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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최치원 계림(鷄林)의 꿈 2005/10/01 00:10 http://blog.naver.com/spiritcorea/120018154132 신라국 초월산 대숭복사 비명 및 서 신은 듣자오니 “왕자께서 선조의 덕을 기본 삼아 후손의 법을 높임에 정치는 인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법은 효도로써 으뜸을 삼는다” 하옵니다. 그 인으로는 대중 건져주는 정성을 다하고 효도로는 어버이 높이는 법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치우침이 없는 것을 하범에서 본받고 끊어지지 않음을 주시에서 따라야 하나니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닦음에는 피 따위의 비방 받음을 없애며 제사함에는 마름따위의 제수 올림을 깨끗이 하여 은혜로운 덕택은 뭇 사람에게 고루 미치고 덕의 향기는 높은 하늘에까지 멀리 사무치게 하나이다. 그러나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하며 죄인을 보고 우는 것이 어찌 뭇 중생을 크게 미혹한 데에서 건져주는 것만 하겠으며 힘을 다하여 하늘에 짝하고 상제께 제사함이 어찌 높으신 혼령을 항상 즐거운 곳에 받드는 것만 하겠습니까. 구친에게 잘 화목함이 진실로 삼보를 받들고 높이는데 있는가 하옵니다. 하물며 이 옥 털의 빛이 비추는 것과 금 입에서 게송의 흘러 퍼지는 것이 서역의 생령에만 한하지 않고서 먼저 동방 세계에 미친 것이겠습니까? 곧 우리의 태평승지는 성질이 유순함에 있고 기운은 발생함에 한합니다. 산과 숲에는 고요히 닦는 무리가 많아서 인으로써 벗을 모으며 강과 바다에는 조종하고 싶어함과 같아서 착함에 순종하는 것이 물의 흐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풍도를 드높이고 범왕의 도덕에 젖는 것이 마치 진흙이 옥새를 따르고 금이 불리는 틀에 있어 만들어짐과 같나이다. 임금님과 신하는 뜻을 삼귀에 밝히고 관료와 서민은 정성을 육도에 기울이며 나아가서는 국성까지도 아낌이 없어서 능히 탑묘를 많이 세우셨나니. 비록 남섬부주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도솔타 천상에 부끄러우리요. 뭇 미묘하고도 미묘한 것을 무엇으로 다 말하겠습니까? 금성의 남쪽 일관의 산 기슭에 숭복(崇福)이라는 절이 있사온데 이는 옛 임금께서 왕위를 계승하시던 첫해에 열조 원성대왕의 원능을 받들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이에 옛 절의 유래를 상고하며 새 절의 만들어짐을 살펴 봅건대 곧 옛적 파진손인 김원량은 소문왕후의 원구며 숙정왕후의 외조부였습니다. 몸은 비록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진실로 참 옛사람인지라 처음엔 사안이 동산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노래하는 집과 춤추는 관을 의젓하게 세우더니 종말엔 혜원이 서경에 뜻을 두듯이 그를 버리고 불전과 경대을 만드니 그 당시의 봉관 곤현 이었던 것이 이 날에 금종과 옥경이였습니다. 때를 따라 변하여 고쳐진 것은 출세의 인연이며 절이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위에 따오기 모양이 있거늘 그로 인하여 현판을 만들어 앙려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안전으로 하여금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곧 저 바라월의 표형과 굴린차의 기호라도 어찌 천리에 나는 것으로 견주어 말하며 쌍림의 변한 것으로 표제함과 같으리까! 다만 이 땅은 위력이 축두보다 낮으나 덕은 용이 보다 높으며 금계를 마련할 만하고 옥전이 세워질만 합니다. 정원 무인년 겨울을 당하여 능 모시는 일을 칙명하시니 산으로 인하여 이에 명령하셨으나 땅을 선택하기가 더욱 어렵기에 이에 절에다 비전을 봉안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에 의아하는 이가 있어서 말하되 “옛적에 유씨의 사당과 공자의 집도 오히려 차마 무너버리지 아니 했기에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거늘 지금 금지를 뺏으려고 하니 수달다의 크게 희사하는 마음을 버림이 아니겠느냐. 명장이란 땅은 돕는다고 하나 하늘은 허물하는 바이니 타당치 않다” 고 하거늘 집정자는 의논하여 말했습니다. “법묘란 있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가는 곳마다 꼭 적응하나니 그러므로 능히 재앙의 터를 변화시켜 복된 장소로 만들어서 백억 겁 동안 그 험난한 세속을 제도하는 것이오. 영수란 아래로는 땅의 맥을 재고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맞추어 반드시 사상을 구원에 포괄하여 천백 대 동안 그 끼친 복을 보전하는 것이다. 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는 이루는 시기가 있나니 땅을 바꾸어 모심이 하늘의 이치에 순응함이라. 다만 청오와 같이 잘 본다면 어찌 백마로 하여금 슬피 울게 하리요. 또 살펴 보건대 이 인사는 본래 철기에 예속 되었나니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데에 나아가며 옛절을 버리고 새로운 왕능을 꾀하여 깊숙한 묘로 하여금 바다 나라의 웅장한 데에 웅거하게 하고 청정한 사찰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한즉 우리 왕실의 복이 산이 높아질 것이며 후문의 덕의 바다가 잘 흐를 것이라.” 하였으니 이야말로 “알면 못하는 것이 없고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함이라” 하겠습니다. 어찌 정나라 자산의 작은 은혜와 노나라 공왕의 중지하므로 비교하여 같다고 말하겠습니까! 으레 거북과 시초에 물어서 맞아 따르게 되면 용과 귀신의 기쁘함도 보게 되리라 하여 이에 정사를 옮기고 현궁을 창립하는 두 일이 진행되고 온갖 기술진이 일을 마쳤습니다. 