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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한 후,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며 이듬 해 국호를 朝鮮이라 하고 ,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다.
태조 7년에 제 1차 王子의 난으로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上王이 된다. 1400년 태종(이방원)이 즉위하자 太上王이 되고, 太宗 8년 74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 이성계 영정..보물 제931호이다. )
王建이 세운 고려의 말기.. 우왕시절. 최영장군과 이성계는 동 시대 인물이었다. 친원파(親元派. 몽고)인 우왕과 최영장군은 明나라를 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요동지방(만주)을 차지하려 계획을 세우고 이성계를 보낸다.
4대 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에 있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장군을 체포, 유배보내고 우왕을 폐위시킨다.(1388년). 그 후 창왕과 공양왕을 내세우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1392년 스스로 王位에 오른다.
이성계, 민족의 반역자 ?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지만.... 고구려의 옛 땅을 정벌하라는 王의 지시를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스스로 王이 된다.
역사학자들은 그 당시의 明나라 실력과 정세로 보아 이성계가 진격한 만큼 만주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성계는 그저 반란군일 뿐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 민족의 반역자일 뿐이다.
물론 당시 공민왕시절부터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간의 갈등으로 인한 요동정벌 계획이기는 하였지만, 아쉬운 기회이었슴은 분명하다. 그 후 조선 500년 내내 明나라를 섬기며 신하로서 살아야 했다. 혹자는 이성계를 화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최영장군을 애국자로...이성계는 민족의 반역자로 폄하하며 " 인민의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동조하면 친북세력(親北勢力)이나 빨갱이가 되는지 모르겠다.
왕릉 앞에는 개울을 만들어 다리(금천교)를 건너 가게 되어있다, 다리를 건너 홍살문을 통과한다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王位에 오른 후 7년되는 해에,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하여 왕위를 定宗에게 물려주고 , 2차 王子의 난으로 이방원(太宗)이 즉위하자,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 버린다. 이 때
옥새를 가지고 간다.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위하고, 옥새도 돌려 받을 겸, 태종은 아버지를 환궁시키기 위하여 무학대사 등 사신 즉, 차사(差使)를 여러 차례 함흥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 그 사신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이를 "함흥차사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아들 이방원을 오랫동안 멀리 하였던 이성계의 행동으로 백성들이 지어 낸 말이며,
이 얘기를 옮겨 적은 연려실기술 등으로 전해내려 오는 야사(野史)일 뿐이다. 몇 차례 사신을 보낸 것은 맞지만 그들은 전부 살아 돌아 왔고, 결국 이성계는 한양으로 환궁한다.
의정부 議政府
한양으로 환궁하던 이성계는 도중 소요산에 머물며 환궁을 다시 거부하고, 태종은 다시 사신을 보낸다. 결국 환궁하는 이성계를 맞이 하기 위하여 태종은 의정부(議政府)를 총동원하여 마중나간다.
지금의 의정부이다.
의정부는 모든 관리들을 통솔하고, 정치를 총괄하는 최고의 기관이었고, 여기에는 영의정,우의정,좌의정이 모두 속해 있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입법,사법,행정을 총괄하던 명실상부한 최고의 정치 기관이었다. 의정부를 총동원하여 이성계를 맞이 하였던 곳에서 유래되어 지금의 의정부가 되었다.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神道).. 높낮이가 달라 영혼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다르며,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그 이유는 죽은 자 앞에서 조용히, 천천히 움직이라는 의미이다.
봉분에 오르는 길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도 다르다. 난간이 마련되어 있는 계단은 오로지 죽은 자의 영혼만이 다니는 계단이고, 王이라 할지라도 옆의 검소한 계단을 다녀야 한다.
제1차 王子의 난( 태조 7년. 1398년)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 태조는 정비(正妃)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서 방우, 방과(후의 정종), 방원(후의 태종),방간 등 6형제를 두었다. 계비(繼妃) 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는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을 두었다. 태조는 계비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외당한 정비 소생의 아들들, 특히 이방원의 불만은 매우 컸다. 한편 정도전은 방석을 끼고 돌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권(臣權)의 강화 및 왕권의 약화를 추진한다.
결국 이방원은 휘하 세력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세자인 방석,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고 만다. 이 때 이방원의 추종세력들은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正妃 소생인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책봉한다. 후에 정종이 된다.
제2차 王子의난 (정종 2년. 1400년)...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종은 정비에게서 소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서자(庶子)들만 낳았다. 다시 미묘한 후계문제가 발생하는데... 태조 정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世子의 지위를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인다.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이 이기고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지며, 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된다.
이를 박포의 난이라고도 하는 이유는...박포는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우나 일등공신이 되지 못하여 방원과 반목을 벌이다가 방원에 대한 방간의 불평을 꼬드겨 방간의 거병을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묘 또는 왕릉의 봉분에는 잔디가 심어진다. 그러나 조선 1대 태조 임금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그 까닭은.... 태조 이성계가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태종은 아버지를 멀리 모실 수 없어, 대신 고향인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어 준다.
억새풀은 특성상 자주 깎으면 죽게 되므로 1년에 한번 , 한식날에 깎아 준다. 태조가 1400년에 승하하였으니 , 이 억새는 600년 넘게 이 봉분을 덮어 주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좌향(坐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좌(坐)란 혈(穴)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능의 뒷쪽에 배산이 있고, 경사지 밑 부분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곡장)을 두르고, 곡장 안에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밑으로는 12각의 호석(護石)을 둘러 봉분을 보호했는데, 이를 병풍석이라고 한다.
