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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강해(막8 1 5 유튜브 교회 #활공교회, 설교원본-BAND: 활공교회)
https://youtu.be/gJM4kJkQsgc
말씀:
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막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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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596 영광은 주님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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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읽기:
1.바쳐질 때 역사가 나타났다
(막16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요5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엡1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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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대한 역사는 작은 헌신에서 시작된다
(출1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6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막16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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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운다
(민12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느9 7 8
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잠28 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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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보기:
hJmevra(2250, 헤메라)
날 da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헤메라(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a) ① '낮' daylight
② '하루 종일' full day(24시간)
③ 주간의 '날' day of the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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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trei'"(5140, 트레이스/)
셋 three.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트레이스/ 트리아는 Homer 이래로 사용되었으며, '셋, 삼'을 의미한다. 셋은 매우 일반적인 수이며 자연적이며 수사적인 숫자이다. 그리고 삼의 배수 또는 세 개로 묶는 것은 이 숫자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 곳에서 종종 나온다. 반복되는 많은 기사와 비유들은 세가지의 요소들을 갖고 있다. 많은 기본 개념들을 쉽게 세 개로 분류되는 형태로 공식화 되어 있다. 신적인 삼중성은 고대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3회의 발언이나 집행은 내용을 유효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3회의 맹세, 3회의 청원, 3회의 기도 등이다. 어떤 치료 과정은 3일간 지속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삼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포함하며, 자연에는 세 개의 차원이 있고, 시간은 세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필로에서 영혼이 3개의 부분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것은 두 극단의 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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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트레이스는 매우 많이 나온다.
창 6:10에서 노아의 세 아들은 전 인류의 조상이며, 민 24:10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을 3회 축복한다. 민 6:24이하에서 제사장의 3회 축도, 호 2:21 - 22에서 삼중의 약속, 왕상 18:34에서 3회의 행위가 있다.
셋과 관련된 특기할만한 사항은 다윗의 세 영웅, 겔 14:14의 세 의인, 욥의 세 친구, 다니엘의 세 친구,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 등이다.
종교적 사항으로, 3회의 절기(출 23:14), 3회의 기도 기간(단 6:11)이다. 그 외의 3과 관련된 언급들이 많다.
(주품이 묵상:사흘은 3일을 의미한다. 3은 유효하고 결정적인 의미가 있다 한다. 3일간이나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당신의 빈곤함으로 인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결정적인 믿음이 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헌신은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셔도 될만한 가벼운 구경꾼의 무리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주님은 기적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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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eJptav(2033, 헵타)
일곱, 칠
1. 고대 문헌
고대에 모든 종교사를 통하여 일곱(eJptav, 2033)이라는 수가 가진 성질로 본 의미는 원래는 달의 네가지 변화와 일치하는 7일이라는 기간을 단위로 때(시기) 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설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정확성이다. 왜냐하면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직선적인 시간의 연속이 없었고 시간을 단지 하나의 기간으로만 이해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일곱은 성취된 기간, 또한 완전히 완성된 기간의 상징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칠(킷사투 kissatu)이라는 수는‘충만, 완전, 전체’와 같은 뜻이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상당어 셰바(칠, 일곱)도‘충만’을 나타낸다(잠 3:10, 이곳에서 RSV는 '일곱'을 나타내는 이 히브리어를‘가득히 with plenty’로 번역한다). 일곱은 완전, 전체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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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성경의 용법
구약성경은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이미지의 내용을 셀 수 없이 많은 방법들로 받아들였다. 곧 칠일 간의 창조는 창조의 완성이며(창 1:1 이하), 칠일간의 절기는 완전한 기간이다(레 23:6; 34).
일곱번 반복되는 피뿌림은 완전한 정화을 의미하며(레 I6:l4,I9), 여호와께서 가인을 해하는 자에 대해 칠배의 벌을 약속하신 것은 그에 상당하는 충분한 신적 응보를 약속하신 것이다(창 4:I5).
왕하 4:35 이하에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그 아이는 일곱번 재채기를 했다. 이것은 그가 실제로 다시 살아난 것을 나타낸다. 일곱번 재채기는 생명이 전과 같이 완전히 소생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슥 4:10에서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개의 눈은 모든 것을 완전히 감찰하시고 돌보시는 것을 나타낸다.
사 30:26에 햇빛의 칠배는 구원의 시대의 성취를 나타내는 표적들 중의 하나이며, 비유적으로 진리의 빛의 충분한 조명과 그 결과인 진리를 아는 지식의 충만(참조:사 11:9)을 의미한다.
10x7년은 인생 수명의 만수(full life span)를 가리키며(시 90:10; 사 23:15), 일곱의 배수는 주로 전체를 의미하는 대략적인 수를 나타낸다(창 46:27; 삿 20:16; 참조, 마카베오사서 8 이하에 나오는 일곱 유대 형제들의 어머니는 15:29에서 '민족의 어머니'로 칭해진다). 잠언 20:16에서 일곱은 사실상 '모든 것'을 의미한다.