그 절을 옮겨 세울 적엔 인연 있는 대중이 서로 모여와서 옷소매를 펼쳐 놓아도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이 없을 정도로서 무시가 오리에까지 연하여 나오는 것이었으며 설산이 한 때에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그 기와를 걷고 서까래를 빼내며 경전을 받들고 불상을 모심에 번갈아 소로 주고 받들며 다투어 정성을 다하여 이루었나니 역부들의 분주하던 발걸음도 쉬게 되고 석자들의 편히 있을 곳이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그 구원을 성취함엔 비록 왕의 국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기에 그 봉분에 가까운 땅을 검토해 보고 값이 높은 땅을 구하여 구농 2백여 결을 더하고 곡식 2천점을 주며 또 유사와 왕도의 군읍에 명령하여 함께 가시덤불의 길을 닦고 아울러 소나무를 심으니 씁쓸한 슬픈 바람 소리 많으매 춤추는 봉황과 노래하는 난조의 생각을 자아내고 울울하게 백일을 보매 서린 용과 걸터 않은 범의 위세를 돕습니다. 또 그 땅을 보건대 땅은 하구와 다르나 경계는 양곡에 연했습니다. 기수의 남은 행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곡림의 아름다운 기운이 더욱 무르녹으며 비단 같은 봉우리는 먼 사방에서 서로 조회하고 마전한 베와 같은 개는 한 가닥이 눈 앞에 있었나니 실로 교산이 빼어났고 필맥이 기이하다 하겠으며 금의 가지로 하여금 계림에서 더 무성하게 하고 옥의 줄기로 하여금 접수에 더욱 깊게 하였습니다. 처음 절이 옮겨짐에 있어 비록 솟아나오는 것 같았으나 화성과 같지 않음인지. 가시덤불을 제거하여 산 지형을 찾아냈으며 띠집과 섞인 채로 바람과 비를 피하면서 겨우 칠십팔년을 넘고 어언 아홉 조정을 지나 문득 전복 당했으되 미처 수리하지 못했더니 셋 이익의 수승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천년의 보배로운 국운이 이그러짐이 없었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대왕께서는 흥저에서 광채가 나시고 별잠에서 몸이 강탄하시어 이름을 처음 옥녹에 빛내시고 각별히 현풍을 떨치시더니, 이윽고 금초에 올라 나라를 밝게 다스리며 용전에 계셔 덕을 심고 봉소에 깃드시면서 마음을 깨끗이 하셨나니 말을 내면 어진이의 사람을 편안케 함이오 정사를 꾀함엔 이에 도로써 인도함이었습니다. 팔병의 무거운 권세를 모두 쥐고 사유의 떨어진 실머리를 이에 펼치시며 모든 난관을 겪고 시험 삼아 덕의 돌아오는 바가 있었더니 마침 기국들이 근심이 침범하여 왕의 자리가 비어 산악이 흔들리는 것 같은지라 비록 사슴을 쫒아 잡는 언덕은 아니나 역시 까마귀가 모이는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질며 유순함으로 하였고 덕과 인으로 하셨기에 백성의 추대하는 바가 되었나니 우리를 버리고 어데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몸을 대저에 두시고 뜻을 자문에 기우르시며 선조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하여 불사를 일으키기를 발원하시고 분황사의 중 숭창을 청하여 절을 중수하여 받들 뜻으로써 부처님께 고하고 다시 김순행을 보내어 선조의 업적을 높이고 펼 정성으로써 사당에 고하셨으니 시전에서 이른바 개제한 군자여 복을 구함이 삿되지 아니하다. 한것이오 서전에서 말한바 상제께서 이에 흠향하시매 아랫 백성이 공경하며 화목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지극한 정성이 가만히 감응되며 좋은 희망이 잘 순응된지라 공경과 사대부가 수귀와 함께 합하게 되었고 동국을 빛내어 군림하셨습니다.. 이에 대신을 보내어 헌안왕의 떠나심과 그 왕위 계승함을 아뢰었더니, 드디어 함통 6년에 천자께서 어사 증승 호귀후와 우리 고을 사람 전 진사이었던 배광으로 하여금 허리에 금어를 차고 머리에 해치를 쓰게하고 보행을 삼아 왕인 전헌섬와 함께 와서 칙명을 전하여 말하되, "빛나게 계승함을 받음으로부터 성유를 잘 받들어서 잘 계승하는 이름을 빛내고 진실로 지공한 추천에 응했나니 이에 당신을 임명하여 신라의 왕을 삼는다" 하면서 인하여 검교태위 지절통영 해군사를 주셨으니 전일에 제나라인 것을 변하여 빼어남과 나타내고 노나라됨에 이르러 꽃다운 것을 드날리지 아니했다면 어찌 봉의 붓을 날려 먼 제후를 총애하며 용의 기장목을 나려 대사마에게 주심이 이와 같겠습니까! 이미 성서러운 덕택을 영화롭게 받았으매 장차 영구에 나아가 뵈올것이니 그러므로 천승의 행차를 갖추시었다. 어찌 열 집의 재산을 소모함이 있으리오. 드디어 태제 상국을 명하여 청묘에 제사 드리고 현경에 대신 뵙게 하셨나니 아름답고 위대함이여! 계수의 무성함이 나타나고 영원의 번영이 뛰어났도다. 해가 오랠수록 가는 코끼리를 길이 생각하게 되고 시절이 평화로우니 헐떡이는 소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들을 수 놓고 시내를 비추우매 보는 자가 구름같도다. 이에 복의 등인 늙은이와 따오기 눈썹인 중이 있어 손벽을 치며 서로 경사로 여기고 크게 기뻐하며 치하하면서 말하였습니다. “귀하신 개제의 행차여, 성스러운 임금님의 은덕이 현저하시며 우리 임금님의 효심이 이룩되었도다.” 예의와 향풍이 풍요하게 여유가 있었으며 드디어 물결이 고요하고 변방의 풍진이 맑아지며 천리가 고르고 지재가 불어나게 되어 이에 연우을 잇달아 중수하고 백성을 잘 보호하시게 되었도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이니 이 때를 버리고 어느 때를 기다리리오. 이에 효성이 크게 사무치고 생각과 꿈이 서로 부합하여 성조의 대왕을 뵙게 되었나니 대왕께서 어루만지시며 이르시되 “나는 너의 할아버지다. 네가 불상을 세우며 나의 능역을 꾸며 보호하려고 하니 조심하여 일 함에 빨리 하려 말라. 부처님의 덕과 나의 힘이 너를 도와 주리라.진실로 그 중용을 잡아서 천록을 길이 마치라” 하셨습니다. 이미 정신이 동호에 반짝이고 몸이 옥침에서 열리어서는 십훈에 점쳐보지 않아도 구령을 얻음과 같았습니다. 문득 유사에게 명령하여 정성스레 법회를 베풀게 하시니 화엄대덕인 중 결언이 당사에서 교지를 받들어 경을 오일 동안 강설하였으니 그 효도의 생각을 펴고 명복을 비는 바이었습니다. 인하여 교지를 내리시니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은 경(經)에서 경계하는 바이며,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으랴' 하는 시를 어이 잊으랴. 근념함이 울타리에 있었고 절을 수리하고자 하였는지라 혼이 사귀어 감응이 이루워짐에 송구함이 가슴과 마음에 가득 찬지라. 