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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 |
세조가 듣지 않고 물리치자
그는 같은 내용의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그러자 분노한 세조는 용서하지 않았다.
| “ |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 | ” |
사물의 진리를 밝히는 학문이 성리학이니만큼
천문 지리 의학 등의 실용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문신이 앞장서 익혀야 하는데
김종직이 섣불리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김종직은
곤장을 받고 투옥되고 파직되었다.
공신 세력은
사림파의 존재를 거슬리는 존재로 취급하여
사림의 당수인 그를 엄하게 처벌하려 하였지만
공신들의 발호를 견제하던 세조는
그를 고신 박탈과 곤장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이듬해 복직하고 경상도 평사로 나갔던 것이다.
1466년(세조 11년)
경상도병영 막부에 있으면서 병마평사로서 절도사 진례군을 수행하여 다인현에 다녀왔고,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가지고 병력을 모집, 선발하기 위해 영해부에 다녀왔다.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이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 교서관교리 지제교가 되었다.
1469년(예종 2) 조산대부 전교서교리 겸 예문관응교 지제교가 되었다.
그해 10월 6일 제범(帝範)의 훈사를 인쇄하여 바치라는 예종의 명을 받아
제범의 훈사를 영인하였다.
1469년(예종 2년)
예종이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리고 만사 3수를 지어올렸다.
성종 즉위 직후
집현전의 예(例)에 의하여 예문관(藝文館)의 정원을 늘려서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여,
특별히 예문관수찬(修撰)이 되었다.
곧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예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성리학의 장려, 보급 및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위해
성균관의 유생 수와 강의를 늘림으로서 세력 확장을 꾀한다.
성종 즉위 초,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책봉하면서
왕명으로 〈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조카인 단종과 사육신 관련자 8백여 명을 처형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들을 출입시켰는데,
남편과 함께 불교를 후원했었고,
김종직은
소격서 철폐와 불교 혁파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를 거역할수 없었던 성종은
그에게 간곡하게 만류하여 되돌려보내곤 했다.
중 학조가 대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해인사의 주지를
자신의 수하 인물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을 기록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
불교를 미신으로 간주한 그는 학조를 혐오했으며 이를 불교비판의 소재로 활용한다. 학조의 부패와 월권행위에 이어 간통 사건까지 벌어지자, 이를 수시로 언급하며 불교비판과 공박의 소재로 한다. 소격서는 철폐되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는 후일 그의 제자들이 다시 사초에 기록하려다가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한가지 원인이 된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 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된다는 이유로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함양군수로 재직 중 벼슬 품계가 거듭 승진했는데,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8]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찬위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9]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조의 부도덕함을 질책하고 세조대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훈구 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9]
함양군수로 나갔는데 그 다스림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화합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정사의 성적이 제일이었다. 또한 행음주례를 정하고 주자가례와 여씨춘추를 참고로 향약을 정하여 보급시켰으며, 도적은 용서하지 않고 엄히 다스렸다. 그가 재직중인 동안 함양과 근처 고을에는 도적이 창궐하지 못했다.
1475년(성종 6년)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는데 성종은 "종직은 군(郡)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좋은 자리로 옮기도록 하라."고 하고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로 전임되었다. 그해에 마침 중시(重試[10])가 있었는데 모두들 권하면서 "중시는 문관이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계기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았는데, 여론이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유자광은 종 출신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그는 유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의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내어 불사르게 했다.
- 김종직 :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어찌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당장 내려라.
- 하인 :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 김종직 :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그러나 이 일은 입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유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다 한다. 또한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성분에 열등감을 가진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된다. 이는 후일의 '무오사화' 의 한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심이 이를 통쾌히 여겼고, 함양에는 그를 찾아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 조롱한 것으로,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이극돈, 임사홍 등과 손잡고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1476년(성종 7년) 1월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그러나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외직을 자청하여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미신을 타파하고, 무당과 성황당 등을 철폐하였으며 주자가례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도박을 금지하였으며, 서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사자소학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서원을 장려하였다. 또한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풍기문란 단속과 성리학적 향촌사회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관료이면서도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김굉필·정여창·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어 그는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조정에 건의,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게 하였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기도 했다.
1479년(성종 10년) 어머니 박씨의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3년상(三年喪)을 치렀는데 상례를 주자의 주자가례대로 행하였으며, 시묘살이 중 병을 얻어 건강을 해친 것이 예에 지나치니 사람들이 그의 지극정성에 감동하였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충청남도 금산(金山) 촌야(村野)에 있었다.
