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은 속죄이론을 파악하는 것 이상이다
인터넷에서 ‘속죄’(atonement)와 ‘이머징 교회’(emergent church)라는 단어를 함께 검색해 보면, 컴퓨터 화면에 열기가 한층 달아오를 것이다. 고전적 속죄이론들을 옹호하는 이들과, 속죄이론들이란 60년 전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의 풍자적 표현을 약간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언제나 예의바르지만은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어즈의 말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정죄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 너무도 순결하고, 그래서 특별히 매력적인 희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의 형벌적 가학성(vindicative sadism)을 충족시켰다.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만을 정죄할 뿐이다.
2000여 년 전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래, 오리게네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피에르 아벨라르, 칼빈 같은 신학자들은 속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제안했다. 사탄에게 지불한 속전(사탄 속전설, 오리게네스), 하나님이 요구하신 배상(속상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인류를 위한 도덕적 감화(도덕 감화설, 피에르 아벨라르), 인간 때문에 대신해서 받은 형벌(형벌 대속설, 칼빈).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는 속죄이론 중 일부는 많은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표상이며,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을 빌려보자면)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도 혐오하는 이 세상을 위해 죽으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는 생생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래도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과 본질상 어떻게 구별되는지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 왜 속죄가 필요하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속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이다.
작년 고난주간에 내가 속죄에 관해 묵상했던 것을 돌아보니, 그때 나는 속죄이론이 아니라 속죄가 실제로 이룬 바에 대해 묵상했던 것 같다. 그 주간에 내가 얻은 세 가지 통찰은 이렇다.
1. 십자가는 하나님과 새로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했다.
세 복음서가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안에 있는 두꺼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를 드러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 년에 단 한 번, 욤 키푸르라 불리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그 무서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몸을 씻고 거룩한 옷을 입고 각기 다른 짐승 제사를 다섯 번 드리는 등의 준비를 하고서도 대제사장은 죄를 범할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른 제사장들이 줄을 당겨 대제사장의 시신을 끌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옷에 방울을 달고, 발목에 줄을 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신자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4:16) 수 있다고 그 차이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지성소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이미지는 결코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보호막이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보호자가 되기에 충분한 중보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1962년에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신학자 칼 바르트는 정확히 언제 구원받았는지 따져 묻는 사람을 만났다. 바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후 34년 어느 오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 온갖 장애를 이겨낼 방법을 찾아낸다.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2. 십자가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정당성을 반어적으로 비꼰 “죄명” 유대인의 왕을 세 나라 말로 써 붙였다. 가장 순수한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일제히 무죄한 한 사람에게 맞섰을 때, 가장 명성 높은 사법 제도가 십자가형을 집행했을 때, 실상 예수님의 정당함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작가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부활을 보지 못했다. 모두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았다. 모두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고 있다.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다.” 십자가는 인류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정치나 과학에 눈을 돌리려는 유혹에 빠질 때, 바로 이 모순을 알려주신 정지 신호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가장 큰 기대를 거는 권세들이야말로 거짓 신들임을 드러내신다.
3. 십자가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 곧 겸손을 드러낸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표현한 것과 같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태도, 곧 본질상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여김받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신 그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2:5-8, 역자 사역) 가난하고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이 일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애팔래치아 오지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바닥 공동체(base community, 중남미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이룬 예배 공동체/편주)에서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듣는다. 소설가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 Bernanos), 이그나치오 실로네(Ignazio Silone), 이들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례를 자신들의 최고작의 중심에 놓았다.
속죄에 대해 달리 뭐라 말할 수도 있지만, 속죄는 상처 입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유대인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할 것이다. 하나님은 상처 입기로 마음먹으셨다. 갈보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