이미 3년 날지 않음엔 부끄러우나 하루에 반드시 수리하기를 벌써 깊이 생각했도다. 백윤과 어사들은 이해가 어떻다고 하느냐. 비록 아이를 팔고 부인을 잡힌 비방이 없음은 보장하나 혹 귀신의 원망과 사람의 수고롭다는 말이 있을까 두렵나니 타당하면 실행하고 부당하면 폐지하여 부디 소홀히 하지 말라." 종신 계종과 훈영이 이를 발표하여 협의하고 말을 올리되, 미묘하신 소원이 신명에게 감응되고, 인자하신 신령이 꿈에 나타나심은, 진실로 왕의 뜻이 이미 정해지심이어늘, 과연 뭇 공론이 모두 일치되었사오니, 이 절이 이룩되면 구족(九族)이 경사가 많을 것이옵니다. 다행이 농사철이 아닌 때를 당하여 목공들을 불러들이니, 이에 인룡을 건례선문에서 뽑고 승상을 소현정서에서 천거하되 종실의 셋 어진 이에게 명령하였으니 말하자면 단원. 민영. 유영이명 석문의 두 호걸에게 맡겼으니 말하자면 현량과 신해였다. 그리고 그 일을 돕는 중 숭창들이 그 일을 맏았습니다. 또 국왕께서 단월이 되시고 나라 선비가 유사가 되었으니 힘도 남음이 있고 마음도 부지런했습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만들려 함에 어찌 새것에다 옛것을 섞이는 것이 좋으리요마는 단계의 옛 소원을 저바릴까 두렵고 내원의 옛 공적을 손상하지 않으려 하여 옛 재목을 골라 추리고 높은 터에 나아가 옮긴 것입니다. 이에 점치고 택일하며 큰 규범을 널리 들어 흙을 조화하고 금을 지어붓으며 미묘한 솜씨를 다투어 보인지라 구름 사다리엔 수인 재목으로 험한데에 얹어 놓았고 서리 바름엔 노의 백토에 향을 이겨 넣으며 바위 산발을 깍아 담을 돋우고 시내 흐름을 메워 창호를 높게 하며 황무한 섬돌을 금테로 장식한 섬돌로 바꾸고 낮은 행랑을 옥으로 조각한 행랑으로 만들었습니다. 겹겹인 전당엔 용이 서렸는데 복판에 비로자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층층인 누각엔 봉황이 우뚝 섰는데 위에 수다라로써 이름하였다. 고래등 같은 집 마룻대를 높여 베풀고 난조 같은 난간을 마주 올렸다. 기정엔 꽃을 모아 포개어 수놓았고 주두는 서로 끼어 두가지로 가새목 지은지라 날개를 솟구쳐 날아갈 듯 하니 보는 이마다 눈이 아찔하겠도다. 그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은 부처님 모신 법당과 스님들이 거처할 연방이며 공양하는 식당과 음식 만드는 공수간이었습니다. 더욱 공교로은 솜씨를 다하여 아로새기고 다듬었으며 정력을 기우려 채색하고 단청하였으니 암굴과 골짜기도 따라 맑으며 연기와 놀이 서로 찬란하도다. 옥의 찰간에 봉명의 달이 걸렸으니 두 송이 서리 같은 연꽃이며 금방울에 소나무 간수의 바람에 울리니 사시장철 하늘의 풍류로다. 또 절승한 경치를 보건대 이 먼 모퉁이에서 걸출하였나니 왼쪽의 산봉우리는 닭발이 구름을 찌를 듯 하고 오른쪽의 언덕은 용 비눌이 했빛에 번쩍이도다. 앞에 임하면 메기 산이 검게 벌려 있고 뒤로 돌아보면 봉 묏부리가 갈구리처럼 연해 있도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높고 기이하며 가까이서 보면 상쾌하고 수려하니 가히 낙랑의 선경이라 할만하며 참으로 낙방의 초월이었습니다. 명산이 문득 복된 땅으로 되었슴이며 잘 건립하여 일이 두루 이룬 것이오 부지런히 딱았음에 복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 반드시 인방을 크게 덮으며 위로 보수를 돕는다 하겠도다. 삼천 세계를 망라하여 넷 경계를 삼으며 오백 세로 한 봄을 삼을 것이온데 번산에서 표범을 사냥하매 바야흐로 꼬리 세운 것을 기뻐함과 형산에서 용을 타매 문득 수염 떨어진 것에 울 줄이야. 어이 기약하겠습니까! 헌강대왕은 덕이 젊으신 나이에 높으셨고 정신은 멀리 체달함에 맑으셨으며 침문에서 환관에게 묻는 것을 우러러 슬퍼하시고 익실에 종주로 있는 것을 엎드려 준수하신지라. 동문공의 예를 다하여 복 입음은 마침내 능히 몸을 극복 하심이오, 초장왕이 때를 기다려 정사를 다스림은 그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심이었습니다. 하물며 또 천성이 중화의 풍도를 따르고 몸이 지혜의 감로에 젖으시어 선조 높이는 도를 받들며 부처님께 귀의하는 정성을 기우르심이랴! 중화 을사년 가을에 교지를 내리시되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잘 따르면 길이 너와 같은 무리를 주는 것이 제에게 있을 뿐이다. 먼저 왕의 세웠던 바 곡사를 마땅히 명칭을 바꾸어 대숭복으로 할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 경을 전문하는 개사와 기강을 세우는 정리들이 남쪽에 있는 밭으로써 공양과 보시에 충당하게 하여 한결같이 봉은사의 옛일을 따랐습니다. 그 옛날 파진손 김원량이 희사한바 지리는 운수하여 굴려 온 것이 적지 않으니 마땅히 정법사에 위임할 것이라 하시며 따로 두 숙덕을 선출하여 상주의 물건으로 편입시키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시니 윗 자리에 있는 이로써 유명까지 살피지 아니함이 없고 큰 인영을 맺은 이로 감응이 있으매 반드시 통함이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부종은 비고 고요한 데서 울리고 용발엔 향적의 밥을 담으며 창도함에 육시로 옥이 울리듯 하고 수지함엔 만겁동안 구슬이 연한 것 같나니 위대하여이다! 공자의 이르신바 근심이 없는 이는 그 오직 문왕이신저! 아버지는 창안 하시고 아들은 계승한다는 것을 얻으심이 아니겠습니까. 경력 병오년 봄에 하신을 보시며 이르시되 예에서 이르지 아니했더냐. 명이란 스스로 이름함이니 그 선조의 덕을 칭송하고 후세에까지 밝게 나타내는 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라 하였도다. 선조께서 절을 이룩할 처음에 큰 서원을 발하셨는데 김순행이 그대의 아버지 견일과 함께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이 한번 거행되면 위 아래가 모두 상득하리니 그대는 마땅히 명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신은 종적이 성차에 유랑하여 월계의 향기로움을 도둑 하였으나 우구 에서의 영원한 비통 이오며 계로의 한갓 영화로움 이였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자옵고 두려워 놀래오며 몸을 어루만져 슬퍼하여 목이 메이나이다. 그윽히 생각하옵건데 서쪽에 가서 벼슬할 적에 일찍이 유자규의 동국일을 기록한 글을 보았아오니 그 서술한 바가 바르고 조리가 있어 왕도 아님이 없었나이다. 지금에 향사를 읽어 보니 완연히 성조대왕 조정의 사적이었습니다. 