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생물과,
한국신학대학,
고려대 철학과 졸업(72),
국립대만대학 철학과 석사(74),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학과 석사(77),
하바드대학 철학박사(82),
고려대 철학과 부교수 부임(82),
고려대 철학과 정교수(85),
고려대 철학과 교수직을 사직(86년 9월 1일 부),
그 후로 자유로운 예술, 저술, 저널리즘 활동,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90~96), 한의사 면허 취득(96.7), 동숭동에 도올한의원 개원(96.9),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교수, 용인대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 중앙대 의과대학 한의학 담당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 역임(96~98),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철학분과 위원장,
도올서원 강주
들어가는 말
제1명제: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 있다.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키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經에 종교의 본질이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내가 어찌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할손가?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스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說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요,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說하는 몇몇의 통찰에 感入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이스람교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는 없다고 단언한다 종교간의 배타의 문제에 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도들보다는 기독교들에게서 매우 강한 배타의식을 직면하게 된다.
나의 긍정이 타의 부정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그들의 전도주의(evangelism)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의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선민의식(chosen people)의 연장태일 뿐이요,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이란 팔레스타인이나 이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유랑하는 유목민족의 역사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후천적,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기되어야 할 구약, 즉 옛 약속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하는 보편주의적 사랑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은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apostle for gentiles),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나는 이 나의 금강경 강해를 불교도가 듣기 보다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편견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21세기 문명사적 과제상황의 근원적인 해결의 열쇠가 이 금강경 속에 다소곳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현자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를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金剛經에 대하여 조선의 불교는 금강경을 적통으로 한다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대장경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구니 속에서 삼장의 호한한 경전이 즐비하지만, 우리 민중이 실제로 불교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독송하고 암송하고 낭송하고 인용하는 소의경전을 꼽으라 하면 그 첫째로 반야심경이 꼽히고, 그 둘째로 금강경이 꼽힌다.
소승 아라한(arhan)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으로 원시불교의 팔정도를 든다면, 대승보살(bodhisattva)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은 "六波羅蜜"이라는 것이다. 이 6바라밀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덕목을 말하는데, 앞의 전오바라밀은 최후의 지혜바라밀을 얻기 위한 준비수단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바로 이 최후의 지혜바라밀, 즉 혜지의 완성, 그것을 우리가 반야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반야사상이란 최후의 바라밀, 즉 지혜바라밀을 통괄적으로 이해하면서 아주 새로운 혁신적 불교운동을 선포하기에 이른 일련의 흐름 전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금강경은 이 반야운동의 초기에 성립한, 반야바라밀사상을 완성시킨 결정체인 것이다.
나는 금강경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같은 음악적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교향곡을 들을 때, 많이 들은 사람들은 거개가 그 교향곡의 멜로디를 암송하고 듣는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다 암송하는 자들에게만 들리게 되어있는 명심포니중의 명심포니인 것이다.
금강경은 외워야 한다. 금강경은 手持讀誦해야 한다. 금강경은 생활속에서 느껴야 한다. 금강경은 그 향기속에 취해 있을 때만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묘미는 곧 간결한 주제와 그 반복의 묘미인 것이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은 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금강경은 워낙 심오하고 워낙 근본적이고 워낙 철저한 無我의 주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끊임없이 변주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인지될 길이 없다.
그것은 철학의 논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찬가이다.
그것은 번쇄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득도의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부름이다.
아~위대하도다! 금강의 지혜여!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자아! 너무 번쇄한 학구적 논의를 떠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을 분석해보자! 도대체 小乘乘이란 무엇이냐?
작은 수레다!
그럼 大乘이란 무엇이냐?
큰 수레다!
그럼 소승이 좋은거냐?
요즈음 아파트도 모두 작은 아파트보다 큰 아파트 못 얻어서 야단인데 아무렴 큰게 좋지 작은게 좋을까보냐?
