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될...청계천 재개발 모습을 담다
철거를 앞둔 '세운 4구역'의 지난 수개월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도시탐구를 연재하며 기자는 서울 강북 도심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그때마다 마주치는
문구 하나가 기자에게 부채감으로 자리 잡았다. 세운상가 근처 건물들에 내걸린 “철거예정” 플래카드가 그것이다.
세운상가 일대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시행사가 되어 재개발이 진행 중인, 행정적 표현으로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예정된 세운4구역이다. 종로구 예지동의 지은 지 적어도 50년에서 70년 된 건물들이 싹 헐리고 오피스텔과 호텔 그리고
사무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2021. 09. 27) 세운상가 근처 건물에 걸린 '철거예정' 플래카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자는 세운상가 근처를 지날 때마다 ‘이 지역이 상전벽해처럼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청계천을 지켜온 오랜 정경이 머지않은 미래에 싹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청계4구역의 현재 모습이 옛 모습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야지 하고 마음먹은 때가 올 초였다.
하지만 여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해 부채감이 생긴 거였다. 아무튼 더 늦기 전에, 현재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사진으로 담기로 했다.
9월 27일, 골목에는 셔터 내린 점포들과 쓰레기만
지난 9월 27일 세운4구역을 찾았다. 이 근처를 지나다닌 적은 많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세운상가 옆길을 따라 들어선 건물들에는 아직 영업하는 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문 닫은 점포들도 있었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을 연 가게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문 닫은 점포가 입주했던 건물은 빈 건물이 되었고, 빈 건물에는
여지없이 “철거예정”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2021. 09. 27) 세운상가 근처 골목. 문 닫은 점포들이 늘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9. 27) 쓰레기가 쌓인 세운상가 근처.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빈 점포가 늘어선 골목길에는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누군가에게 잠시 휴식을 제공했을 소파부터 오래전 장부들, 그리고 한때는 상품이었을 껍데기만 남은 컴퓨터
본체까지. 골목길에 쌓인 쓰레기가 그 골목의 과거를 비춰주기도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를 예언하는 듯했다.
문 닫힌 점포 중 많은 곳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 가게들은 내려진 셔터에 옮겨간 곳 주소와 약도를 정성껏 남겨 놓았다. 대부분 세운상가 아니면 인근의 상가였다. 손 글씨로 남겼든 인쇄한 종이로 남겼든 모든 메시지에 혹시 단골들이 찾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이 담긴 듯 보였다.
(2021. 09. 27) 문 닫은 점포의 이전 안내.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점포들 문은 닫혔어도 간판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간판에 쓰인 폰트가 예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옛 간판 위에 새로 덧붙인 간판도 있었다. 간판은 이 골목의 점포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와 그 부품, 노래방 기기 등 친숙한 제품을 다룬 가게도 많았지만 ‘카세트 테프 고속복사기’, ‘휴즈 백화점’,
‘고압 승압 따운’ 등 청계천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점포가 많았다.
(2021. 09. 27) 세운상가 근처 골목의 어느 간판. 이 지역 업종 특성을 보여준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1968년에 완공된 세운상가는 한때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인근의 상가와 골목의 점포들도 함께 주목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자제품과 컴퓨터용품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은 용산에 전자상가가 건설되자 상권이
위축되었다. 세운상가와 그 일대는 한때 잠수함과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지금은 세운상가 일대의 슬럼화 때문에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철거를 앞둔 골목길에 쓰레기는 쌓이고
찾는 발길은 줄어들어 오히려 더 슬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10월 29일, 11월부터 철거한다는데
9월 27일 세운4구역을 방문하고 한 달여가 지난 10월 29일(금)에 현장을 다시 찾았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듯했다. 세운상가 일대 골목마다 “11월부터 철거예정”이라 쓰인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러니 “통행 시 안전에 유의”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2021. 10. 29) 11월 철거를 예고하는 플래카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10. 29) 쓰레기가 쌓인 세운상가 근처 가게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철거가 임박한 세운4구역은 문 닫은 점포들이 한 달 전보다 많은 듯했다. 셔터 내린 가게들 앞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위로 ‘11월부터 철거예정’이라 쓰인 플래카드가 내걸리니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뒷골목들은 더욱 슬럼이 되었다. 문 닫은 점포들에서 재고를 옮기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그냥 골목길에 널려
있기도 했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에서 쓸만한 것을 찾으려는지 헤집는 사람도 있었다. 후미진 골목에는 아직 수분이 마르지
않은 깨진 술병과 오래된 용변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골목은 어두웠다. 셔터 내린 점포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양을
쳐 하늘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을 연 점포 앞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철거가 예정된 곳을 아직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1. 10. 29) 마지막 영업을 하는 오스타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오늘이 이 자리에서 영업하는 마지막 날이에요.
시행사가 이전하라고 말미를 준 날이 이번 달 말이기도 하고요. 11월부터 철거한다잖아요. 주말 동안 물건들 다 빼야죠.”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11길에 자리한 ‘오스타사’ 박희진 대표의 말이다.
그는 1985년부터 이 자리에서 사업을 한 선풍기와 믹서, 그리고 청소기 모터 수리의 장인이다.
그에게 계획을 물으니 가게 인근 장사동의 재개발에 포함되지 않은 건물로 이전한단다.
(2021. 10. 29) 마지막 영업을 하는 서민전자.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골목길 안쪽에 자리한 ‘서민전자’도 문을 열었다.
가게를 지키던 74세 서정근 대표는 17세부터 청계천 인근에서 일했다고 한다.
종로28가길의 현 자리에서는 32년 되었다고. 청계천에서만 57년 경력을 가진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오늘이 청계천에서 마지막 날인 듯합니다.
이전할 데를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있나요. 주말에 짐 빼야지요”
안 그래도 좁은 골목길이 문 닫은 점포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로 더욱 좁아졌다. 그 길을 수레가 오가고 있었다.
철거가 예고된 마지막 주, 남은 재고를 옮기는 손길로 골목길이 분주해졌다.
(2021. 10. 29) 철거를 앞둔 청계천 골목은 짐을 빼는 손길로 분주했다.
11월 1일, 누군가는 그리워할 골목과 건물들
철거가 예고된 11월의 첫날인 지난 월요일에 세운4구역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골목은 더욱 어두웠다.
그나마 문을 열었던 가게들이 주말 동안 짐을 빼고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을 연 점포들도 아직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조만간 세운4구역의 오래된 건물들이 싹 헐릴 게 분명해
보였다. 그곳을 누군가는 낡고 지저분하다 여기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리워할 골목과 건물들이 있던 곳일지도 모른다.
(2021. 11. 01) 청계4구역의 철거를 앞둔 옛 건물.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11. 01) 청계4구역의 철거를 앞둔 옛 건물.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래서 손가는 데로 사진을 찍었다. 특히 나지막한 단층 건물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우뚝 솟은 건물들,
어쩌면 건축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를 건물들은 사진은 물론 주소도 함께 기록해 두었다.
혹시 나중에 그 건물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옛 흔적을 찾을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기자는 세운상가 일대의 재개발 지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진행 중인 청계4구역의 옛 건물들이 헐리고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 과정을 계속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