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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김 성 한
1
그믐맘이었다. 흐려서 더구나 캄캄한 밤이었다.
53 고지 전면을 끼고 돌아간 강에 얼어붙은 얼음판을 따라 일렬 종대로 모래를 뿌리면서 조심성 있게 전진하는 제 2 분대원들은 온 신경을 두 발에 쏟으면서 숨을 죽였다.
53 고지를 공격해서 포로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 제 1 소대의 제 1 분대와 제3 분대는 이 나지막한 고지의 측면으로 돌고 제2 분대는 정면으로 접근하는 길이었다. 이따금씩 찬 바람이 귀를 어이고 지나갔다. 부분대장 9 번 김 경석(金慶錫) 일등병은 척후로 선두에서 전진하였다. 전투모에 담은 모래가 자꾸만 줄어 가는데 고지 전면 비탈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앞을 응시하고 가끔 뒤로 분대장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나가던 경석은 주춤하고 엎드렸다. 사람이 아니라 바위였다. 기어서 바위까지 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위에 기대서 분대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시 일어섰다. 무심코 첫발을 내디디었다, 뒷골을 빙판에 찧으면서 자뿌라졌다. 자빠지는 순간 소총이 얼음판에 딩굴고 옆구리에 찼던 물통이 땡그랑 소리를 내고 말았다. 모래를 안 뿌렸던 것이다. 온 피가 머리로 쏠렸다. 빙판에서 몸을 돌리고 상반신을 내밀어 얼른 소총을 잡았다. 바위 밑으로 다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가만 있으라는 신호가 연달아 왔다. 고지 위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마디. 모든 것은 이제 실패다. 나 때문에. 온몸에 식은 땀이 배었다. 그는 바위에 기대어 초조한 가운데 분대장의 신호만 기다렸다.
부산 광복동 네거리, 에덴 다방 앞에서 담배 장수를 하다가 천막에 돌아온 혜란(惠蘭)은 곤히 들었던 잠이 깨었다, 꿈에 경석을 보았다. 한 달 전에 편지가 온 후로 깜깜 소식이 없는 그였다. 글줄이나 안다고 대대 본부에서 서무를 보라는 것을 거절하고 그냥 소총 소대에 남아 있노라는 사연이었다. 진짜 인간들 사이에 있는 행복을 느끼노라고도 하였다. 꿈에 보는 경식은 여느 때보다 훨씬 키가 컸다. 곧 대장이 되노라고 전에 없이 싱글벙글하였다. 꿈은 반대라는데 부슨 불행이 일어난 것이 아닌지. 혜란은 돌아누웠다.
분대장한테서는 그냥 전진하라는 신호가 왔다. 아, 이것은 죽으라는 말이로구나.
가슴 속은 이 밤과 한가지로 캄캄하였다. 조심성 있게 일어서 모래를 뿌리고 한 걸음 내디디었다. 고지는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무기미한 정적이었다.
능선 삼십 미터 전방에 분대원 9 명은 딱 엎드려렸다. 고지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분대장의 명령으로 경석과 교대하여 능선에 올라갔던 6 번 이 명룡 일등병이 돌아왔다. 교통호와 산병호까지 보았으나 아무도 없더라는 보고였다. 사변 당초부터 일선에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른 이 명룡은 귀신이라는 별명의 소유자였다. 생김생김이 괴상해서 귀신이요, 싸움에 귀신 같아서 귀신이었다. 그에게는 실수라는 것이 없었다. 경석의 가슴에는 일루의 희망이 솟았다. 아까 들은 기침 소리는 헛들은 것일까? 입을 꼭 다문 스물 남짓한 분대장은 잠자코 있다가 무전으로 오피에 연락하고 전진 신호를 내렸다.
대형을 바꾸어 일렬 횡대로 침묵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이처럼 인간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교통호는 과연 텅 비어 있었다. 산병호에도 아무 자취가 없었다. 분대장은 계속 전진을 신호등으로 명령하였다.
이십 미터도 못 가서 전방에서는 모든 화기가 불을 토하였다. 소총, 중기ㅡ-―빗발치는 일제 사격이었다. 아홉 명은 자동적으르 푹 엎드렸다. 측면으로 돈 옆엣 분대원의 비명이 들려왔다. 엎드렸던 분대장은 후퇴를 명령하였다. 이번에는 뒤에서도 일제 사격이 왔다. 땅에 딱 붙었다. 없던 적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로구나! 경석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습성으로 분대장의 옆에 다가갔다. 아홉 명은 원형으로 머리를 모았다.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한 분대장은 주먹으로 이마를 받친 채 말이 없었다. 앞뒤에서 퍼붓는 이 숱한 총탄을 뚫고 나가는 재주가 인간에게 있을 리 없었다. 경석은 저도 모르게 명룡의 손을 꽉 잡았다. 그도 힘을 주는 것이었다. 우군의 단말마의 비명은 연달아 날아오고 적의 사격은 조금도 덜할 줄을 몰랐다.
