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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이 계시는 샌디에이고의 Deer Park Monastery를 찾아서>
우리 가족은 지난 일요일(February 1st, 2004) 여기서 한 시간쯤 달려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틱낫한 스님이 계시는 수도원(Deer Park Monastery)에 다녀왔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알려준 대로 길을 따라가다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어 그곳 주민의 도움으로 수도원 입구를 찾았다. 들어서면 첫 번째 언덕 위로 적갈색의 타원형 지붕이 멀리 보인다. 천여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 건물 벽 양쪽으로 여러 군데의 유리문 통로가 있고 정면에는 두 군데의 출입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질서 있게 신을 벗고 들어 갈 수 있었다. 강당에 못 들어간 사람들을 위하여 밖에 의자도 놓여 있었다. 오전 8시에 미국인들을 위한 법회가 영어로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으나 우리는 거의 끝날 무렵에 도착 되었다. 틱낫한 스님은 한 시간쯤 쉬신 후에 다시 베트남 불자들을 위하여 베트남어로 거의 세 시간. 동안거 법문을 듣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우리가족과 미국인들은 영어 통역이 되는 이어폰을 끼고 들었다. 통역자의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 힘들었다)
우리 한국식 사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강당에는 부처님도 계시지 않았고 정면 벽 위에는 다이아몬드모양으로 자른 두장의 빨강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Peace and happiness at every step.' 'The pure land in the here and now.' 그리고 양쪽에 세워둔 조화로 만든 나뭇가지에도 무슨 글자들이 적힌 쪽지들이 몇 개 매달려 있었다. 수수한 꽃 화병 하나 뿐 이였다.
앞쪽의 신도들 속에 섞이어 앉아 있던 백여 명이 넘어 보이는 스님들이 질서 있게 조용히 줄지어 앞으로 나왔다. 왼쪽에는 비구스님 오른쪽에는 가사와 같은 빛깔의 밤색스카프를 머리에 동여맨 비구니 스님들이 성가대가 되어 노래공양을 시작 하였다. 미소를 띠며 노래를 듣고 난 Thich Nhat Hanh(틱낫한) 스님은 물 한 컵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싸들고 한 모금씩 세 번에 걸쳐 정성껏 마셨다.
‘평화로움(Being Peace)’ ‘화(Anger)’ ‘힘’ 등의 저서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월남스님. 시인 그리고 평화운동가. 월남 전쟁 때 프랑스로 망명가서 자두마을을 세우고 그곳에서 살고 계신다. 11시가 되자 맑은 광채가 발하는 조그마한 틱낫한 선사님이 나와 수수한 법상에 앉으셨다. 우리사찰에서처럼 스님을 예우하는 삼배도 없었고 합장하는 인사도 없었다. 매우 편안한 분위기에 앉아있는 청중들과 전혀 권위 의식이 없는 시골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연사로 나오신 틱낫한 tm님. 그런 분위기에 우리가족과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 이렇게 신선한 모습으로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위대한 동양의 성자임에 확실 하였다. 아아! 살아있는 부처님. 나는 마음 속으로 “Thich Nhat Hanh sunim is a living Buddha!"라고 외쳤다. 때론 불편하고 형식적이던 한국적 전통의 불교의식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던 나의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터지는 느낌이었다.
40년 전에 승려가 되었다는 할머니 비구니스님이 앞쪽으로 나와서 베트남어로 틴콩션 장군이 지은 노래를 함께 불렀다. 틱낫한스님도 함께 부르신다. 그리고 또 영어로 번역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The sun is in your shining eye. The autumn rain now begins……." 오늘은 불자이며 뒤늦게 참선을 배우고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틴콩션장군의 화려한 일생을 주제로 법문을 하시는 날이다.
