿐이오. 몇몇 영웅은 소멸되었고,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그리고는 칼을 뽑아 앞에 있는 주안을 찍으며 호통을 칩니다.
주유는 80만을 염려하는 손권에게 조조가 거느린 병사는 16만명에 완전히 항복하지 않은 유표의 병사
8만이 다라고 하며 5만의 병사만 주면 무찌르겠다고 하니... 손권은 주유의 등을 어루만지며 “공근,
경이 말한 것을 들으니 내 마음과 같소. 이미 3만명을 뽑아놓았고 배와 양식, 전쟁도구를 다 갖추었소.
경과 자경, 정공은 편리한대로 앞서 출발하면 나는 인원을 모으고 양식을 수레에 싣고서 지원 하겠소.”
1만 오군은 손권이 중군으로 거느리고 2만 오군은 주유와 정보를 좌우독으로 삼아 유비와 함께
조조와 맞서게 하고 노숙을 천군교위로 삼아 방략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3만 밖에 동원
하지 못한 것은 주전파와 항복파 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싸우기로 결정되었어도 몸을 사린 호족
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니, 근본적으로 호족 연합체인 동오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할수 있습니다.
번구에서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
하는데 주유는 부서를 떠날수 없다면서 거꾸로 유비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수는 없다면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동맹이랍시고 이렇게 나오는 주유의 태도에 저 둘이 화가 난 모양이라 달랜 것입니다.
유비는 주유의 군대가 3만인 것을 듣고는 실망감을 나타내며 적다고 말하자 주유는 불과 2만인 주제에
'그냥 자신이 공을 세워 적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 고 오히려 핀잔을 주니 유비는 예전
에 만났던 노숙을 불러다가 함께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고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 테니 그때 까지 기다리라' 고 말합니다.
두 군대가 적벽에 집결하자 주유의 예측대로 조조 군사들은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으며
첫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해 장강 북쪽으로 물러나니... 주유는 조조군을 견제하고자 남쪽
강 언덕에 진영을 세웠는데, 하지만 양측의 병력 차이는 여전히 컸을뿐더러 시간을 끌면
끌수록 오나라가 불리해져 가는데 그렇게 속절없이 대치하던 어느날 황개가 주유를 찾아옵니다.
주유를 찾아온 황개는 적이 배를 서로 붙였음을 지적하며 화공을 사용할 것을 건의하니 주유는 그
계책을 받아들여... 몽충 10척에 마른 억새와 장작을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휘장으로
덮어서 위장한 다음 위에는 정기를 세우고 미리 주가를 준비하여 그 끝에 매고는 조조에게 항복
의 편지를 보내니,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만나 묻고는 결국 황개의 사항계에 속아 넘어가 버립니다.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열척 함선을 최전방에 내세우고 강 가운데서 돛을 올려 나머지 배와 함께 나아가니
조조군의 병사들은 "황개가 진짜로 항복하러 왔다!" 며 좋아하였지만... 황개는 조조의 배에서 2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인화물질에 불을 붙여 조조의 함선들과 충돌하니, 강한 바람을 타고 엮어져 있던 조조
의 배들은 불에 타 침몰하는 배가 부지기수였으며 거센 불길은 강 언덕 위에 있던 군영에까지 이어집니다.
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이 하늘에 피어올랐고 사람과 말은 불길에 사로잡혀 불타올랐으며 뜨거움을
해소하고자 강에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은 자들이 셀수 없이 많았는데... 뒤이어 주유는 경무장한
정예병을 인솔하여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뇌고를 쳐서 오림의 조조군을 완벽하게 무너
뜨렸으니, 유비 역시 공격에 참여해 조조와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파하고 그 배를 불태웠습니다.
일등공신 황개는 유시에 맞아 부상을 입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배에서 떨어져 강에 빠졌는데 인솔 병사
들이 구출했으나 어둠속에서 누군지 몰라 화장실 안에 넣어버렸으니.... 결국 황개는 병사들의 실수로
위생상태가 좋지못한 화장실 속에서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다행히도 한당을 보고는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쳐서 살아났는데 하마터면 전쟁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운 구국영웅 장수가 화장실에서 죽을뻔 했다는?
유비와 주유가 진격하니 조조는 화용으로 부터 도보로 달아나다가 중간에 진흙탕을 만나서 길이 통하지
않고 날씨 또한 바람이 엄청 불어서 군사들에게 풀을 져다가 메우게 하고서야 기병이 마침내 지날
수 있었지만... 기병들에게 길을 만들어준 지친 군사들은 사람과 말에 밟혀서 진흙 속에 빠져 죽었으며,
유비와 주유는 계속해서 조조를 쫓아 남군까지 도착하는데 도망쳐 나온 조조는 갑자기 웃기 시작합니다.
주위 제장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는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고 잠시 후 유비가 불을 놓았으나
이미 조조는 지나간 뒤였다는데... 내가 유비라면 진작 화공을 해서 꼼짝 못하게 했을 거라는 발언은
안도함과 동시에 인정한 적수지만 그래도 자기 보다는 아래라고 여기는 심리를 반영한 거라고 봅니다.