금산 촌야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촌야의 서당 근처에는 친히 연못을 파서 연(蓮)을 심었으며 집의 이름은 경렴(景濂)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평소 송나라의 학자 무극옹(無極翁) 주돈이을 사모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학동들을 가르치고 시를 읊으며 세상일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1482년 10월 홍문관 응교(應敎)로 부름을 받자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출사하게 되었다. 경연에 입시해서는 말이 간략하면서도 이해가 쉽고 뜻이 잘 통하여 강독(講讀)을 가장 잘 하여 성종의 총애와 관심이 지극하였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 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을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9]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힘을 합해 훈구파와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했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 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1483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오른 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요직에 등용되기에 이른다.
또한 김종직은 신분과 집안 배경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할 것과 단종조에 절개를 지킨 인사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 등용을 건의하였다. 성종은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는 듯한 그의 발언에 분개하였으나 나중에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널리 인재를 구하는 한편 사림파와 청담파 계열 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등용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성종에게 면학 분위기를 장려할 것을 권고하였다. 문풍 진작과 학문 권면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면학 분위기와 문풍 진작을 위해서는 임금인 성종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성종에게 경연에 자주 참여하여 학문을 강론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성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매일 경연에 출입하여 학문을 강독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 서당과 서원, 향교 등을 세워 학문을 적극 장려, 권장하여 전국적으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8월 6일조는 도승지로 임명받은 김종직과 그 문인(門人)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를 비평하여 '경상도 선배당(慶尙先輩黨)'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고, 김종직도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 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있다. 훈구파들은 그가 파벌정치를 조장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고향으로 내려가 금산지(金山池) 위에 서당을 지어 그 곁에 연꽃을 심고 집의 호를 경렴(景濂)이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학자 염계 주돈이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매일 그 집에서 시문을 읊고 제자를 가르치며 세상 일에 뜻이 없었으나 다시 홍문관 응교로 부르시니 병이라 칭탁하고 사양하였으나 임금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부득이 벼슬길에 나가니 임금님의 총애가 지극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다. 그는 감당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성종은 "경의 문장과 경륜은 족히 감당할 것이니 사양치 말라."며 그를 불러들였다.
곧 이조참판 동지경연사로 옮겼는데 이때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 선물로 하사하였고, 이후로도 그의 글재주를 아껴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이후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부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등의 외직을 지내고 병조참판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자신이 선산부사 등으로 재직할 때 길러낸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하여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덕적 명분론을 주창하여 훈구파의 찬탈과 부패를 비난하는 한편 향촌의 질서과 규범 확립이라는 이유로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밖에 그는 송석충, 남효온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우리 당 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후 본처 조씨를 상처하고 1485년(성종 16년)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그의 아내 조씨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증조모와 외조모 아래서 컸다.
시집와서는 7남매를 연달아 잃고 결국 아이를 낳다 얻은 병으로 떠났다. 김종직은 박복(薄福)한 아내의 영전에서 통곡하며 긴 제문(祭文)을 바쳤다. '당신 아버지는 정정히 계시는데 아름다운 날이면 누가 술을 마련할 것이며, 어린 두 딸 시집갈 땐 누가 짐을 꾸려주겠는가...'라며 통탄하였다.
1487년(성종 18년)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한국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학문과 덕행이 만인의 사표가 되었다.
문하에서 김굉필·김일손·정여창·손중돈·이목·권오복(權五福)·권경유·남곤·주계부정 이심원, 최부(崔溥) 등이 배출되었고 그 외에 박한주(朴漢柱)·유호인(兪好仁)·이원(李黿[12])·이주(李胄)·원개(元槩)·이승언(李承彦)·조위(曺偉)·남효온·김맹성(金孟性)·송석충·이의무·강흔·이기·홍유손(洪裕孫) 등의 도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이철균, 곽승화, 강흔,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강희맹, 노조동, 강겸, 이계맹, 정승조, 강백진, 강중진, 강혼, 김흔(金昕), 김용석(金用石), 이종준(李宗準), 김기손, 손효조, 신영희(辛永禧), 안우(安遇), 표연말, 허반, 홍한(洪瀚), 정세린, 주윤창[13], 양준(楊浚), 방유녕(方有寧), 손숙돈 등이 배출되었다. 박형달(朴亨達), 안구(安覯), 박수견(朴守堅), 민구령(閔九齡) 형제 등도 그의 문하에서 배운 문인들이었다.