또 전해진 말을 듣자오니 한의 사신 호귀후가 복명함에 있어 우리의 풍속과 가요를 충분히 채취하고서 당시의 그 승상에게 아뢰었답니다. 우가 다녀온 지금부터 서는 산서에서 출생한 자는 동방에 사신 가지 아니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림에는 산수의 아름다움이 많습니다. 동왕이 시로써 격려하며 증여하시거늘 우가 일찍이 운 맞춤과 말하는 것을 배웠기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합하였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해외에 웃음거리가 되었을것입니다 하니 군자들은 이를 옳은 말이라 한다고 하더이다. 또 공손히 생각하옵건데 열조께서 사술로써 터전을 마련하시고 먼저 임금님께서도 육경 으로써 풍속을 교화하시니 어찌 그를 주시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능히 그 글에 밝음을 얻으면 명에 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오 붓이 남아 있는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감히 하늘을 엿보며 바닷물을 잔질하여 비로소 속된 말을 엮어봅니다.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지매 이윽고 영원한 한이 있더니 문득 정강대왕께서 남긴 숫돌에 공을 이루시며 저를 불음에 운률이 맞으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미 큰 왕업을 이어 수호하시며 장차 유적을 계승하여 이루시려고 그 지위에서 안일함이 없으시고 그 글을 마치지 못하시고 멀리 일제형임을 따르셨다가 문득 서산에 지는 그림자를 만나셨고 높이 월자매에 의하여 길이 동해에 비추는 광채를 발하셨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대왕 전하께서는 경악이 연달아 꽃다우시며 선원이 심히 밝으신지라 정수한 곤덕을 체득하셨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셨나니. 진실로 이른바 신비로운 구슬을 품은 것이오 채색돌을 간 것이어서 휴손함이 있으면 모두 보결하고 선을 닦지 않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우에서 금 말씀으로 분명히 수기하심인 것과 대운의 옥게송이 완연히 부합됨과 같음을 얻으셨나이다. 또 문고께서 부처님 궁전을 이룩하시고 강왕께서 스님들의 공양을 보살피시어 이미 유리의 세계를 높이셨으나 완염의 말씀을 새기지 못하셨기에 용렬한 재주에게 명령을 나리시어 힘없는 붓을 흔들게 하셨습니다. 신은 비록 못이 먹물로 변함엔 부끄럽고 붓이 서까래 같음엔 욕 되오나 장융이 두 왕씨의 필법 없음을 한탄하지 아니함에 그윽히 비할 것이오며 조조가 어느 때 여덟글자 잘 풀이함을 칭찬함에 가까울 것입니다. 설령 재가 서로 부딪혀서 못을 메우려 먼지가 날아서 바다에 창일할지라도 본 가지는 울창할 것이라 약목과 같이 길이 번영할 것이오 큰 돌 정성을 가다듬고 손으로 절하며 눈물을 씻고 붓을 들어 빛나신 발자취를 추모하면서 명을 올려 말합니다. 가위라의 자비하신 왕은 우이의 거룩한 태양처럼 서토에 나타나시어 동방에서 돋았구나. 먼데를 비추지 않음 없고 인연 있는데는 모두 빛나시니 공이 청정한 절에 높았으며 복이 명장에까지 덮었도다. 열열하신 영조께서는 덕이 명우에 부함 하신지라 큰 산에 들어가심 무난하시고 하토를 문득 두시어 우리의 자손을 보호하시며 백성의 부모 되옵시니 그 뿌리 도야에 깊었고 줄기는 멀리 상포에 뻗으셨습니다. 신불과 용순으로 산원에서 진체를 보호하시며 유당에 묘 길을 만드시고 용탑을 가까운 곳에 옮기시니 만세동안 애모하는 예도와 천생의 청정한 터전은 금밭의 두터운 이익이며 옥 잎사귀의 영원한 봄이옵니다. 효손이 많고 아름다우시여 빛나게 천지를 감동하셨네 봉이 날으고 용이 뜀이여 금규가 옥신부에 합했도다. 신령께 빌으심 흐리지 않아 복을 맞아들이매 이 이르렀나니 그 덕 갚으시려고 하여 법사를 높이 받드셨네. 나라의 인걸을 잘 선출하시며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들이고 농사철 아닌 때를 틈타시어 부처님 궁전 이룩하시니 채색 난간엔 봉황이 모이고 아로새긴 들보엔 무지개 섰으며 둘른 담엔 구름이 솟아 오르고 그림 벽에는 노을이 어리었도다. 둘레의 터전은 양명하며 조강하고 보이는 풍경마다 소쇄하며 푸른 묏부리는 다투어 솟았고 향기로운 샘물은 솔솔 흐르도다. 꽃이 아름답게 핀 봄산이며 달이 높이 뜬 가을 밤이니 비록 바다 밖에 있음이나 홀로 천하에서 아름답도다. 진에서는 보덕이라 칭하였고 수에서는 흥국이라 이름했으니 어찌 집안의 복이라만 하랴 이 나라의 힘을 높이심이로다 법당엔 미묘한 소리 요란하고 정주엔 청정한 음식 풍족하니 임금님의 끼치신 덕화 이어받아 만겁동안 무궁하오리 아! 빛나신 여와 임금님이시여 효도와 우애의 정 두터우시어 안항의 아름다움 이루시고 용수의 정성을 기우르셨네 문장 꾸밈은 썩은 붓임이 죄스러우며 글씨 솜씨는 팔목 당김이 부끄럽습니다. 고래 구렁은 비록 다할지라도 거북 옥돌은 썩지 않으리다. 初月山大崇福寺碑 臣聞 王者之基[基 本也 書武成篇 太王肇基王迹也] 祖德而峻 [峻 崇也]孫謀也[詩云 貽厥孫謀] 政以仁爲本 禮以孝爲先[仁孝爲一編大旨] 仁以推濟衆之誠[左傳鍾儀云 仁以接事 事雖大必濟 論語云 一日克己復德 天下歸仁焉] 孝以擧尊親之典 莫不體無偏於夏範[洪範曰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注 偏不平也 黨不公也 言無偏黨反側己私之見於事也 蕩蕩 廣遠也 平平 平易也 言正直不偏邪也] 遵不匱於周詩[詩云 威儀孔特 君子有孝子 孝子不匱 永錫爾類 註云 孝子 王人之嗣子也 儀禮 祭祀之終 有嗣擧奠 匱竭也 類善也 言汝之威儀 旣得其宜 又有孝子之擧奠 孝子之孝誠不竭則永錫爾善矣] 聿修芟秕稗之譏[芟 刈也 秕 不成粟也 稗 似稻而實細也 比政事不明] 克祀潔蘋蘩之薦[詩云 于以采蘋 南澗之濱 又云 于以采蘩 于沼于沚 于以用之 公侯之事 蘩 各蒿也 沚 渚也 註言南國被文王之化 諸侯夫人 能盡誠敬 采以奉祭祀也] 俾惠渥[渥音屋 洽也 渾也 賈誼云 德至渥也 言王德] 均濡於庶彙 [庶 衆也 彙音暉 類也 聚也] 德馨高達於穹旻[孝誠達穹旻] 然勞心而扇暍[ 暍音葛 說文 傷暑 帝王世紀 武王自孟津還 及于周 見暍人 王自左擁而右扇之] 泣辜[夏禹 出見罪人 下車 問而泣之] 豈若拯羣品[衆生]於大迷之域[三界] 竭力而配天[配音沛 匹也 合也 周頌 克配彼天也]饗帝[書曰 以饗上帝鬼神]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 [常 樂 我 淨爲涅槃之四德 常樂之鄕卽涅槃之世界也] 是知敦睦九親[敦 厚也睦 和也 堯典云 