월남에서 이름을 날리던 틴장군은 프랑스가 지배할 때 저항하던 애국지사 아버지를 15살에 잃은 후 방황하였지만 독실한 불자이고 자비심 넘치는 훌륭한 모친의 영향을 받아 불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공산당들이 동족을 마구 죽이고 젊은이들의 수많은 주검들을 보며 같은 인간으로서 그는 생과 사의 의문을 던지며 괴로워하였다. 마침내 그런 장군의 뼈아픈 고통들을 그는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고 노래로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정부에 대항하였다고 한다. 아주 자상하게 장시간 동안 장군의 일생을 들려주셨다. 두 시간쯤 흘렀다. 중년의 여신도가 나와 베트남의 북인 목어와 피아노반주에 맞추어 독창을 하였다. 틱낫한 스님이 피곤하시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 같았다. 스님은 법상에 그대로 앉아 평화로운 얼굴로 잠시 쉬시며 노래를 들으셨다. 노래가 끝나니 시끄럽게 손벽을 치지 않고 우리들 어릴 적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를 부를 때 하는 손동작으로 양손을 들고 motion으로 소리없는 박수를 보낸다.
1968년에 아름다운 노래들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시인이던 유명한 틴콩션 장군이었지만 늘 고독을 느꼈기에 어느 날 스님으로부터 참선수행을 배우며 마침내 자기 안에 있는 반짝이는 지혜를 찾아 깨닫게 되었다.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걱정과 공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여생을 마쳤다는 이야기였다.
틱낫한 선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맨틱 사랑을 추구 하고 좋아 하지만 그것은 시한부 사랑이라고 말하셨다. 그러나 우정은 영원하다고 강조를 하신다. 진실한 우정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통하고 서로를 이해 할 수가 있다. 진실한 우정은 보석처럼 귀중하다고. (Friendship is more treasurable.) 그는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고 또 행복을 가져 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하여 함께 모여 수행을 하자고 외치셨다. 틱낫한스님은 늘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하셨다.
끝날 무렵에 틴콩션 장군과 거의 40여년 우정을 나누었다는 월남여가수 한분이 나와서 유우머스럽게 스님과 농담을 20여분 동안 주고받으며 청중을 웃겼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이고 처음으로 스님을 만나 곁에 앉으니 떨린다고 말했다. 베트남어로 말하여서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이어폰을 귀에 걸고 듣는 나의 미숙한 듣기능력으로 100% 소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집중하여 들었다.
보람 있는 삶의 가치를 찾아 온 파란 눈의 서양인들과 우리 가족처럼 먼 길을 달려온 베트남 불자들.
세 시간에 걸친 행사가 끝나니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이 법당청소를 시작하였다. 한 스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모두 부처가 될 사람이니깐 수행자들이 해야 한다고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신도들은 점심을 먹으려고 아래의 공양처로 거의 내려가 버렸고 스님들만 남아서 청소를 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점심식사 테이블 쪽으로 가지 않고 우리 가족은 수도원 사무실 앞 정원으로 올라갔다. 나무에 붙어 있는 팻말을 읽어 보았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한 걸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강연 주제에 들어있는 내용 이였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는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순간에 바르게 살며 좋은 업을 만들어 가라는 말씀들.
Thich Nhat Hanh스님은 Morden시대에 어울리게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행동으로 전달해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스승임을 나는 똑똑히 확인하는 날이었다. 가난한 보트피플 이라며 한때 우리가 얏 보았던 베트남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결코 잘못이었음을 난 크게 깨달았다. 이렇게 넓은 땅에 큰 건물을 세우고 단결하는 베트남사람들로부터 우린 분명히 배울 점이 있었다.
차원이 높다고 자부하는 한국적 우리 불교는 아직도 옛날과 거의 다름없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뭘까?
미국에 살며 큰집과 화려한 자동차를 사기위하여 대부분의 교포들이 악착같이 일하여 돈을 벌어 제이의 유태인이라는 별명가지 얻어놓은 한국사람-우리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남겨주고 떠날 것인가? 지금 우리들은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우리의 한국문화를 얼마나 관심 있게 보존하며 발전시켜 왔는가!