둘의 마지막 맞대결 한중 공방전 때도 유비가 법정의 조언을 따라 하후연을 계책으로 전사시켰다는 말을
들은 조조가 '그럼 그렇지. 유비 혼자서 그런 계책을 짜냈을 리가 없다.' 고 유비를 헐뜯으며... 쉽사리
유비를 자기와 같은 급의 맞수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화용도 추격은 육지에서 펼쳐졌고
연합군은 수전을 펼친 직후 퇴각할 시간을 벌려고 남겨둔 조조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평어람에 조조가 뗏목을 만들었고 주유가 불태웠다고 하며 오주전은 조조가 남아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고 하고... 무제기에서는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라고
대장을 유비로 기록하고 있으며, 산양공재기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 것을 유비라 기록
하고 있는데 유비는 유기와 관우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전에 함께 참여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선주전에서는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배를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역병이 돌아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
갔다' 고 되어 있어 조조군을 대파한 주장이 유비고 주유, 정보가 힘을 합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주전에서도 유비가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뒤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하니 선주전,
무제기, 오주전 셋 다 조조를 격파한 걸 유비로 기록하고 있는 셈인데... 유비가 가진 반조조
세력 결집능력과 관위등을 따진 것만이 아니라, 유비도 주장의 신분으로 전투에서 주유의
손오의 군대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고 활약했고 이후 남군공방전 까지 주유와 같이 진행합니다.
적벽대전은 겨울(음력 11월의 동지철)에 일어났으니 조조가 전투를 서둘렀으며 패배로 이졌는데...
조조군은 유비를 쫒기위해 강행군을 하였으며 이들은 물 위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조조군의 압도적으로 강력한 전력이었던 기병은 말먹이를 확보할 수 있는 계절이 아니었으며,
배 위에선 기병의 강점이 발휘될수 없으며 조조군이 전염병으로 인해 고생한 것도 패인으로 봅니다.
강남은 농경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천연두가 돌기좋은 기후조건에다가 군대가 대규모로 뭉쳐 있으면
나오는 쓰레기에 파리와 쥐가 대량으로 꼬이면서 흑사병도 창궐하기 쉬우며... 강 주변에서는
말라리아도 쉽게 창궐하기 때문에 주유는 역병이 돌 것을 알수 있었고, 주유군의 화공에 대책없이
당한 것을 보면 적벽이 좁은 협곡을 끼고 있어 대선단을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인 듯 합니다.
합비에 대한 수비가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면 조조는 형주의 유종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할 당시는
손권 까지 공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이는데..... 조조가 자랑하는 하북 기병으로 원술을
죽이고 차지한 회하에서 장강으로 도하해 건업을 치는게 더 빠르고 간단하니, 오히려 형주에서
강을 타고 내려가는게 번거로운데 손권은 그 위험성 때문에 회수를 손에 넣겠다고 고생하게 됩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싸우는 것은 치밀한 계획 끝에 나온 것이 아니라 형주 유종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내친
김에 손권까지 정복해보려는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그 결과, 조조군은 만반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쁜 컨디션으로 대군이 싸우기에도 불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강요받은 것이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조조가 지휘한 전투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조의 병사가 20만 정도라면 적벽에서 수전이란 도하를 놓고 벌이는 일부 병력의 전초전이라
수전에 참여한 수 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오림 쪽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조조군이 수전
에서는 패배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조조 자신부터 혼란에 빠져 화용도까지 도망간 것은
전술 실책인데, 오림에 방어선을 쳐서 도하하는 적을 막아낼 수도 있었지만 조인에게 남군
을 수비할 병력만 남기고 형주를 포기한 채 하북으로 물러갈 정도로 궤멸적인 참패였습니다.
조조군의 적벽에서의 참패는 삼국지 연의에서 묘사한 것과 유사한 대참사로 추측되는데... 이때 병력과
물자 손실의 여파 때문인지 조조는 그 이후로 대규모 총력전을 통해서 유비나 손권을 멸망시키려는
시도를 하지않고 국지적인 전투의 승리에 만족하며 병력을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거저 얻은
남형주는 그대로 유비와 손권에게 넘어가버렸고 덕분에 유비는 훗날 익주로 진출할 발판을 얻게 됩니다.
장수 중에서 역병에 걸린 자가 없는걸 보면 진수가 조조의 패배 책임을 피하기 위해 면피성 핑계로 과장
했을수도 있으며... 배송지는 가후의 전략에 대해 시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니 당시, 한수나
마초등 무리는 관서지방에서 승냥이같이 중원을 노리고 있었고, 위의 무제가 형주에 느긋하게 앉아
위광으로 오지방을 다룰 여유가 없던게 명백한 상황이었으며 형주는 손권, 유비 쟁탈의 목표였습니다.
확전을 제지한 가후의 식견이 옳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적벽대전을 결행한 조조의 그릇된 판단
이 유례가 없는 대참패를 불러왔기 때문인데, 조조의 선택을 지지한 배송지 조차도 "조조가 손오 지역
을 얻음에 장차 이보다 더 안전한 기회가 없었으나, 결국 적벽에서 대패함은 그의 운수가 사나웠기
때문이며… 하늘이 이와 같이 한 것일 뿐 사람의 노력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조조가 성급하게 싸움에 임한 이유는 조조는 50대 중반이니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지만 유비를
제외한 손권, 주유, 제갈량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자신보다 한 세대 이상 젊었으니...
젊은 세대가 성장하며 위협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군을 돌렸다가는 다시 언제 또 이런
기회가 또 있을른지, 자신이 직접 출진할 수는 있을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감행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첫댓글 관도대전 적벽대전 자세한 내용 잘 들엇습니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술을 격파하니
조조는 사실상 중국의 주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