쮸 쮸 하는 소리가 나자 꽝 하고 포탄이 터졌다. 우군의 야포 사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분대장은 얼굴을 번쩍 들었다.
“너희들 재주껏 빠져 나갈 사람은 나가라. 내 뒤를 따를 자는 일렬 종대루 따라 와. 횡대 아니구 종대다!”
힘 없는 한 구절이었다. 분대장은 앞장서서 전방의 적진을 향해 포복을 시작하였다. 여덟 명은 말없이 따랐다. 부분대장 경석은 맨 뒤를 맡았다.
사이사이 관목이 들어선 이 조그만 잡초 고원, 전방 후방, 그리고 공중에서 총포탄을 쏟아붓는 가운데를 아홉 명의 젊은 생명은 적진을 향해 필사의 포복을 하였다. 이미 생도 없고 사도 없었다. 경석은 충실히 종대의 뒤를 따랐다. 따라가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백여 미터나 갔을까, 분대장은 정지 신호를 내렸다. 숨을 죽였다. 분대장은 우뚝한 곳에 재빨리 내려서면서 얼른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빈 산병호에 내려선 분대장은 대원을 하나씩 잡아채어 교통호에 내려서게 하였다. 경석은 명룡을 찾았다. 살아 있었다. 분대장 바로 옆에 쭈그리고 있었다. 아홉 명은 모두 무사하였다. 머리는 저절로 모여졌다. 분대장은 호 속에 친 가마때기를 흔들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지하도가 있다. 전방 진지하구 이 진지 산병호 사이에 각각 지하도가 있단 말이다.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지하도로 일단 뒤에 왔다가 우순가 깃순가 하여튼 하나 건너씩 앞으로 나간 모양이다. 요행으루 이건 앞으로 나간 놈의 후야. 양쪽 호에는 적이 있다.”
분대장은 말을 끊고, 숨소리만 들려 왔다.
이윽고 명령이 내렸다.
“부분대장과 6번은 좌, 4번 5번은 우, 적을 처치하구 와!”
경석은 명룡과 함께 교통호를 따라 좌로 9 미터 가량 떨어진 산병호로 다가갔다.
지극히 간단하였다. 그렇게 간단할 줄은 몰랐다. 앞을 향해서 무턱대고 쏘는 놈의 잔등을 명룡은 그저 총검으로 쑥 찔렀다. 비명 같은 것이 들린 듯하기도 하고 안 들린 듯도 하였다. 위로 솟았다가 쓰러진 놈의 옆구리를 그는 두세 번 쿡쿡 찌르고는 가자고 하였다. 경석은 가슴에 무엇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맺혔던 것이 풀리는 심사였다. 전투도 수없이 치렀다. 그러나 이처럼 아슬아슬한 고비는 없었다. 신병이 항용 가지는 공포심을 털어 버린 지도 옛날인데, 아기자기하고 초초한 심사에 신경을 갈아바친 몇! 시간, 그 후에 느끼는 이 쾌재. 이 명룡 일등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서 걸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4번 5 번도 돌아왔다.
“부분대장과 6, 7, 8 번은 좌측 호, 부분대장 지휘. 2, 3, 4, 5 번은 우측 호 내가 지휘한다. 지하도를 따라 전방 진지로 전진, 산병호에 이르면 즉시 적병을 처치!”
분대장은 네 명의 선두에 서서 우로 돌았다. 경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진 신호를 내리고 앞서서 좌측 호에 다다랐다. 쓰러진 적병이 발길에 걸렸다.
허리를 꾸부리고 얼마를 걸었는지 하여튼 먼 거리를 온 느낌이었다. 총포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앞이 희미하게 밝았다. 입구의 산병호는 저기리라. 경석은 일단 정지하고 동정을 살폈다. 뒤쪽을 향해져 불을 토하는 소총이 눈에 들어왔다. 세 명을 끌어다가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낮은 자세로 접근은 계속되었다. 교통호 이어서 산병호. 경석은 호 벽에 붙어서 살폈다. 필시 이 쪽을 향하였건만 눈와 위치가 너무 높은 적병.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는 탄도는 머리 위를 훨씬 높이 지나갔다.
경석은 손가락에 온갖 지성을 모아서 방아쇠를 당겼다. 6 번과 7번도 당겼다. 사격 이 멎었다. 산병호에 뛰어들어 총검으로 찔렀다.
그저 꿈틀할 뿐이었다.
교통호에 도로 나와 좌측 산병호로 돌았다. 이 놈도 다짜고짜 어둠 속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쏘고 있었다. 사로잡아야겠다. 불쑥 총검을 들이댔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따당 쏜다. 빗나갔다. 옆에 다가선 명룡의 딱 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다. 비명을 올린다. 분대장과 네 명이 왔다.
엎드려 무전 연락을 하던 분대장은 모이라고 하였다.
“이제 강까지 각개 약진, 명룡아, 이 놈을 업어라.”
재빠른 대원들은 벌써 능선을 넘어 아래로 달렸다. 옆을 달리던 그림자가 능선에서 쓰러졌다. 경석은 달려가서 둘러업었다. 며칠 전에 온 5 번이였다.