九族旣睦 註云 高祖曾祖祖父子孫曾孫高孫玄孫爲九族] 實在紹隆三寶[佛法僧] 矧乃玉毫光[法華經云 佛放眉間白毫 相光 照東方萬八千世界 靡不周遍 下至阿鼻地獄 上至阿迦尼吒天 註云 阿鼻 此云無間 卽地獄最下 阿迦尼吒 此云質礙究境 卽色界極頂也]所燭照 金口偈[佛說經文]所流傳 靡私於西土生靈 爰及於東方世界[佛說法華時 放眉間瑞光 照東方萬八千里云] 則我太平勝地也 性茲柔順[東方配五常則仁 故柔順] 氣合發生[東方始生萬物]山林多靜黙之徒[僧侶] 以仁會友 江海協朝宗之勢 [尙書 江漢朝宗于海 註 春見曰朝 夏見曰宗 江漢趨於海 如諸侯朝宗于王也] 從善如流 是故激揚君子之風 薰漬[漬音恣 漚也 浸也]梵王之道 猶若泥從璽[天子之璽 以紫泥封之]金在鎔[董仲舒曰 上之和下 下之從上 猶金之在鎔 此二句 明從善如流]而得君子鏡[照也] 志於三歸[佛法僧也] 士庶翹[翹 懸也 文選 曹植雜詩 思慕遠人 註 翹猶懸也] 誠於六度[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之總稱] 至乃國城無惜 能令塔廟相望 雖在贍部洲[此云勝金洲也]海邊 寧慚都史多[梵語 兜率 亦都史多 此云知足天]天上 衆妙之妙 何名可名 [案 衆妙二句 總結妙中之尤妙也 衆妙指莊嚴塔廟等事也 下妙字 謂妙法也 言衆妙中之眞妙法 名狀不可得也] 金城[新羅都城也]之离[南方卦名 言南方] 日觀[日觀者 泰山東南峯名 雞初鳴 則見日出 故云日觀峯 今新羅東亦有之]之麓 有伽藍號崇福者 乃先朝[景文王]嗣位之初載[西紀八六一年] 奉爲烈祖元聖大王[冊號敬信 卽景文王之九世祖]園陵追福之所修建也 粵若[發語辭也]稽古寺之濫觴 [水初出曰濫觴 比作事之始也] 審新刹之覆簣[孟子云 爲山九仞 功虧一簣 若盡一 簣 則是覆也 故言凡事之終 云覆簣] 則昔波珍飧 [新羅十七級爵中第三級也] 金元良者 昭文王后[元聖大王之母]之元舅 [帝王之長舅 卽帝王母之兄弟之長] 肅貞王后[元聖大王之后]之外祖也 身雖貴公子 心實眞古人 始則謝安[比金元良]縱賞於東山 儼作歌黨舞館 終乃慧遠同期於西境 捨爲像殿經臺[晉謝安携妓 遊東山三十年 後與慧遠法師與劉遺民雷次宗周續之宗炳等百二十人 結白蓮社 發願往生西方] 當年之鳳管鵾絃[崑山之竹 作管吹之 有龍鳳之音 以鵾之筋 作琴瑟之絃 用鐵撥彈 則其響如雷] 此日之金鍾玉磬 隨時變改 出世因緣 寺之所枕倚也[主山] 巖有鵠狀 仍爲戶榜 [因爲寺榜云鵠寺也] 能使鴦廬長價[鴛鴦必具雌雄 故東西翼廊 謂鴦廬] 永令鵝殿增輝[禽經曰 鵝鳴 沈 養之園林 則蛇遠去 諸佛所住 百害斯無 故佛殿謂之鵝殿] 則彼波羅越之標形[西域達親國 有過去迦葉佛伽藍 窮大石山作之 凡有五層 最下層作象形 五百間石室 第二層獅子形 四百間 第三層馬形 三百間 第四層牛形 二百間 第五層鴿形 一百間 窓牖通明 室中朗然 是名波羅越寺也] 崛恡遮[此云鷹 巖如鷹狀故因爲寺名]之紀號 詎若飛千里以取譬[古詩 黃鵠飛千里 取鵠字意也] 變雙林以刱題者哉[梁武帝時 傳大士於松上頂古寺 因雙搗樹 改名雙林 而居之 但取其變本名之義也 此寺名但鵠寺 而無白字 解云 佛入涅槃時 雙林皆白 取白意 非] 但茲地也 威卑鷲頭 [西域記云 梵語枯標陁羅 唐言鷲頭 亦云鷲臺 枯標特松 旣棲鷲鳥 儀類高臺 故佛於此說法也] 德峻龍耳[郭璞錦囊經云 勢止形仰 前澗後崗 龍首軾之 藏曼顙 吉昌耳 致王侯 以坎爲首 卽甲角震耳也 註 燕國公張說與玄宗 俱微行 見葬龍耳者 誤謂龍角 尋往其家 勸移他地 其人答曰 葬龍耳 則三年內 白衣天子到門前云云] 與畫金界 [金界者 寺也] 宜開玉田[玉田者 陵也] 洎貞元[唐德宗年號] 戊寅年[元聖大王十四年]冬 遺敎窀穸之事\窀音肫 穸音夕 墓穴幽堂也 杜預曰 窀 厚也 穸 夜也 言穴中厚暗如長夜] 因山是命[綱目註 帝王之葬 因其山川 而不復起墳] 擇地尤難 乃指淨居[寺也] 將安秘殿[王陵] 時獻疑者有言 昔游氏之廟[說文云 鄭聲公 欲毁游氏之廟 以廣苑囿 子産曰 游氏之賢 不能保五畝之宅耶 公遂止] 孔子之宅[漢書景帝中子 爲魯恭王 欲毁孔子舊宅 以廣其居 聞金石絲竹之音 乃止不壞] 皆不忍終毁 人到于今稱之 則欲請奪金地 無乃負須達多 [指給孤獨作祗垣精舍者 比金元良也] 大捨之心乎 冥葬者[陵也] 地所祐 天所咎[白虎通云 天以高爲尊 地以厚爲德 ○ 案 冥葬則地增其厚 故爲所祐 天減其高 故爲所咎] 不相補矣 而莅[莅音利 臨也] 政者譏[譏 議也 左傳云 鄶以下 無譏焉]曰 梵廟[寺也]也者 所居必化 無往不諧 故能轉禍基爲福場 百億劫[劫 具云劫波 此云時分也]濟其危俗 靈隧[陵也]也者 頫 坤脈[頫音府 低頭也 同銓 坤脈 五行之氣 運於地中 猶人之血脈 運於皮膚之中] 仰揆乾心 [揆 度也 乾心 二十八宿與列星 羅于乾心 各有主張分地也] 必在葛四象[謂金木水火]于九原[九原 葬處也 禮檀弓云 趙文子視于九原曰 九原可作 吾誰與從 註云 卿大夫死 則多葬于此 故云九原] 千萬代保其餘慶 則也法[佛法]無住相禮[喪葬之禮]有成期 順天之理 但得靑烏善視[郭璞之師 靑烏先生 善陰陽地理 著錦囊經]豈令白馬悲嘶[梁高僧傳云 昔外國王 盡毁諸寺 唯招提寺 未及毁 夜一白馬 繞塔悲嘶 卽以啓聞 王乃停止 因改招提 爲白馬寺 名出義集] 且驗是仁祠[寺也] 本隸[付屬]戚里[金元良也] 誠宜去卑就峻[去卑 應上威卑句 就峻 應上德峻句] 捨舊[指舊寺也]謀新[陵也] 使幽庭[陵也] 據海域之雄 淨刹[寺也]擅雲泉之媺[美也] 則我王室之福山高峙 彼侯門[侯門者 指金元良是貴公子 故下數節明不負須達陁之意 此是文結處故]之德海安流 斯可謂知無不爲 各得其所 豈與夫鄭子産之小惠 魯恭王之中輟[指上不毁宅毁廟也] 同日而是非哉 宜聞龜筮協從[筮音誓 蓍曰筮 蒿屬也 龜曰卜也 蓍二施 史記云 蓍千歲 一本百莖 下有神龜 守之 此言葬於佛地 未知吉凶 故先以占兆也] 可見龍神歡喜[案 宜聞云云 至歡喜 言龍神歡喜 故龜筮協從 龜龍一族 蓍神無二故也] 遂遷精舍 爰創玄宮 兩役[寺與陵也] 它徒 [它音披 具也 治也] 百工蕆事[蕆音闡 備也] 其改創紺宇[紺音甘 染靑赤色釋名云 紺 含也 靑而含赤色] 則有緣之衆 相率而來 張袂不風 植錐無地 霧市奔趨於五里[後漢 張楷 能爲五里霧 學其術者塡門 人謂之霧市] 雪山和會於一時[西域記云 伊爛那城長者之子 性情仁善投雪山學佛 凡有所須 自其居家 至于雪山 鄰里奴僕 交路替傳 曾不踰時 其和會可知] 至於撤瓦抽椽[撤 除去也 抽 發也] 奉經戴像迭相授受 競以誠成 役夫之跬步未移 釋子之宴居已就[寺役畢] 其成九原 則雖云王土[普下之下 莫非王土] 且非公田 於是 括以邇封[括 結束也 量也 說文 築土爲墳曰封 檀弓 孔子合葬于防 封之崇 言邇封者 作墓之近地也] 求之善價 益丘隴[指墓域周邊之地 俗所謂山坂]餘弌百結[從來寫本及刊本 皆書以 百結 今據碑石斷片 改以弌百結] [酬同]稻穀合二千苫[斞除一斗爲苫也 司馬法 六尺爲步 步百爲畝 秦孝公制二百四十步爲一畝 程頤曰 古者 百畝止當今田十畝也 斞音與 量名 十六斗] 旋命[旋 轉也 回也]所司[司 治葬者] 與王官之邑[官猶主也 樂記云 天地官矣 註 主也 卽畿內之邑也] 共芟榛徑[芟音杉 刈也 唐史 墟榛 註 榛 木盛也]分蒔松埏[蒔音時 植也 埏 和土也 又字彙云 墓道也]故得蕭蕭多悲風 激舞鳳歌鸞之思[魏志 武帝臨終 謂宮人曰 汝等日後思朕 登銅雀臺 望西陵而歌舞 此以舞鳳歌鸞 比思先王之宮女也] 鬱鬱見白日 [博物志云 漢滕公卒 公卿送葬 駟馬跼地悲鳴 掘地得石槨 銘曰 鬱鬱佳城 三十年見白日 嗟呼 滕公居此室] 助盤龍踞虎之威 [漢書 諸葛亮至石頭城 歎曰 鍾山虎踞 石頭龍盤 眞帝王宅也] 且觀其地 壤異瑕丘 [ 禮記云 公叔文子升於瑕丘 嘆曰 樂哉 斯丘 死則我欲葬焉] 境連暘谷[時出處] 祗樹[曾是寺垈 故曰祗樹]之餘香未泯 穀林[堯葬處]之佳氣增濃 