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해요!
2024.2.18. 주일오전예배
요즘 빈들판 시간을 통해서 온 식구님들이 빈들판 형제로 잘 묶어가고 계신 줄 압니다. 특별히 정오 시간에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님과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대한민국이 이처럼 평화가 유지되고 안정된 것은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한 앞선 세대가 있음을 지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몸 된 교회를 생각할 때도 이처럼 주님 앞에 기쁨이 되고 영광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목사님과 앞서간 성도들 지금 우리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영어 격언에 “No cross, no crown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예수님의 그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주님 모시고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해요!’입니다.
사무엘하 2장에 보면 다윗이 이제는 도망 다닐 신세가 아니고 사울은 죽었고 다윗은 주님께 물어보면서 유다로 올라갔고 헤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유다 왕국으로의 길을 유다 백성에게 왕으로서 추대 받으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울을 장사한 사람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깜짝 놀랐고 고마운 마음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신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보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찌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겠다” 사울이 죽으면 당연히 그 자식이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다윗도 사위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겠지만 사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장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위에서 사십 년을 지냈으니까 사십 년 전으로 이야기는 되돌아갑니다. 사무엘상 1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눈을 빼서 복종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악한 사람들이지요. 그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일주일의 말미를 달라, 그 일주일 안에 우리가 대책을 못 세우면 너희들에게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이 소식을 보냅니다. “우리가 지금 곤궁에 처해있다 형제들아 도와달라” 그때 사울이 그 소식을 듣습니다. 사울이 그 소식을 들을 때에 그냥 마음이 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했어요. 성령에 감동되어서 자기가 밭 갈던 소 한 겨리, 곧 두 마리를 각을 떠서 각 지역의 열 두 지파에게 보내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으면 너희 집 소를 이렇게 각을 떠버리겠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두려움이 온 이스라엘에 사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벼운 소식으로 듣지 않고 이 일은 우리 집의 일도 될 수 있다 생각하고 그들이 군사로 일어섰는데 이스라엘에서 삼십만, 유다에서 삼만 해서 삼십삼만의 대군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려고 그들이 한 사람처럼 일어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 마음처럼! 그래서 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쳤습니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없을 정도로 대승리를 거두지요.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뚜렷하게 등극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곤란한 처지에 도와주었던 사울 왕,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울 왕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 사울에 대한 고마움을 뼈에 새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정을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긋난 길로 갈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왜 우리 사울 왕이 저렇게 어긋난 길로만 갈까 걱정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 속에 죽었고 그 시신을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성벽에 못 박아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야베스의 장사들이 일어나서 밤새도록 달려가서 그 시신을 수습하고 야베스로 가져와서 화장하고 전체 거민들이 칠일 간 금식하는 정중한 장례를 치렀습니다. 성서 지도로 길르앗 야베스부터 벧산까지를 자로 재어보았어요. 직선 거리상으로 약 23km정도, 골짜기도 있고 산도 있을 테니까 못 되어도 30km가 되지 않을까요, 왕복 60km! 거기를 갔을 때 웃으면서 갔겠습니까? 비장한 마음으로 우리 사울 왕의 시신을 가져올 때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그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의리의 형제들입니다. 뼈있는 형제들입니다. 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는 형제들입니다.
여기 비교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무엘상 23장에 나와 있는 대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도망 다니는 시기에 블레셋 변방에 있는 그일라 거민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주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주님,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과 전투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주님은 “가라!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곁에 있는 다윗의 형제들이 만류합니다. “우리가 지금 도망 다니면서 유다에 있기도 힘든데 이 상황에서 전투까지 치러야 됩니까? 다시 한 번 재고해주십시오.” 다윗은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가 블레셋을 너희에게 맡겼으니 가서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재차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주님의 허락과 지시를 받아서 그일라 성읍 거민들을 블레셋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였지요. 당연히 그 전쟁의 소식이 이스라엘의 사울 왕에게 들렸습니다. 사울 왕이 이제 저들이 성에 갇혔으니 잡으러 가자고 군사를 움직여서 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잠시 쉬는 시간 없이 다시 길을 나서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주님, 이 그일라 사람들이 우리를 사울의 손에 맡기겠습니까?” “그들이 너를 배반하고 사울의 손에 주리라” 참 괘씸한 사람들이지요.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지요. 소위 말하면 사람이 아니에요. 바로 엊그저께 자신들을 위해서 목숨 바치고 구해준 은인들인데 사울이 온다고 해서 그들을 내어줄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게 우리의 육적 자아입니다. 그들만 나무랄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와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주님 따르겠습니다” 했으면서도 주님이 잡히시니까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도해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사람 노릇하게 된 것이지요. 이 땅에서 우리는 언제나 배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친구가 되는 세상인데 우리 성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주님의 성품을 따라서 변함없는 주님의 사람,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주님의 형제들이 되어야겠지요. 주님께 속해서 뼈있는 야베스요, 자기에게 속해서 배반하는 그일라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시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동산에 가보니까 어떤 분이 계세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말씀하실 때 울면서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대답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마리아야” 불러주십니다. 제자들은 도망가고 예루살렘 어느 방에서 꽁꽁 문을 닫고 있는데 이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 사무친 그리움 때문에 그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인데 그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지요. 무슨 기도에 대한 응답을 위해서 찾아간 것 아닙니다. 부자 되려고 찾아간 것 아니고요, 병 고치려고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이 그립고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지요. 오늘도 이러한 중심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이 로마에서 갇혀 지내면서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거예요. 그 디모데후서 1장 15절, 17절,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 이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지요.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이 갇히고 이제 역량이 드러나지 못하고 고난의 길에 있을 때, 세상에!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할렐루야! 이거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 선생님을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로마가 가까운 옆 동네도 아닌데. 그리고 갈 때마다 주님 모시고 잘 지내는 가운데서 그 오네시보로 형제를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 마음이 기뻤어요. 영혼이 잘 된 것 같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람으로 뚜렷이 서가는 모습을 볼 때 감사했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 형제가 웃기는 코미디를 했겠습니까? 우리 형제를 보더라도 형제들이 잘 서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주님께 감사하고 유쾌한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멀리 있는 형제 교회 소식도 그렇고, 멀리 있는 선교사님들이 주님 모시고 잘 지내고 뼈있게 서 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유쾌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 고마움 잊지 못하지요.
사도 요한 선생님도 주님이 천국으로 가신지 육십여 년이 지나갔지만 그 주님의 은혜와 고마움을 결코 한시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주님의 발자취를 기록하라고 성령님이 감동을 주셔서 쓴 것이 요한복음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제목을 ‘그리움’이라 부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그리움이에요. 우리가 그리움과 그 고마움을 잊어버린다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 아닙니다. 사람답게, 성도답게 앞서가신 귀한 분들을 그리워하면서 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목사님이 자주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이 천국으로 떠나가신지 벌써 이 년이 지났지만 목사님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십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제게 하셨어요. “아우님, 은혜 속에 강하십시오” 주님의 은혜 속에 강하게 서서 그 목사님의 중심과 기도와 헌신을 계속 이어받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영광의 그날까지 뻗어갈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