죽어서도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 천국에 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일부의 기독교인 친구들은 조국의 문화와 종교에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미신 같은 종교를 믿는다며 때론 나를 무시하려고까지 든다. 오죽하면 하버드를 나온 미국인 현각 스님이 만행이라는 책을 써가며 우리를 대신하여 나섰을가! 많은 교포들이 외국에 나와서까지 조국의 문화를 내팽개쳐 버리는 듯 하다. 서양인처럼 닮아가고 싶어 눈을 키우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자신감마저 잃어가고 있는 조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들이 진정 한국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를 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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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Footsteps of Buddha>
토요일인 1월31일에 우리가족은 샌디에고의 북쪽동네 샌디기에토 공원에서 하는 야외법회에 갔다. 2달라를 내고 주차하는 공원의 파킹장은 만원이어서 우리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올라왔다.
우리가 공원에 들어서니 틱낫한 스님 일행은 부처님 당시 걸식을 하던 행사를 하고 있었다. 메스컴을 통하여 행사의 내용을 미리 알고 보시물을 준비해 온 사람들은 열을 지어 서서 스님들이 두 줄로 지나 갈 때 음식을 바리(밥그릇)안에 넣어 드렸다.
걸식이 끝나고 다시 본부석의 잔디밭 위에 230명이나 되는 틱 선사의 수행승들이 앉으셨다. 공원 언덕 높은 쪽으로 무대처럼 비구니(남자스님) 와 비구(여자스님)의 가운데 자리에 나란하게 틱낫한선사가 앉고 그의 곁에는 커다란 범종이 놓여 있었다.
틱낫한 선사는 제자가 갖다 놓은 물 한 컵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쳐 들었다. 서너 차례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마셨다. 매사에 먹는 음식들을 아무 생각 없이 후다닥 성급하게 먹고, 주변의 작은 일에 화도 잘 내는 우리들을 스스로 조용히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스승님. 자연으로부터 온 고마운 음식들과 수고해서 만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음식을 어떻게 먹고 왜 먹어야하는 가를 설명하셨다. 우리 몸에 필요한 적절한 양인 한 그릇정도의 음식을 반시간 정도 걸려서 천천히 오물오물 드셨다. 공원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위대한 수행자와 그 제자들이 점심을 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선사의 평화로운 식사법을 따라 그들이 준비해 온 점심을 조용히 먹기도 하고 소풍 나온 가족처럼 잔디밭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무절제한 식사법을 하지 않는 듯 공원에 모여든 서양인들의 엉덩이들은 모두 정상인의 사이즈였다. 몇 아이들이 뒤쪽 놀이터에서 조용히 놀고 있었지만 점심 후 본격적인 법문강연 시작이 되자 그 아이들도 모두 떠났다.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에게 공중도덕을 철저히 가르치는 미국사람들의 문화수준은 역시 최고이다. 멀리서 정복을 입은 한 관리인이 간간히 오가며 호기심으로 한번씩 강연장을 바라볼 뿐 이였다.
식사를 마친 오후에는 정식으로 법상에 올라가 앉으셔서 열 사람정도의 공개 질문도 받으시더니 영어로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법문을 하셨다. 대부분의 질문들이 스트레스에 대한 것들이었다. 스님은 “Stop thinking is very important.”라고 말 하셨다. 우리는 늘 일상의 번뇌 속에 살고 있기에 순간순간 스스로 깨어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는 일러준다. 구름이 비가 되고 시냇물이 되어 다시 구름이 되듯이 우리는 언제나 형태만 변할 뿐 우리들의 근본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 한다. 그러니 나고 죽는 일도 결국은 우리들의 형태(겉모습)만 바꾸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공원 낮은 쪽 테이블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들었다. 한 사람 동양인의 수행 철학 강의를 들으려고 모여든 파란 눈의 사람들로 붐비는 공원의 희한한 풍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같은 동양인으로 내 좁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저 많은 젊은이들이 머리를 박박 깎으며 왜 저렇게 어려운 수행 길에 들어갔을까?”
"저 수도승들의 고뇌와 우리들의 고민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
다시 한번 우리들 삶의 의미를 깊이깊이 생각해 보는 날들이었다.
