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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틀의 말은 거의 상식에 가깝다. 이 말은 그의 정치학 이라는 저술 속에 나오는 말인데, 그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ōon politikon)’이라 불렀다. 이 말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로 바뀐 것은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한 한 사건 때문이다. 세네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어 텍스트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동물’을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is)'로 전환시킨다(1).
언뜻 생각하면 인간의 속성은 모임과 협력, 그리고 역할의 분담에 있고 이를 통해 지금의 문명과 기술을 이루었다는 면에서 이는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를 보면 오히려 인간의 그런 속성으로 인해서 바이러스 감염과 이로 인한 고통과 사망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고 이를 강력하게 국민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람 사이의 교류를 아주 그만둘 수 는 없기에 만나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만나지 않고도 비대면으로 업무나 쇼핑 등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정보 통신 기술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속성은 이처럼 인간의 생존과 문명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강점이지만 동시에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는 약점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이 부분을 강조한다. 인간은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말이다. 시편 8:4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그 앞의 3절에서 시인이 하늘과 달과 별(우주)을 보고 난 후 한 말이다. 우주의 광대함과 무한함에 비하면 인간인 자신은 정말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더구나 그 우주를 만드신 절대자 하나님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임을 자각하는 말이다. 욥도 욥기 7:17에서 동일하게 말한다. "사림이 무엇이기에". 이 말은 욥이 그 앞장인 6장에서부터 자신의 고통, 특히 몸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후에 뱉은 말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광대하고 장엄한 우주를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한 후에 "인간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다면, 욥은 가족과 재산과 건강을 모두 잃고 난 후에 고통가운데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라는 속성이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을 가지는 것처럼 인간의 연약함 역시 양면성을 가진다. 그 양면성은 사람을 위협하는 존재가 거대한 우주나 자연의 재해일 수도 있지만 입자의 크기가 80-120 나노미터(1 나노미터는 1/천만 센티미터)에 불과한 바이러스일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대조에서 더욱 부각된다. 이 극렬한 대조로부터 우리는 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자각을 얻은 시인과 욥은 그 이후의 사고의 흐름을 정반대로 가져간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토록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인간을 하나님 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천사보다는 우월한 지위로 묘사한다(5절). 하지만 구약 원문을 보면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엘로힘(אלהים)이고 이는 개역개정의 '하나님'이라는 번역이 맞다(2). 더구나 시편 8편은 찬양시로서 예배 때 사용되었을 것이다. 복수형의 말과 단수형의 말이 번갈아 등장하는 것(“우리 주여” 1절; “내가 보오니” 3절)은 예배라는 맥락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것이다. 우주보다 못한 인간,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피조 세계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배하는 대리인으로 삼으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감사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대리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찬양의 이유인가!
이에 반해 욥의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중요한 위치로 높이신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게 되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의 무자비한 감시와 영원한 조사를 인간에게 초래했다는 비난을 시작하는 말이다(3). 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철학적이지도, 그렇다고 종교적이지도 않다. 다만 현실의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나온 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이 고통을 견디며 사는 것보다 낫겠다는 선택이다. 욥기 7:15-16의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깍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라는 울부짖음 뒤에 나오는 질문이 바로 17절의 "사람이 무엇이기에..."이다.