꿈자리가 사나운지라 혜란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것은 기다리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오늘 밤같이 추운 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었다. 바로 이 천막, 이 자리에서였다. 혜란은 한사고 말렸다. 나중에 마구 달려들었었다.
“당신은 무책임해요. 난 그럼 어떡허란 말이에요?”
입대를 지원하고 돌아온 경석은 마지막까지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글쎄,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데두.”
“뭐 여행 가는 것쯤으루 생각하세요?”
“명은 재천이니 그 땐 또 그 때지.”
“여부 당신더러 누가 나와 달랍디까? 당신이 나간다구 막 밑리는 이 판에 신통한 수가 있을 줄 아세요?”
“……”
“왜 대답이 없어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이렇게 갖다 놓구 이태두 못 돼서 팽개치구 가기에요?”
“……”
“나갈 사람두 빠지느라 야단인데 당신은 삼십두 넘잖었수? 게다가 당신은 개죽음할 사람이 아니예요. 나라의 인재예요.”
경석은 말없이 담배만 빨았었다.
“안 가시죠?”
“노.”
“제가 싫어겼어요?”
“싫구 좋구, 어디 그런 문젠가.”
“당신은 철학자예요., 최고의 인텔리예요, 바보짓 마세요. 개죽음하는 건 국가적으루두…….”
“그만 해.”
“개죽음 아니구요. 당신은 나라의 보배예요. 공연스리 수선을 떨지 말구…….”
“알았어.”
“안 나가시죠?”
“노.”
혜란은 남편을 부둥켜안고 밤새도록 울었었다. 경석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찌기 자기를 거역한 일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하여 주던 사람이다. 보리쌀 배급이 나와 방앗간에 쓸러 가려니까 자루를 빼앗아 냉쿵 둘러메고 나서는 그였다. 교수의 체면에 보기가 안 되었다고 하니, 체면이란 말은 그런데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던 그였다. 추운 날 아침이면 먼저 일어나 물을 길어다 데워놓고 자기를 깨우던 그였다.
남편은 변하였다. 어저께까지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이런 남편은 아니었다.
남들은 배를 타네, 제주도로 가네 야단인데, 남편은 북을 향해 달리겠다고 끄덕 없었다. 밀려 오던 뭇 군중은 바다에 걸려 아웅다웅하는데 효용 없는 제물로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동이 틀 무렵에 깜빡 들었던 잠을 깬 혜란은 머리칼을 치켜올리면서 일어나 촛불을 켰다. 나지막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몇 시간 안 있어 떠나갈 남편, 혜란은 다가가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경석의 얼굴에는 아래로 흐른 두 줄기 눈물 자국이 있었다. 혜란은 조용히 돌아서 잠자코 치맛자락으로 자기의 두 눈을 훔쳤다.
“아, 벌써 날이 밝았나?”
경석은 불쑥 몸을 일으키면서 침구를 밀어젖혔다. 혜란은 픽 돌아섰다.
“혜란의 마지막 써비쓰예요. 오늘 아침만은 가만히 누워 계세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 끝이 흐렸다. 쳐다보던 경석은 일어서 힘껏 안아 주었다.
“꼭 돌아올 거야. 아니 꼭 돌아와.”
조반이 목에 넘어가지 않아서 혜란은 숟가락을 든 채 경석을 넘겨다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웃는 낯으로 보내리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경석은 물을 마시고 나서 빙긋 웃었다.
“아니예요. 생각 않기루 했어요. 그저 당신 같은 귀한 인재가 아까워요.”
경석은 담배를 길게 내뿜고 나서 기둥에 기댔다.
“당신한테는 미안하오. 무책임두 하죠. 무너지는 태산을 향해서 달리는 어리석음도 잘 알구요. 그러나 사람이란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경우도 있어. 거름이 좋아야 싹두 좋답니다. 거름은 싫구 꽃만 생각한 것이 오랜 실수였죠. 이름은 무어라도 좋소. 시비도 모르겠소. 하여튼 온 백성이 홍수에 빠져 아우성칠 때 돌등에 앉은 개구리 행세는 못 하겠소.”
떠날 때에는 잘 있으라고만 하였었다. 기다리라는 말도, 갔다 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돌아서는 순간 눈이 번뜩였었다.
혜란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다윗을 보호하신 전능하옵신 하나님 이시여, 그이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의 의와 야곱의 지성으로 싸움터에 달려간 그이는 이 땅의 가장 의로운 사람의 하나이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있었음과 같이 그이에게 있어 환난에서 구하시고 위지에서 빠지게 하여 하루 속히 여기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수서.”
부상한 신병 은 옆구리를 맞았었다. 잔등에서 물을 달라고 마구 졸랐다. 경석은 숨이 콱콱 막혔다. 강에 이를 무렵에 신병은 숨을 거두었다. 이제 물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2
늦은 봄의 햇살을 받으면서 창가에 앉은 혜란은 타이프를 쳤다. 한 달 전부터 여기가 그의 자리였다. 마카오에 양복지 가격을 조회하는 편지였다. 길가에서 담˙배를 파는 그에게 우연히 담배 사러온 경석의 친구가 소개하여 준 이 무역 회사는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전연 딴 세계였다. 기름이 돌았다. 돈을 물쓰듯 하는 족속들이었다. 사장에 전무, 타이피스트로 혜란, 그리고 급사 아이가 있을 뿐이어서 사장은 말끝마다 ‘가족적 ’이라는 것을 덧붙였다.