유대 사상들에 의하면 총 70 민족들이 지상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89:59 이하). 이 사상은 창세기 10장에 열거되어 있는 70 민족 일람표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이 사상은 세상의 70 민족을 위한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본의 명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참조, Aristeas; 70인역본의 기원에 대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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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묵상: 7은 충만함 완전함을 의미한다. 빈곤한 가운데 있는 제자의 7개의 떡은 인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한계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야라는 제약된 환경에서 인간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이 완전함 충만함을 다 가지고 있어도 인간 무리의 빈약함은 인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다는 나약함을 보게 된다. 이때 우리의 의지는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음을 본다. 또한, 5병 2어에 이은 7병 2어는 주님의 기적은 7로서 완전함 충만함을 보이어 더 이상 주님의 기적과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묵상해 볼 수 있다. 5병2어는 어쩌다 행하셨겠지 하지만 또 다시 7병2어의 행하심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 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믿음과 신뢰를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활동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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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 먼저 7병2어의 기적은 5병2어의 기적과 매우 다름을 보아야 합니다. 5병2어는 갈릴리 북쪽 뱃새다로 유대인 밀집 지역이고 때는 저녁 즈음입니다. 7병2어는 갈릴리 남쪽 데가볼리로 이방인의 밀집 지역이고 때는 낮입니다. 7은 완전 숫자로 이방인까지의 전도와 완전에 가깝다는 상징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낮은 시작이고 한창때로 이제 복음이 한참 전해져야 함을 의미하며 5병2어의 기적이 저녁 즈음에 유대인에게 전해진 것은 이제 유대인이 복음 안에서 무르익어 가는 열매라는 상징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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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첨언할 증거는 5병2어 때는 유대인이 쓰는 휴대용 작은 바구니로 남은 바구니가 12 바구니이고 7병2어는 때는 남은 광주리로 7 광주리 였다는 것입니다. 광주리는 사람이 들어 갈만한 이방이 쓰는 큰 광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두기적은 명백히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9 25
마지막으로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라고 성경에 써 있는 것은 전에 있었던 기적을 다시 또 행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7병2어는 한번이 아닌 두 번째 기적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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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자들의 선택과 집중의 은총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사렙다 과부의 처지와 그녀의 믿음 속에 역사하시고 주님은 나아만의 처지와 그의 믿음 속에 그 둘을 선택 집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에 돌아와서 예수님을 무시하고 여기서도 기적이나 해보시지 하는 분과 시기가 가득한 무리에게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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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눅4:26-27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4:28
3일이나 생명의 위협을 각오하며 광야까지 따라온 무리는 진정 예수님을 향한 최소한의 사랑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주님의 선택과 은총을 받기에 합당 하였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각오하고 교만하지 않고 확실히 겸손히 공손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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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예수님은 이스라엘 서북쪽 두로와 시돈을 거쳐 갈릴리 남쪽 데가볼리까지 긴 선교여행 중에 3일간 굶주리는 무리가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거리에는 두로와 시돈 이방인 지역과 요단강 동쪽의 이방인 지역의 무리 였을 것입니다. 이 지역은 광야로서 황량하고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수가 기진하고 먼 데서 온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을 받으러 오는 자나 복음을 전하러 가는 자나 하나님은 공급의 책임을 지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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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 받으려 할 때도 주님은 채워주시고 또한 주님의 일을 하러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공급을 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까마귀에게서 공급을 받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 염려에 두려워하며 놀라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정직하게 돈 수공물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나아가며 주님의 자연스런 공급을 믿는 것도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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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 이 대답은 매번 끼니때마다 기적을 수십 수백번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게 됩니다. 주님은 수만번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에도 하지 않으심은 선택과 집중과 은총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어디 여기서 기적이나 해보시지’ 하는 불량한 무리와 ‘이런! 우리의 기득권을 다 뺏어 버리내 아 배아파 내 인기를 가져가네’ 하는 시기하는 무리를 선택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천국 초대에 이런 불량한 시기하는 무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이런 시기하는 불량한 무리를 신부 삼아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리가 믿지 않도록 비일비재하게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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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바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가진 것과 그들의 손을 빌리시는 것은 시청각 5감을 통한 믿음의 교육을 위한 것입니다. 귀먹어리와 벙어리를 고치실 때에 혀와 양귀에 손을 대시는 것은 이 기적이 당신께서의 기적이시고 당신께서의 하신 것이다는 것을 증거하여 믿게 하심인 것입니다. 만약 손을 거치지 않으면 우연이라는 착각과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와의 대화 그들의 손에 있는 물질을 보고 느끼었던 그 모든 기억들은 이를 바라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잊지 못할 생생한 기억과 증거와 살아 있는 믿음으로 남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진 일곱 개의 떡으로 기적을 행하셨어’
‘주님께서 내 동료 제자가 가진 떡으로 기적을 행하셨어’
‘멀리서 온 무리 중 하나인 내가 저 제자가 가진 떡으로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았어’
이런 고백들은 터져 나오고 성경의 기록으로 남아 후세와 우리와 미래의 세대에게도 전해지어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자취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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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우리가 드려지는 작은 헌신 속에 큰 기적을 행하시는 기적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미약하고 부족하오나 주님은 완전과 충만함으로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확신 겸손하고 순종하는 작은 믿음 속에 주님은 선택하시고 집중하여 바라 보시며 은총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을 주님 보시기에 이와같이 합당하도록 깨뜨리어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 주님을 위한 선한 기적과 기사가 성경은 아니지만 좋은 기록으로 주님만을 위해 성도간에 귀한 덕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