큰 수레가 넉넉하고 좋을게 아니냐? 작은길 가는데는 작은 수레가 좋지, 뭔 거추장스런 큰 수레냐?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대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서 규정된 원래의 의미만을 정확히 맥락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의미를 상황적으로, 유동적으로, 방편적으로 적용해야할 뿐인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압축시킨 도식을 하나 제시해보자!
小乘(hinayana)阿羅漢(arhat)八正道 大乘(mahayana)菩薩(bodhisattva)六波羅蜜 금강경은 禪이 아니다.
금강경을 禪으로 접근하는 모든 주석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금강경은 오로지 대승의 출발이다.
대승됨이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만약, 선이 금강경과 그 의취과 부합된다고 하면 그것은 오직 선이 대승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金剛般若波羅蜜經 法會因由分
第一
1-1. 如是我聞.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제1분 법회의 말미암음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1-2. 爾時,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1-2.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빌으셨다.
1-3. 於其城中,次第乞已,還至本處, 飮食訖.
1-3. 그 성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1-4.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善現起請分
第二
2-1. 時, 長老須菩提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而佛言.
제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2-1. 이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2-2.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면, 뭇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2-3. 菩薩!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2-3.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더 이상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낸다고 하는 뜻이다.
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2-5. 唯然世尊! 願樂欲聞.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大乘正宗分
第三
3-1. 佛告須菩提: 諸菩薩摩하薩, 應如是降伏其心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3-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뭇보살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3-2. 존재하는 일체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하여 멸도하리라.
3-3.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3-4.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四相의 부정은 곧 불타의 一法印인이라고 할 수 있는 "諸法無我"論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멸도의 행위의 부정의 인식론적 근거를 밝힌 것이다.
보살에게는 어떠한 경우도 我라고 하는 실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我가 있으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다. 즉 보살됨의 규정은 곧 無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無我의 실천의 없이는 반야의 지혜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妙行無住分
第四
4-1. 復次須菩提!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제4부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4-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法은 소승부파불교에서 말하는 存在이다.
존재의 실체성에 집착하는 그러한 인식구조에서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행위는 불필요한 業의 증대만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4-2.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4-2.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성향미촉법은 諸法중에서 色法에 속하는 것이다.
색법이라 함은 물질적 형태를 갖는 것을 말한다. 즉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보시는 이렇게 색법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여서 행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4-3.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4-3.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4-4.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4-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음으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6-4.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6-5. 何以故? 是諸衆生, 無福我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無非法相.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중생들은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6-6.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著我人重生壽者.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6-7. 何以故? 若取非法想,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6-8.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如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無得無說分
第七
7-1.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耶? 如來有所設法耶?
제7분 얻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7-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인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과연 있는 것인가?
7-2.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7-3.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非法非非法.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7-4.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以有差別.
그 까닭은 무엇이오니이까?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依法出生分
第八
8-1.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萬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8-2.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이다.
8-3.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其福勝彼.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8-4.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出.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8-5.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일언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의 佛은 곧 깨달음이다.
불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은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대승예수의 최후의 일언은 이런 것이었다.
"나 예수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다"
一相無相分
第九
9-1.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이 경지를 얻었노라" 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만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9-3.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9-4.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번 왔다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9-5.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9-6.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無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올 자'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9-7.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제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112-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 하나라도 설하는데 이른다면, 마땅히 알라,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화도 같은 곳이 되리라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전체를 수지하고 독송함에 있어서랴!
12-2.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則爲有佛若尊重第子.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의 법을 성취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과 그의 존경스러운 제자들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것을. 콘체는 금강경이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보고 있다.
사실 콘체의 이와같은 분석은 공부를 깊게 한 사람의 통찰력있는 문헌비평적 발언이다.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한다.
실제로 금강경의 주된 암송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짧고 아쉬우니까 그 후에 딴 암송자들이 앞의 내용을 부연하여 반복하면서 늘여갔을 것이다.
사실 내용적으로는 이 이후의 금강경은 여기까지의 내용의 사족에 불과하다. 이후, 시간이 있을 때, 나머지도 옮기겠습니다.