두 우두머리는 저 쪽에서 말을 주고받었다. 숨기거나 거리끼는 눈치는 조금도 없었다.
“이번 고철은 들어맞았어.”
“그 댓가루 들여온 나이롱은 더 맞은걸요.”
“고놈의 고철 한탕 더 해야겠군.”
혜란은 곁눈으로 힐끗 넘겨다보면서 키를 눌렀다.
66 고지를 공격하던 대대는 두 차례나 후퇴하였다가 열 두 시까지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고지를 점령하라는 엄명을 받고 태세를 갗추어 다시 진격하였다. 총공격을 개시한 사단의 진격로에서 측면을 위협하는 66고지를 빼앗지 못하면 이 사단뿐만 아니라 전세 전반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군의 폭격기와 야포는 간단 없이 고지에 집중 사격을 가하고 적의 포 지원, 박격포와 중기도 필사의 저항을 감행하여 일대는 불바다로 화하고 간담을 녹이는 총포성에 뼈의 마디마디가 울렸다. 부분대장 김 경석 일등병은 BAR을 분대 우익 후방 오목한 지점에 배치하고 조준을 맞춰 적진 좌익의 화점 (火點)을 때리게 하고 나서 산개한 대원들을 훑어보았다. 한 치, 두 치 지극히 완만하면서도 분대는 전진하고 있었다. 중앙 좌에 위치한 5 번은? 논두렁에 엎드려 머리를 둔덕 밑에 틀어박은 것이 보였다. 꼼짝도 않는다. 신병이었다.
―저 놈은 죽을 놈이구나 !
경석은 육감으로 알았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놈은 백에 아흔아홉까지 죽게 마련이었다.
―一―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피하냐? 기합을 줘야지.
경석은 포복으로 날쌔게 좌로 미끄러져 갔다.
잔등에 손을 얹어도 모르고 5 번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먹으로 철모를 갈겼다.
“자식 아, 나가라!”
꿈틀하고 머리를 약간 비틀다가 그냥 수그러졌다.
경석은 턱을 떠받쳤다. 애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애원하는 눈초리,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너 예 한 군데 가만 있다간 죽는다! 이걸 얼른 뛰어넘어 나가라!”
신병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또 엎드렸다.
경석은 귀를 잡아채었다.
“자ㅡ식, 이봐 이렇게 넘는 거야!”
그는 살짝 둔덕을 넘어서 움폭 팬 곳으로 기어갔다. 뒤를 보았다. 신병의 철모가 나타났다. 총알이 철모 옆에 떨어지면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ㅡ 동작이 느리구나!
신병은 넘어서 주춤했다. 경석은 뜨홈하였다. 금시 맞은 줄만 알았다. 여기 오라고 연방 손짓을 하였다. 이번에는 총알이 약간 높았다. 경석은 부리나케 BAR로 돌아갔다.
혜란은 타이프친 것흘 전무한테 가져갔다. 전무는 죽 훑어보고 나서 얼굴을 쳐들었다.
“리틀(Little)의 t가 하나 빠겼군요……. 뭐 괜찮습니다. 다시 칠 것 없구…….”
경석은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면서 땅에 엎드렸다. 쮸 쮸 소리에 이어서 꽝 하고 터졌다. 몸뚱이가 움칠했다. 머리를 쳐들었다. 옆엣 분대에서 비명이 올랐다. 그는 코를 울리고 입에 들어간 흙을 뱉었다.
전무는 빙그레 웃었다.
“미쓰, 아니 미쎄즈 황, 조용히 얘기할 거 있는데 다섯 시 반에, 아냐 오늘은 토요일이지, 열 두 시 반에 에덴에 나와 주실까?”
혜란은 대답하였다.
“네.”
12 시가 지나도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우군의 폭격기 세 대가 물러서자 사이를 두지 않고 다섯 대가 달려들어 폭탄을 쏟아부었다. 고지의 화력은 약간 수그러진 듯하였으나 야포 지원은 더욱 치열하였다. 정확한 사격이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다. 엎드린 채 손등으로 비벼댔다. 땀과 먼지로 눈이 맵다. 쑤 쑤. 틀림없이 맞았다. 마지막이다! 몸뚱이가 뎅쿵 들렸다가 떨어졌다. 눈을 떴다. 4 번이 산산이 부서졌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7 번이 앞으로 콕 꼬꾸라졌다. 중기에 맞았다. 경석은 BAR 을 잡아채어 미친 듯이 포복 전진하였다. 8 번은 바싹 따라왔다: 흙무더기 옆에 BAR 을 놓고 마구 쏘아붙였다. 적진 좌익 화점에 명중하였다. 불을 토하지 않았다. 제트기 십여 대가 적진 후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 전투도 끝장이로구나. 한숨 돌리면서 좌로 분대원을 훑어보았다. 분대장이 쓰러져 이따금씩 한 팔을 쳐들었다가는 놓았다. 경석은 문득 상반신을 일으켰다가 8 번을 밀어 BAR의 위치에 집어넣고 내달았다.
