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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청년 랭보를 닮은 재기 발랄한 시인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무릎의 문양
김경주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이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
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 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무릎의 문양〉을 읽는다. 시인의 화법에 따르면,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 살을 맴도는 자리”, “잊혀진 문명의 반도”다. 〈무릎의 문양〉은 무릎에 관한 시가 아니라 무릎이라는 음성기호가 발화되는 순간 불러일으키는 섬광, 혹은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 그 희미한 이미지들에 관한 시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이며, 무릎과 아무런 의미론적 관련이 없는 그 무엇들에 대한 기호다. 당신과 나무와 시간에게 그 무릎이 있다. 이 무릎은 무릎의 내포를 가졌지만 그 외연은 우리가 아는 그 무릎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는 구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릎은 당신, 당신 안에 있는 짐승 - “그래, 누구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짐승 한 마리 / 앓다 가는 거지”(〈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 - 이고, 죄책감이며, 사람이 아닌 다양체이고, 의미가 고갈된 의미의 껍데기이며, 시인이 ‘무릎’이란 언어체 속에 불러 모으고 싶은 그 모든 무엇이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라면 이 시는 영원히 요령부득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경주의 “무릎”에 가려면 언어에 대한 관습적 이해에서 나와야 한다. “무릎”의 문자적 전언을 버리고 상징적 전언을 읽어야 한다. 그 “무릎”의 명시적 의미의 기표는 무릎이 내포로 품은 명시적 기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로지 무릎이라는 다양체들을 대체하는 우연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개념과 청각 인상의 총체다.
소쉬르는 개념에는 기의(Se), 청각 인상에는 기표(Sa)라는 용어로 분리해서 쓴다. 이때 Se와 Sa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기호가 본질적으로 자의적 산물이라 하더라도 화자나 청자가 자기 입맛대로 언어를 만들어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의(Se)와 기표(Sa) 둘 사이에 아무런 유사성 없이 단지 언어공동체의 관습이나 사회적 약속에 따라 설정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릎”은 무릎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다시 “무릎”이라는, 당신이 알고 있는 언표에 기대어 읽으려고 한다면 또다시 당신은 소통 불능이라는 벽과 마주친다.
당신은 이 구절을 읽기 위해 다시 “무릎”으로 돌아와야 한다. “무릎”은 최소의미 단위의 ‘무릎’이라는 어휘에서 애초의 언표를 지워 낸 무릎이다.
신체의 한 부분을 지시하는 이 어휘는 기호의 장에서 새로운 약호로 튕겨져 나온다. 하나의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체가 아니다. 무릎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추상화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 다양성이라는 몸을 갖는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라는 모호한 구절은 당신에게 무릎이 있다는 최소한도의 전제 하에 성립한다. 무릎에 관한 독자의 경험은 중요한 이해의 변수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의미의 1차적 생산자이지만 독자는 의미의 2차적 생산자이다. 이 구절을 산문으로 풀면, 당신에게 무릎이 있고, 저녁들은 그 무릎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저녁들은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안다, 라고 읽을 수 있다.
〈무릎의 문양〉은 차라리 저녁의 무릎들에 관한 시, 당신과 내가 일군 무릎의 문명에 관한 시다.
너무나 사소한 무릎은 그 모든 저녁들과 문명과 당신과의 사랑을, 아니 그 기억들을 불러오는 우연한 기호다. 이 시는 역설적으로 무릎이라는 기호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무릎에 관한 시다. 무릎은 “살속에 숨은 섬”이며, 제 무릎을 안고 잠드는 사람은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 지상에 드러”낸다. 이 문양은 무엇인가. 기어코 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이 아닌가.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당신은 무릎을 안고 잠든다, 그 위에 눈이 내린다, 그것은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이다, 지금 내 무릎에도 눈이 내린다, 내 무릎에도 눈이 내리기 때문에 나는 틀림없는 무릎의 근친이다. 나는 타자의 타자고, 내 무릎은 타자의 무릎의 타자다. 저녁의 무릎들은 다 안녕한가? 내 무릎이 안녕하다면 모든 저녁의 무릎은 다 안녕할 것이다. 시인은 무릎의 문명 안에 묶인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무릎에도 눈이 내리고 있는가.
김경주(1976~ )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른이 넘은 그의 얼굴에는 퇴거하지 않은 스무 살의 동정(童貞)과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시와 연극, 그리고 갖가지 인디문화를 넘나드는 재기 발랄한 시인이다. 갑자기 키만 훌쩍 커 버린 사춘기 소년 같은 신체에 내장된 무진장의 에너지로 그는 그 모든 작업들을 능히 감당해 낸다. 김경주에게서 청년 랭보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방랑의 봉헌물로 바친 발이 날개라면 생은 물신과 망상이 교접하는 난바다와 같은 이 세상을 떠 가는 한 척의 ‘취한 배’다.
시집 《기담》은 연극의 형식을 빌려 온다. 시집 전체가 3막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정교하게 꾸민 언어극이다. 시집 안에 때와 공간과 등장인물과 암전과 자막과 연출의 변이 있다. 심지어는 시집 안에 ‘흡연 구역’조차 숨어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시를 낯설게 하는 장치다. 의도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부조화를 꾀하면서 시를 시와 먼 것, 가능한 한 이질적인 요소들로 무장한 채 그것을 비시(非詩) 쪽으로 한껏 밀어붙인다. 여기서 생겨나는 것은 피상적 의미 작용에서 멀어짐이고, 그 효과는 시와 독자 사이의 서먹함, 이질감, 불편함이다. 아울러 소통의 최소화, 시의 정서적 환기력 반감시키기라는 효과가 생겨난다.
김경주의 시적 수사학은 언어와 그 내포적 의미의 불화 위에서 세워진다. 김경주는 시라는 이름의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해 불가능의 상자를 던져 주고 독자의 반응을 살핀다. 김경주의 언어 실험은 그 투철함이 첫 시집보다 더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기담》은 언어를 소통불능의 기호로 만들고 그 기호로 낯선 풍경을 그려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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