이러한 시인과 욥의 인식과 반응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왜 똑같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욥과는 다른 방향으로 시인은 나가고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당장 처한 상황과 지금까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과 경험의 결과일 것이다. 시인은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류 전체에 대한 섭리의 차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면, 욥은 자신만이 겪고 있는 재난과 고통 속에서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며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에 처해 있는지 정말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는 차원에서 묻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시편 8편의 시인이 우주를 보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크게 세우신 것을 찬양했다면, 욥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항의하며 따진 것이다. 시인이 인간 전체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면, 욥은 고통 중에 있는 자기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다. 욥은 다른 이들의 입장과 형편을 생각할 여유도 겨를도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고통과 오직 하나님께만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 치중했던 욥의 체험은 오늘날 다른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모여서 함께 호흡하며 한 공동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활동들을 하는 것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더 잘 퍼지게 하는 조건이 되자 그러한 활동들은 위험하고 피해야 할 것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을 그저 인간은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만 인식한다면 -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이 그런 의미만은 아니지만 -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시기 동안 인간은 절대로 사회적 동물이어서는 안된다. 아리스토틀이 말한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다'가 의미하는 뜻에 맞게 행동한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공동체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서 이웃(사회)에 관심을 갖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하며 논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더욱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단지 모이지 못하는 것만을 문제삼지 말고 왜 모이는지를 곰곰 따져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25의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말씀에서 '모이다'가 그저 함께 모이는 형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을 말한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모였는데, 유대인들의 모임 외에 그리스도인들은 따로 모임을 가지곤 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모이는 목적과 이유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정한 모임만 허용하고 그외에는 모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모이기를 폐한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모이는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형식적인 모임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는 것이 된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25절은 앞 24절의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는 문장을 보강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 날'은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을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는 '심판의 날', 또는 '주님 재림의 날'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현실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으로 돌아보아 고통과 고난의 때를 이길 수 있도록 담대해져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가?'라는 본래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고 하셨다. 이 명령에 따라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 혹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그 공동체의 특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으므로 폴리스를 통해서 자급자족을 이루고, 또한 한 개인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이 지구 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격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의 차원에서 그렇게 말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완전한 인간은 '이 땅에서 잘 살아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로 온 땅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이다. 사회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며 이 일을 이루는 과정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 폴리스적 존재가 아니라 혼자이든 공동체의 일원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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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글 중에서 인용, 출처: http://www.kefplaza.com/labor/manage/econo_view.jsp?nodeid=289&idx=10933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적 동물'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3071221871
(2)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번역한다. 또한 개역개정도 히 2:7에서 동일한 시편 8편의 인용 부분을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라고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WBC의 설명을 보면 아래와 같다.
The early versions differ in their interpretations at this point. Many of the earliest versions
took the word אלהים (literally, “God, gods”) to mean “angels” (so G, S, Tg and Vg), and in
some texts that would be an appropriate translation. But other versions (Aquila,
Symmachus, and others) translated God. The translation angels may have been prompted
by modesty, for it may have seemed rather extravagant to claim that mankind was only a
little less than God. Nevertheless, the translation God is almost certainly correct, and the
words probably contain an allusion to the image of God in mankind and the God-given role
of dominion to be exercised by mankind within the created order. This position is mankind’s
estate (the verb in v 6a implies a past accomplishment), yet the role is not static, but
requires continuous human response and action: hence, “you will crown him with glory
and honor” (v 6b).
G Greek Old Testament, S Syriac Old Testament, Tg Targum, Vg Vulgate
Craigie, P. C. (2004). Vol. 19: Word biblical commentary (2nd ed.). Word Biblical Commentary (108). Nashville, Tenn.: Nelson Reference & Electronic.
가장 초기의 역본들 중 많은 것들이 엘로힘(אלהים, 문 자적으로는 “하나님”)을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헬라어 구약성경, 시리 아어 구약성경, 탈굼 및 벌게이트역이 그러하다). 그리고 일부 사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적합한 번역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본들(아퀼라역, 시마쿠스역 및 그 밖의 역본들)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천사들”이라는 번역은 아마도 겸손이 낳은 결과였 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터무니없는 말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번역이 옳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그 말은 인간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이 피조된 질서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지배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위치다(5절의 동사는 과거에 성취되었음을 암시한다).
(3) In Job, “What is man?” prefaces a reproof that God’s elevation of humankind to a position of significance has not been for its good, but has only drawn down upon mortals God’s merciless scrutiny and perpetual examination.
- Clines, D. J. A. (2002). Vol. 17: Word Biblical Commentary : Job 1-20. Word Biblical Commentary (192). Dallas: Word, Incorpo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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