전무는 얼근히 취했다. 연거푸 맥주를 들이키면서 혜란에게도 권하였다.
“맥주란 한여름에만 드는 건 아닙니다. 언제 마셔두 좋은 것이 맥주거던요. 미쎄즈, 아니 황으루는 미쓰 황이 옳지, 미쓰 황, 얼마나 적적하시우. 가히 짐작이가지요. 그런데 우물은 파야 있구 행복은 찾아야 있답니다. 어디나 있는 것이 행복이죠. 사람이 보지 못한다 뿐이지, 그건 그렇구우, 미쓰 향이 들어오면서부터 왜 그렇게 일이 술술 되는지 몰라. 이번 고철만 하더라두 여간 아니거던요. ……얼마나 재미 봤느냐구? 줄잡아두 일억 환. ……뭐 고철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구? 거 다 수가 있죠. 되는 일이 없는 반면에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 대한 민국인 줄 모르쇼?”
전무는 또 한 컵 마셨다.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하였다. 시선의 각도가 차츰 달라졌다. 혜란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조용히 하실 말씀이란 무어죠?”
“헤헤…… 천천히 합시다. 이 중국집으루 안내한 성의부터 받아 주셔야지. 우선 한 잔 드시구.”
컵을 또 들어서 턱까지 치밀었다. 혜란은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전 못 한다니까요.”
전무는 노려보다가 자기가 죽 마시고 나서 컵으로 상을 탁. 쳤다.
“미쎄즈, 아니 미쯔 황, 얼마나 적적하시우? 나두 가족을 모두 일본에 보내구 독수 공방이라 그 심경 잘 알지요.”
“도루 모셔 오죠.”
“허허, 시국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아오? 그저 만사 튼튼히 함만 같지 못합니다. 이제 막다른 대목이 되면 미쓰 황은 내가 책임지죠. 이런 시절에는 마지막 준빌 단단히 해둬야 합니다.”
혜란도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이 부산에서 우굴거리는 군상, 그 하나 하나가 모두 붙잡으려고 헤매는 황금새였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그럼. 미쓰 황은 절세 미인이야. 내 평생에 처음 보는 가인이오. 내 생애가 여기서 커브를 도는 모양입니다, 미쓰 황!”
전무는 팔을 내밀어 상 위에 얹힌 혜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달리던 경석은 옆구리에 도끼로 찍힌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모로 쓰러져 딩굴었다. 삼각건을 끄집어 내려고 애쓰다가 그냥 지쳐서 숨만 허덕였다. 고통이 더하면서 의식이 차차 멀어져 갔다.
혜란은 반사적으로 뿌리치고 불쑥 일어섰다. 전무는 두 눈으로 지켜 .
“왜?”
혜란은 핸드백을 집어 들고 층층대를 달려 내려왔다. 뒤에서는 전무가 연달아 따라왔다. :거ㅡ一지 같은 년’ 할 무렵에는 이미 아래층에 다다랐다. 경석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중국 사람은 이상한 얼굴을 하였다.
3
달밤이었다.
소나무 숲을 뚫고 구급차는 후방으로 달렸다. 담요에 싸여서 담가에 누운 경석은 혼수 상태에 있었다. 차가 진동하는 대로 좌우로 기울고 때로 옆엣 부상병과 부딪혀도 알 바 없었다. 육체를 뚫고 왕래하는 마음과 마음이 기능을 정지한 이 순간 그들은 뚝 떨어진 물건과 물건이었다. 커브를 돌면서 경석의 몸뚱이가 급각도로 기울자 위생병은 두 손으로 바로잡았다.
천막에 앉은 혜란은 달을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허황하였다.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과거가 희미한 환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달과 더불어
무의미의 공간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4
혜란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담배 상자를 부둥켜안았으나 상자는 차츰 사나이 편으로 끌려만 갔다. 어금니를 악물고 힘껏 잡아채었다. 사나이는 상자를 드러내 놓고 눈을 부릅떴다.
“이러기야, 그래?”
혜란은 대답은 고사하고 도망치려고 옆으로 빠졌다. 사나이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탁 밀쳤다. 혜란은 다방 출입문에 자뿌라지면서 상자를 놓쳐 버렸다. 양담배, 껌, 성냥 등이 비내리는 진흙탕에 흩어졌다.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잔등을 밀치는 손이 있었다. 다방 이다바였다.
“왜 이 야단이야, 응? 여기는 안 된다구 몇 번 얘기했어?”
전매서원이 턱을 놀리자 일꾼은 담배를 주워 구루마에 얹힌 큼지막한 궤짝에 던져 넣었다. 혜란은 다급히 한 걸음 내디디다가 멈췄다. 가슴에서 싸늘한 선풍이 일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선풍은 목에 걸려서 감돌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용두산 천막을 향하여 종종겉음을 쳤다.