繡峯[峯之隱現端好 如錦之繡]則四遠相朝[如繡之峯 四方歸朝] 練浦[浦之澄麗亙長 如練也] 則一條在望[如練之浦 一面供望] 實謂喬山[黃帝 壽百一十歲 乘龍上天 葬弓劍於喬山] 孕秀 畢陌[文王葬地]標奇 而使金枝[本孫]益茂於雞林[新羅]玉派[外孫] 增深於鰈水[海東也 東方有比目魚 其名曰鰈也]者矣 初寺宇之徙也雖同聳出[法華 多寶佛塔 從地涌出也] 未若化城[法華 中長者 欲領諸子 達於寶所 諸子憚路險遠 故中路權化一城 略置寶貨 引諸子入化城 後更引入寶所 譬佛以二乘法引之 終入大乘也] 哉[乃也 又纔也]得剗荊棘而認岡巒 雜茅茨而避風雨 僅踰六紀 [十二年爲一紀 取歲星一周天] 驟歷九朝[元聖 昭聖 哀莊 憲德 德興 僖康 神武 文聖 憲安] 而屢値顚覆 未遑嵩飾 三利[憲安王無子 欲擇膺廉爲婿膺廉聞長女醜 而少女有姿色 範喬<敎>曰 娶長女 有三利 一 王無子 以婿爲太子 二 少女自然相從 三 終得大位 是爲景文王]之勝緣有待 千齡之寶運[指國運也]無虧 伏惟先大王[景文王也 僖康王之曾孫]虹渚騰輝[虹 水名 顓頊母 曰女節 見有星流 感而生顓頊] 鰲岑[慶州有鰲山]降跡 始馳名於玉鹿[似指花郎團 而未可詳之] 別振風流[鸞郎碑云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俄綰職於金貂[貂音彫 鼠屬出胡丁零國 亦出東北 夷徐曰 侍中冠 以貂爲飾 北方寒 以貂皮暖 故附施于冠 漢冠儀 貂蟬 註曰 金取堅强 蟬取居高飮潔 貂取內勁悍外溫潤也] 肅淸海俗 據龍田而種德[易乾卦云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註曰 田地上也 出現於地上 其德已著 以聖人言之 舜之田漁時也 利見大德之君 以行其道也 卽東宮] 棲鳳沼 [周靈王太子晉 吹鳳簫求凰 與秦穆公之女季嘯 俱爲神仙而去 後人稱太子所居室曰鳳閣 所遊池曰鳳沼]而沃心[說命云 啓乃心 沃朕心 註云 沃 灌漑 也 沃朕心者 漑我心 而厭飫也] 發言則仁者安人 謀政乃導之以道 八柄之重權咸擧[周禮 太宰以八柄貂王 御羣臣 註 一 有德則爵 二有功則祿 三 言語合道則賜予 四 有善行則置于位 五 有大勳則使子孫享養 六 有大罪則殺而奪符 七 有罪則廢而放之 八 有過失則譴責] 四維之墜緖斯張[天之四維 東西南北 人之四維 禮義廉恥]歷試諸難[玉鹿至四維 皆是諸難 如唐堯之歷試虞舜也] 利有攸往 旋屬憂侵杞國[李白詩 杞國無事憂天傾 此言王之昇遐 取天傾意] 位曠搖山[古文 邦國曠位 山岳搖動 亦言王之昇遐] 雖非逐鹿之原[秦失其鹿 天下共逐] 亦有集烏之苑[詩云 瞻烏爰止 于誰之屋之意 言未知寶位將爲誰人之所傳 如烏之飛 將止于誰屋之比也 ○ 有引左傳云 宋景文公 無子 取公孫周之子得與啓 畜諸公宮 公有病 死 大尹立啓 三日 得夢啓北首而寢於廬門之外 己爲烏而集於其上 咮加於南門 尾加於北門 覺而言曰 北首 死像也 寢門外 失國也 余夢美吾必立也 然不及前義] 然以賢以順 且長且仁[賢順 就氣質而言 仁長 就德行而言也] 爲民所推 捨我奚適 乃安身代邸[漢文帝 以代王至長安 受皇帝位於代邸] 注意慈門[佛門也 以佛慈悲爲本也] 慮致祖羞[移寺而安陵 若不崇飾其寺 則是爲祖先奉佛之羞] 願興佛事 因請芬皇寺僧崇唱[寺在國城西 今猶完在也] 以修奉梵居之旨 白于佛 復遣金純行 以隆宣祖業之誠 告于廟 詩所謂愷悌君子 求福不回[愷悌 樂易也 回 邪也 言文王之求福 修德以俟之也 不爲回邪之行以要之也] 書所謂上帝時歆 下民祗協[書 微子命 註云 歆 饗也 協合也] 故能至誠冥應 善欲克從 卿士大夫與守龜協[龜協 中庸云 國家將亡 必妖孽見蓍龜 註 蓍所以卜也] 赫赫[高明顯盛貌]東國 而君臨之 爰遣陪臣[諸侯之臣 於天子 爲陪臣] 告終稱嗣 [憲安王薨 景文王嗣位也] 遂於咸通六年[唐懿宗年號] 天子使攝御史中丞胡歸厚 以我鄕人前進士裴匡 腰魚[金魚袋]頂豸[豸音池 一名神羊 似鹿而一角 生于北荒 楚文王好服豸冠 漢爲法冠 御史冠也 ○ 堯時 有一雙獬豸 立於階下 善者入之 則引之 不肖者入之\ 則觸之 死 葬於殿之左矣 生朱草 長一丈 小人入則指之 故後世取 豸爲臣冠也] 爲輔行[副使]與王人[官名]田獻銛 來錫命 曰自光膺 [光 先王之光 膺 服膺也]嗣續 克奉聲猷[天子聲敎] 俾彰善繼之名[善繼其志 善述其事] 允協至公之擧[非王子弟 而以仁善承位 故曰至公] 是用命爾爲新羅國王 仍授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 向非變齊標秀 至魯騰芬[孔子云 齊一變 而至於魯 魯一變 而至於道也] 何以致鳳筆[指上詔書] 而寵外諸侯[指上新羅王也] 降龍旋[指上持節] 而假大司馬[指上寧海軍使]之如是矣[鳳筆 筆柄雕鳳 龍旋 旋上畫龍故也] 亦旣榮沾聖澤 必將親拜靈丘[先王陵] 肆以備千乘之行 [天子萬乘 諸侯千乘] 奚翅[翅 啻也]耗十家之産[漢文帝欲作露臺 召匠計之 直百金 上曰 百金 中人十家之産 乃止] 遂命大弟相國[追奉尊諡惠成大王] 致齊淸廟[祀堂] 代謁玄扃[陵也]懿[大也 美也]乎雞樹[雞林] 揚蕤[蕤音唯 草木華垂貌 又孫氏瑞應圖曰 王者禮備至則葳蕤生于殿前]鴒原挺茂[詩 常棣 註 鶺鴒行 則首尾相接 喩兄弟急難相救] 歲久而永懷耕象[陵龜蒙曰 世謂舜田于歷山 象爲耕 鳥爲耘 吾觀象行 必端而必深 法其端深 曰象耕 鳥之啄食 務疾而畏奪 法其疾畏 故曰鳥耘 非眞象鳥耕耘] 時和而罷問喘牛[漢丙吉爲相 出逢羣鬪者 死傷橫道 吉過之不問 前逢人逐牛 牛喘 使史問曰 牛行幾里矣 謂前後失問 吉曰 民鬪傷殺 京兆尹 職當禁捕 宰相不親細事 非當於道路問也 方春牛喘 恐陰陽失和 宰相職司燮理 是以問 人以爲吉知大體也] 藻野耨川[文選云 靚粧藻野 袨服耨川 或曰 當作耨野藻川 言耘耨於野 采藻于川] 東者如雲 乃有鮐背之叟[鮐音台 鮐背 老人氣衰 皮膚消瘠 背若鮐魚 故曰鮐背 釋名 九十曰背鮐 見字彙] 鵠眉之僧[眉之皓白 如鵠眉之白也] 抃[抃音便 拊手也 列子老幼喜躍抃舞] 手相慶 大相賀曰 貴介弟[左傳 伯州ꝃ曰 王子圍寡君之貴介弟 介 大也]之是行也 聖帝[懿宗皇帝]之恩光著矣[著者八域皆聞故也] 吾君之孝理成焉[理 道也 孝理成者 榮鬱光先故]禮義鄕風 綽[綽音作 寬貌]有餘裕[裕 寬意也] 遂使海波晏[晏 安也 柔和貌也] 塞塵淸[干戈息靜 王克寧海軍使重任故] 天吏均 [受命于天 謂之官吏 淮南子曰 四時者 天之吏也 吏卽四時也 言四時順行 天無烈風淫雨] 地財羨[羨音衍 餘也] 則乃踵[繼也]修蓮宇[寺也] 威護柏城[陵也] 今也其時 捨之何俟 於是孝誠旁達 思夢相符[晝思夜夢相符] 乃見[現也]聖祖大王[元聖王] 撫而告曰 余而[而 汝也]祖也 而[而 汝也]欲建佛像 飾護予陵域 小心翼翼[詩云 維此文王 小心翼翼 翼翼 恭愼貌] 經始勿亟[詩云 經始勿亟 庶民子來 註 經度也 亟 急也 言臺之經度始役 王言勿急 而庶民子來而作也] 佛之德予之力 庇爾躬 允執厥中 天祿永終[論語云 堯曰 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厥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舜亦以命禹 書云 舜命禹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云云 至永終 參看銘中德符命禹以上註] 旣而韻耿銅壺[漏壺也] 形開玉枕[莊子 其寢也魂交 其覺也形開] 不占十煇[春官掌十煇之法 以觀妖祥 煇謂日傍之光 一曰侵 陰陽相侵 赤雲爲陽 黑雲爲陰 二曰象 如赤鳥 三曰鐫 日旁雲氣刺日 四曰監 赤雲在日傍 如冠珥 五曰闇 日月食也 六曰瞢 日月無光 雲氣貫日而遏 八曰叙 雲氣次序如山 九曰躋 升虹也 十曰想 雜氣形象] 若佩九齡[禮記云 文王謂武王曰 