병풍석은 지대석 위에 우석을 놓고 사이사이에 면석 12기를 세웠는데, 면석에는 중앙에 12방위를 담당하는 12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맞게 양각하였다. 이 십이지신상은 모든 방위의 외침(外侵)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석이 감싸고 있는 봉분의 주위는 다시 난간석으로 둘러 보호하였다. 난간석은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인 석주,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접근을 막는 죽석, 죽석의 중간에 받쳐둔 작은 기둥인 동자석주로 구분되었다.
난간석 바깥으로는 石羊 4기를 동서로 나누어 세우고, 石虎 4기를 북쪽에 2기, 동서의 석양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밖을 향하게 하였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느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추존된 왕릉의 경우 석호와 석양의 수르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봉분 바로 앞에는 上石을 두었다. 상석 아래에는 귀면 모양을 새긴 고석(皐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는데,험상궂은얼굴을 한 귀면 중에는 4개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고, 이보다 한단 아래에 장명등(長明燈)을 두었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가 후에는 차츰 사각형 지붕으로 변하였다. 장명등 아래에는
양쪽에 文人石 하나씩과 석마(石馬) 한필씩을 각각 세웠고, 그 아래에는 武人石 1쌍과 석마 한필씩을 세웠다.
정도전...이성계와 손을 잡다.
三峰 정도전(鄭道傳)은 1360년(공만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북한산) 옛집에 은거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부모가 잇따라 죽자 영주에서 3년간 시묘(侍墓)생활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정도전
신돈이 제거된 후 성균관박사에 기용되었으나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다시 정치적 파란을 겪는다. 당시에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정도전은 친명파이었다.
1375년 (우왕 1) 원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고려 조정은 정도전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정도전은 "내가 가서 사신의 목을 베어 오거나 체포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 일로 정도전은 나주의 천민마을로 9년동안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살이가 끝난 , 우왕9년(1383)에 이성계를 찾아간다. 혁명을 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정도전을 지원하기로 약속한다. 이후 정도전은 혁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후 작업에 더욱 가속이 붙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設計者가 된 것이다. 정도전은 한양 천도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경복궁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다. 無學大師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무학대사가 추천한 자리는 동향(東向)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景福宮이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다.
태조 이성계와 無學大師는 친구와 같이 막역한 사이로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한사람은 새 왕조의 창시자로, 한사람은 조선 건국의 왕사(王師)로서, 개국(開國)의 기틀을 다진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농담
어느날,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산책을 하다가 무학대사에게 누가 더 농담을 잘 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제의한다. 그래서 이성계는 먼저 무학대사에게 농을 걸었다. " 대사! 내가 보기에 스님은 꼭 돼지같소. " 그런데 이 말에 무학대사는 뜻밖에도 " 소승이 보기에 전하는 부처님 같습니다."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이성계가 의아하여 ...아니 농담을 하기로 해놓고 어인 말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대답한다. 그 말은 제가 드리는 농담의 말입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이성계는 아니 대사! 그 말이 무슨 농담이란 말이요?하고 정색을 하자 무학대사가 말하기를...
돼지의 눈에는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혼유석(魂遊石)... 한자의 뜻 그대로 영혼이 쉬며 놀던 곳이다. 훼손되었다.
이성계의 고려말 행적
이성계가 정치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공민왕19년(1361) 아버지 이자춘이 죽고부터이다.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선대로부터 토착기반을 물려 받아, 함흥지방의 유력한 지방세력으로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천호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은 99년동안 빼앗겨 왔던 동북면(東北面..함경도지방)지방을 수복시키려 했는데, 그 쪽 세력의 내응(內應)을 받아야 했다. 몽고의 元나라가 망해가는 세계 정세를 읽은 이자춘은 고려에 귀순하여 공민왕의 수복정책을 도왔다.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이자춘에게 개성에 집 한채를 주고, 함경도의 본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이자춘이 공민왕10년에 죽자, 그 세력기반을 그대로 이성계에게 물려받아, 동북면 천호가 되어, 고려사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성계가 고려역사에 나타난다. 공민왕시절에는 끊임없는 외침의 시대이었다. 남쪽으로는 왜구(倭寇)가 300번 이상 침입하였으며, 북쪽에서는 원나라의 세력이나 여진족, 중국본토에서 반란한 농민들 등 침입이 그치지 않았다.
위급할 때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서 수도 개성이 2개월동안 점령당하면서 고려의 백성을 10만명 이상 죽기도 하였다. 이런 외침의 시기에 무장(武將)이 출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성계는 명궁(名弓)으로 만주까지 세력을 미칠 정도이었고, 말을 타고 군사작전을 수행할 때 백전백승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고려입장에서 보면, 가장 변두리인 함경도지역의 토호이었지만, 차차 고려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그러나 우왕13년(禑王)까지는 이성계가 뛰어난 장수이상의 정치적인 인물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성계는 우왕 8년경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 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히고, 새로운일을 도모하자고 의논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권문세도 출신이 아닌,정도전을 중심으로한 젊은 유학자들의 중심이 된 것같다.
이 당시 이성계는 최영장군과 손을 잡고, 당시 집권세력이며 부패한 염흥방,이인임 등을 축출하고, 또한 위화도회군 후, 최영장군마저 제거하게 된다.
당시 이성계가 거느린 휘하 군사들은 대부분 여진족(女眞族)이었으므로 이들을 고려군사로 보기는 어렵고, 이성계의 사병(私兵)성격이 짙었다. 여진족은 곧 만주족이며, 후일 淸나라를 세운다.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태조 이성계의 시비(詩碑)... 동구릉 입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