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땅바닥에 절이라도 할 자세로 그녀에게
애걸했다. 이것이 회사의 명운을 좌우할 출장길이라고 덧붙이며 그녀의 표정을 살짝 엿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녀의 눈동자를 알아차린 나는
그녀를 향해 나는 2발짝 다가섰다. 내가 똥인지 된장인지를
가늠하고 있을 이 몇초의 찰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나는 일단 몇 초간의 시간을 벌어놓은 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좀전에
인터넷에서 찾아낸 그녀의 수임사건 일지가 나온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걸 보시면 저를 이해하실 겁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제 사건은 어떻게 아셨나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난 두서없이 얘기를
쏟아냈다. 해외건설 현장에서 몇 년간 근무하면서 매달 급여를 노모에게 송금했던 일. 동네 저축은행에 조금 이자가 싸다는 이유로 자식의 급여를 꼬박 꼬박 예금했던 노모와 이를 노리고 사기행각을
벌인 은행창구 여직원의 범죄사실. 이 건을 가지고 3년째
그 은행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쉬지 않고 말했다. 그것도 일목요연하게.
그도 그럴 것이 매월 한차례 돌아오는 재판일
마다 변론 주장의 요지를 직접 요약해서 담당 변호사에게 제출해온 나였다.
어디 그뿐인가? 노쇠한 시골의 담당 변호사님이 미덥지 못할 때 마다 몇번이나 서초동 법무법인 거리를 헤메던 나였다.
짧은 시간 내에 내 사건을 그들에게 요약설명하고
승소 가능성을 타진하는 상담을 몇 차례 하다 보니 거의 외울 수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 나는 내 사건의 번호로 검색된 대법원 사건안내 사이트 화면을 그녀에게 들이 밀었다. 반대편 손으로는
내 신분증을 함께 제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No라는 반응이 나올까 나는 더욱 서둘러
추가 코멘트로 못을 박았다.
회사 명함과 함께 내 법인카드를 차량을 반납할
때 까지 맡기겠다고 하면서 나는 사우디 현장에서 직원들의 현지 민원과 민형사 기소사건을 담당했다는 것도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은행을 상대로 한 나의 사건도 항소심 단계에 와 있는데 양변호사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했고 내가 딱했는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랬는지 그녀는 나와 함께 다시 렌터카 대여소
안내데스크로 향해 주었다.
한걸음 앞서 내 앞장을 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긴 웨이브가 출렁거리면서 그 향기가 또 코끝에 전해져왔다. 나는 시계를 다시 한번 보며 숨을 길게 내
쉬면서 렌터카 대여 안내센터로 향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일이란 이렇게도 풀리는 법이야. 궁하면 통한다고..’
악운이 천운으로 역전되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곧은 걸음걸이에 165는 돼 보이는 키에 직업이 변호사이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흙두루미가 걷듯 보폭을 이을 때마다 흩어지는 웨이브 머리결 사이로 하얀 목덜미에 진주목걸이 알이 반짝였다.
렌트카 데스크 앞에는 2명의 다른 손님이 대기하고 있었다.
“ 네 본부장님, 이제 김해공항 도착해서 차량 렌트 중입니다. 늦어도 오후에 창원공단
둘러보고 오후 경에는 울산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장 유치할 부지 확인되는 대로 사진 전송하겠습니다. “
우리 앞에 선 남자는 양 어깨에 노트북 가방을 2개나 메고 전화 통화 중인 그의 또다른 한 손에는 아직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한 햄버거를 들려져 있었다.
그녀도 카톡으로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변호사협회 명부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 들어갔다.
‘양혜진’ 사법고시 42회, 고려대 철학과 대구검찰청,
수원검찰청, 2012년 변호사로 전업’
상주라는 지명을 다시 기억하며 그녀와 어느
타이밍에서 ‘내 고향은 신기 입니다. 아니 점촌 입니다’라고 말할 것도 염두에 두었다.
서울대가 아니라 고려대 그것도 비 법률학과
출신이 검사로 바로 임용됐다면?..
나는 얼른 위키대백과 사이트로 들어가서 한비자에
대해 일독하였다.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통치 패더다임과 법가의 정신 등등
몇 가지 키워드만 기억해 두면 충분하리라. 그때 내 생각의 흐름을 끊어 버리는 건조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차종을 뭘로 하실건가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아닌 안내데스크의 아가씨가
눈빛으로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어떤 차가 빨리 되나요?”
“예약을 안 하셨기에 아반떼는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내가 아반떼 정도의 그릇으로만 보이는가 싶었다.
“그럼 제일 빨리 되는 게 뭔가요?”
“에쿠스는 바로 됩니다.”
“그럼 에쿠스로 ~~”
하다가 나는 말을 삼켰다. 서울 사무소 독일 임원이 관용으로 사용하는 차가 뉴그랜져인데 내가 더 고급차를 ? 아무리 렌탈이라지만..
“그럼 그랜져로 주세요."
나는 '최신형으로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양변호사를 쳐다 보았으나 그녀의 눈길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가 있었다. 한손으로 문자를
찍는 와중에 그녀의 표정에 살짝 미소가 번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양손 어디에도 아직 반지는
끼워져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