汝何夢矣 夢帝與我九齡 西方有九國 君王其終撫 文王曰 我百 爾九十 吾與爾三焉 文王九十七終 武王九十三終] 遽命有司 虔修法會 華嚴大德釋決言 承旨 於當寺 講經五日 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仍下敎曰 不愛其親經所戒也[卽孝經也]無念爾祖 詩寧忘乎[詩云 無念爾祖 寔繁有徒] 睠言在藩[小雅云 睠言顧之 註 睠 反顧也]有欲修寺 魂交[在夢時]致感 㾕慄[㾕音甚 感寒體戰也 慄 悚縮也] 衿靈[心神也 旣愧三年不蜚[楚莊王三年不政 伍擧曰 有鳥在阜 三年不飛不鳴 是何鳥也 曰 飛將衡天 鳴將驚人也] 深思一日必葺[葺音緝 茨也 又修補也] 百尹[尹 治也 猶言百官]御史 謂利害何 雖保無賣兒貼婦之譏[宋明帝 以湘東舊宅爲寺 謂何尙之曰 此是朕之大功德 散騎常侍虞愿對曰 此是賣兒貼婦之錢 佛若有知 必當悲愍 何功德之有 註 貼 以物爲質 言徭役繁重 民不能供 故或賣兒質婦 以當役錢] 或慮有鬼怨人勞之說[秦築長城 鞭撻民丁 役使鬼神 民作魚游河曲 鬼有怨恨之聲也] 獻可替否 爾無忽諸[替 廢也 否 非也 忽輕也 諸 語辭] 宗臣繼宗勛榮以下 協議上言曰 妙願感神 慈靈現夢 誠因君志先定 果見衆議僉同 是寺也成 九族多慶 幸値農隙 請興杍工[杍音子 治木器 又木工也] 爰用擇人龍[馬岌謂宋纖曰 人中之龍] 於建禮仙門[摩詰詩 建禮高秋夜 註 建禮 門名 蓋禮曹門也] 擧僧象於昭玄精署[僧之持律院也] 乃命宗室三良 曰端元 毓榮 裕榮 與釋門二傑 曰賢諒 神解 及贊導僧崇唱等 督其事 且國君爲檀越 [梵云檀 此云施 越是唐語 言行施越苦海] 邦彦[爾雅云 美士爲彦]爲司存 [存 在也 司而在者 卽有司也] 力旣有餘 心能匪懈 將俾小加大 豈宜新間舊 然恐沮檀溪宿願[梁武帝 伐竹木 沈檀溪 積茅如岡阜 立願云 事若成 則當以此材 建立伽藍 竟得如意]不瑕[與無乃同]傷 苑前功[西域 有中虛 樹 女子從中而出 王取而爲后 建寺於其地 號 苑] 選掇故材 就遷高 [掇音徹 入聲 拾也 採也 音陟 基址] 於是占星揆日[詩云 定之方中 作之楚宮 揆之以日 作之楚室 註云 是占星之意也] 廣拓[拓音尺 開也]宏規 合土範金[造作器用 見禮運]爭呈妙技[呈 視也 露也 技 材也] 雪梯[雪 當作雲 公輸般爲楚 造雲梯攻宋 墨子拒之 出墨子] 而倕材架險[倕 黃帝時巧匠名]霜塗[霜 白也塗土也] 而 堊[ 古之土工 堊 白土也]黏香[黏 着也 言以香和土而塗之] 斸巖麓[斸音燭 斬也 麓 山足]而培垣[培 加土也] 壓溪流而敞戶[敞 高曠也] 易荒階以釦砌[釦音口 金飾也 言砌石之隙 以鉛錫而鑄飾] 變卑廡以琱廊[琱 雕飾也] 複殿[上下皆殿]龍盤 中以盧舍那[毗盧舍那佛之略稱 實無異於釋迦牟尼]爲主 層樓鳳跱[跱與峙同 屹立貌 樓若鳳之屹立] 上以修多羅[修多羅 梵語經典之意] 爲名 高設鯨桴[張衡東京賦 撥鯨魚鏗牢鍾 註 海岸有獸 名蒲牢 其聲如鍾 性畏鯨 見鯨輒吼 故鑄鍾 以蒲牢爲首 桴則像鯨而擊之] 對標鸞檻[畫鸞於檻] 綺井[綺井者 卽藻井也 畫芰荷水草以覆之 所以避火 乃井上板子] 華攢[攢 族聚也]而 鞢[鞢音狎 鞢音燮 花相次比貌 何平叔景福宮賦云 紅葩 鞢] 繡栭[栭 樑上柱 又說文 屋枒上樑也 卽樑上短柱 承屋脊者]枝擁[擁 衛也 羣從也] 而杈枒[杈枒音叉耶 杈木交枝 枒木無枝 言栭梠相接 齒牙相入] 聳翼如飛 回眸必眩 其以增崇而改作者 有若睟容[佛也]別室[景堂 別於正殿與僧寮也]圓頂[僧也]蓮房[蓮之爲物 一房百子 故喩僧之一舍羣居]揣食臑堂[揣 度也 量也 臑 朱子曰 音耎 熟也 卽食堂也] 晨炊 屋[ 廣也 卽今香積殿] 加以雕礱罄虰[礱音弄 磨也 罄音敬 盡也] 彩雘[雘音 廓 丹中之善者 多出衡山]窮精 巖洞共淸 烟霞相煥 玉刹[法堂上左右白竿]掛蓬溟之月 兩朶霜蓮 金鈴激松澗之風 四時天樂 就觀勝槩 傑出遐陬 左峯巒則雞足挐雲[三峯特秀 如雞足之倒立 挐 牽引也] 右原隰則龍鱗[隰音濕 阪下隰也 公羊傳云 上平曰原 下平曰隰 遠視隰 則如龍鱗之閃日]閃日[文選云 龍鱗閃日 又云 疆域綺錯 原隰龍鱗云云] 前臨則黛[字書云 山色靑黑者 謂之黛] 列鯷嶠[ 鯷音地 又言弟 魚名 頭大尾小也 言山形上大下小 如鯷魚形也 有云 鯷魚膓大着地 而背靑黑色 山形如之也 嶠 山也] 師睇 [睇音弟 目小視也]則鉤連鳳岡[傍有飛鳳山故] 故得遠而望也 峭而奇 迫而察也 爽而麗 則可謂樂浪[本是四郡之一 慶州亦嘗稱樂浪]仙境 眞是樂邦 初月名山 便爲初地[十地中初地也 地有生成 住持四義] 善建而事能周匝[匝 周也 遍也 ○ 寺與陵俱修也] 勤修而福不虛捐 必謂大庇仁方 上資寶壽 罩[罩音朝 壓也]三千界[言統合三千世界]爲四境 籌五百歲爲一春[人間五百歲 四天王一晝夜 卽上資寶壽者 卽彼天壽也] 豈期獵豹樊岑[山名 似是樊山 而未可詳之] 方歡竪尾[叢譜符命篇云 孫權獵豹樊岑 有老嫗問曰 今日獵何獸 曰得一豹也嫗曰 何不竪尾 因忽不見 因立神嫗廟 註云 竪尾者 何不立太子乎] 跨龍荊岫[荊山] 遽泣墮鬚[黃帝鑄鼎於荊山下湖水上 鼎成 龍至 帝及羣臣宮女七十二人 乘龍上天 百姓攀龍鬚 鬚絶 帝墮弓 百姓抱弓號泣 喩景文王昇遐 ○ 輦佛旣勤 豈期至此乎] 獻康大王[景文王太子]德峻妙齡 神淸遠體 仰痛於寢門問竪 [文王爲世子時 王季有疾 則雞初鳴 就寢門 問候於宦竪] 俯遵於翼室宅宗[宅 居 宗 主 蓋帝王居喪 則不居正殿 徙居翼室 爲居憂之宗主也] 滕文公盡禮居憂 [ 滕文公爲世子 使然友問居憂之禮於孟子 極盡死葬之禮] 終能克己[ 克除私欲] 楚莊王俟時修政 其實驚人[楚阜之鳥 三年不飛不鳴 飛將衝天 鳴將驚人之語] 矧復性襲華風 躬滋慧露[佛法也] 抗[擧也] 尊祖之義 激歸佛之誠 中和[唐僖宗年號] 乙巳年秋 敎曰 善繼其志 善述其事 永錫爾類 在我而已 先朝所建鵠寺 宜易榜 爲大崇福寺 其持經開士[蒙疏 大心始開] 提綱淨吏[卽維那執綱紀者也] 南畝以資供施 一依奉恩故事[武烈王爲眞智王追福所建] 其故波珍飧金元良所捨地利 輸轉非輕[納三寶爲寺] 宜委正法司[紏正僧法之司] 別選二宿德 編籍爲常住 薦祉于冥路 則有以見居上位[王位]者 無幽不察 結大緣者[金元良] 有感必通 自是鳧鍾[考工記 黃帝命鳧氏造鍾] 吼泬寥[泬音穴 宋玉九辨 泬寥兮天高 註 泬 曠蕩也 寥 空也] 龍鉢[檀經云 曹溪寶林寺前潭中 有一龍常出沒 現形甚巨 師叱之曰爾不能現小身耶 龍乃小身躍出 師展鉢曰 爾入老僧鉢 龍乃入鉢 師至堂 爲龍說法 龍乃蛻去 故云龍鉢耶 又龍所獻鉢歟] 飫香積[維摩經云 淨名居士過上方四十二恒河沙世界 至香積世界 借一鉢飯 供養一萬文殊] 唱導則六時玉振[孟子註云 八音 金木土絲竹匏革石 擊金而始之 始條理也 後擊磬收之 終條理也 磬是玉也]修持則萬劫[具云劫波 此云時分]珠聯[持戒之法 如聯珠而不絶] 偉矣哉 得非尼父所謂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者耶[父王季 子武王]慶曆[唐代無慶曆年號 或唐曆 亦似未瑩]景午[僖宗光啓二年丙午 丙字 高宗諱 故改丙爲景]年春 顧謂下臣曰 禮不云乎 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 先朝締構[刱寺]之初發大誓願 金純行與若[汝也]父肩逸 嘗從事於斯矣 銘一稱而上下皆得[吾與汝俱得孝子之心也] 爾宜譔銘[譔 造也 又屬辭記事曰撰 銘名也 名記其功也] 臣也浪跡星槎[杜詩註云 漢張蹇乘槎 泝河源 至一處而見一丈夫牽牛一美女織錦 問曰 此何處也 女授一石曰 問于城都嚴君平 蹇還如言問之 君平曰 此是織女支機石 某年月日 客星犯牽牛 其時爾應到彼也 此喩入中國也] 偸香月桂[東坡詩註云 月中有桂 高五百丈 衆仙於中傲戲 下有一人 常斫之 則吳剛也 言偸香者 孤雲卽入唐登甲科] 虞丘永慟[家語云 孔子至虞丘 聞子阜哭甚哀 問其故 