<2004년 2월 4일 오후 4시 Thich Nhat Hanh 스님과 Interview>
몇일 전 고맙게도 남편은 토요일 틱낫한 스님의 야외법회에 가자며 나에게 청해주었다. 근래에 많이 달라진 그이의 이런 데이트 신청이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수요일 오전 내가 인터넷을 쓰는 바람에 우리 집 전화가 불통이였다. 11시경에 내가 만났던 자원봉사자 Denise로부터 인터뷰시간을 연락받고 남편의 직장에도 전화를 걸어 알렸더니 그이가 좋아서 일찍 일을 마치고 달려 왔다. 딸은 나의 부족한 영어를 도우려고 통역관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우리가족은 15번 고속도로 위를 신나게 달렸다.
교통체증 시간에 걸리지 않으려고 우린 일찍 출발하여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책방에 가서 책을 몇 권 샀다. 비구스님과 여신도 한 분이 책을 팔고 있었다. 3시 반이 되어 약속장소에 내려와 있으니 백팩을 맨 월남 아가씨 Denise가 왔다. 서서 20여분동안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백팩(가방)을 맨 Brother Phap Hai스님이 웃으며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가는데 무지하게 느린 속도로 한 발자국씩 사푼히 걸어가신다. 그리고 우리가 질문이 있어 물을 때마다 걸음걸이를 멈추고 뒤돌아서서 귀를 기울려 듣고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프랑스사람이냐고 물었더니 호주사람 이라고 한다. 스님이 되신지 7년이 되었단다. 그의 말하는 태도와 걸음걸이를 보며 빨리 서두르는 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이 한방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참 수행자의 고요한 걸음걸이를 뒤따라가며 행선이 바로 저런 것 이로구나라고 우리가족도 가만가만 흉내를 내며 그 젊은 수행자의 뒤를 밟았다.
스님의 거처는 조용하고 아담한 작은집 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월남스님들과 다른 서양인 스님이 우리를 묵언으로 반겨준다. 거실에는 하얀 석고상 부처님 사진이 중앙에 걸려 있고 Thich 스님이 16살에 출가 하셨다는 베트남 절의 사진이 걸려 있다. 갈색방석과 엉덩이에 받히는 동그란 쿳숀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으니 투명하고 작은 유리컵에 녹차가 테이블 위에 준비되고 스님의 안경 그리고 아주 작은 기계(녹음기?)를 갖다 놓았다. 잠시 후 Thich스님이 방에서 나오셔서 우리는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벽에 걸린 부처님 사진에만 인사를 하라고 손짓을 하셨다. 우리가 삼배를 올리는 동안 옆으로 비켜 내내 서계셨다.
너무나 분주하신 일정 때문에 나의 갑작스런 인터뷰요청이 받아들여질지 궁금하였었는데 뵙게 되니 정말 기뻤다. 틱낫한 선사님과 마주보고 앉노라니 거리를 두는 한국의 높은 스님들과 분위기가 달라서 난 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뵙자마자 기쁨으로 흥분도 되고 몸이 잘 달구어지는 나의 갱년기 증세와 함께 조금 긴장이 되어 얼굴에서 나는 땀도 났다.
Thich스님은 내가 책상에 올려놓은 1월호 미주현대불교를 보시더니 구독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어서 약 2000명쯤 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정도면 괜찮다고 기뻐하셨다. 사실 이 책은 신도들이 기증한 돈과 저처럼 아무 보수를 받지 않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기에 만들어지는 가난한 월간지라며 우리현대불교책의 실정을 말씀드렸다.
스님 측에서도 묻지 않았지만 사전에 나도 인터뷰시간에 대한 제약을 여쭙지 않았다. 그래서 간단히 두 세가지의 질문을 준비해 갔었다. 우리를 만나보시더니 거의 한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전혀 시간을 재촉하지 않으시고 편안하게 대화에 응해주셨다.