목이 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경석은 눈을 떴다. 간호원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호원이 빙그레 웃었다.
“정신이 드셨어요?”
멀리서, 지극히 멀리서 울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것은 말이 아니고 소리였다.
오직 물이 그리웠다. 입을 움직여 물을 청해야겠다. 입이 굳었다.
입은 좌우로 비틀어졌다.
“알았어요, 가만 계세요.”
간호원은 한 손으로 사뿐히 가슴을 눌러 주고 돌아섰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숨은 반쯤 들어가고 멎었다. 동체가 틀에 박힌 느낌이었다.
뒤에서 달리는 신발 자국 소리와 함께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러 오고 이어서 작은 소년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머니 이건 갖구 가세요. 더 ―-----―러운 자식들.”
흙탕에 뒹군 껌과 성냥을 내미는 구두닦이 아이였다. 혜란은 귀찮았다. 말도 하기 싫었다. 옆으로 비켜서 더 빨리 걸었다.
구두닦이는 픽 돌아서 물끄러미 보다가 옷소매루 이마의 빗물을 홈치면서 다방 쪽으로 막 달렸다. 간간이 한쪽 다리로 홀짝홀짝 뛰었다.
경석은 누운 채로 간호원이 부어 주는 물을 조금씩 마셨다.
“수술 경과는 매우 좋아요.”
간호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5
이십 일 만에 타이프라이터로 돌아온 혜란은 수치의 중압을 느끼면서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문을 들어서자 일순간 크게 뜨던 눈을 담박 누그러뜨리고 전무는 앞을 가로질렀었다.
“몹시 아프셨다죠?”
입가에 서린 미소―---=-―이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그 무엇이다. 발바닥으로 인간의 머리를 짓밟는 존재의 그림자다.
혜란은 S 자를 쳤다.
경석은 침대에 결터앉아서 저 쪽 구석 환자한테 상반신을 구부리고 얘기하는 간호원의 옆모습에 혜란을 보았다.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렸다. 여태까지도 혜란의 모습이 머리에 가끔 떠오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非情)의 상(像)이었다. 성서와 연결된 영상이 아니었다. 총알·포탄·괴로움·피·땀·참호·주림·목마름ㅡ이 모든 것들은 자기의 온갖 것을 깎아 버리고 그저 뼈만 남겨 놓았었다. 뼈, 그렇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 내려는 모진 뼈다귀였다.
그런데 이제 혜란은 다른 모습을 갖추고 나타났다.
―지금쯤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일선에서 받은 편지에는 그저 잘 있다고만 했겠다. 편지도 벌써 올 때가 됐는데. 서울쯤 해도 후방이라고 이자들 기합이 부족해, 확실히 하는 일이 모두 느리구 데데허구.
경석은 사지를 뻗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천정의 파리를 주시했다. 혜란이 몹시도 그리웠다. 돌아가면 잘 해 주리라.
혜란은 목덜미가 아팠다. 상하 운동을 하려고 쳐들다가 전무와 눈이 마추치자 도로 숙였다. 또 웃는다. 잔등이 서늘해지는 웃음이었다. 천막에서 나올 때 각오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밤과 여러 낯을 두고 갈고 닦은 각오였다. 면회 사절, 굶주림, 멸시 속에서 단련한 각오였다. 그이가 돌아올 때까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목숨만은 부지하자. 죽더라도 이 가슴에 맺힌 것을 확 풀어놓고야 죽으리라.
그랬던 각오가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들기 시작했다. 걸핏 나가라고만 한다면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리날 판이었다. 목덜미는 더욱 아팠다. 무거운 것으로 지그시 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길을 옆으로 돌리면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낭하에 나오자 크게 숨을 쉬면서 목을 마구 놀리기 시작했다.
옆엣 사무실에서 우편 배달부가 나왔다. 이 쪽으로 온다. 혜란은 편지를 잡아 채다시피 받아들었다. 경석의 편지도 있었다. 오래 기다리던 편지였다.
맨 먼저 ×× 육군 병원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란은 불현듯 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우선 살아 있구나.’
경석은 힐끔 곁눈으로 옆을 보았다. 새 환자가 손구루마에 앉아 오다가 옆엣 침대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치떴다.
“얘, 명룡이 아니나?”
환자는 픽 돌아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자―식 역기 와 있구나. 뒈진 줄만 알았댔는데.”
모든 생각, 모든 환상은 날아가 버리고 자기와 명룡이 있을 뿐이었다. 반가왔라.
옛날 혜란이가 수학 여행을 간다고 두 주일이나 떠나갔을 때, 손꼽아 기다리다가 만나던 때같이 반가왔다. 그 후로는 이처럼 직정으로 반가와 본 일은 없었다. 경석의 얼굴에는 실로 오래간만에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돌았다.
“명룡아, 너두 그래 총에 맞니?”
이 명룡은 씩 웃었다.
