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시절, 포장마차에서 이외수의 단편집 <겨울나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서 '여기 나하고 똑같은 작자가 있구나' 하고 킬킬대고 웃은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산다는 게 너무 허무하고 외로워서 이외수를 만나러 춘천엘 간 적이 있다. 소주를 사들고 그의 집엘 갔을 때, 그는 '장수하늘소'라는 중편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와의 이런 저런 많은 대화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외수가 하나님도 가끔씩 찾는 모양이지만 그 당시에는 데카당스한 집시(gypsy) 일 뿐이었다. 집시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가장 즐겨 듣는 다는 것은 마치 양아치가 성경을 애독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이외수가 바흐의 모음곡을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가 삶에 대한 혼돈과 방황 속에서 바흐의 모음곡을 들으며 그나마 간신히 영혼의 질서를 유지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질서와 밝음의 신비와 경외감에 몸을 떨며 삶의 의욕을 이어 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외수는 아마도「카잘스」가 연주한 것을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곡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카잘스」와「로스트로포비치」, 두 거장은 모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거의 신성(神聖)시 했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첼로의 성서(聖書)로 불려진다.「카잘스」에 의하여 발견되어 연주된 이후 첼로 음악의 최고의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모든 첼리스트들이 정복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다.
「카잘스」는 13살 무렵, 바르셀로나의 어느 고악보 가게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발견하고 12년간 홀로 연구한 뒤 공개석상에서 연주하여 세상에 그 진가를 알리게 되었다. 13살이면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의 나이인데 그 나이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인 신비가 이 악보에 담겨져 있었다. 이 발견은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라고 말했다니 참으로 입이 딱 벌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내린 천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카잘스」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약관의「로스트로포비치」를 자신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콩쿠르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콩쿠르가 열리기 전에「로스트로포비치」를 자신이 머무는 호텔로 부른 뒤 다짜고짜 첼로를 꺼내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로스트로포비치」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과 감동 속에서「카잘스」의 연주를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들었으며「카잘스」는「로스트로포비치」의 그런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것이 두 천재의 첫 번째 대면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5살 때부터 바흐의 모음곡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바흐의 아내「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본 악보를 텍스트로 연주했는데 그는 훗날 그때의 연주로 나온 자신의 음반을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오죽하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노년에 들어서야 "이제 나는 용기를 내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녹음해야만 한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한 대성당에서 바흐의 모음곡 전곡을 녹음하게 된다. 현재 일반에 출시되어 있는「로스트로포비치」의 음반이 바로 그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동안 첼로 연주자가 들을 수 있는 최상의 찬사를 들었다. 곡에 대한 완벽한 해석과 강렬하고 엄청난 표현의 폭, 그리고 가장 낮고 작은 음까지도 연주장의 구석구석에까지 들릴 수 있도록 연주하는 불가사의한 연주 솜씨로 그는 '20세기 첼로 연주의 황제'라 불리워졌다. 그런데 그 첼로의 황제를 깜짝 놀라게 만든 천재소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장한나이다.「로스트로포비치」가 파리에서 열린 <카잘스 콩쿠르>에 참석하여「카잘스」에게 사사받은 것처럼, 장한나도 파리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참석하여「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받게 된다.
1994년, 11세의 나이로 제 5회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 콩쿠르에 참가한 장한나는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선보이며「로스트로포비치」를 비롯하여 심사위원 10명의 전원 만장일치로 대상(Grand Prize)과 현대음악상 (Contemporary Music Prize)을 수상한다. 역대 최연소 수상이었다.「로스트로포비치」는 잔뜩 흥분하여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라고 극찬했다. 그 후 장한나는「로스트로포비치」의 정신적인 딸로서 그와 함께 연주하는 행운을 누리며 세계적인 연주자로 발돋음 한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이제 단순히 재능있는 천재소녀가 아니라 진정한 연주자로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장한나가 자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여 8월 17일~9월 4일까지 전국 10대도시에서 순회독주회를 갖는다. 22살의 대학생으로 성장한 장한나는 어릴 때보다 훨씬 성숙하고 예뻐졌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치켜 뜬 두 눈은 여전히 크고 영롱하며 도발적이다. 그녀의 호기심은 그녀를 하버드대 인문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한나는 "연주는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고 마음속에 무엇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연주의 내용이 결정되므로 내면을 채우는 공부는 당연한 것"이라고 철학 전공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하지만 음악은 언어에 갇히지 않으므로 의식과 무의식 등 모든 장벽을 뛰어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연주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연주자는 무대서 연주할 때 살아있어요. 하지만 만족하는 순간, 생명은 끝나고 말죠. 계속 발전을 모색하는 게 가장 힘들고 어떨 때는 외롭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성품인 창조에 동참할 때는 살아있는 기쁨을 누리지만 인간의 한계에 부딪힐 때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대가들의 작품연주를 통하여 그걸 터득했고 그 괴리를 극복하고자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규정짓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의 손끝에서 나왔지만 그의 머리에서 구상된 악상(樂想)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다.「로스트로포비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내게 이 모음곡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 곡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이 곡들을 생각하는 매 시간, 매 초마다 당신은 이 곡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이 곡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 당신은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로스트로포비치」의 고백을 들으며「로이드 죤스」목사의 글이 떠올랐다.「로이드 죤스」목사는 어느 책에선가 "나는 성경을 100번도 더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이런 느낌은 많이 읽을수록 그 강도가 더 커졌으며 이제는 내가 성경에 대하여 초보자일 뿐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라는 말을 했다. 바흐는 가장 개신교적인, 그리고 가장 복음적인 작곡가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성령의 역사가 가장 강하게 역사하는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바흐의 곡들이다. 특히 그의 첼로 모음곡은 그 절정에 이른다.
「C S 루이스」가「조지 맥도날드」의 소설에서 천국의 영광을 맛 본 뒤 그의 학문적 사고체계가 바뀐 것처럼「로스트로포비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똑같은 변화를 일으켰다. 장한나는 아직 어리다. 음악이든 철학이든 아직은 열심히 연주하고 공부하면서 더 많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진정한 대가는 재능과 인격과 신앙이 아름답게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장영주보다는 장한나에게 좀 더 큰 기대를 걸게 된다. 나는 장한나의 두 눈에서 예술과 진리,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당돌한 호기심과 불굴의 투지를 본다.
첫댓글 공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