*What is the meaning of our life?(우리 편집장이 여쭈는 질문이라고 전했다)
Thich 스님-사람에 따라 정의가 다릅니다.
불교의 초발심자에게 해주실 수 있는 말씀으로 다시 청했더니 “목표를 세우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지요.”
*What do you think of it while you visited korea last year?
Thich 스님-거의 한 달 동안 많은 곳을 가보았는데 한국이 매우 아름다운 나라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사람들과 음식들 모든 것이 나와 아주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는 전생에 한국사람에 살았다고 생각 됩니다. 특히 서울의 남산에 살았던 것 같아요. 또 북한사람이 아니라 남한사람이라고 말 하셔서 우리 모두 한바탕 웃었다.
*스님의 책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스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장래에 미주현대불교에서 Los Angeles나 New York에 오실 수 있으면 하루 법문을 해주시라고 초청을 하고 싶습니다. 오실 수 있는지요?
Thich스님- 물론입니다. 갈 수 있지요. 나의 수좌스님들과 의논을 하시지요.
*내가 딸을 스님께 소개하였다. 미국에서 동아시아 학을 공부했으며 이제 한국에 나가 4년 동안 한국학 박사과정을 공부한다며 말씀을 드렸더니 틱낫한 선사께서는 매우 기뻐하신다. 그리고 딸 같은 젊은이들이 이제는 현대불교로 개혁(revolution)을 해야 한다며 명령을 하시듯이 부탁을 하셨다. 나의 딸은 "선사님께서 저에게 숙제를 주시는군요.”하고 웃었다. 또 지난해 한국방문 때 동국대학에서 수계식을 하였는데 4000명이 왔었어요. 법문하고 좌선과 행선도 하고 삼일동안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청중의 50%가 기독교인 이였다는데 참석자 모두 불자가 되어버렸다며 기뻐하셨다.
*스님은 전통 의식과 다르게 절도 받지 않으시고 대단히 현대적 이십니다.
Thich 스님-“I am human-being, and normal ."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니깐요. 그래서 그는 어느 법회에서든지 절을 받지 않았나보다. 높으신 분이라고 권위를 전혀 나타내지도 않으셨다. Thich,선사는 옛날의 부처님 시대와 똑같이 남녀평등 하다고 강조를 하였다. 그래서 합창 때도 비구 비구니스님들을 나란히 동등하게 서게 하신다며 말씀을 하셨다. 비구스님이 앞서고 비구니스님이 뒤따라오는 일은 부처님시대에도 없었고 누구나 평등하시다고 강조를 하셨다. 이렇게 겸손하신 선사이지만 그의 제자들은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 훌륭한 스승으로 높이높이 모시고 있음을 난 느낄 수가 있었다.
젊으실 적에 틱낫한선사님은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를 하셨고 콜롬비아에서도 강의를 하여서인지 월남어의 억양은 조금 있지만 유창한 영어로 부처님의 말씀을 편안하게 들려주신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기복 불교가 아니고 형식적이 아닌 철저한 행동불교 실천불교를 그는 솔선수범하며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많은 서양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또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드는지도 모른다.
점점 우리가족과 더욱 친숙하게 느끼시는 틱낫한스님은 한국 사람들이 이곳 수도원을 많이 이용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씀 하셨다. 몇 사람 그룹을 만들어 밤9시부터 다음 날 4시까지 하루 밤 수행을 하러 오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분들은 사무실에 연락하고 의논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김치를 아주 좋아 하신다며 또 김치찌개가 아주 맛있었다며 한국방문시의 추억을 다시 회상을 하셨다.
내 손목시계는 벌써 5시를 가리켰다. 감사하다며 인사를 드렸더니 스님은 어서 곁으로 와 앉아서 우리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자며 내 딸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포즈를 취해주셨다. 틱낫한 선사님은 8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고 전혀 느낄 수가 없이 젊고 건강해 보였다.