“수색대루 나갔다가 그만 실수했구나. 허벅다리에 한 대 먹었다. 까짓거 괜찮다는데 자――식들 여기까지 끌구 오는구나.”
명룡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참 분태장은 어떻계 됐지 ? ”,
“으——ㅁ, 그 날 아니댔나? 버얼써 죽었지. 소대장두 죽구. 가만 있자, 그래 그 모가지에 넓적한 점이 있던 애 말이다. 걔두 죽구 이럭 저럭 죽구 보니 내가 제일 고참이댔는데 그만 한 대 먹었구나.”
이 명룡도 매우 반가운 눈치였다. 평소에는 입을 조금 벌리고 표정도 말도 없던 그가 오늘은 제법 떠들었다. 경석은 그에게 맛있는 것을 듬뿍 먹이고 싶었다. 주머니에 남아 있을 삼백 환 생각을 하였다.
혜란은 창가에 서서 연필로 쓰인 편지를 읽었다.
……·조그만 부상을 했는데 수술 경과는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나으려면 몇 달 걸릴 모양이요. 그 동안 가능하면 한 번 면회하러 오시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기 그지 없소.
간단한 사연이었다. 글씨가 예전보다 무척 서툴다. 연필에 침을 발라 쓴 흔적이 군데군데 나타났다. ‘가능하면’에는 방선(傍線)이 있다. 꼭 오라는 암시에 틀림 없으리라. 아니 틀림없다.
혜란은 다시 한 번 읽었다. 가슴이 떨렸다. 광명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심사였다. 만난다는 것, 아니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위대한 기적이었다. 중압을 뛰어넘어서 수모를 발길로 찰 힘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갔다. 눈길도 웃음도 별일 없었다. 파리만큼도 무섭지 않았다. 백을 들고 사장한테 인사하였다.
“전 서울 가야겠어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사장은 이상한 얼굴을 하였다. 입을 벌리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종내 안 나오는 표정이었다. 혜란은 또 성큼성큼 결어 나왔다. 이번에는 문간에서 급사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전무가 낭하로 쫓아 나왔다.
“하, 미쓰 황 내 체면두 좀 생각해 주셔야지. 사장한테 이리 치구 저리 치구 오늘날까지 끌어왔는데 사람을 망칠라구 이러시우?”
혜란은 픽 돌아서면서 똑바로 보았다.,
“체면? ·…·사람? 당신만 사람인 줄 아시우?”
전무도 입을 벌리고 안 나오는 말을 기다리는 얼굴을 하였다. 기름 칠한 반백 머리가 옆을 향하면서 약간 수그러졌다.
혜란은 전무의 목덜미에 강한 시선을 던지고는 돌아서 활기 있게 걸었다.
6
아침 내내 두 팔을 베개로 천대에 누워서 천정만 바라보던 이 명룡은 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불쑥 이렇게 물었다.
“경석아, 너 진짜 대학 교수가?”
그 표정 없는 얼굴에 입을 약간 벌린 명룡. 경석은 농으로 받았다.
“건 왜 물어?”
“그저 물어 보는 거지.”
명룡의 얼글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석은 농으로 받은 것을 뉘우쳤다. 무표정 뒤에는 표정을 불허하는 간곡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명룡아!”
“응?”
이 명룡은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너, 내 동생 돼 줄라?”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이 없었다.
“……”
침목이 흘렀다.
“왜 대답이 없어?”
“시시한 소리 그만둬.”
“……”
경석은 말문이 막혔다.
계원은 짜증을 냈다.
도강증을 내러 매일 내왕한 끝에 혜란은 더욱 초조하기만 하였다. 내일 오라, 모레 오라, 결재가 안 났다. ―― 이런 식으로 열흘이 지났다. 초조한 심사로는 쏘아붙이고도 싶었으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영영 안 나올 것만 같아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공손히 물었다.
“그럼 언제쯤 와 볼까요?”
문서를 보는 계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글쎄, 언제라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혜란은 암담하였다. 발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정이 급해서 그래요. 전에두 말씀드렸지마는 일선에서 부상한 환자가 죽어 가나 봐요…….”
말끝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았다.
“사정 이야 뭐 댁에만 있는가요?”
혼자 중얼거리듯 하면서 계원은 일어서 저 쪽으로 사라졌다. 멍청하니 뒷모양을 바라보다가 혜란은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현관에 나서니 눈물이 금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는 변소로 얼른 달려갔다.
침대에 누운 명룡은 천천히 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물었다.
“너 뭘 하러 전쟁에 나왔댔니?”
무표정한 얼굴은 입을 비스듬히 벌린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난(多難)하던 과거를 담은 그 눈초리에는 어떤 쓸쓸함이 괴어서 경석의 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가슴에 퍼졌다. 경석은 대답이 없었다. 말이란 너무나 빈약한 연장이었다.
“우리 같은 거야 아깝지 않은 농군이니까 무더기루 쓸어내다가 무더기루 죽어두 괜찮지만, 네가 나온 건 좀 이상하단 말이다. 대학에 댕기는 아이덜두 나라에 쓸 사람이라구 빼놓는데 대학 선생님이 나올 턱이 없쟎아? 그게 이상해서 묻는 거다.”