왕족인 무풍부정 이총,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 중종반정의 3대장의 한사람인 유순정과 성희안,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일파 숙청을 묵인한 김전, 임사홍의 아들인 임희재 등도 그의 문인이었다. 이후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이연경, 이언적 등에게까지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1488년 5월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병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그해 10월 16일에 한성부좌윤 겸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1489년(성종 20년) 1월에 에는 공조참판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여름 형조판서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겸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지병인 중풍(中風)의 마비 증세로 인하여 휴가를 주었으나 낫지 아니하므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초 형조판서에 재임명되고 지경연춘추관사와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곧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사직 상소를 올라고 녹봉을 반납했으나 성종은 특명으로 전직을 바꾸지 말라하고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녹봉을 받으라 하였다. 점필재는 세차례나 상소로 사퇴했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종은 '점필재는 단직하고 성긴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이 넓고 깊다' 라는 내용의 비답을 친서로 두 차례나 보내어 윤허하지 않았다. 그는 성종이 내린 녹을 사양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글을 올리며 사양했으나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보내며, 어사품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1492년 7월 집안에 있던 서적을 살펴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서책들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그는 문집으로 《점필재집 (米畢齋集)》, 저서로는 《유두유록 (流頭遊錄)》, 《청구풍아 (靑丘風雅)》, 《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로는 《동문수 (東文粹)》, 《이준록 (彛尊錄)》, 선산군의 향토지인 《일선지(一善誌)》 등을 남겼다.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종은 특별히 쌀 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그해 8월 19일 밀양의 명발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음이 듣고 성종은 특별히 조회를 이틀간 파하고 애도하였으며 태상시에 명하여 바로 문간의 시호를 내렸다. 5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 넷을 일찍 여의고, 후처 문씨에게서 얻은 아들 김숭년(金崇年)의 나이가 7세밖에 되지 않아 후처인 문씨(文氏)가 상주가 되고, 제자이자 외조카인 강백진, 강중진, 제자이자 처남(그의 본처 조씨의 남동생)인 호조참판 조위가 호상을 하였다. 밀양군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 건좌손향(乾坐巽向)에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김종직이 죽자 어떤 호랑이가 한마리 나타나 그의 무덤 옆에서 날마다 슬피 울다가 숨을 거뒀다[14] 한다. 그의 묘 옆에는 김종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호랑이의 설화가 깃든 인망호폐(人亡虎斃) 비석이 있다.[15]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세조의 찬탈에 비판적이며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인가 여부는 불확실하며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정문형·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장악하여 훈구파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 해석했다고 평가된다. 이후 다른 훈구세력 역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김종직과 그 일파의 처벌에 찬성한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남곤·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이때 그가 저술한 글을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불에 태워 없앴으나, 그의 외조카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 김식 등 김굉필과 정여창의 문하생들이 조정에 다시 출사하면서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후 중종 초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선비의 사표로 추대되었다. 조광조는 그를 성균관 문묘에 배향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로 그의 문하들은 다시 큰 타격을 입었으나, 1565년 윤원형 등이 축출되면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사후 신도비가 세워졌고,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지었으나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으로 유실되었다. 1634년(인조 12년) 여헌 장현광이 다시 신도비를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昌原大都護府使 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오여발(吳汝撥)이 글을 써서 다시 건립한다. 묘갈명도 다시 개보수되어 우암 송시열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과 김수항 등의 건의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贈職)되고, 1709년(숙종 35년) 2월 문간(文簡)에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시호(諡號)는 정2품 이상 대신에게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17][18],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령 쌍림에 부조묘(不朝廟)가 세워졌고,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그는 학문적 이론에서 끝나지 않고 학문의 이론과 동시에 실천을 강조했다.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와 생활화를 역설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사서오경과 주자의 성리서 등의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장력과 시서 등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경학파와 사장파로 분기되고 이 중 사장파는 몰락하면서 경학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계속되었지만 그는 경학에 못지 않게 사장의 중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종직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김굉필, 정여창, 시문(詩文)과 사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 유호인, 남곤, 이행, 조위, 사회적인 체제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방외인문학(方外人文學)의 입장에 선 남효온(南孝溫), 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했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등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했다.
그는 왕이라고 해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되며 국왕이 도와 덕의 모범을 보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훈구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상소들은 그의 도학적인 절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왕이라고 할 지라도 도리와 덕을 지키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성종 역시 김종직의 견해에 동조하여 스스로 도학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하려 했다.
고려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글을 익힌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사학에도 두루 능통해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제자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그의 조의제문에서 보여지듯이 그가 화려한 문장이나 시문을 추구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절의를 바탕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려 하는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제자들은 절의와 의리를 내세우며 이를 저버린 훈구파와 척신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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