나는 프랑스로 가시기 전에 김치공양을 한번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인터뷰를 하고 나오며 시좌스님에게 마늘과 파를 드시느냐고 여쭈었다. 대답은“No!"이었다. 물론 고기도 안 드신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젓갈도 넣지 않는 순수한 야채김치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오래전 내가 미국에 이민 와서 서점의 책꽂이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여러 권의 그의 저서를 발견하고 월남스님인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몹시 궁금하였었는데…….
세월이 흘러 흘러 이렇게 인연이 되는구나 싶어서 오늘은 무척 감회로운 날이었다.
멀리서 종이 울린다. 15분마다 들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면 수도원의 모든 사람들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잠시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고 한다.(What I am thinking? What I am speaking? What I am doing?) 종소리를 들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순간이나마 돌아보도록 일깨우시는 틱낫한선사님의 가르침이 참 멋있다고 느껴진다.
수도원 스님들의 하루생활
AM 5:00 기상 좌선 염불(get up, meditation, chanting)
7:45 식사(breakfast)
9:00~11:00 울력(Cooking, cleaning, gardening)
11:30 행선(walking meditation)
PM 12:30 Lunch with silence
short rest(휴식)
3:00 토론(discuss activity), 기공체조
6:00 Dinner
8:00 좌선과 염불
9:30 취침
Direction to Monastery:
(샌디에이고 북쪽, 에스콘디도의 Deer park Monastery 가는 길)
Free way 15번에서 78번 East 로 나가 Broad way 만나면 왼쪽으로 돌아서 똑바로 올라가 North Ave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길 Cindy Jo Lane이 나온다. Cindy Jo Ln에서 왼쪽으로 돌아 잠깐가다 Melru Lane을 만나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조금만 가면 절의 사인 판이 나온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산등성이에 있는 절이 나온다.
주소
Deer Park Monastery
2499 Melru Lane
Escondido, CA 92026
전화 760-291-1003
팩스 760-291-1010
웹페이지 안내
www.plumvillage.org (동안거동안에 미국에서 머무시는 틱선사님은 2월과 3월에도 많은 행사가 있다.)
소개
Deer Park Monastery는 한때 평화봉사단에서 또 청소년수련장으로 사용되었다가 빈 공터로 최근에는 내팽겨진 땅이었다고 한다. 2000년에 틱낫한스님과 신도들이 이곳을 구입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부처님이 인도에서 최초로 설법하셨다는 장소 Deer Park(녹야원)와 우연히도 이름이 같아서 기뻐 하셨다고 한다. 지금 틱낫한선사님과 동안거를 하려고 230여명의 스님들이 세계각지에서 모였다고 한다. 평소에는 오십 여명의 스님들이 살고 계신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프랑스의 자두 마을(plum village in France)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보트를 타고 월남을 도망쳐온 아이들을 도우려고 프랑스의 아이들이 모은 돈으로 1250그루의 자두나무를 심어서 만든 피난처이다. 자두를 따서 쨈과 자두건과를 만들어 팔아서 그 돈으로 월남아이들을 Thich Nhat Hanh선사는 도와주고 있다.
그는 조국에서 38년 동안이나 혁명가와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으며 관광객으로만 오직 월남을 방문 할 수 있다고 한다. 승려시인이자 평화운동가- Thich Nhat Hanh선사는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큰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틱낫한 스님의 저서들(책의 제목)
*Old path white clouds
*Peace is every step
*Touching peace
*The Miracle of Mindfulness
*Breathe! you are alive
*No death, no fear
*The heart of understanding(반야심경 해설)등이 서점에 있다.
*연화경등의 경전이 영어로 있다.
Event 행사 안내
*Public Talk about Creating True Peace (February 22, 2004 at 2:00 PM UC Irvine Bren Events Center, Irvine, Orange County)
*In the Footsteps of the Buddha (February 28, 2004 at 10:00 AM Mile Square Park, Fountain Valley) contact (949) 715-1066
*Nurturing the Creative Heart (March 19-21, 2004 Deer Park Monastery, San Diego)
*Colors of Compassion (March 25-27, 2004 contact (760)291-1003)
첫댓글 200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