對曰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遊宦列國 旣歸而親沒 故哭之云] 季路徒榮[家語云 子路少時 爲親負米 及親沒仕楚 歎曰 雖列鼎而食 累茵而坐 雖欲爲親負米 其可得乎 言孤雲親沒 徒榮也] 承命震驚 撫躬悲咽[昔於乘桴之時 父有嚴訓 今於還錦之日 父不待養 季路子阜 實與我千古同情 況有君命 及於父事 心驚淚咽 無地措躬] 竊思西宦日 嘗覽柳氏子珪[江南人] 錄東國事之筆 所述政條 莫非王道 今讀鄕史 完是聖祖大王[卽元聖王] 朝事蹟 抑又流聞[流聞 傳聞也 禮王制 千里之外曰流 遠聞也] 漢使胡公歸厚之復命也 飽採風謠[指吾邦漢詩] 白時相曰 自愚已往 出山西者[漢書云 山東出相 山西出將 故烈士武夫 多出涼州] 不宜使海東矣 何則 雞林多佳山水 東王詩以印之而爲贈 賴愚嘗學爲綴韻語 强忍愧 之 不爾爲海外笑必矣 君子以爲知言[東國之行王道 右文學 中國人習知之] 是惟烈祖以四術開基 [武烈大王金春秋統合三韓 以忠愛無私 用賢簡能 四術開基] 先王以六經[詩 書 易 禮記 春秋周禮]化俗 豈非貽厥之力[書 貽厥孫謀 貽 遣也] 能得煥乎其文 則銘無愧辭[世說云 貺邕曰 吾爲人作銘 常有慙容 惟爲郭有道碑銘 無愧耳] 筆有餘勇[言若使我贊揚四術六經之化 則無愧於心 有勇於文] 遂敢窺天[以管窺天]酌海[傾蠡酌海] 始緝[繼續]凡詞 誰知墜月摧峯[獻康王薨 如月墜山崩] 俄興永恨 旋遇定康大王 [景文之子 獻康之弟] 功成遺礪[遺 餘也 礪 石砥也 言前人礪砥 後人亦磨 以成其功 喩定康大王亦成獻康之餘業也] 韻叶吹篪[伯氏吹塤 仲氏吹篪 比兄弟皆得王位也] 旣嗣守丕圖[王業也 丕 大也] 將繼成遺績 無安厥位[書 伊訓文 其云 無輕民事 惟難 無安厥位 惟危也] 未喪其文[喪 終也] 而遠逐日弟兄 遽値西山之影 高憑月妹姊 永流東海之光[說文 東王以日爲兄弟 以月爲姊妹 又春秋感精符曰 人主 父天母地 兄日妹月也 今定康遠逐獻康兄之日 而共作西山之影 言其死也 死而無子 傳於眞聖妹 則是憑月流光也] 伏惟大王殿下 [眞聖女主] 瓊萼聯芳[萼音諤 詩註云 華下有萼 萼下有跗 華萼相承覆 猶兄弟相順而榮顯意也 唐玄宗 兄弟五人 作華萼聯芳樓] 璇源激爽[王者本系之譜 尊稱爲璇源也] 體英坤德[相合無間曰體 草之秀者曰英 質英合坤之德] 纘懿天倫[纘音鑽 繼也 懿 美也 言繼美之天倫] 諒所謂懷神珠[諒音亮 信也 卽八歲龍女懷方 成佛也] 鍊彩石[事文類抄云 昔 女媧鍊五色石 補蒼天缺 斷鰲足 以立四極 其後 工共氏 與顓頊爭爲帝 怒而觸不周山 天柱絶 地維斷 故天傾西北 日月星辰就焉 地不滿東南方 故百川歸焉] 有虧皆補 無善不修 故得寶雨金言[寶雨經云 爾時 東方有一天子 名曰月光 乘五色雲來 詣佛所 退坐一面 佛告天子言 我涅槃後 最後時分 第五百年中 法欲滅時 汝於此瞻部洲東北方摩訶支那國位居阿鞞跋致 實是菩薩 故現女身爲自在主 經於多歲正法治化 養育衆生 建立塔寺 常修梵行 名曰日月爭光天子 爾時月光天子 從佛世尊聞受記已退坐一面 註云 摩訶 此云大 支那 此云東震阿 鞞跋致 此云不退轉] 焯然授記 大雲玉偈[通載云 唐中宗文明元年甲申七月 沙門十輩詣闕 上大雲經 盛稱則天當卽宸極 則天大悅頒經于天下郡國 各建大雲寺 九月 則天革唐稱周則天皇帝 比眞聖女主也] 完若合符 且以文考成佛宮 康王施僧供 已峻琉璃之界[寺也] 未刊琬琰之詞[曲禮 典瑞現圭 以治德結好 註 琬圭九寸 繅以象德 琬猶圜也 琰音鹽 說文云 璧上起美色 又圭之銳上者] 申命瑣才[瑣 玉屑 言才少也 申 重也 先王旣命今王重命之] 俾搖柔翰[翰 筆也 柔 無力也 言不如長杠巨筆也] 臣雖池慚變墨[羲之洗硯 池色變黑] 而筆忝夢椽[忝辱也 王珣 字坦之夢 人與大筆如椽 人曰 當有大手筆 如言] 竊比張融不恨無二王之法[齊張融善草書 高帝曰 恨卿無二王書法 答曰 臣非恨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 二王 羲之獻之] 庶幾曹操或解有八字之褒[邯鄲淳撰曹娥碑云 孝順第一曹娥碑 蔡邕陰題云 黃絹幼婦外孫薤臼 曹操解] 設使灰撲塡池[漢武帝鑿昆明池 得灰 問東方朔 不知 藏之府庫後有西來胡僧曰 此乃天地撲滅時 劫灰也]塵飛漲海[列仙傳云 麻姑自言 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於往者 豈將復還爲陵陸乎 王方平曰 聖人皆言 海中行復揚塵也] 本枝蔚矣 齊若木而長榮 [淮南子曰 灰野之山 有樹 名曰若木 日入處也] 豐石[豐厚也 石碑也] 巋然[巋音奎 獨貌 莊子云 巋然有餘] 對沃焦而卓立[十住毘婆娑云南海有石 其名沃焦 萬流至此皆焦 故海水不增 取久遠之義] 齎誠拜手[首至手而不至地也 出書註中] 抆涕[思先王之命 自然流涕]援毫 追蹤華[蹤迹之華麗也]而獻銘曰 迦衛慈王[具云迦維衛 此云赤澤也] 嵎夷太陽[嵎夷 曰出處]現于西土[西土 佛生處] 出自東方[東方 日出處] 無遠不照[日也] 有緣者昌[佛不度無緣衆生也]功崇淨刹 福蔭冥藏[陵也]烈烈英祖[元聖王]德符命禹[指大舜] 納于大麓[舜典云 納于大麓 烈風雷雨弗迷 註云史記曰 堯使舜入山林川澤 暴風雷雨 舜行不迷] 奄有下士[天下也] 保我子孫 爲民父母 根深桃野[東方] 派遠桑浦[東海] 蜃紼龍輴[蜃似蛇而大 蜃紼 謂其長如蜃也 輴 喪輿也 龍輴 謂喪輿之上刻畫爲龍也] 山園保眞[莊子云 已返其眞 而我猶爲人猗 案古人指死而無分別 謂之眞無分別 謂之眞無分別者 體魄是也] 幽堂[墓也] 闢隧[ 墓道也 上有負土成墳 傍掘地通道 以納棺也] 聳塔遷鄰[移寺] 萬歲哀禮[陵也] 千生淨因[寺也] 金田厚利[寺也]玉葉長春[聖子神孫謂之玉葉] 孝孫淵懿[淵 深 懿 美] 昭感天地 鳳翥龍躍[說文云 飛擧也 言子孫如鳳飛龍躍也]金圭合瑞[此二句 言子孫英傑 世世顯榮金圭 諸侯所執之信 圭 上圓下方 瑞 信也 五等諸侯 各有所執 公執桓圭 侯執信圭 伯執躬圭 子執穀璧 男執蒲璧也 言以王之金圭\ 符合于天子之冒 周禮 天子執冒 以朝諸侯 冒 鎭圭也 以德覆冒天下] 乞靈不昧 徼[徼音要 求也]福斯至 欲報之德[先祖之德] 克隆法事[造寺] 妙選邦傑[俗三良 僧二傑] 嚴敦國工[工 匠也] 伺農之隙 成佛之宮 彩檻攢鳳 雕樑架虹 繚[繚音了 纏也]墉[墉 垣也] 雲矗 繢[繢音會 五彩以畫]壁霞融 盤基爽塏[爽 高明也 塏 高燥也] 觸境蕭灑 藍岫交聳 蘭泉[味甘香也]迸瀉 花娓[美也]春巖 月高秋野 雖居海外 獨秀天下 陳稱報德[陳後主 爲高祖創報德寺] 隋號興國[隋文帝創興國寺] 孰與家福 興之國力 堂聒妙音 廚豐淨食 嗣君[定康王]遺化 萬劫無極 於鑠媧后[詩云 於鑠王師 註云 於 歎歎 鑠 盛也 媧后 眞聖女君] 情敦孝友[孝於父母 友愛於兄弟也] 致媺雁行[媺 與美同 雁飛有次第 故比兄弟也] 愼徽龍首[愼 脩也 徽 美也 龍首 指陵上也] 詞恧腐毫[恧音六 慚也 毫 筆 腐 謙辭] 書慚掣肘[掣 引也 肘 臂節也 說苑云 魯使宓子賤爲單父宰 子賤恐魯君聽讒而不得便其政 請於魯君之近史善寫者 俱與之官 使之寫書 傍坐 掣其肘 書醜則怒 更欲善書 則又掣 書者歸告魯公 魯公不會其意 問于孔子 孔子曰 不齊 君子也 意者以此爲諫乎 公悟以從之 單父大治也 ○ 不齊 子賤之名也] 鰌壑雖渴[鰌壑 鰌魚所在之壑 卽東海也 鰌音秋 長千餘丈 入穴則潮水退 出穴則潮水進] 龜珉不朽[珉 美石 卽龜上所竪之碑也 世傳言 龍生九子 不成龍而各有所好 一曰贔屭 形似龍而好負重 故碑下趺是也 二曰螭吻 形似獸 性好望 故今之屋上獸頭是也 三曰蒲牢 形似龍而好吼 今之鍾上紐是也 四曰狴犴 形似虎 有威力 故立于獄門是也 五曰饕餮 性好飮食 故立于鼎蓋是也 六曰 性好水 故立于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