베개 위에 도로 얹힌 얼굴에는 무엇인가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경석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으一ㅁ,……·그건 말하자면 잘못된 점이다. 아까운 사람, 아깝잖은 사람, 그런 구별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사람은 다 매한가지 아냐?…….”
경석은 말을 끊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은 모두 형제다.”
명룡의 얼굴은 돌아서 똑바로 위를 쳐다보고 한쪽 팔이 이마에 얹혔다.
“거, 다하는 소리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못 생기구 돈 없구 일자 무식이 아냐? 공부두 할 대루 하구, 돈두 있구, 자동차 타구 댕기는 사람들하구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냐? 그런 사람들이 자동차 타구 지나가는 길을 손바닥이 닳두룩 닦는 게 우리네 농군이다. 난 가만 생각하다가두 비감이 들 때가 있다. 무슨 이 따위 팔잘 타구났는지 모르겠더라.”
명룡의 입에서는 억양도 없는 얘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경석은 그 한 마디가 뼈에 사무치게 아팠다. 자기도 과거에 봉사를 요구하는 족속이었다. 우월감, 부모의 덕분으로 근대 합리주의 건축의 한 조각을 훔쳐다가 그것을 번뜩이고 그것으로 온 세상을 재고 잘났노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한테 더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고향을 떠나서 행패를 일삼는 탕아(蕩兒)들― 자기도 그 패거리였다. 갈수록 멀어져 가는 이역(異域), 그 이역과 고향 땅 사이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고 이방인으로 행세하며 고토(故土)의 원시(原始)에 침을 뱉는 일당이었다. 침을 뱉으면서 이를 침노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파렴 치한들의 앞잡이——이것이 나 김 경석이었다.
“얘 우리 제대하면 형제처럼 같이 살자.”
경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이 튀어 나갔다. 명룡은 곁눈질로 힐끔 넘겨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경석은 상반신을 내밀었다.
“응?”
명룡은 눈을 감고 팔을 이마에 얹은 채 사이를 두고 대답하였다,
“죽는 날이 제대하는 날인데 살긴 뭘루 살아.”
경석은 도로 제자리에 드러누웠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죽는다! ·……이 명룡과 더불어 고지의 돌 밑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길은 곤리로 트여 있었다. 혜란한테로 가는 길, 그 쪽에는 길이 없었다. 이 길을 더듬어 가면 그 저 쪽, 아득한 피안(彼岸)에 혜란이 있음직도 하였다.
7
간밤에는 꿈에 혜란을 보았다. 한강 저 쪽에서 건너오려고 무진히 애를 쓰는 혜란이었다. 자기를 언뜻 보자 발을 동동 굴렀다. 배가 없었다, 옛날처럼 아름다운 혜란이 었다.
― 꽃은 누구를 위하여 피었는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경석은 쓸쓸함을 어쩔 수 없었다.
“자 이제 가겠다, 잘 있어라.”
원대로 복귀한다고 보따리를 들고 선 명룡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경석은 맥없이 일어섰다. 요사이 며칠을 두고 몸이 거뿐치 못하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서 정문 밖 한길까지 나왔다. 명룡은 이제 그만 들어가라고 하였다. 경석은 힘껏 명룡을 안아 주고 나무 밑 돌등에 앉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명룡은 이따금씩 주먹을 눈으로 가져갔다. 개울을 따라 사람 없는 거리를 가는 이 길, 경석은 꼼짝도 않고 명룡의 뒷모습에 시선을 부었다. 모퉁이를 돌면서 명룡은 잠깐 발을 멈추고 이 쪽을 보다가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경석은 가슴이 싸늘해지면서 앞이 흐렸다.
개울 쪽으로 돌아앉은 그는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울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경석은 일어섰다. 포격으로 담장이 부서진 경복궁, 북악산, 낯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젼 고요한 거리, 지게에 배추를 지고 가는 노인, 그리고 남산― 쓰다듬어주고 싶은 정다움이었다. 기억에도 희미한 옛날에 떠나온 땅이요 사람이었다.
― 나도 가야지.
정문에 들어서면서 경석은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옮겨 놓다가 비틀거리던 끝에 느티나무 밑에서 쓰러지고야 말았다. 보초가 달려와서 일키려고 하였다. 정신을 가다듬어 일어나려는 순간 상처에는 또 모진 충격이 왔다. 머리가 아찔해지고 빙빙 돌다가 캄캄헤졌다. 경석은 축 늘어졌다.
천안에 멈췄던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혜란은 도시락을 끌렀다.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감격은 이미 가슴에 벅찼다. 서른세 살과 스물 일곱ㅡ-― 액운은 여기서 걷히고 어쩌면 서울에서 그냥 살게 됨직도 하였다.
늙은 군의관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때까지 목숨이 붙어 온 것이 기적이지. 원래가 안 되는 거야. 치명상인걸.”
경석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한 간호원은 손을 들어 눈을 감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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